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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돈하 역사칼럼, "임진왜란 그 후"

이순락기자 0 2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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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 재야청년사학자 도경당 류돈하 ~


일치일란(一治一亂)...한번의 치세가 오고 가면 한번의 난세가 온다고 한다. 그 난세가 올때면 우리는 역사인물 중 충무공 이순신을 떠올린다. 충무이공이 경험한 임진왜란은 조선 개국 200년만에 일어난 초유의 난세였다. 문충공 류성룡이 저서 징비록 서문에서 밝혔듯이 임진왜란이라는 재앙은 참담하고도 참담하였다. 한양, 개성, 평양 세 도읍지가 한달 사이에 왜군 16만 대군에게 강탈당했으며 조선 팔도가 와해되었다. 임금과 조정은 피난을 가야만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충무 이공의 등장은 실로 하늘이 내린 축복이었다. 그러나 충무 이공의 등장이 과연 우연이었을까? 결코 우연은 아니다.그는 이미 임진란 이전부터 치밀하게 전란을 준비했으며, 임진왜란 발발일인 413일 하루전에도 거북선에서 화포를 쏘는 훈련을 하였다. 전술했듯 세 도읍지가 무너지고 팔도가 왜적들에 의해서 짓밟히는 와중에서 충무이공은 조선의 바다를 굳건히 지켰다.

 

한양을 떠나 개성을 거쳐 평양에 이르렀다가 다시 의주로 몽진한 선조임금에게 왜군 선봉장 소서행장은 편지를 보내 "이제 장차 어디로 가시고자 하무니까?"라는 조롱을 하였다. 그러나 이 조롱이 실로 무색해지게 된 것은 충무이공이 조선의 바다에서 왜군의 수륙양면작전을 차단하고 아군의 작은 손실을 바탕으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기 때문이다.

 

충무이공이 단순히 영웅을 넘어서서 성웅(聖雄)으로 기억되는 것은 풍전등화의 위기에서 압도적인 승리로 나라를 구해내었기 때문이다. 충무이공의 업적은 당대와 조선에서만 통용되지 않고 중국, 일본 등 동아시아 사회에 깊이 각인되고 존경받았다.

 

1599년 새해가 되자 선조임금은 아직 조선에 주둔중인 명 장수들의 진영을 찾아 새해인사를 다녔다. 선조실록에선 세배(歲拜)라 하였다. 선조가 159919일에 만난 명나라 제독 마귀(상곡마씨 시조)는 충무이공이 전사하기 전부터 양장(良將)이라 높이 평가했던 사람이다. 마귀는 그 자리에서 선조에게 충무공의 충렬을 국가차원에서 기릴 것을 건의하였다. 선조는 이미 처리한 문제라고 답변한다. 이어 명나라 장수 등자룡의 전사를 애도하는 뜻을 비추자 마귀는 처리할 일이 많다며 그 자리를 물러가겠다고 했다.

 

선조실록 159919일조 기사는 충무 이공에 대한 선조 개인의 생각을 여러각도로 해석해 볼 수 있는 사료이다. 조선을 직접적으로 구한 조선제일의 장수 이순신과 명나라 장수 등자룡의 전사를 놓고도 명나라 장수의 장례를 먼저 걱정한 조선국왕 선조이기에 이것을 단순히 외교적인 문제로만 해석 할 수 있을지 판단하기가 쉽지 않다.

 

이순신의 업적과 그 영향은 조선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명, 일본 등 동아시아 전역에 각인된 한편 동아시아가 서양과 본격적으로 이어진 후에도 서양에까지 널리 파급되어갔다. 트라파가 해전에서 승리한 영국 해군제독 넬슨에 비유되지만 실은 충무이공의 공적은 이를 훨씬 능가하고도 남음이 있다. 서애 류성룡은 징비록에서 그의 전사를 다루면서 "재능이 있었으나 운수가 없어 백가지 재능 중 한가지도 베풀지 못하고 죽었으니 애석하다."라며 평가하였으니 과연 충무이공은 불멸하다 하겠다.

 

-730일 밤 영화 한산 관람-

 




기사등록 : 김영숙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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