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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경북미디어뉴스 &amp;gt; 사설칼럼 &amp;gt; 김기훈칼럼</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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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경북미디어뉴스 &amp;gt; 사설칼럼 &amp;gt; 김기훈칼럼</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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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김기훈의 역사와 인물]일선김씨(一善金氏)와 선산김씨(善山金氏)는 어떻게 다른가?</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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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p><a href="http://xn--289ak2iu9buvke3bs7m0vf.kr/bbs/view_img.php?img=http%3A%2F%2Fwww.xn--289ak2iu9buvke3bs7m0vf.kr%2Fdata%2Feditor%2F2301%2F7d1df9805dcd18099592295350140133_1673367704_6978.jpg" target="_blank" class="view_image"><img itemprop="image" content="http://www.xn--289ak2iu9buvke3bs7m0vf.kr/data/editor/2301/7d1df9805dcd18099592295350140133_1673367704_6978.jpg" src="http://www.xn--289ak2iu9buvke3bs7m0vf.kr/data/editor/2301/7d1df9805dcd18099592295350140133_1673367704_6978.jpg" alt="7d1df9805dcd18099592295350140133_1673367704_6978.jpg" class="img-tag "/></a><br style="clear:both;" /><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lt;필자: 경북대 정치학박사&gt;</span></p><p><br /></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제목에 대한 이야기를 언급하기 이전에, 우리 각자가 가지고 있는 본관(本貫)이 언제 어떻게 생성 되었는가? 에 대한 깊이 있는 생각과 공부를 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따라서 본관이 만들어진 고려 사회에 대한 이해가 먼저 이루어지는 것이 이해를 높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   </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고려 시대를 역사학계에서는 귀족 중심의 사회, 벌집 구조의 사회라고 평가한다. 이 귀족 중심의 사회와 벌집 구조의 사회를 만든 것이 바로 본관제(本貫制)이다. 각 성씨의 본관(本貫)은 고려의 개국과 동시에 생겨나게 된다. </span></p><p><br /></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고려를 건국한 왕건(王建)은 전 국토를 중국의 본관제(本貫制)를 모방하여, 각 지역의 사람과 가문에게 성씨(姓氏)를 하사하고 본관을 부여하게 된다. 이렇게 본관제를 통하여 전국의 군사와 행정을 통치하고, 지배하게 되었다. </span></p><p><br /></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한국의 대표적인 성씨(姓氏)들 대부분이 고려 초기 고려 왕조로부터 하사 받는 것이 대부분이나 조선에 들어와서도 본관이 생겨난다. 이러한 본관이 주어지면<span style="font-size:12pt;"> </span></span><span style="font-family:'굴림';color:rgb(32,32,32);font-size:14pt;">관직</span><span lang="en-us" style="font-family:'굴림';letter-spacing:0pt;color:rgb(32,32,32);font-size:14pt;" xml:lang="en-us">(</span><span style="font-family:'굴림';letter-spacing:0pt;color:rgb(32,32,32);font-size:14pt;">官職</span><span lang="en-us" style="font-family:'굴림';letter-spacing:0pt;color:rgb(32,32,32);font-size:14pt;" xml:lang="en-us">)</span><span style="font-family:'굴림';color:rgb(32,32,32);font-size:14pt;">과 작위</span><span lang="en-us" style="font-family:'굴림';letter-spacing:0pt;color:rgb(32,32,32);font-size:14pt;" xml:lang="en-us">(</span><span style="font-family:'굴림';letter-spacing:0pt;color:rgb(32,32,32);font-size:14pt;">爵位</span><span lang="en-us" style="font-family:'굴림';letter-spacing:0pt;color:rgb(32,32,32);font-size:14pt;" xml:lang="en-us">)가</span><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 함께 수여되는데, 이것을 봉작(封爵)이라 한다. 본관제는 교통·통신이 발달하지 않은 시대에 전국의 각 지방을 효율적으로 통치 하는데 가장 효과적인 것이었다. </span></p><p><br /></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본관제는 고려 왕조가 지역의 각 호족 세력과 각 지방을 효율적으로 통치 하기 위한 수단이었던 동시에 하나의 통제 장치였다. 본관(本貫)과 성(姓)을 왕이 직접 하사 하는 것을 사성(賜姓)이라고 한다. 이 사성은 주로 공신에게 주어졌는데, 사성을 받는 사람이나 가문은 아주 많은 혜택을 받았다.</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고려 때, 사성을 받은 공신에게는 관직(官職)뿐만 아니라 경제적인 부분을 해결해 주기 위해서 식읍(食邑) 또는 녹읍(祿邑)을 함께 주어졌다. 이 뿐만이 아니라 대대로 후손들이 과거시험을 보지 않고, 관직에 오를 수 있는 음서(蔭敍)제도의 혜택도 주어졌다. </span></p><p><br /></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고려 때, 국가의 통치의 수단으로 사용되었던 본관제는 그대로 조선으로까지 이어진다.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李成桂)를 이은 태종 이방원(李芳遠)은 전국의 각 지역을 원활하게 통치 하기 위해서 군사·행정의 관할 지역 편제에 따른 개편·수정 작업을 거쳐 정착시킨다. </span></p><p><br /></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구미·선산은 신라 시대에는 일선군(一善郡)·숭선군(崇善郡)으로 불려졌고, 고려 시대에는 </span><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8.6667px;">선주군(善州郡)으로 불려졌</span><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다. 고려 말 조선 초기 짧은 기간 동안 화의군(和義郡)으로 있다가 태종 3년에 선산군(善山郡)으로 개칭된다.</span></p><p><br /></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고려의 본관제는 조선에 들어와서도 그대로 통용된다. 조선에서 고려의 본관제를 그대로 유지한 것은 그 가문과 개인이 새로운 국가 “조선”에 충성하라는 의미가 담겨져 있었다. 그래서 고려에서 시행되던 본관제는 조선에 들어 와서도 파괴하지 않고 수정·보완을 거쳐 실시되었다. 조선 건국 초기에 또다시 많은 본관이 생겨나고,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본관들이 다수 생겨나기 시작한다.</span></p><p><br /></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임진왜란 때 명나라에서 조선에 파병된 명나라 군사들이 중국으로 돌아가지 않거나 전공을 세워 조선의 왕으로부터 본관을 하사 받는다. 또한 임진왜란 때 왜적으로 조선에 온 병사들 중 1만 여명 정도가 일본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span></p><p><br /></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그 중에서도 대표적으로 조선 군과 함께 왜적을 물리친 일본인 사야가(沙也加)가 있다. 이후 조선의 조정에서 충직하고 착하다는 뜻의 “충선(忠善)”이란 이름을 내렸다. 김충선의 본관은 임금이 하사한 성씨라 해서 ‘사성(賜姓) 김해 김씨(金海金氏)의 시조가 된다. </span></p><p><br /></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명나라에서 조선에 파병 되어 돌아가지 않고, 조선에 정착한 대표적인 성씨로는 전주추씨(全州秋氏), 절강편씨(浙江片氏), 절강팽씨(浙江彭氏), 절강장씨(浙江張氏), 성주시씨(星州施氏), 광천동씨(廣川董氏), 진양화씨(晉陽花氏), 낭야정씨(瑯琊鄭氏), 성주석씨(星州石氏), 성주초씨(星州楚氏), 두릉두씨(杜陵杜氏) 등이 있다.</span></p><p><br /></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한국 사람은 개인 혹은 조상의 역사적 연대기를 기록한 족보를 대부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우리가 알고 있는 족보는 그 간행된 역사가 조선 중기에 와서 만들어졌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span></p><p><br /></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일반인들은 족보가 신라 혹은 고려 시대부터 기록되었을 것이라는 막연한 인식과 판단을 하는 것이 보편적일 것이다. 왜냐하면 고려 개국과 함께 그들의 시조(始祖)부터 그들 조상들이 족보에 계속적으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자칫 신라나 고려 때부터 족보가 간행되지 않았나 생각할 수도 있지만, 족보 간행의 시작은 조선 중종 때 와서 태동한다.</span></p><p><br /></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족보 간행 역사를 보면, 조선 세종 때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를 지은 좌찬성과 예조판서를 지낸 권제(權踶)가 중국의 소씨보(蘇氏譜)를 모방하여 편찬한 것을 아들 권람(權擥)이 자료를 수집하여 보완하다가 죽는다. </span></p><p><br /></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그러나 권제의 생질(甥姪)인 대사헌(大司憲)과 대제학(大提學)이자, 당대의 최고 학자로 이름을 떨치던 서거정(徐居正)이 1476년 안동권씨(安東權氏) 족보인 성화보(成化譜)를 완성한다. 따라서 현재 안동권씨 성화보가 우리나라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족보라고 할 수 있다. </span></p><p><br /></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이후 1524년(중종 19년)에 한양조씨(漢陽趙氏) 갑신보(甲申譜), 1529년(중종24년) 합천이씨(陜川李氏) 기축대동보(己丑大同譜), 1565년(명종20년) 문화류씨(文化柳氏) 가정보(嘉靖譜), 1576년(선조 9년) 남양홍씨(南陽洪氏) 족보 등이 활발하게 간행되기 시작했다. </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 </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안동권씨 성화보에서는 “옛날 중국에는 종법(宗法)이라는 것이 있어 소목(昭穆)의 순서를 정하고 적손(嫡孫)과 지손(支孫)을 구별하여 백세(百世)가 지나도 그 관계를 분명하게 밝힐 수가 있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span></p><p><br /></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강량이씨(江陽李氏)라고도 하는 합천이씨(陜川李氏) 기축대동보를 쓴 이복로(李福老)는 서문에서 “지금 중국에는 사대부의 집만이 아니라 상공민(商工民)의 천함으로도 족보가 있으되, 우리 동방은 족보가 있는 집이 적으니, 비록 문벌 좋은 구족(舊族)이라도 두어 대만 지나면, 자손들이 고조(古祖)와 증조(曾祖)의 이름을 기록하지 못하는 자가 많다.”는 표현하고 기록하고 있다. </span></p><p><br /></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조선의 유수의 많은 가문들이 그 가문의 족보를 간행 하는 움직임은 중종과 명종 때에 와서 본격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을 알 수 있겠다. 따라서 중종과 명종 때는 이미 고려 시대와는 수백 년이 흐른 뒤이기 때문에 많은 가문들은 오래전의 기록들을 찾아내기 위해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된다. </span></p><p><br /></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필자는 일반인들에게 일선김씨(一善金氏)와 선산김씨(善山金氏)가 같지 않느냐? 아니면 어떻게 다르냐? 라는 질문을 많이 받았다.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상대방에게 짧게 이해 시키기란, 실제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span></p><p><br /></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적어도 답을 구하는 상대방이 두 집안의 족보와 역사적 인물들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없는 상태에서 이해를 시킨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답을 구하는 상대방은 아주 쉽게 질문을 하는데, 답을 하려는 사람은 어떻게 설명해야 상대방이 이해할까 늘 고민할 것이다. 역사와 족보를 모르고는 대화가 되지 않는 질문과 답만이 있었을 수 있다.</span></p><p><br /></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필자가 생각하기로 일선김씨에서 善山(一善)金氏이라고 표기 하면서 일반 사람들은 일선김씨와 선산김씨를 혼동하기 시작했을 것이라 필자는 생각하고 추측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혼란을 피하기 위해서 선산김씨보다는 “들성김씨”로 더 많이 부르고 이야기 하는 경향이 있게 되었다. </span></p><p><br /></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선산(善山)의 옛 지명이 일선(一善)이었기 때문에 선산김씨와 일선김씨, 누가 봐도 두 가문이 같다는 생각과 같은 가문인데 다르게 표기할 수도 있다는 개연성(蓋然性)을 충분히 준 것이었다.  </span> </p><p><br /></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조선 시대를 뒤흔든 우리 지역의 유력 가문인 일선김씨를 먼저 알아보는 것이 해답을 찾아 가는 지름길이라 생각한다. 모든 가문의 출발점이 시조(始祖)를 중요시하기 때문에 일선김씨의 시조인 김선궁(金宣弓)에 대해 알아보는 것이 당연하다고 하겠다. </span></p><p><br /></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왕건의 고려 통일의 마지막 전투는 선산의 낙동강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일이천(一利川)전투에서 일선김씨 시조(一善金氏 始祖) 김선궁(金宣弓)이 역사의 무대에 등장한다. 그리고 김선궁은 15세의 나이로 고려 왕건(王建)을 도와 전투를 승리로 이끌면서 고려 왕조를 여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다. </span></p><p><br /></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왕건을 도운 김선궁에게 왕건이 직접 쓰던 활(弓)을 주면서 “선궁”이란 활(弓)을 넣은 이름을 하사한다. 그리고 왕건은 당시 지명에 따라 김선궁의 본관을 일선(一善)으로 봉작(封爵)을 내린다. 이때부터 고려 개국과 함께 고려 역사에서 일선김씨가 등장하게 된다.</span></p><p><br /></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고려가 후백제를 멸망시키고, 태조 왕건이 후삼국을 완전히 통일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김선궁은 신라 제46대 문성왕(文聖王) 김경응(金慶膺)의 7세손이었다. 김선궁은 고려의 개국원훈공신(開國元勳功臣)으로 선주백(善州伯)으로 봉해진다.</span></p><p><br /></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김선궁은 당시 지역 최고의 통치자로 군림하기 시작하였을 뿐만 아니라, 김선궁의 고려 건국의 활약과 역할은 고려왕조에 후손들이 손쉽게 관직에 나갈 수 있는 길을 마련하였다. 당시 백(伯)이 붙은 선주백은 당시 이 지역의 군사·행정의 최고 통치자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span></p><p><br /></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그리고 김선궁은 고려 조에서 “벽상공신(壁上功臣)”으로까지 추앙 받았던 인물이다. 벽상공신은 공신의 초상화를 종묘사직의 벽에다 걸어 놓고, 왕조가 망할 때까지 최고의 예우를 받는 공신반열이었다. 고려 왕조에서 그만큼 김선궁과 일선김씨에 대한 관심과 지지가 남달랐다는 것을 의미했다.</span></p><p><br /></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김선궁이 세상을 떠난 뒤, 구미시 해평면 미석산(彌石山)에 있는 그의 유허비(遺墟碑)에는 “고려 삼중대광 영문하시중(高麗三重大匡領門下侍中)”, 순충 일선 김선궁(諡 順忠 一善 金宣弓) 새겨져 있다. 왕이 죽은 신하의 공덕을 찬양하기 위해 내리는 것을 시호(諡號)라고 하는데, 김선궁의 시호는 순충공(順忠公)으로 기록되어 있다. </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br /></span></p><p><a href="http://xn--289ak2iu9buvke3bs7m0vf.kr/bbs/view_img.php?img=http%3A%2F%2Fwww.xn--289ak2iu9buvke3bs7m0vf.kr%2Fdata%2Feditor%2F2301%2F7d1df9805dcd18099592295350140133_1673371962_1582.jpg" target="_blank" class="view_image"><img src="http://www.xn--289ak2iu9buvke3bs7m0vf.kr/data/editor/2301/7d1df9805dcd18099592295350140133_1673371962_1582.jpg" alt="7d1df9805dcd18099592295350140133_1673371962_1582.jpg" class="img-tag "/></a><br style="clear:both;" /><span style="font-size:12pt;font-family:'굴림', Gulim;">&lt;구미시 해평면 미석산, 일선김씨 시조인 김선궁 유허비&gt;</span></p><p><br /></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이러한 일선김씨 시조 김선궁의 유허비의 역사적 사실과 근거를 본다면, 김선궁을 시조로 모시고 받들고 있는 후손들은 善山(一善)金氏로 표현 하는 것 보다는 일선김씨(一善金氏)로 표기하는 것이 역사적 진실과 사실에 더 가깝다고 강조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span></p><p><br /></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혼인 관계로 본다면 선산김씨와 일선김씨가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결론 내리기가 더 쉽다. 선산김씨의 선산 입향조(入鄕祖)는 고려 말 광주목사(廣州牧使)를 지낸 화의군 김기(和義君 金起)이다. 김기의 부인이 일선김씨 부인이다. 우리 민족의 역사에서 동성동본(同姓同本)의 혼인을 하지 않는 풍습과 예법이 오랫동안 지켜져 왔던 것을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br /></span></p><p><a href="http://xn--289ak2iu9buvke3bs7m0vf.kr/bbs/view_img.php?img=http%3A%2F%2Fwww.xn--289ak2iu9buvke3bs7m0vf.kr%2Fdata%2Feditor%2F2301%2F7d1df9805dcd18099592295350140133_1673372072_9696.jpg" target="_blank" class="view_image"><img src="http://www.xn--289ak2iu9buvke3bs7m0vf.kr/data/editor/2301/7d1df9805dcd18099592295350140133_1673372072_9696.jpg" alt="7d1df9805dcd18099592295350140133_1673372072_9696.jpg" class="img-tag "/></a><br style="clear:both;" /><span style="font-size:12pt;font-family:'굴림', Gulim;">&lt;구미시 선산읍 포상리, 선산김씨 입향조 화의군 김기의 <span style="font-size:12pt;">묘비</span>&gt;</span></p><p><br /></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이러한 화의군 김기의 혼인으로 보았을 때, 일선김씨와 선산김씨는 완전히 다른 가문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선산김씨 입향조인 화의군 김기의 장인(丈人)인 김원로(金元老)를 살펴보는 것이 더 정확한 이해를 도울 것이다. </span></p><p><br /></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김원로(金元老)는 김선궁의 13세손으로 선산군 옥성면 주아리에 살았다. 김원로는 고려 말, 정순대부(正順大夫)로서 예의판서(禮儀判書), 진현관대제학(進賢館大提學), 지춘추사(知春秋事) 등을 역임했다. 김원로는 쓰러져 가는 고려 왕조를 대해 충성을 다한 인물로 평가할 수 있겠다.</span></p><p><br /></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김원로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그들이 백암 김제(白巖 金濟)와 농암 김주(籠巖 金澍)이다. 이들 두 형제는 두문동 72현에 들어가는 고려 왕조의 충신들이었다. 부조현(不朝峴) 고개에서 관복을 벗어던지고,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가 새 왕조인 조선에 출사하지 않았고, 끝까지 고려 왕조에 충성을 맹세한 충신들을 “두문동 72현(杜門洞七十二賢)”이라고 한다. </span></p><p><br /></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김제·김주 형제와 김기는 처남매부 지간이었다. 이렇게 하여 김기는 고려 왕조가 망하고, 조선이 개국되자, 처가(妻家)인 현재 선산 옥성면 주아리로 피신하였다. 김기는 처가에서 머물다가, 세상이 조용해질 때까지 하늘 아래 첫 동네라는 옥성 산촌(山村)에서 숨어 지내게 된다. </span></p><p><br /></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이러한 사실들을 살펴보았을 때, 선산김씨(들성김씨)는 일선김씨 김원로의 외손(外孫)들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겠다. 이렇게 엄연히 다른 가문임에도 사람들은 서로의 본관과 조상에 대해 혼란과 혼동을 하는 경우가 많다. </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br /></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그렇다면 왜 일선김씨가 혼란스럽게 선산김씨로 본관을 쓰게 되었는가를 살펴봐야 할 것이다. 이 원인은 조선 시대의 점필재 김종직(佔畢齋 金宗直)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원인을 찾을 수 있겠다. </span></p><p><br /></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조선이 개국되자, 일선김씨들 중에서 조선 시대 유학사(儒學史)에 빼놓을 수 없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그가 바로 성리학의 도통관(道統觀)을 잇는 대학자인 강호 김숙자(江湖 金叔滋), 점필재 김종직(佔畢齋 金宗直) 부자(父子)들이다. 강호 김숙자는 일선김씨 시조인 김선궁으로부터 13세손이 된다.</span></p><p><br /></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성리학은 고려 충렬왕 때 원나라에서 안향(安珦)이 고려로 가지고 왔다. 이 당시 성리학은 원시적 상태의 학문이었다. 그러나 시간의 흐름에 따라 성리학은 고려시대 목은 이색(牧隱 李穡) → 포은 정몽주(圃隱 鄭夢周) → 야은 길재(冶隱 吉再)로 이어져 계승·발전되어 갔다. </span></p><p><br /></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야은 길재의 성리학은 한 차원 높은 단계로 발전하여 조선이라는 시간과 공간에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기 시작한다. 야은 길재에서 발원한 조선의 성리학은 강호 김숙자(江湖 金叔滋)와 그의 아들 점필재 김종직(佔畢齋 金宗直)에게서 한 차원 높은 도학(道學)으로 발전·계승하게 된다. 이때부터 성리학자들을 도학자(道學者)로 부르기 시작하였다.</span></p><p><br /></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김숙자와 김종직은 금오산의 야은 길재에게서 출발한 성리학을 전국적으로 확산 시키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다. 전국으로 확산된 성리학은 당시 국가와 사회를 이끌어 가는 사대부의 핵심 이데올로기(Ideologie)로 변화되어 갔고 수용되어 졌다. </span></p><p><br /></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점필재 김종직의 학문은 조선의 선비들을 사림(士林)이라는 거대한 숲으로 변화시켰다. 김종직은 이 사림들에게 사림의 영수(領袖)로서 끝임 없는 존경과 추앙을 받으며, 선비들의 가슴 속에 끊임없이 살아 숨 쉬는 사람이었다. </span></p><p><br /></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그러나 김종직을 따르는 사림(士林)들이 벼슬 길에 나가자, 기득권을 유지하던 훈구(勳舊)세력들과 충돌하게 되면서 점필재를 따르던 수많은 선비들은 그들의 목숨을 걸어야 했다. 죽음을 각오한 사림은 부패한 훈구파에게 절대로 물러서지 않았고, 당당히 그들의 부패와 잘못을 지적하며 당당히 맞섰다.</span></p><p><br /></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김종직은 1453년(단종 1년)에 진사에 합격하고, 1459년(세조 5년)에 문과에 합격한다. 1468년 세조가 죽고, 예종이 즉위 하여 채 2년 못되어 죽는다. 이후 성종은 13세의 어린 나이로 조선의 임금으로 즉위한다. 성종이 어리다는 이유로 할머니 정희왕후(貞熹王后)의 수렴청정을 하게 된다. 수렴청정의 뒤에는 정희왕후와 훈구대신들간의 비호와 결탁이 있었다. </span></p><p><br /></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성종이 왕이 되는 데 공을 세운 원로대신들, 그 중에서도 장인인 한명회(韓明澮)를 비롯한 훈구대신들은 정치적으로 절대적인 영향력을 발휘했다. 그들은 예종이 금지했던 분경, 대납, 겸판서 등을 부활시켰고, 자신들을 견제하던 종친 세력의 핵심 인물인 구성군(龜城君)을 유배 보냄으로써 훈신 세력의 권력을 공고히 했기 때문에 왕권이 약화되어 갔다. </span></p><p><br /></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성종이 성년이 되어 왕권을 물려받자, 신진사림을 전면에 등용하여 훈구세력을 견제하기 시작한다. 성종은 훈구세력을 견제할 젊은 인재들을 필요하게 되었는데, 이것은 김종직과 그의 제자들이 중앙 정계에 진출하는 기회를 만들었다. 사림들은 주로 대간으로 기용되어 언론권을 장악해 훈구파의 부정부패를 공격했다. </span></p><p><br /></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1478년(성종 9)에 예문관에서 분리된 홍문관(弘文館)을 신설하고, 사간원(司諫院), 사헌부(司憲府) 등에 신진사림을 포진시켜 언론 삼사(三司)로 훈구세력을 강력하게 견제했다. 홍문관은 대간(</span><span style="font-family:'함초롬바탕';letter-spacing:0pt;">大諫)<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을</span></span><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 감독하는 역할을 하다가 언론 기관으로 삼사(三司)의 하나로 군림하게 되었다.</span></p><p><br /></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조정에 대거 기용된 신진사림과 훈구대신들의 충돌은 무오사화·갑자사화·기묘사화·을사사화 등으로 이어지게 된다. 조선시대 사화(士禍)의 중심에는 점필재 김종직과 그를 따르는 제자들인 사림(士林)들이 있었다고 보면 된다.</span></p><p><br /></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김종직을 따르는 사림(</span><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8.6667px;">士林)</span><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은 정신적으로 무장한 붓을 든 무사<span style="font-size:14pt;">(</span></span><span style="font-family:'굴림';letter-spacing:0pt;font-size:14pt;">武士</span><span lang="en-us" style="font-family:'굴림';letter-spacing:0pt;font-size:14pt;" xml:lang="en-us">)</span><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들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겠다. 필자가 더 이상 김종직에 대한 학문과 위상에 대해 언급하지 않아도 그의 영향력과 파급효과는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범위 이상이었다는 것이다.</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 </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따라서 김종직은 사림파(士林派)의 중심적 인물이었으며, 김종직은 훈구파에 대항하는 시작점과 중심점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그래서 김종직은 조선의 선비들 마음 속에 살아 숨쉬는 영원한 스승처럼 존경을 받았던 인물이다.</span></p><p><br /></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조선의 기틀은 성종(成宗) 때에 와서 완전하게 마련된다. 조선의 기틀을 다지던 성종은 훈구(勳舊) 대신들의 부정부패를 비판하고, 도덕성과 성리학의 근본주의 이념을 강조했던 정치적 집단인 신진사림(新進士林)들을 대거 조정에 등장시킨다.</span></p><p><br /></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성종이 이룩한 큰 업적 중 하나는 조선왕조 통치 체제의 근간이 되는『경국대전(經國大典)』을 완성 반포한다. 경국대전의 완성은 조선왕조 통치체제를 확립하는 계기를 마련한 것이다.『경국대전』은 조선 시대의 기본 법전으로, 조선의 행정 조직인 이전(吏典), 호전(戶典), 예전(禮典), 병전(兵典), 형전(刑典), 공전(工典)의 6전으로 구성되었다. </span></p><p><br /></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이 책은 각 조별로 태조부터 성종까지의 왕명(王命)과 교지(敎旨), 판지(判旨, 각 부서에서 필요한 법 조항을 올리고 이를 왕이 재가한 것) 등을 집대성한 것이다. 따라서 6조는 이러한『경국대전』의 법 조항에 근거해 업무를 처리했다.</span></p><p><br /></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이러한 신진사림의 중심에는 김종직과 그의 제자들이 있었다. 김종직은 성종의 무한한 신뢰와 지지를 받으며, 성종이 추진하고 싶어 하는 성리학적 조선을 만드는데 자기의 학문과 웅대한 기개를 펼쳐 나갔다. </span></p><p><br /></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조선왕조 500여 년간 왕위에 오른 사람은 모두 27명이다. 이 가운데 왕의 적장자 혹은 적장손 출신으로 정통성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던 사람은 겨우 10명에 불과하였다. 나머지 17명의 왕은 세자의 책봉 과정이나 왕위 계승에 있어서 원칙에 맞지 않는 비정상적인 계승자였다. </span></p><p><br /></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조선왕조에서 왕의 직계가 아닌 왕실의 방계에서 처음 왕위를 계승한 사람은 조선 제14대 왕인 선조(宣祖)였다. 선조는 중종의 서자 덕흥군(德興君)의 셋째 아들이었다. 적정자(嫡長子)가 아닌 서자 덕흥군의 아들이 등장하자, 명나라에서는 왕위 계승의 정통성이 결여된 것으로 파악하고, 이 조선의 왕위 계승 문제를 외교 문제화 했던 것이다. </span></p><p><br /></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명나라는 이러한 선조의 왕위계승 문제를 지적하기 위해 조선에 사신들을 보낸다. 트집 잡기 위해 조선 온 명나라 사신들 앞에 당당히 나가서 대화할 수 있는 사람은 조정 안에서 아무도 없었다. </span></p><p><br /></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명나라 사신들에게 대답을 잘 못 말했다가는 자신의 목숨 뿐만 아니라, 임금의 안위도 담보할 수 없었다. 그때 선조는 퇴계 이황을 불러 명나라 사신들의 응대하라고 명한다. 퇴계는 서울로 올라가 무례하기 짝이 없는 명나라 사신들 앞에서 당당히 그들 의 질문에 답변해 나간다. </span></p><p><br /></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그 때 명나라 사신이 퇴계 이황에게 조선 성리학의 학통과 도통관을 묻는다. 퇴계 이황은 그 자리에서 바로 고려 포은 정몽주(圃隱 鄭夢周) → 야은 길재(冶隱 吉再) → 강호 김숙자(江湖 金叔滋) → 점필재 김종직 → 한훤당 김굉필(寒暄堂 金宏弼) → 정암 조광조(靜庵 趙光祖)라고 바로 이야기 한다. 당시 왕인 선조와 문무백관들은 퇴계 이황의 답변을 절대적 진리로 받아들였고, 지금까지도 받아들여지고 있다.</span></p><p><br /></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퇴계의 답변이후 이 도통관은 조선에서 명문화되어 지금까지도 받아 들여지고 있는 것이다. 사실 이 도통관을 설계한 장본인은 정암 조광조였다. </span></p><p><br /></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우리가 잘 못 알고 있는 사실 중 하나는 야은 길재의 스승이 포은 정몽주로 알고 있는데, 야은 길재에게 실질적인 가르침을 준 인물은 조선개국에 참여한 양촌 권근(陽村 權近)이다. 길재에 대해 또 하나 잘 못 알고 있는 사실 중 하나는 고려 왕조가 패망해서 벼슬을 버리고, 금오산으로 낙향했다는 것이다. </span></p><p><br /></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길재는 신하들이 고려 우왕(禑王)을 유배 보내어 우왕이 신하들에게 죽임을 당하자, 자신이 섬기던 왕을 하루 아침에 신하들이 죽이는 것은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그래서 길재는 이 모든 것에 회의와 절망을 느끼고, 절의(節義)를 되새기며, 고향으로 낙향해 버린다. </span></p><p><br /></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길재는 고려 최고의 학자인 목은 이색(牧隱 李穡)에게 낙향 인사를 올리고, 고향으로 내려와 금오산에 은거한다. 우왕을 왕의 자리에서 끌어 내리고, 죽이는 사건의 중심에는 포은 정몽주와 이성계(李成桂)가 있었다. </span></p><p><br /></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역사적 기록들을 자세히 찾아보면, 실제 길재는 포은 정몽주를 좋아 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우왕이 죽은 이후 고려 왕조는 창왕(昌王), 1392년 공양왕(恭讓王)까지 이어진다. 우리는 길재가 고려 왕조가 망하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했다는 잘 못된 역사적 사실들에 대해 우리는 한번도 의심해 보지 않았다. </span></p><p><br /></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길재는 태종 이방원과 함께 고려시대 성균관(成均館)에서 동문수학한 친구사이였다. 그래서 길재의 제자들이 과거에 급제하여 조정에 나오면 태종 이방원은 친구 길재의 안부를 물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태종 이방원은 “길재는 사람이다.”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고 한다. </span></p><p><br /></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정몽주와 길재의 관계를 조선시대에 성리학이 도학(道學)으로 발전되면서 도통관을 만들어야 하는 당위성과 필연성으로 조광조가 정몽주 → 길재라는 도통을 만들었던 것이다. 이것은 일종의 왜곡인데도 불구하고, 이 왜곡을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br /></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조선 성리학에서 학통과 도통관에서 눈여겨 볼 두 사람이 있는데, 바로 강호 김숙자와 점필재 김종직이다. 특이하게도 강호 김숙자와 점필재 김종직은 부자 간에 스승과 제자 관계를 맺었다. 강호 김숙자에 학문을 배운 점필재 김종직은 조선 성종 때 사림의 중심적 인물로 많은 일을 수행한다. </span></p><p><br /></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그러나 김종직은 수많은 개혁 과제와 업무에 지치고, 가족의 연이은 죽음으로 무척 괴로워했고, 힘들어 했다. 그래서 김종직은 외직으로 선산부사를 자청한다. 성종은 김종직의 선산부사로 보내고 싶지 않았지만, 그의 청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span> </p><p><br /></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그래서 선산부사로 부임한 4년 동안 김종직은 선산에서 낮에는 각종 사무와 행정을 수행하였다. 김종직은 밤에는 선산향교에서 인근뿐만 아니라, 멀리서 찾아 온 선비들을 모아 제자 양성에 전력을 쏟는다. 그리고 함양군수 5년 동안 수많은 제자들을 길러 낸다. </span></p><p><br /></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김종직의 대표적인 제자들은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김일손(金馹孫)·유호인(俞好仁)·남효온(南孝溫)·조위(曺偉) 등이다. 김종직은 불세출의 제자를 양성함으로써 사림(士林)의 종장(宗匠)으로 일컬어졌다. 조선 5현인 김굉필·정여창·조광조·이언적·이황 중에서 김굉필과 정여창 2명이 점필재 김종직의 제자들이다.</span></p><p><br /></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이때 선산부사시절 김종직이 제자로 만난 사람들 중에 대표적인 사람이 한훤당 김굉필(寒暄堂 金宏弼)이 있었다. 이러한 김종직의 제자 양성은 성리학을 전국적으로 빠르게 확대되어 나가는 계기를 만들었고, 한 차원 높은 도학(道學)으로 만들어 나갔다.</span></p><p><br /></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또한 김종직은 1480년(성종11년) 이존록(彛尊綠)을 저술한다. 김종직이 저술한 이존록은 일종의 족보<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span></span><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族譜)</span><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 형태이다. 김종직은 이존록에서 “통훈대부<span style="font-size:14pt;">(</span></span><span style="font-family:'New Gulim', '새굴림', '돋움', Dotum, AppleGothic, sans-serif;font-size:14pt;">通訓大夫) 전 선산도호부사<span style="font-size:14pt;">(</span></span><span style="font-family:'New Gulim', '새굴림', '돋움', Dotum, AppleGothic, sans-serif;font-size:14pt;">善山</span><span style="font-family:'New Gulim', '새굴림', '돋움', Dotum, AppleGothic, sans-serif;font-size:14pt;">都護府使) 종직</span><span style="font-family:'New Gulim', '새굴림', '돋움', Dotum, AppleGothic, sans-serif;font-size:14pt;">(</span><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8.6667px;">宗直)은 찬(撰)한다.”라고 시작한다.</span><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 그리고 그는 “무인년 여름에 종직이 선부군<span style="font-size:14pt;">(</span></span><span style="font-family:'New Gulim', '새굴림', '돋움', Dotum, AppleGothic, sans-serif;font-size:14pt;">先父君)의 복<span style="font-size:14pt;">(</span></span><span style="font-family:'New Gulim', '새굴림', '돋움', Dotum, AppleGothic, sans-serif;font-size:14pt;">服)을 마치고, 선부군의 덕행<span style="font-size:14pt;">(</span></span><span style="font-family:'New Gulim', '새굴림', '돋움', Dotum, AppleGothic, sans-serif;font-size:14pt;">德行)과 사업<span style="font-size:14pt;">(</span></span><span style="font-family:'New Gulim', '새굴림', '돋움', Dotum, AppleGothic, sans-serif;font-size:14pt;">事業)을 서술하고, 마침내 세계(世系)까지 서술하게 되었다.”라고 이존록의 취지를 밝히고 있었다.</span></p><p><span style="font-family:'New Gulim', '새굴림', '돋움', Dotum, AppleGothic, sans-serif;font-size:14pt;"><br /></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a href="http://xn--289ak2iu9buvke3bs7m0vf.kr/bbs/view_img.php?img=http%3A%2F%2Fwww.xn--289ak2iu9buvke3bs7m0vf.kr%2Fdata%2Feditor%2F2301%2F62b8a6a391ceb8e49c6b3e16271ecc1c_1673377450_6691.jpg" target="_blank" class="view_image"><img src="http://www.xn--289ak2iu9buvke3bs7m0vf.kr/data/editor/2301/62b8a6a391ceb8e49c6b3e16271ecc1c_1673377450_6691.jpg" alt="62b8a6a391ceb8e49c6b3e16271ecc1c_1673377450_6691.jpg" class="img-tag "/></a><br style="clear:both;" /><span style="font-size:12pt;">&lt;점필재 김종직이 저술한 이존록&gt;</span></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br /></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이존록은 아버지이자 스승인 김숙자에게 책을 바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span><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이존(彛尊)은 원래 ‘제사에 쓰는 술 그릇’이라는 뜻한다. 그리고 </span><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8.6667px;">이존(彛尊)으로 읽어도 되고, 이준(</span><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8.6667px;">彛尊)으로 읽어도 틀리지 않고 맞다.</span><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 </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br /></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8.6667px;">이존(彛尊)이라는 단어가 함축하고 있는 뜻으로 봤을 때, 김종직은 </span><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아버지이자 스승인 김숙자에게 거룩하고, 위대한 무언가를 바치고 싶어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그가 쓴 단어 중에서 가장 극대화 시킨 단어인 이존(彛尊)을 붙였던 것이다. 그러나 김종직은 아버지에게 바치는 이존록에 선산김씨보도지<span style="font-size:14pt;">(</span></span><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letter-spacing:0pt;font-size:14pt;">善山金氏譜圖誌)를 기록한다.</span><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span style="font-size:14pt;"> </span></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br /></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김종직은 자신의 본관을 당시의 지명에 따라 일선김씨가 아닌 선산김씨(善山金氏)로 쓴다. 선산김씨보도지의 서문(序文)을 김종직의 처남이자, 제자인 매계 조위(</span><span style="font-family:'굴림';letter-spacing:0pt;background-color:rgb(255,255,255);"><span style="font-size:14pt;">梅溪 曺偉)</span><span style="font-size:14pt;">가 쓰고</span>, </span><span style="font-family:'굴림';font-size:14pt;">발문</span><span lang="en-us" style="font-family:'굴림';letter-spacing:0pt;font-size:14pt;" xml:lang="en-us">(</span><span style="font-family:'굴림';letter-spacing:0pt;font-size:14pt;">跋文</span><span lang="en-us" style="font-family:'굴림';letter-spacing:0pt;font-size:14pt;" xml:lang="en-us">)은</span><span style="font-family:'굴림';font-size:14pt;"> 퇴계 이황에게 책을 가장 많이 구해줬다는 구암 이정</span><span lang="en-us" style="font-family:'굴림';letter-spacing:0pt;font-size:14pt;" xml:lang="en-us">(</span><span style="font-family:'굴림';letter-spacing:0pt;font-size:14pt;">龜巖 李楨</span><span lang="en-us" style="font-family:'굴림';letter-spacing:0pt;font-size:14pt;" xml:lang="en-us">)이 쓴다.</span><span style="background-color:rgb(255,255,255);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letter-spacing:0pt;">﻿</span></p><p><br /></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여기서 김종직의 아버지이자, 스승인 김숙자의 삶을 짧게 살펴보자. 점필재 김종직의 아버지인 강호 김숙자가 선산에 있을 때, 곡산한씨(谷山韓氏)와 일찍 혼인을 하여 아들을 둔다. 김숙자가 경학(經學)과 문장에 아주 뛰어났으며, 26세(1414년, 태종 14년) 생원시에 합격한 이후 곡산한씨와 이혼을 한다. 이후 김숙자는 경남 밀양의 박홍신(朴弘信)의 딸인 밀양박씨(密陽朴氏) 부인과 결혼한다.</span></p><p><br /></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그리고 5년 뒤인 1419년(세종 1년)엔 식년문과에 급제했다. 세종(世宗)은 청년 김숙자를 ‘사관(史官)’에 임명하기로 했지만, 조정의 젊은 관리들로 구성된 사헌부(司憲府)에서 김숙자의 이혼 문제를 제기하게 된다. </span></p><p><br /></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그리고 조정의 젊은 관리들은 김숙자의 이혼 문제 삼아 “처자식을 버린 의리와 도리가 없는 선비”로 관리 임명을 반대하고 비난하는 상소를 세종에게 올리자, 김숙자는 조정에 나아가는 것을 포기하고, 처가인 밀양으로 내려가 버린다. </span></p><p><br /></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이후부터 김숙자는 지방의 낮은 벼슬인 각 지역의 향교에서 제자를 양성하는 교수(敎授)직을 주로 맡게 된다. 김숙자의 호(號)가 강호(江湖)·강호산인(江湖山人)인 것도 벼슬에 마음을 비웠다는 의미에서 강(江)과 호수(湖), 그리고 산(山)을 넣은 호를 사용했던 것이다. </span></p><p><br /></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김종직이 서술한 이존록의 선산김씨라는 기록은 이후 엄청난 혼란을 가져오게 되었다. 조선 최고의 대학자로 사림(士林)으로부터 추앙받던 김종직이 쓴 이존록의 선산김씨라는 기록에 대해 어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 사실 김종직이라는 거대한 산 앞에 이의를 제기할 수도 없었다. 이후부터 점필재 후손을 중심으로 본관을 선산(善山)으로 쓰기 시작했다.</span></p><p><br /></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김종직은 태어난 고향이 경남 밀양(密陽)임에도 불구하고, 김종직은 아버지가 태어난 고향인 선산을 자기의 고향으로 기록한다. 지금으로 보면 자기가 태어난 곳을 고향으로 기록하거나 이야기한다. 하지만 고향(故鄕)은 엄밀히 해석하자면, 부모와 조부모가 태어난 곳 또한 고향으로 할 수 있다. 본관을 <span style="font-size:14pt;">관향(</span></span><span style="font-family:'굴림';letter-spacing:0pt;font-size:14pt;">貫鄕)이라고 한다. 관향에는 조상들의 고향들이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span></p><p><br /></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옛날에는 고향(故鄕)보다는 “팔향(八鄕)”이라는 표현을 많이 썼다. 팔향은 아버지의 내·외향(內外鄕), 할아버지의 외향, 증조(曾祖)의 외향, 어머니의 내·외향, 아내의 내·외향을 뜻하는 것이다. 지금이야 살아가는데 본관이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지만, 조선 시대에는 과거시험을 보기 위해서는 본가 4대까지 어머니와 할머니들의 본관을 비롯해 외가의 4대까지 본관을 서술하지 않으면, 과거시험 자체를 볼 수 없었다. </span></p><p><br /></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본관은 일종의 개인의 신원 증명이다. 그리고 신분 사회에서 그 사람의 신분과 가족들을 가늠하는 척도였다. 조선 시대 과거시험보다 더 중요한 것이 혼인을 하는 것인데, 본관은 혼인을 하는데 있어서 아주 중요한 첫 번째 요소였다.</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br /></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a href="http://xn--289ak2iu9buvke3bs7m0vf.kr/bbs/view_img.php?img=http%3A%2F%2Fwww.xn--289ak2iu9buvke3bs7m0vf.kr%2Fdata%2Feditor%2F2301%2F7d1df9805dcd18099592295350140133_1673372231_2645.jpg" target="_blank" class="view_image"><img src="http://www.xn--289ak2iu9buvke3bs7m0vf.kr/data/editor/2301/7d1df9805dcd18099592295350140133_1673372231_2645.jpg" alt="7d1df9805dcd18099592295350140133_1673372231_2645.jpg" class="img-tag "/></a></span></p><p><span style="font-size:12pt;font-family:'굴림', Gulim;">&lt;선산의 과거시험 합격자 명단이다. 과거합격자는 맨 아래 자기의 본관을 기록하는데, 당시 일선인을 선산인으로 표기하지 않았고, 일선인(</span><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2pt;">一善</span><span style="font-size:12pt;font-family:'굴림', Gulim;">人)으로 표기하였다. 자세히 보면 선산인(</span><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2pt;">善山人)이 따로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gt;</span><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2pt;background-color:rgb(119,119,119);">﻿</span><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2pt;background-color:rgb(119,119,119);">﻿</span></p><p><span style="background-color:rgb(119,119,119);">﻿</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필자는 조선 최고의 대학자로 일컬어지는 김종직의 마음은 잘 알 수 없지만, 아마 김종직 마음속에는 아버지가 버리고 떠난 고향을 자기 스스로 되찾고 싶은 마음에서 이존록에 자기의 모든 정체성이 포함되어 있는 본관을 선산으로 표기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아버지가 떠나버린 고향을 되찾아, 김종직은 아버지 김숙자에게 그 고향 선산을 바치고 싶은 마음이었을지도 모른다.</span></p><p><br /></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그래서 적어도 선산김씨와 일선김씨가 다르다는 것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 이 글을 쓰게 되었다. 따라서 필자가 언급한 사실만으로도 어느 정도 선산김씨와 일선김씨가 서로가 다른 가문이며, 본관을 가지고 혼동하는 일은 조금이 나마 사라졌을 것으로 생각한다. </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br /></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끝으로 필자의 얕고, 짧은 지식으로 역사를 기술해 보았다. 비록 독자들이 읽을 때, 필자의 미흡한 부분이 없지 않겠지만, 혹여 부족한 점이 있더라도 양해 해 주기 바라는 바이다.</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br /></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br /></span></p>]]></description>
	<dc:creator>이순락기자</dc:creator>
		<dc:date>Wed, 11 Jan 2023 01:20:36 +0900</dc:date>
	</item>
	<item>
	<title>[김기훈의 역사와 인물]다병옹 김양선(多病翁 金揚善)과 탄옹 김경(灘翁 金澃)의 삶의 궤적을 통하여 역사를 해석하다.</title>
	<link>http://xn--289ak2iu9buvke3bs7m0vf.kr/bbs/board.php?bo_table=03004&amp;wr_id=126</link>
	<description><![CDATA[<p><span style="font-size:14pt;"><a href="http://xn--289ak2iu9buvke3bs7m0vf.kr/bbs/view_img.php?img=http%3A%2F%2Fwww.xn--289ak2iu9buvke3bs7m0vf.kr%2Fdata%2Feditor%2F2301%2F4e2136107ff7c0a5f49fccf8e04d73a8_1672763631_5673.jpg" target="_blank" class="view_image"><img itemprop="image" content="http://www.xn--289ak2iu9buvke3bs7m0vf.kr/data/editor/2301/4e2136107ff7c0a5f49fccf8e04d73a8_1672763631_5673.jpg" src="http://www.xn--289ak2iu9buvke3bs7m0vf.kr/data/editor/2301/4e2136107ff7c0a5f49fccf8e04d73a8_1672763631_5673.jpg" alt="4e2136107ff7c0a5f49fccf8e04d73a8_1672763631_5673.jpg" class="img-tag "/></a><br style="clear:both;" />&lt;필자: 경북대 정치학박사&gt;</span></p><p><span style="font-size:14pt;"><br /></span></p><p><span style="font-size:14pt;">다병옹 김양선은 1585년(선조 13년)에 10월22일에 선산김씨(들성김씨) 상의원 직장(尙衣院 直長) 석담 김석광(石潭 金錫光)의 아들로 태어난다. 다병옹 김양선은 1592년에 일어난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7년전에 태어났으며, 다병옹 김양선은 1616년(광해군 8)에 문과(대과)에 32세의 나이로 급제하였다.</span></p><p><br /></p><p><span style="font-size:14pt;">조선시대 과거시험을 살펴보자면, 지금의 우리가 흔히 말하는 고시(考試)보다 훨씬 더 어렵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대과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는 사마시는 각 지방별로 소과(小科)를 치러 초시에서 보통 700명 정도를 선발하고, 이 합격자를 대상으로 복시를 치러 100명을 선발하여 합격자에게 백패(白牌)를 지급한다. 이 사마시 합격자는 성균관(成均館)에 입학하여 다시 수학한 후 대과(大科)에 응시하는데 통상 3단계를 거친다. </span></p><p><br /></p><p><span style="font-size:14pt;">우선 초시에서는 100명을 선발하고 여기의 합격자를 대상으로 복시를 치러 33명을 선발한다. 마지막 전시에서 33명을 성적에 따라 선발하여 홍패(紅牌)를 지급한다. 이 문과 급제자 33명은 갑, 을, 병의 등급에 따라 최초 임용 때 차등 임명하게 된다. </span></p><p><br /></p><p><span style="font-size:14pt;">이후 김양선은 전적(성균관의 정6품)·감찰(사헌부의 정6품)·형조좌랑(형조의 정6품)을 역임하고, 평안도 도사를 발령을 받았으나, 병을 이유로 나가지 않았다. 이후 경상감사를 보좌하는 경상도 도사를 맡아 벼슬을 하다가 도사 자리에서 물러난 뒤 처가인 경남 합천에서 여생을 마친다.</span></p><p><br /></p><p><span style="font-size:14pt;">다병옹 김양선은 아버지가 상의원 직장(尙衣院 直長)을 지낸 석담 김석광(石潭 金錫光)인데, 종 7품의 직장(直長) 벼슬로 임금과 왕족들 옆에서 궁중의 크고 작은 살림을 사는 벼슬을 했기 때문에 다병옹 김양선은 서울 한양에서 태어났다. </span></p><p><br /></p><p><span style="font-size:14pt;">500~600년 전의 조선시대를 살았던 조상들에 대한 자료와 문헌은 거의 남아 있지 않고, 묘갈명(墓碣銘), 묘지문(墓誌文), 행장(行狀)정도의 미약한 자료만이 남아 있어, 짧은 글 속에서 다병옹 김양선에 대한 해석과 평가를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당시의 역사적 상황과 인간관계를 고려한다면 좀 더 다병옹 김양선에 대한 이해를 높일 수도 있기 때문에 필자는 이러한 사실들을 참고하면서 기술하고자 한다.</span></p><p><br /></p><p><span style="font-size:14pt;">다병웅이 살던 시기는 1592년 임진왜란을 거치고, 광해군(光海君)이 집권을 하다가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정치권력이 하루아침에 바뀌는 급변하는 정치적 상황 속에서 삶을 살았다. 조선시대 최고의 위기적 상황인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속에서도 동서분당으로 인한 동·서인간 정치적 갈등과 대립은 계속되며, 이 갈등과 대립은 일본이 강제로 조선의 국권을 빼앗는 1905년까지 계속되었다.  </span></p><p><br /></p><p><span style="font-size:14pt;">선조(宣祖) 초기부터 사림세력들은 동인(東人)과 서인(西人)으로 분열의 조짐을 보여 왔다. 1575년(선조 8)에 신진 사림 출신의 김효원(金孝元)과 명종(明宗)의 왕후인 인순왕후(仁順王后)의 동생인 심의겸(沈義謙)이 조선시대 삼사(三司)의 관리를 임명하는 정5품 정랑과 정6품 좌랑을 합친 이조전랑(吏曹銓郞) 자리를 두고, 갈등과 대립으로 결국 동인(東人)과 서인(西人)으로 분열되는 동서분당(東西分黨)이 일어난다. </span></p><p><br /></p><p><span style="font-size:14pt;">명종(明宗) 말기에 문정왕후(文定王后)가 죽게 되자, 사림파는 다시 등용되기 시작한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김효원(金孝元)이다. 1572년 오건(吳健)이 김효원을 이조전랑(吏曹銓郎)에 추천하자, 사림으로서 척신 윤원형(尹元衡)의 문객이었다는 이유로 이조참의 심의겸(沈義謙)이 반대하고 나왔다. 결국 김효원은 이조전랑에 자리에 가지 못한다. 그러나 김효원은 2년 뒤, 1574년 조정기(趙廷機)의 추천으로 이조전랑이 되었다. </span></p><p><br /></p><p><span style="font-size:14pt;">1575년 심의겸의 동생 심충겸(沈忠謙)이 이조전랑으로 추천되었다. 이조 전랑의 관직은 척신의 사유물이 될 수 없다는 이유로 김효원이 심의겸의 동생인 심충겸(沈忠謙)을 반대하였고, 김효원은 이발(李潑)을 이조전랑에 추천했다. 이때부터 사림은 이조전랑 자리를 두고 갈등과 분열되기 시작했다. 김효원과 신진세력들은 서울 동쪽에 살았기 때문에 동인(東人), 심의겸과 구세력들은 서울 서쪽에 살았기 때문에 서인(西人)으로 불렀다. </span></p><p><br /></p><p><span style="font-size:14pt;">1573년(선조 6) 우의정, 1578년(선조 11) 좌의정, 1585년(선조 18)에 영의정을 지낸 소재 노수신(穌齋 盧守愼)과 이조판서 율곡 이이(栗谷 李珥)가 동서분당의 갈등과 대립을 중재하고자 노력하였다. </span></p><p><br /></p><p><span style="font-size:14pt;">그러나 이러한 중재는 잠시 동안만 이루어지다가 결국 동서인의 정치적 갈등과 대립은 극대화되어 갔다. 이후부터 조선의 주권이 일본에게 완전하게 빼앗기는 1905년 을사늑약 때까지 동서인의 갈등과 대립은 계속 이어졌다. 조선의 역사를 제대로 알려면, 붕당(朋黨)으로 인한 당파싸움을 제대로 보는 것이 더 역사적 진실에 가깝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span></p><p><br /></p><p><span style="font-size:14pt;">동인에서는 다시 남인(南人)과 북인(北人)으로 나누어지는 정치적 회오리는 임진왜란의 속에서도 멈추지 않고 계속되었다. 선조이후부터 왕위 계승 문제에 있어서 동인과 서인은 깊숙하게 관여하기 시작한다. 이 동서분당으로 말미암아 조선의 왕은 이제부터 신하들로부터 선택되어지는 택군(擇君)의 시대로 접어든다.</span></p><p><br /></p><p><span style="font-size:14pt;">다병옹 김양선이 과거시험에 합격한 시기는 광해군 시대로 동인들 중에서도 북인들이 집권하던 시기였다. 소수의 북인들이 집권 가능했던 것은 임진왜란 중 왜적에 맞서 의병장으로 혁혁한 공을 세움으로서 자연히 조정(朝政)안에서 북인들의 입지와 영향력은 강화될 수밖에 없었다.</span></p><p><br /></p><p><span style="font-size:14pt;">당시 조선시대 학문으로 퇴계와 쌍벽을 이루던 남명(南冥 曺植)의 다수의 제자들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들이 배운 의(義)를 지키고 실천하기 위해 과감히 각지에서 의병을 일으킨다. 그리고 왜적의 퇴로와 병참을 차단하여 많은 전과를 올린다. 그 대표적인 의병장들이 홍의장군 곽재우(郭再祐)와 내암 정인홍(來庵 鄭仁弘)·송암 김면(松菴 金沔)·이대기(李大期)·노순(盧錞) 등이다.</span></p><p><span style="font-size:14pt;"> </span></p><p><span style="font-size:14pt;">남명 조식의 수제자 다섯 명을 남명오현(南冥五賢)이라 부른다. 수우당 최영경(守愚堂, 崔永慶), 덕계 오건(德溪 吳健), 내암 정인홍(來庵 鄭仁弘), 동강 김우옹(東岡 金宇顒), 한강 정구(寒岡 鄭逑)이다. 동서분당이후 동인에서 남인과 북인으로 분열될 때, 조식의 제자들은 대부분 북인세력을 형성하게 된다.</span></p><p><br /></p><p><span style="font-size:14pt;">필자는 이러한 역사적·정치적 배경과 영향권에 살고 있었던 다병옹 김양선은 이 정치적 사건들과 무관하지 않았으리라 추측한다. 당시의 시대를 살았던 조선의 관료와 백성들은 이러한 임진왜란과 정치적 사건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고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span></p><p><br /></p><p><span style="font-size:14pt;">따라서 조선시대에서 가장 혼란했던 시기에 삶을 살았던 다병옹 김양선의 삶의 궤적을 찾아 가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만, 한번 시도해 보고자 한다. 점과 점을 연결하다 보면 선이 되는 것처럼, 사실과 사실을 잇다 보면 어느 정도 진실에 가까운 해석이 나오리라 믿는다.</span></p><p><span style="font-size:14pt;">                             </span></p><p><span style="font-size:14pt;">다병옹 김양선의 조부(祖父)는 김공(金筇)으로 승정원(承政院) 좌승지 경연참찬관(左承旨經筵參贊官)을 정3품을 지냈다. 좌승지 경연참찬관은 품계는 정3품으로 높았지만, 관직은 낮았다. 여기서 김공은 신당 정붕(新堂 鄭鵬)선생의 아들 정의(鄭毅)의 딸과 혼인하여 석지(錫祉)와 석광(錫光)을 낳는다. </span></p><p><br /></p><p><span style="font-size:14pt;">여기서 필자는 성리학과 신당 정붕선생에 대한 언급을 짧게 나마 하고자 한다. 선산 금오산에서 야은 길재(冶隱 吉再)선생으로부터 태동한 조선 성리학(性理學)은 입지적인 제자들의 출사(出仕)와 활약으로 인해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나갔다. </span></p><p><br /></p><p><span style="font-size:14pt;">지금이나 옛날이나 학문은 서울 한양으로 옮겨 간다. 그러나 한양에서 한훤당 김굉필(寒暄堂 金宏弼)에게서 공부한 신당 정붕(新堂 鄭鵬)은 성리학을 자신의 고향인 선산으로 다시 되가져 온다. 말하자면 조선 성리학의 발원지로 다시 성리학을 신당 정붕이 가져 온 것이다. </span></p><p><br /></p><p><span style="font-size:14pt;">조선시대 성리학의 도통관(道統觀)은 야은 길재(冶隱 吉再) → 강호 김숙자(江湖 金叔滋) → 점필재 김종직(佔畢齋 金宗直) → 한훤당 김굉필(寒暄堂 金宏弼) → 정암 조광조(靜庵 趙光祖) → 회재 이언적(晦齋 李彦迪) → 퇴계 이황(退溪 李滉)으로 이어진다. </span></p><p><br /></p><p><span style="font-size:14pt;">영남의 성리학의 한축인 신당 정붕(新堂 鄭鵬) → 송당 박영(松堂 朴英)선생 이어지게 만들었다. 이후 신당 정붕의 성리학은 송당 박영(松堂 朴英)에게로 이어지게 되었다. 조선 중종(中宗)이후 선산지역에서 송당 박영선생이 성리학을 발전·확산시키자 그 명성이 전국적으로 퍼져 나갔다. </span></p><p><br /></p><p><span style="font-size:14pt;">하지만 1545년 명종 즉위년에 왕위 계승권을 둘러싸고 일어난 파평윤씨(坡平尹氏)가문의 대윤(大尹)·소윤(小尹)의 권력 다툼은 사림(士林)을 숙청하는 단계로 발전하는데, 그것이 바로 을사사화(乙巳士禍)이다. 이 을사사화는 전국적으로 성장·확산되어 가던 송당학파(松堂學派)를 정조준하게 되어 화(禍)를 입게 된다. </span></p><p><br /></p><p><span style="font-size:14pt;">송당학파의 일원으로 을사사화의 화(禍)를 입은 사람은 야계 송희규(倻溪 宋希奎, 유배), 신재 김진종(新齋 金振宗, 유배), 주천 강유선(舟川 康惟善, 사형), 경응 안명세(安名世, 사형)였다. 이러한 을사사화로 큰 타격을 입은 송당학파는 분열과 와해의 길을 걷게 된다. </span></p><p><br /></p><p><span style="font-size:14pt;">당시 송당 박영의 성리학에 대한 명성과 평가가 어떠했는가를 보자면, 1568년(선조 원년) 당시 사림파의 영수(領袖)이자, 영의정(領議政)을 지낸 동고 이준경(東皐 李浚慶)이 송당 박영에 대해 극찬했을 정도이다. 이준경(李浚慶)은 “지금 모두들 도학하면 조광조(趙光祖)를 추존할 뿐이고, 박영·정붕에 대해서는 세상에서 아는 이가 없다”고 당시 사림파의 편향된 분위기를 비판하였다. </span></p><p><br /></p><p><span style="font-size:14pt;">이준경의 신당 정붕과 송당 박영에 대한 평가가 이 정도라면 더 이상 이야기하지 않아도 그 명성과 실력이 얼마 만큼인지 모두들 알 수 있을 것이다. 중종과 명종 때에 신당 정붕선생과 송당 박영 선생은 이미 신진 사림들 속에서 그 학문적 실력을 당당히 인정받은 것이라 할 수 있겠다. </span></p><p><br /></p><p><span style="font-size:14pt;">그러나 1575년(선조 8)의 동서분당(東西分黨) 그리고 1589년(선조 22)의 동인(東人) 안에서 남인(南人)과 북인(北人)의 분열되기 시작하면서 영남의 성리학적 사상계는 퇴계학파와 남명학파로 양분되면서 선산지역의 송당학파는 구심점을 잃어 버리게 된다. </span></p><p><br /></p><p><span style="font-size:14pt;">동고 이준경은 중종 때에 일어난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억울하게 죽은 조광조(趙光祖)의 억울함을 주장하는 한편, 명종 때에 일어난 을사사화(乙巳士禍)로 훌륭한 명신들인 노수신(盧守愼)·유희춘(柳希春) 등을 석방시켜, 조정에 다시 등용시키는 인물이었다. </span></p><p><br /></p><p><span style="font-size:14pt;">이준경은 본인이 죽기 직전 선조(宣祖)에게 “새도 죽을 때는 슬피 우는 법이라면서,  반드시 사림(士林)이 분열되어 붕당(朋黨)을 일으킬 것이니, 이를 경계하고 막으라.” 선조(宣祖)에게 충고했던 인물로도 유명하다. 선조는 이준경이 죽으면서까지 이 간곡하게 절규한 충고를 그냥 흘려 듣게 된다. </span></p><p><br /></p><p><span style="font-size:14pt;">이준경의 충언을 간과한 결과 선조이후 조선의 역사가 기록되는 모든 정치적 사건들은 속에는 당파싸움과 붕당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후에 많은 훌륭한 선비들이 이 동·서인 갈등과 대립으로 희생되는 결과를 초래하였으며, 남인이 주류를 형성하는 영남지역에서는 벼슬 길로 나가지 않는 경향이 뚜렷해졌다.</span></p><p><span style="font-size:14pt;"> </span></p><p><span style="font-size:14pt;">다병옹 김양선의 어머니는 광주이씨(光州李氏)이다. 여기서 광주이씨는 전라도 광주를 의미하며, 또 다르게 광산이씨(光山李氏)라고도 한다. 광주이씨(廣州李氏)는 경기도 광주를 의미하며 광릉이씨(光陵이씨)라고 한다. 여기서 본관이 다르다는 것을 밝히지 않으면, 엄청난 혼란이 발생하기 때문에 이렇게 밝히는 것이다.</span></p><p><br /></p><p><span style="font-size:14pt;">다병옹의 어머니 광주이씨는 봉사(奉事) 벼슬을 한 이응명(李應命)의 딸이고, 성주 윤동(倫洞)마을의 의성김씨(義城金氏)를 명문가의 초석을 놓고 다진 삼척부사(三陟府使) 칠봉 김희삼(七峰 金希參)의 외손녀이다. 이응명의 의성김씨 부인이 세상을 떠났을 때, 묘갈명을 남명 조식(南冥 曺植)이 찬(撰)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 것으로 봐서는 남명 조식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span></p><p><br /></p><p><span style="font-size:14pt;">칠봉 김희삼은 1524년(중종 18년) 선산 들성마을의 진락당 김취성(金就成)에게 수학하기 시작했는데, 진락당 선생이 칠봉을 매우 의로운 사람이라 중히 여겼다고 한다. 훗날 칠봉이 월봉산 아래 서실을 진재(進齋)라 지었는데, 진락당 선생의 아우인 구암 김취문(久庵 金就文)이 진재설(進齋說)을 지었다. </span></p><p><br /></p><p><span style="font-size:14pt;">칠봉이 1540년 문과에 급제하자, 진락당 선생이 편지를 보내어 급제를 축하하며, 이르기를 “다행히 큰 곳에 이르러 도를 행할 수 있게 되었으니 내가 급제한 것 보다 낫도다.”라고 했고, 진락당 선생이 한번은 첩자(帖子)를 주었는데 “본원을 함양하는 공부는 진실로 중간에 끊어지기가 쉽다. </span></p><p><br /></p><p><span style="font-size:14pt;">그런데 막 끊어진 것을 깨달았을 때, 곧 거기가 이어야 할 곳이니, 이로부터 발분하여 이어나가기를 오래하면 자연히 천리가 밝아질 것이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말로는 나타내기 어려운 오묘함을 마주 앉아 논하기를 바란다.”고 했다. </span></p><p><br /></p><p><span style="font-size:14pt;">김희삼이 호(號)를 칠봉이라고 붙인 데는 두 가지 설이 있었다. 첫 번째는 그가 칠봉산 밑에서 태어나 자랐기 때문에 ‘칠봉’이라 호를 스스로 지었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어느 날 임금이 신하들에게 소원이 무엇인가를 물었는데, 다른 신하들은 모두 스스로의 소망을 말했지만 김희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span></p><p><br /></p><p><span style="font-size:14pt;">그래서 임금이 재차 물으니, 김희삼은 말하기를 “소신의 집은 성산에 있는데 일곱 봉우리들이 앞뒤로 둘러싸고 있으며, 그 안에는 작은 내가 흐르고 있습니다. 저는 벼슬에서 물러나 칠봉산 아래에서 나물이나 캐고, 물고기나 낚으면서 일생을 마치기를 원합니다”고 했다는 것이다. </span></p><p><br /></p><p><span style="font-size:14pt;">그러자 국왕은 김희삼에게 ‘칠봉’이라는 호를 내리면서, “나중에 거기 가서 살라”고 했다는 것이다. 1905년 일본에 의해 조선이 망하자, 칠봉 김희삼과 동강 김우옹의 많은 자손들은 조선독립운동에 뛰어 든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심산 김창숙(心山 金昌淑)이다. </span></p><p><br /></p><p><span style="font-size:14pt;">심산 김창숙은 상해임시정부 부의장을 맡았으며, 해방이후 서울의 성균관대학교를 설립한다. 안동뿐만 아니라 전국의 의성김씨 가문에서 한국독립운동에 삶을 희생한 사람이 약 200여명이나 된다. 이 사실로 미루어 보았을 때, 필자가 생각하건대 의성김씨는 한국최고의 명문가라 할 수 있겠다.  </span></p><p><br /></p><p><span style="font-size:14pt;">칠봉 김희삼의 아들이 바로 퇴계 이황(退溪 李滉)과 남명 조식(南冥 曺植)에게서 학문을 배운 동강 김우옹(東岡 金宇顒)이다. 김우옹은 대사헌(大司憲), 대사성(大司成), 부제학(副提學)을 거친 조선시대 최고의 관직을 두루 거친 관료이자, 학자였고, 동서분당이후 동인을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span></p><p><br /></p><p><span style="font-size:14pt;">김우옹은 동서분당(東西分黨)이후 동인을 대표하는 인물이었기 때문에 정여립 역모사건으로 발생된 기축옥사 때 유배를 가게 된다. 김우옹의 중형(仲兄)인 개암 김우굉(開岩 金宇宏) 역시 대사성, 대사간, 부제학을 거치면서 형제들이 전국적으로 대학자로 인정받았다. </span></p><p><br /></p><p><span style="font-size:14pt;">다병옹 김양선의 어머니인 광주이씨는 동강 김우옹에게 생질녀(甥姪女)가 되는 것이다. 요즘은 생질녀라 하면 모르는 사람이 많다. 누나나 여동생의 딸을 생질녀라고 한다. 이러한 연유로 다병옹이 벼슬길에 나가 있을 때, 김우옹은 김양선을 무척이나 아꼈다고 한다. 김우옹은 특히나 다병옹 김양선이 문과 급제를 하여 벼슬 길에 나갔을 때 그에 대한 관심과 지지는 더 커져만 갔다. </span></p><p><br /></p><p><span style="font-size:14pt;">기록에 의하면 다병옹은 “성품이 총민하고 재기가 탁월하여, 겨우 여섯 살에 능히 글을 지어 많은 사람의 칭찬을 받았으며, 동강(東岡 金宇顒)이 기이하게 여기고 사랑했으며, 생질녀가 좋은 아들을 두었다라고 칭찬하였다.”는 기록이 있다.</span></p><p><span style="font-size:14pt;"><br /></span></p><p><span style="font-size:14pt;">“열네 살의 어린 나이로 여러 차례 과장(科場 : 향시(鄕試)를 보이는 시험장)에서 장원하여 명망이 더욱 넓고 높았으니 명예를 다투는 사람들이 다툴 줄을 몰랐더라.”라고 기록하는 것을 보았을 때, 다병옹은 어려서부터 학문에 천재적 타고난 재질을 보였다는 것을 알 수 있겠다.</span></p><p><br /></p><p><span style="font-size:14pt;">다병옹의 사촌(從兄)형이 바로 선산 출신의 탄옹 김경(灘翁 金澃)이다. 기록으로 봤을 때, 탄옹 김경은 다병옹 김양선보다 3살 위이다. 탄옹 김경의 어머니가 선산의 신천강씨(信川康氏)인데, 극재 강경선(克齋 康景善)의 딸이다. 창원도호부사(昌原都護府使) 강의(康顗)의 아들이 극재 강경선(克齋 康景善)·주천 강유선(舟川 康惟善) 형제들이다. 이 형제들은 진락당 김취성(眞樂堂 金就成)의 제자들이었다. 탄옹의 외할아버지가 바로 극재 강경선이다. </span></p><p><br /></p><p><span style="font-size:14pt;">강경선의 동생은 주천 강유선(舟川 康惟善)으로 송당학파의 일원으로 진락당 김취성에게 수학하였다. 기묘사화로 죽은 정암 조광조(靜庵 趙光祖)의 신원회복을 운동을 성균관 유생들과 노력하다가 을사사화 때 이홍윤(李洪胤)의 역모 사건에서 연루되어 억울한 누명을 쓰고 죽는다. </span></p><p><br /></p><p><span style="font-size:14pt;">광해군과 북인을 몰아내는 인조반정의 중심인물이 바로 북저 김류(北渚 金瑬)이다. 김류는 인조반정 때 정사1등 공신에 책록되어 이조판서·좌의정·도체찰사·영의정의 벼슬자리에까지 오른 인물이다. 김류의 할머니가 바로 강의(康顗) 딸이다. 따라서 탄옹의 외할아버지와 김류의 할머니는 남매지간이 된다.</span></p><p><br /></p><p><span style="font-size:14pt;">김류는 1620년 이귀(李貴) 등과 반정(反正)을 꾀하지만 실패한다. 다시 1623년 거의대장(擧義大將)에 추대되어 이귀·신경진(申景禛)·이괄(李适) 등과 인조반정을 일으켰다. 이 반정의 공로로 병조참판에 제수되고, 곧 병조판서로 승진되어 대제학을 겸하는 동시에 승평부원군(昇平府院君)에 봉해졌다. </span></p><p><br /></p><p><span style="font-size:14pt;">이듬해 반정의 주류들 사이의 갈등으로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병조판서로서 남행(南幸)하는 인조를 호가하였다. 난이 평정된 뒤 우찬성을 거쳐 1624년 이조판서를 역임하였다. 김류는 임진왜란 때 탄금대전투의 신립(申砬)장군의 종사관의 직책을 맡은 김여물(金汝岉)장군의 아들이다. 김여물은 그의 외가인 신천강씨 집안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span></p><p><br /></p><p><span style="font-size:14pt;">탄옹 김경은 1617년(광해군 9)에 36세에 성균관 생원시 합격했다는 것을 보면, 다병옹은 이 보다 젊은 나이에 32세에 1616년(광해군 8)에 문과 급제를 한다. 탄옹보다 다병옹은 벼슬길에 일찍 나갔으며, 탄옹의 생원시 합격으로 성균관 입학하자, 다병옹은 서로 재회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span></p><p><br /></p><p><span style="font-size:14pt;">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탄옹 김경의 할아버지 김공(金笻)과 아버지 김석지(金錫之)는 가족들과 함께 금오산 도선굴로 피신하였다. 그러나 전란의 와중에 전염병이 창궐하여 안타깝게도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게 된다. 탄옹 김경의 어머니 신천강씨(信川康氏)는 시아버지와 남편이 세상을 떠나게 되자, 시아버지와 남편의 장례를 준비하던 중에 스스로 자결하게 된다. </span></p><p><span style="font-size:14pt;"><br /></span></p><p><span style="font-size:14pt;">이 때 탄옹 김경의 나이 겨우 11살이었다. 어린 나이인데도 불구하고 집안과 이웃의 도움을 받아 장례를 정성을 다해 치르고 마친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죽음도 모자라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난 탄옹 김경이 전쟁 중에 기댈 곳은 그리 많지 않았다. 고아가 된 탄옹 김경이 찾아 간 곳은 이모 집이었다. 여기서 탄옹 김경은 이종사촌들과 함께 공부하며 자라게 되었다.</span></p><p><br /></p><p><span style="font-size:14pt;">탄옹 김경은 1629년(인조 5)에 3만의 후금군(後金軍)이 침입으로 인조가 강화도로 피신하는 정묘호란(丁卯胡亂)이 일어난다. 김경은 의병(義兵)을 일으키는데, 때마침 후금과 강화가 체결되어 군사들을 파하게 된다. 이 일이 조정에 알려지자, 그의 충성심에 대한 보답으로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에 임명되어졌다. 이후 김경은 교하현감, 함흥부 판관, 호조좌랑을 거친다. </span></p><p><br /></p><p><span style="font-size:14pt;">탄옹 김경은 1637년(인조15년) 4월에 5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이후 김경은 1636년 일어나는 병자호란(丙子胡亂)으로 남한산성으로 피신하는 인조의 호종을 아들 김하량과 함께 도왔다. 김경은 인조의 남한산성 호종의 공훈으로 죽은 이후 사헌부 장령(掌令)에 증직되고, 3년 후에는 승정원 좌승지와 호조참판을 증직 받는다. </span></p><p><br /></p><p><span style="font-size:14pt;">김경의 아들인 강탄 김하량(江灘 金廈樑)은 여헌 장현광(旅軒 張顯光)의 제자로  1630년(인조 8) 진사가 되고, 2년 뒤에 문과(대과)에 병과 2등으로 급제하였다. 이후 김하량은 안동부사·판결사(判決事)·한성부우윤 등을 역임했다. 김하량이 죽은 이후 예조판서에 추증되었다.</span></p><p><span style="font-size:14pt;"><br /></span></p><p><span style="font-size:14pt;">김경은 호(號)를 탄옹(灘翁)으로, 사촌동생인 김양선은 다병옹(多病翁)으로 각자의 호(號)에다 늙은이 옹(翁)을 붙인 것처럼 봐서는 종형제 사이에 남다른 우애가 있지 않았겠는가 하는 추측과 생각을 필자는 한다. </span></p><p><br /></p><p><span style="font-size:14pt;">이들 종형제(從兄弟)들은 1613년 계축옥사(癸丑獄事)로 대북파가 서인과 남인들을 축출한 이후 과거시험에 합격하여 대북파가 정권을 장악하고 있을 때 벼슬 길에 나갔다. 표현하자면 벼슬 길에 나갔지만, 본인들의 운명이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아주 살벌한 시기에 살고 있었던 것이다. 이 당시 벼슬길은 출세 길도 되지만, 반대로 죽을 수도 있는 길이었다.</span></p><p><span style="font-size:14pt;"><br /></span></p><p><span style="font-size:14pt;">다병옹의 어머니가 앞에서 언급했듯이 광주이씨(光州李氏)이다. 조선시대 광산(광주)이씨를 대표하는 인물이 바로 동암 이발(東巖 李潑)이다. 그러나 선조(宣祖) 때 사림 세력들이 서인과 동인으로 분열될 때 이발은 동인(東人)의 대표적 인물이었다. 또한 이발은 남명 조식의 제자들과 교류가 많았는데, 그 중에서도 동강 김우옹(東岡 金宇顒)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span></p><p><br /></p><p><span style="font-size:14pt;">1589년(선조 22년) 정여립 역모사건으로 발생된 기축옥사(己丑獄事)로 희생되는 대표적 인물이 광산이씨(광주이씨)의 이발이다. 정여립은 1571년 (선조 3년)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율곡 이이(栗谷 李珥)의 문하에 있으면서 서인에 속했다. </span></p><p><br /></p><p><span style="font-size:14pt;">그러나 이이가 탄핵되어 물러나 죽게 되자, 동인의 정치세력이 우세해지자 동인으로 전향한다. 동인으로 전향한 정여립은 본인이 모셨던 율곡 이이를 비롯한 서인의 영수격인 박순(朴淳)∙성혼(成渾)을 비판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정여립의 이러한 태도에 대해 선조는 불신하고 멀리했다. 선조의 정여립에 대한 미움은 미움으로 그치지 않고, 관직을 삭탈하게 된다. 정여립은 고향인 전주로 내려가서 활쏘기를 하는 대동계(大同契) 모임을 결성한다. </span></p><p><br /></p><p><span style="font-size:14pt;">이 대동계 모임의 위력이 어느 정도인가 하면 전라도에 왜구가 침입했을 때, 그 왜구를 물리칠 정도의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 선조는 누구보다 의심이 많았던 왕이었다. 관직이 삭탈된 신하가 왜구를 물리칠 정도의 군사력을 갖는다는 것만으로도 역적이었다.</span></p><p><br /></p><p><span style="font-size:14pt;">이렇게 해서 정여립은 서인들과 선조의 완전한 표적이 되어버렸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은 사람이 바로 조선시대 가사문학의 대가인 송강 정철이었다. 정철은 정여립을 역적으로 몰아 동인들을 제거하려는 조선시대 최고의 비극 중 하나인 기축옥사를 만든다.</span></p><p><br /></p><p><span style="font-size:14pt;">기축옥사를 주도한 송강 정철(松江 鄭澈)은 이발의 80세 노모와 10살 된 아들까지도 무참히 죽이는 무자비한 잔혹함을 보인다. 역사에서 가장 아이러니 하게 생각하는 인물이 바로 송강 정철이다. 정철이 주도한 이 기축옥사는 3년 동안 1000여명에 가까운 동인 관료와 선비들이 희생된다. </span></p><p><br /></p><p><span style="font-size:14pt;">이발(李潑)은 이조정랑(吏曹正郎)·부제학(副提學)·대사간(大司諫)을 역임한 인물이다. 조선시대 선비들이 최고로 선망하던 벼슬이 이조정랑·부제학·대사간이다. 이발은 정암 조광조(靜庵 趙光祖)의 지치주의(至治主義)를 이념으로 왕도정치를 실현하고자 했던 인물이다. </span></p><p><span style="font-size:14pt;"><br /></span></p><p><span style="font-size:14pt;">광주·광산이씨 사람들은 정철이 연일정씨(延日鄭氏)임으로 연일정씨와 혼인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리고 제사지낼 때 고기를 썰거나 다질 때마다 송강 정철! 송강 정철! 하면서 복수를 다짐했다고 한다.</span></p><p><br /></p><p><span style="font-size:14pt;">정여립(鄭汝立)의 역모사건이 일어나자, 서인들은 원인 규명과 사태 파악보다는 역모사건을 빌미로 무자비하게 동인들을 숙청하고, 정치적으로 제거하는 한편, 서인들은 정치적으로 영구 집권을 공고히 하는 계기를 마련한다. </span></p><p><br /></p><p><span style="font-size:14pt;">김우옹도 동인에서 중요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기축옥사의 화(禍)를 피해갈 수는 없었다. 그래서 김우옹 역시 유배를 가게 된다. 이러한 정치적 대사건은 다병옹이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 길에 나가기 이전의 일이지만, 이러한 것들은 다병옹 입장에서는 자신의 앞날에 결코 좋지 않은 환경과 배경이었다.</span></p><p><br /></p><p><span style="font-size:14pt;">1608년 북인들은 광해군(光海君)이 왕으로 옹립시키자, 다시 대북(大北)과 소북(小北)으로 갈라져 갈등과 대립한다. 대북은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옹립하려 했다는 이유로 소북의 영수(領首) 류영경(柳永慶)을 죽이고, 소북 인사들을 축출하였다. 그리고 대북정권은 또 계속 왕권에 위협이 되는 영창대군과 그 측근들을 제거하고자 하였다. </span></p><p><br /></p><p><span style="font-size:14pt;">그렇게 해서 1613년에 일어난 대사건이 계축옥사(癸丑獄事)이다. 인목대비의 친정아버지 김제남과 그 아들 3명이 사사(賜死)되고, 영창대군이 폐서인 되어 강화도에 유배되었다. 그리고 서인(西人)과 남인(南人)들이 조정에서 축출되고, 대북의 좌의정 정인홍(鄭仁弘)과 예조판서 이이첨(李爾瞻)이 조정을 완전히 장악한다. 이 계축옥사의 원인으로 결국 서인들이 주도한 인조반정은 계축옥사가 도화선이 된 것이다.</span></p><p><br /></p><p><span style="font-size:14pt;">인조반정(1623년)은 서인(西人)들을 중심으로 이귀(李貴)·김자점(金自點)·김류(金瑬)·이괄(李适)을 주축이 되어 이이첨(李爾瞻)과 대북파를 숙청하고, 능양군 이종(綾陽君 李倧)을 왕으로 옹립하는 정치적 대사건이었다. </span></p><p><span style="font-size:14pt;"><br /></span></p><p><span style="font-size:14pt;">이후 서인들은 자기들의 정치적 이해와 목적이 다른 인물들과 북인·남인을 조정에서 대거 숙청하거나 물러나게 했다. 계축옥사로 희생된 서인들은 다시 정치적 반작용을 광해군과 동인들에게 가하는데, 그것이 바로 인조반정이었다. </span></p><p><br /></p><p><span style="font-size:14pt;">기축옥사(1589년) → 계축옥사(1613년) → 인조반정(1623년)을 거치면서 35년간 동인과 서인 사이에 갈등과 증오는 계속 쌓여만 갔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다른 정파에 대한 대화와 배려·신뢰는 역사에서 완전하게 사라지게 된다.</span></p><p><br /></p><p><span style="font-size:14pt;">이 갈등과 증오는 시간이 지나면서 벼슬 길에 나간 관료 뿐만 아니라, 전국의 향촌 사회로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이 원인은 성리학을 공부하는 선비들이 제자와 스승의 사승<span style="font-size:14pt;">(</span></span><span style="font-family:'굴림';font-size:14pt;letter-spacing:0pt;">師承)관계에 따르거나, 아니면 조상들이 </span><span style="font-size:14pt;">동서인 사이에서 어느 붕당소속이었느냐에 따라 서로가 지향하는 길이 달랐다. 따라서 같은 가문과 집안에서도 동·서인 갈등이 일어나기 시작했었다. 1905년 조선의 국권이 일본에게 완전히 넘어 갈 때까지 이 갈등과 대립은 계속되었다. </span></p><p><br /></p><p><span style="font-size:14pt;">따라서 집권하고 있던 세력들의 정치적 이념과 다르거나 당색(黨色)이 다르다는 것 때문에 동인에서 특히 남인들은 소과(小科)의 진사(進士)이상의 벼슬을 하지 않는 경향이 뚜렷해진다. 아예 벼슬 길에 나가지 않았던 사대부들은 혼인(婚姻)관계로 신분을 유지하거나, 아니면 지역의 향교(鄕校)·서원(書院) 출입을 통해 그들의 신분을 유지하는 행태로 나타났다.</span></p><p><br /></p><p><span style="font-size:14pt;">기록에 보면 다병옹 김양선의 성격과 기개를 알 수 있는 부분이 있다. “광흥부봉사(廣興副奉事)로 본 창에 있을 때에 녹을 헛되게 소비하는 폐단과 하급관리들의 남용과 도둑질하는 자를 색출하여 바로잡아 본 창의 재정을 좋게 하였다. 또 전적과 감찰을 역임하고 형조좌랑이 되어 법집행에 흔들리지 않았다.”라고 기록이 있다. </span></p><p><br /></p><p><span style="font-size:14pt;">그리고 광해군이 인목대비를 폐모(廢母)시킬 때, 다병옹 김양선은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였지만, 폐모시키는 것을 만류하는 소(疎)를 올리는 것을 중지 시키지 못하였다.”라는 기록을 볼 때, 그의 강직함을 사람들이 지주(砥柱)와 같은 절조가 있다고 표현하였다고 한다. </span></p><p><br /></p><p><span style="font-size:14pt;">여기서 지주(砥柱)란 중국 황하(黃河) 중류에 있는 지주산(砥柱山)을 가리키는데, 황하가 범람할 때마다 탁류가 지주산에 부딪치지만, 지주산은 절대로 쓰러지지 않고 우뚝하게 서 있는 것처럼, 난세에 선비들의 의연하고 초연한 높은 절개와 지조를 지주(砥柱)에 빗대어 선비들은 표현했었다.</span></p><p><br /></p><p><span style="font-size:14pt;">1625년(인조 3년) 다병옹은 모든 관직과 벼슬을 버리고, 집으로 돌아 왔다. 다병옹이 인조반정 3년 후 관직생활을 포기한 원인으로는 집권한 서인들과 다른 정치적 견해와 노선을 지향했기 때문이라는 추측을 할 있겠다. </span></p><p><br /></p><p><span style="font-size:14pt;">그리고 서인들이 모든 요직을 차지하고 있는 상태에서는 더 이상 관직 생활의 희망이 없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다병옹 김양선은 10여년의 관직 생활을 뒤로 한 채 벼슬 길에서 완전히 벗어났던 것이다. </span></p><p><br /></p><p><span style="font-size:14pt;">기록에는 “인조임금 초에 성백(成伯)을 시기하여 허위로 죄를 만들려 했으나, 실패로 돌아갔다.”는 것이 있다. 여기서 성백은 다병옹 김양선의 자(字)이다. 이 기록을 봤을 때, 다병옹 김양선에게 어떠한 사건인지는 모르나, 분명히 정치적 위기에 직면한 것을 알 수 있겠다.</span></p><p><br /></p><p><span style="font-size:14pt;">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인조반정의 중심 인물인 김류의 할머니와 탄옹의 외할아버지 관계를 봤을 때, 김류와 탄옹은 막역한 사이였을 것이다. 이러한 관계로 미루어 보건대 탄옹의 입장에서는 4촌 동생인 다병옹이 정치적 위기에 직면하게 되자, 탄옹은 은밀하게 다병옹을 위기에서 구하고자 노력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span></p><p><br /></p><p><span style="font-size:14pt;">그리고 탄옹 김경의 스승은 한강 정구(寒岡 鄭球)와 여헌 장현광(旅軒 張顯光)이었다. 탄옹은 장현광의 제자였다. 인조반정으로 임금의 자리에 오른 인조는 그 정당성을 회복하기 위해 전국의 훌륭한 학자들과 인물들을 조정에 등용하고자 했다. 인조가 그 중에서도 가장 등용하고자 했던 대표적 인물이 여헌 장현광이었다. 인조는 여헌 장현광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여러 차례 서울로 불렀다.</span></p><p><br /></p><p><span style="font-size:14pt;">그때마다 장현광은 늙음과 병을 핑계로 나가지 않았다. 그러나 인조는 가마와 마차를 보내고 심지어 탕약까지 장현광에게 보내어 왔었다. 장현광을 데려가고자 하는 인조의 마음은 한마디로 지극 정성이었다. 그래서 장현광이 그 성의에 보답하고자 인조를 만나러 한양으로 간다. 장현광은 인조를 만나고는 곧장 인조의 허락도 없이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버린다.</span></p><p><br /></p><p><span style="font-size:14pt;">탄옹 김경이 여헌 장현광의 제자였다는 것을 인조는 아마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인조는 탄옹 김경을 눈 여겨 보았을 것으로 필자는 생각한다. 기록에는 없지만, 여헌 장현광이 인조에게 탄옹의 앞날을 당부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필자는 해본다. 이러한 이유로 탄옹은 서인들이 장악하고 있던 조정에서 나름대로의 위치와 영향력을 유지 할 수 있었다고 추측할 수 있겠다. </span></p><p><span style="font-size:14pt;"> </span></p><p><span style="font-size:14pt;">그런데 “병이 많은 늙은이”라는 다병옹(多病翁)으로 호를 가지고 있다. 병을 핑계로 벼슬에서 물러나려 하자, 임금이 “다병옹”으로 하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필자의 생각은 “모함과 시기가 많은 벼슬길에는 더 이상 연연하지 않겠다.”는 선비의 절개와 지조를 엿 볼 수 있는 호(號)라고 생각한다. </span></p><p><br /></p><p><span style="font-size:14pt;">다병옹은 경남 합천지역에 세거하던 철성이씨(鐵城李氏)와 혼인을 했다. 철성이씨는 고성이씨(固城李氏)라고도 한다. 철성 이씨(鐵城李氏)는 이황(李璜)을 시조로 하는데, 고려 덕종 초에 문과에 급제하여 밀직부사를 지냈는데, 1033년 거란군의 침입을 막아 철령군(鐵嶺君: 철령은 철성(鐵城)의 옛 이름으로 경상남도 고성군)에 봉해졌기 때문에 본관을 철성이씨로 했다. </span></p><p><br /></p><p><span style="font-size:14pt;">그리고 조선 태종 때, 이원(李原)은 좌명공신(佐命功臣)으로 철성군(鐵城君)에 봉해졌고, 대사헌, 우의정을 거쳐 세종 때에 좌의정(左議政)이 되었다. 이원은 이진(李溍)의 7대조이다. 그래서 철성이씨와 고성이씨(固城李氏)와 같은 본관으로 볼 수 있다. 다병옹 김양선의 장인은 이진(李溍)으로 합천일대에서 막강한 재력을 소유한 재력가였다고 한다. </span></p><p><br /></p><p><span style="font-size:14pt;">다병옹 김양선의 묘지명에는 “늙어서 집에 있으면서 서책으로 스스로를 즐기고, 자제들을 가르치며 산업을 일삼지 아니하여, 다만 자급할 정도였지만, 자력에 의하여 살아갈 수 없는 곤궁한 사람을 보면 아낌없이 도와주어 자신을 위하여 남겨두지 아니하였으니, 병란을 겪은 뒤에 남쪽으로 내려온 인사들이 많은 도움을 입었다. 재리(財利)에 있어서는 초연한 마음으로 겁쟁이처럼 피하였다.” 그리고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다병옹 김양선의 지인들이 난을 피해 다병옹이 거쳐하던 합천까지 피난했던 것을 알 수가 있다.    </span></p><p><br /></p><p><span style="font-size:14pt;">다병옹 김양선은 1643년(인조 21년) 59세를 일기로 합천 처가에서 세상을 떠난다. 다병옹은 벼슬길에 물러나 세상을 떠날 때까지 처가인 합천에서 생활했다. 다병옹 김양선이 세상을 떠나 지금의 고아읍 원호리 들성마을 웃골 뒷동산에 상여(喪輿)가 들어오게 되었다. 그러나 웃골에 거주하던 사람들이 상여가 동네에서 나가는 법은 있어도, 동네로 들어오는 법은 없다면서 강력하게 반대하자, 상여가 반대편 산을 넘어 와서 묘소를 마련하였다고 전해진다. </span></p><p><br /></p><p><span style="font-size:14pt;">탄옹 김경과 다병옹 김양선 4촌 형제들이 살았던 조선시대는 그야말로 국가적으로 “바람 앞에 촛불”이었으며, 어느 누구에게나 “바람 앞에 촛불”과도 같은 시기였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가장 큰 국제적 규모의 전쟁이 잔인하고 가혹하게 한반도를 쓸고 갔던 시기였다. </span></p><p><br /></p><p><span style="font-size:14pt;">내부적으로는 사림(士林)이 분열되어 동서분당을 형성되고, 반대파에 대한 정치적 공격을 무차별적으로 가하던 살벌한 시기였다. 벼슬 길이 출세 길도 될 수도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본인 뿐만 아니라 가족들이 죽는 길도 되었다. 우리가 아는 조선 시대의 역사를 깊숙하게 알게 되면 비극적인 사건들과 사실들이 너무나 많다는 것이다. </span></p><p><br /></p><p><span style="font-size:14pt;">필자는 탄옹 김경과 다병옹 김양선, 이 두 사람의 삶을 궤적을 깊이 있게 이해하고 알아보기 위해서는 그 당시의 정치적 환경과 배경을 알아보는 또한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정치적 사건들이 일어나게 된 배경과 환경을 파악하지 않고, 역사 속의 한 인물 만을 탐구하는 것은 알맹이 없는 진실을 알리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필자는 많은 역사적 기술을 할 수밖에 없었다. </span></p>]]></description>
	<dc:creator>이순락기자</dc:creator>
		<dc:date>Wed, 04 Jan 2023 01:26:55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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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김기훈의 칼럼] 2023년 계묘년 (癸卯年) 검은 토끼 해를 맞이하여...</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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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p><a href="http://xn--289ak2iu9buvke3bs7m0vf.kr/bbs/view_img.php?img=http%3A%2F%2Fwww.xn--289ak2iu9buvke3bs7m0vf.kr%2Fdata%2Feditor%2F2301%2F21b260458eb9b5fc18de9cd5d0505aa3_1672539702_7824.jpg" target="_blank" class="view_image"><img itemprop="image" content="http://www.xn--289ak2iu9buvke3bs7m0vf.kr/data/editor/2301/21b260458eb9b5fc18de9cd5d0505aa3_1672539702_7824.jpg" src="http://www.xn--289ak2iu9buvke3bs7m0vf.kr/data/editor/2301/21b260458eb9b5fc18de9cd5d0505aa3_1672539702_7824.jpg" alt="21b260458eb9b5fc18de9cd5d0505aa3_1672539702_7824.jpg" class="img-tag "/></a><br style="clear:both;" /><span style="font-size:14pt;">&lt;필자: 경북대 정치학박사&gt;</span></p><p><br /></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다가오는 2023년은 계묘년(癸卯年)으로 “검은 토끼의 해”이다. 2022년은 코로나 19가 괴롭히는 와중에도 대한민국의 명운을 가르는 대통령 선거가 있었다. 정치권은 </span><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밤낮없이 </span><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정치는 실종된 채, 이편 저편으로 나뉘어져 싸우는 과정을 여과 없이 국민들이 마냥 지켜봐야 하는 슬픈 시간과 공간이었다.</span></p><p><br /></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젊은이들이 이태원에서 안타깝게 죽으면서 국민 모두가 슬퍼하고 아파했던 시간과 공간이기도 했었다. 그리고 2022년은 국민들에게 경제적 어려움과 고통이 더 한층 느끼지는 2022년 임인년 (壬寅年) “검은 호랑이의 해”였다. </span></p><p><br /></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2022년에서 2023년으로 해가 바뀐다는 것은 싸움을 상징하는 호랑이는 가고, 평화롭고 다산(多産)을 상징하는 토끼가 온다는 것을 생각할 수도 있다. 토끼는 지혜와 꾀를 상징하는 동물인데, 여기에서 연유한 사자성어가 바로 교토삼굴(狡免三窟)이다.</span></p><p><br /></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교토삼굴은 꾀 많은 토끼가 굴을 세 개를 팠기 때문에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는 뜻으로, 교묘한 지혜로 위기를 피하거나 재난이 발생하기 전에 미리 준비를 해야 한다는 뜻이다.</span></p><p><br /></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이 교토삼굴의 이야기는 사마천(司馬遷)이 쓴 사기(史記)에 맹상군열전(孟嘗君列傳)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교토삼굴의 의미를 되새기는 의미에서 맹산군열전을 살펴보기로 하자.</span></p><p><br /></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풍환(馮驩)은 제(齊)나라의 재상(宰相)인 맹상군의 식객(食客)이었다. 맹상군은 왕족인 전영(田嬰)의 아들로 이름은 전문(田文)이고, 맹상군은 그의 호(號)이다. 풍환은 본래 거지였지만, 재치와 지혜가 남다른 사람이었다. 풍환은 맹상군이 식객을 좋아한다는 말을 듣고 맹산군을 무작정 찾아 간다. </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br /></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맹상군은 풍환을 3등 숙소(宿所)에 배치했다. 그러자 풍환은 고기 반찬이 없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그래서 2등 숙소로 옮겨 주었는데, 이번에는 타고 다닐 수레가 없다고 풍환은 불평·불만이었다. 그래서 맹산군은 풍환을 마지막으로 1등 숙소로 옮겨 주었다. </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br /></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그런데 풍환의 불만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살 집이 없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당시 맹상군은 설(薛)이라는 지방에 1만 호의 식읍(食邑)을 가지고 있었다. 3천 명의 식객을 부양하기 위해 식읍 주민들에게 돈놀이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맹상군의 돈을 빌려간 식읍의 주민들은 맹상군의 돈을 갚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span></p><p><br /></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맹상군은 주민들에게서 돈을 받아 올 사람이 필요했다. 이러한 고민을 알아차린 풍환은 식읍의 주민들에게 돈을 받으러 가겠다고 자청하였다. 그리고 풍환은 맹산군에게 “빚을 받고 나면 무엇을 사올까요?” 하고 물었다. 맹상군은 “무엇이든 좋소. 여기에 부족한 것을 부탁하오.”라고 대답하였다. </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br /></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풍환은 빚진 사람들에게 원금은 그대로 두고 이자만 받았다. 그리고 풍환은 설 주민들에게 “맹상군이 빚을 탕감해 주라는 명을 내렸다”고 외치면서 빚과 관계된 모든 문서를 불태웠다. 그러자 설 주민들은 모두가 기뻐하였다.</span></p><p><br /></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맹상군은 돌아 온 풍환에게 “선생은 무엇을 사오셨는가?” 하고 물었다. 이때 풍환이 말하기를 “차시풍환왈 군지부족즉은의야 이소차서위군매은의래(此時馮驩曰君之不足則恩義也以燒借書爲君賣恩義來)라고 이야기 한다.</span></p><p><br /></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풍환은 맹상군에게 당당하고 용기 있게 “당신에게 지금 부족한 것은 은혜와 의리입니다. 빚 문서를 불살라 당신을 위해 돈으로 살 수 없는 은혜와 의리를 사 가지고 왔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맹상군은 이 말에 몹시 불쾌하고 기분이 좋지 못하였다.</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br /></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 1년 후 맹상군이 제나라의 왕으로 새로 즉위한 민왕(泯王)에게 미움을 사서 재상에서 쫓겨나게 된다. 3천 명의 식객들은 모두 뿔뿔이 떠났지만, 풍환은 맹상군에게 잠시 설에 가서 살 것을 청하였고, 맹상군은 풍환의 권유를 받아 들여 설에 가게 된다. 그런데 뜻밖에도 설의 주민들이 맹상군이 나타나자 모두가 좋아하고 환호했다.</span></p><p><br /></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맹상군은 풍환에게  “선생이 전에 은혜와 의리를 샀다고 한 말 뜻을 이제야 겨우 깨달았소.”라고 하자 풍환은 “지혜로운 토끼는 구멍을 세 개를 뚫습니다.”라고 맹상군에게 이야기 한다.</span></p><p><br /></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그리고 풍환은 맹상군에게 “지금 경(卿)께서는 한 개의 굴을 뚫었을 뿐입니다. 따라서 아직 근심 없이 잠을 자고 즐길 수는 없습니다. 경을 위해 나머지 두 개의 굴도 마저 뚫겠습니다.”그래서 풍환은 위(魏)나라의 혜왕(惠王)을 설득하여 맹상군을 등용하면 부국강병(富國强兵)을 실현할 것이며, 동시에 제나라를 견제하는 할 수 있다고 이야기 하자, 위나라 혜왕은 맹상군을 부르게 된다. </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br /></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하지만, 그 때마다 풍환은 맹상군에게 위나라로 가지 말 것을 조용하고 은밀히 말했다.이러한 사실은 곧바로 제나라의 민왕의 귀에 들어갔고, 민왕은 다시 맹상군의 능력과 사람 됨을 알아보고, 사신을 보내 과거 자신의 잘못된 행동과 판단을 사과하게 된다. 맹상군은 못이기는 척하면서 다시 제나라의 재상으로 가게 되었다. </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br /></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이것은 풍환이 생각하는 토끼의 두 번째 굴이었다. 풍환은 제나라 민왕을 설득하여 설 지방에 제나라 선대의 종묘(宗廟)를 세우게 하고, 선왕(先王) 때부터 전해내려 오던 제기(祭器)를 종묘에 바치도록 하였다. 선대의 종묘가 맹상군의 영지에 있는 한 제나라 민왕의 마음이 변해도 맹상군을 함부로 대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span></p><p><br /></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풍환은 맹상군에게 “이제 세 개의 구멍을 다 팠으니, 편안히 잠을 청해도 될 것입니다”라고 말을 하였다. 이후 맹상군은 제나라의 정치적 위기 속에서도 자기의 지위가 흔들리는 경우가 없다고 한다. 이 맹상군과 풍환에게서 나온 교토삼굴은 “불안한 미래를 위해 미리 준비를 해야 한다는 말로, 완벽한 준비만이 자신에게 다가오는 불행을 막을 수 있다”는 뜻이다. </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br /></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이순신 장군이 명량해전에서 12척의 배로 330척의 왜적을 물리친 것 또한 항상 전쟁에 대한 유비무환(有備無患)적 대비 태세와 그에 맞는 군사들을 훈련 시켰기 때문이다. 기적은 그냥 이루어지지 않는다. 기적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남들이 하지 않는 특별한 노력, 그 무엇이 있어야 기적도 이루어진다. </span></p><p><br /></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산토끼 잡으려다 집토끼 놓친다.”는 말을 어떨 때 우리는 자주 하게 된다. 시대가 한 우물만 파서는 못 먹고 살고, 자신의 지위 향상도 하지 못하는 시대에 와 있다. 하지만  이것, 저것에 욕심을 너무 갖다보면, 길 없는 곳으로 빠져 허우적거릴 수 있다. 삶에서 길을 잃는 것만큼 불행한 것이 없다.</span></p><p><br /></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세상이 발전하면 발전할수록 좋은 것보다는 그 발전 뒤에 도사리고 있는 위험과 불행은 더 많다고 할 것이다. 그래서 사람은 항상 준비하고, 긴장하면서 대비하는 것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span></p><p><br /></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다가오는 2023년 검은 토끼의 해인 계묘년에는 모두가 각자의 삶에서 앞날을 대비하는 지혜로운 토끼처럼 준비와 대비한다면, 먼 훗날 보이지 않는 결실들이 각자의 눈앞에 맺어질 것이라 의심치 않는다. </span><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 </span></p><br /><br />]]></description>
	<dc:creator>이순락기자</dc:creator>
		<dc:date>Sun, 01 Jan 2023 11:22:42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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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김기훈의 칼럼] 2022년 임인년 (壬寅年) 호랑이 해를 맞이하여...</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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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p><br /></p><p><br /></p><p><a href="http://xn--289ak2iu9buvke3bs7m0vf.kr/bbs/view_img.php?img=http%3A%2F%2Fwww.xn--289ak2iu9buvke3bs7m0vf.kr%2Fdata%2Feditor%2F2112%2Fe4e43ab5100df49bf13da9960b7d5adf_1639981850_0917.jpg" target="_blank" class="view_image"><img itemprop="image" content="http://www.xn--289ak2iu9buvke3bs7m0vf.kr/data/editor/2112/e4e43ab5100df49bf13da9960b7d5adf_1639981850_0917.jpg" src="http://www.xn--289ak2iu9buvke3bs7m0vf.kr/data/editor/2112/e4e43ab5100df49bf13da9960b7d5adf_1639981850_0917.jpg" alt="e4e43ab5100df49bf13da9960b7d5adf_1639981850_0917.jpg" class="img-tag "/></a><br style="clear:both;" /><span style="font-size:12pt;">&lt;필자: 경북대 정치학박사, 현재 농부와 칼럼리스트로 활동&gt;</span></p><p><br /></p><p><span style="font-size:14pt;">2022년 임인년은 십이지신(十二支神)으로 “검은 호랑이”의 해이다. 호랑이는 단순하게 용맹하고 사납게 싸우는 것을 일반적으로 인식시킨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다가오는 2022년에는 호랑이의 용맹하고 사나운 기운이 코로나19를 하루 빨리 제압하고 종식시켰으면 하는 마음을 가져 본다.</span></p><p><br /></p><p><span style="font-size:14pt;">우리 역사에서 유독 호랑이와 관련된 전설과 설화가 많이 있다. 그리고 옛날에는 호랑이에게 사람 또는 가축이 잡혀 먹는 호환(虎患)이 많았다는 것을 심심치 않게 찾을 수 있다. 이토록 과거 많은 사람들에게 호랑이는 두려움의 대상이었다.</span></p><p><br /></p><p><span style="font-size:14pt;">그리고 한편으로는 우리 민족은 호랑이를 산신(山神)으로 생각하며 신성(神聖)시 하는 경향이 뚜렷하였다. 사찰의 가장 위쪽에 산신각(山神閣)을 찾을 때, 항상 산신령과 호랑이가 같이 있는 것을 보면 이러한 사실들을 확인할 수 있다. </span></p><p><br /></p><p><span style="font-size:14pt;">고조선의 단군신화에서도 호랑이와 곰이 등장하는 것을 보면, 우리 민족은 호랑이를 숭배하는 경향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산과 들에서 천하무적의 상징이기 때문에 그렇게 숭배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민화(民話)에서 심심치 않게 사나운 모습의 호랑이보다는 한편으로 귀여운 호랑이를 그려 호랑이와 친근한 느낌을 주는 작품들도 볼 수 있다.</span></p><p><br /></p><p><span style="font-size:14pt;">이 천하무적의 호랑이와 관계된 사자성어(四子成語)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용과 호랑이가 서로 싸운다는 뜻으로, 곧 힘이 강한 두 사람이 승부를 겨룬다는  용호상박(龍虎相搏)이 있다. 항상 호랑이가 등장하면 용이 등장하는 경향이 있는데, 또 하나가 풍수지리(風水地理)에서 이야기 하는 좌청룡 우백호(左靑龍, 右白虎)이다.</span></p><p><br /></p><p><span style="font-size:14pt;">호랑이 전설 중에 단언컨대 율곡 이이(栗谷 李珥)와 관련된 이야기가 가장 으뜸 일 것이다. 율곡은 강릉 오죽헌에서 태어났지만, 아버지 이원수의 고향이 경기도 파주 율곡리(栗谷里)라서 그의 호(號)를 율곡으로 했다. 율곡은 밤나무 골짜기라는 뜻이다.</span></p><p><span style="font-size:14pt;">​</span></p><p><span style="font-size:14pt;">어느 날 늙은 스님이 찾아 와 어린 율곡이 호랑이에게 잡혀 먹을 운을 타고 났으니 , 밤나무 천 그루를 심어라고 했다. 이 스님의 말에 따라 밤나무 천 그루를 심는다. 그런데 호랑이가 나타났을 때, 두 그루가 죽어 있었다.</span></p><p><br /></p><p><span style="font-size:14pt;">그런데 갑자기 밤나무 숲에서 "나도 밤나무" 하는 나무가 있었다. 그리고 이 나무는 옆에 있던 나무에게 "너도 밤나무"잖아 해서 천 그루의 밤나무를 채워 율곡이 호랑이에게 화(禍)를 당하지 않았다는 전설을 대다수가 알고 있다.</span></p><p><br /></p><p><span style="font-size:14pt;">우리나라 3대 민속 마을인 성주(星州) 한개마을은 유네스코에 지정될 만큼 역사와 문화가 잘 보존된 우리나라에서 손꼽히는 마을이다. 이 마을을 반석 위에 올린 사람이 다름 아닌 응와 이원조(凝窩 李源祚)선생이다.</span></p><p><br /></p><p><span style="font-size:14pt;">이원조선생이 18세의 나이로 과거 시험을 보러 충청도 작천의 어느 주막집에 잠을 자고 있는데, 꿈속에 호랑이가 이원조를 잡아먹으려고 주막집 앞에 있는 꿈을 꾼다. 그런데 멀지 않은 곳에서 호랑이를 잡는 포수도 꿈을 꾼다. </span></p><p><br /></p><p><span style="font-size:14pt;">포수의 꿈에 신령이 나타나 “이원조는 장차 이 나라의 큰 재목과 인재이니 빨리 구해라”라고 하니, 포수는 잠에서 깨어 이원조가 머물고 있는 주막집 앞을 가보니 실제 호랑이가 있어 총으로 호랑이를 잡았다는 것이다. </span></p><p><br /></p><p><span style="font-size:14pt;">우리는 율곡 이이와 응와 이원조의 호랑이와 관련된 전설에서 알 수 있듯이 나라의 큰 인재는 절대적인 호랑이도 잡아먹지 못한다는 것을 설화적으로 만들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이런 이야기에서 객관적인 사실은 조선시대 당시 호랑이의 피해가 심각했다는 것을 알 수 있겠다.</span></p><p><br /></p><p><span style="font-size:14pt;">2022년에는 우리 대한민국의 대통령과 각종 지방자치 단체장을 비롯하여 선출직 공무원을 선출하는 중요한 해이다. 대권주자들이 2022년에 선출하는 대통령직을 두고 치열하게 상대편을 공격하며 싸우고 있다. 정말 용호상박(龍虎相搏)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span></p><p><br /></p><p><span style="font-size:14pt;">사나운 호랑이가 숲에서 나온다는 맹호출림(猛虎出林)처럼 2022년에는 대통령을 비롯하여 각지에서 많은 출마자들이 맹렬하고 빠른 기세와 위엄으로 선거판에 등장할 것이다. 또한 그들은 국민과 시민을 위하여 저마다 준비된 인물이라고 홍보하고 자랑할 것이 분명하다.  </span></p><p><br /></p><p><span style="font-size:14pt;">여기서 호랑이와 관계된 공자의 정치사상을 한번 살펴보는 것은 정치에 대한 명확한 의미와 함축된 개념을 확인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태산문정(泰山問政)은 “태산에서 정치를 묻다”인데, 백성의 고달픔을 살피는 것이 정치의 근본이라고 공자는 설명했다.</span></p><p><br /></p><p><a href="http://xn--289ak2iu9buvke3bs7m0vf.kr/bbs/view_img.php?img=http%3A%2F%2Fwww.xn--289ak2iu9buvke3bs7m0vf.kr%2Fdata%2Feditor%2F2112%2Fe4e43ab5100df49bf13da9960b7d5adf_1639981995_447.jpg" target="_blank" class="view_image"><img src="http://www.xn--289ak2iu9buvke3bs7m0vf.kr/data/editor/2112/e4e43ab5100df49bf13da9960b7d5adf_1639981995_447.jpg" alt="e4e43ab5100df49bf13da9960b7d5adf_1639981995_447.jpg" class="img-tag "/></a><br style="clear:both;" /><span style="font-size:12pt;">&lt;공자의 "태산에서 정치를 묻다", 태산문정(泰山問政)&gt;</span></p><p><br /></p><p><span style="font-size:14pt;">공자(孔子)가 제나라로 가기 위해 태산(泰山)을 지나고 있는데, 어떤 여인이 슬피 울고 있었다. 공자는 제자 자로(子路)에게 슬피 우는 사연을 물어 보라고 한다. 여인은 자로에게 이 지방에서 호랑이에게 시아버지가 물려 죽고, 남편과 아들마저 잡혀 먹혔다고 했다.</span></p><p><br /></p><p><span style="font-size:14pt;">자로는 이사를 가지 않고, 왜 여기서 사느냐고 묻는다. 여인은 “여기는 가혹한 세금이 없기 때문에 호랑이에게 물려 죽어도 여기서 사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한다. 자로가 공자에게 내용을 전하자, 공자는 크게 탄식하며 “가정맹어호(苛政猛於虎) 가혹한 정치는 호랑이보다 더 무섭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가르친다.</span></p><p><br /></p><p><span style="font-size:14pt;">혹독하고 가혹한 정치에 시달리는 백성들의 슬픔과 비애를 공자는 </span><span style="font-size:18.66px;">가정맹어호(苛政猛於虎)로 </span><span style="font-size:14pt;">말했다. 공자가 말한 "호랑이보다 더 무서운 정치"가 오늘날에도 재현되고 있는 것이 아닌지 생각해 볼 문제이다. </span></p><p><span style="font-size:14pt;">​</span></p><p><span style="font-size:14pt;">그리고 정치는 왜 항상 국민들로부터 외면 받고, 혐오의 대상이 되었는지 모두 각자가 한번쯤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정치가 하루 아침에 나아질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정치인들이 국민이 호랑이라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해서는 적극적인 의사표시와 관심을 가져야만 지금의 정치가 조금이라도 나아질 수 있을 것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span></p><p><br /></p><br />]]></description>
	<dc:creator>이순락기자</dc:creator>
		<dc:date>Mon, 20 Dec 2021 15:36:40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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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김기훈의 역사와 인물】개혁군주였던 정조(正祖)의 죽음과 인동장씨(仁同張氏)사람들...</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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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a href="http://xn--289ak2iu9buvke3bs7m0vf.kr/bbs/view_img.php?img=http%3A%2F%2Fwww.xn--289ak2iu9buvke3bs7m0vf.kr%2Fdata%2Feditor%2F2112%2F2cce0ffeb2f261f87a34ee90108a8a13_1638734937_6863.jpg" target="_blank" class="view_image"><img itemprop="image" content="http://www.xn--289ak2iu9buvke3bs7m0vf.kr/data/editor/2112/2cce0ffeb2f261f87a34ee90108a8a13_1638734937_6863.jpg" src="http://www.xn--289ak2iu9buvke3bs7m0vf.kr/data/editor/2112/2cce0ffeb2f261f87a34ee90108a8a13_1638734937_6863.jpg" alt="2cce0ffeb2f261f87a34ee90108a8a13_1638734937_6863.jpg" class="img-tag "/></a><br style="clear:both;" /><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2pt;">&lt;필자: 경북대 정치학 박사, 현재 농부와 칼럼리스트로 활동 중&gt;</span></p><p><br style="clear:both;" /></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1800년 6월 28일 개혁 군주 정조 대왕은 죽음을 맞이한다. 지금까지 정조의 죽음에 대해 설득력을 얻고 있는 것이 정조 대왕 독살설이다. </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br /></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1776년 할아버지 영조가 사망하면서 그 해 </span><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정조는 비로소 조선의 왕에 즉위 한다. 7월에 정조 암살 기도가 발생한다. 위로는 정순 왕후부터 아래로는 궁궐을 청소하는 사람까지 관여 된 사건이었다.</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br /></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   <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a href="http://xn--289ak2iu9buvke3bs7m0vf.kr/bbs/view_img.php?img=%2Fdata%2Feditor%2F2112%2Facca495443ccdc3de075322dd960edb6_1638729253_2296.jpg" target="_blank" class="view_image"><img src="/data/editor/2112/acca495443ccdc3de075322dd960edb6_1638729253_2296.jpg" alt="acca495443ccdc3de075322dd960edb6_1638729253_2296.jpg" class="img-tag "/></a></span></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2pt;">&lt;호학(好學)군주이며, 개혁 군주였던 정조 대왕 어진(御眞)&gt;</span></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br style="clear:both;" /></span></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다행히 정조 암살 기도 사건은 암살 기도를 실행한 그 시간 정조가 밤늦도록 잠을 자지 않고, 책을 보고 있었기 때문에 노론(</span><span style="letter-spacing:-.2px;font-family:'-apple-system', BlinkMacSystemFont, 'HelveticaNeue-Regular', 'AppleSDGothicNeo-Regular', 'Malgun Gothic', '맑은 고딕', dotum, '돋움', sans-serif;font-size:12px;background-color:rgb(255,255,255);"><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老論</span>)</span><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이 주도한 암살 기도는 실패한다. </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br /></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암살 계획은 정조가 머물고 있는 존현각 지붕을 뚫고 자고 있는 정조를 암살하는 것이었다. 정조는 자기 주변의 모든 것을 의심하기 시작하면서 거처를 창덕궁으로 옮긴다.</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br /></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이후에도 궁궐 담장을 넘으려는 괴한을 발견하는데, 천민 출신 전흥문(田興文) 체포되고, 정조 암살 기도 사건의 전말이 드러난다. 비상 계엄 상황에서 다시 일어난 대담한 암살 기도 사건이었다. </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정조의 아버지 사도 세자가 노론과 영조에 의해 죽은 원인에는 “미쳤다, 사람을 죽였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겠지만, 영조를 즉위 시킨 노론 세력이 사도 세자가 왕위에 오를 경우 남인(南人)과 소론(少論)을 등용할지도 모른다는 의심 때문에 노론에 의해 죽었던 것이다.</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br /></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사도 세자를 죽이는 명을 내리는 것은 아버지 영조였지만, 노론과 정치적 운명을 같이 하지 않으면 본인 뿐만 아니라 훗날 어린 세손(정조)이 왕위에 오르는 것조차 불가능해진다는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br /></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그래서 영조는 아들인 사도 세자를 뒤주에 넣어 죽인다. 권력은 냉정하다 못해 항상 잔인한 면을 가진 것을 역사에서 흔하게 볼 수 있다. 영조는 불안한 아들보다는 손자를 선택한 것이다.</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br /></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a href="http://xn--289ak2iu9buvke3bs7m0vf.kr/bbs/view_img.php?img=%2Fdata%2Feditor%2F2112%2Facca495443ccdc3de075322dd960edb6_1638729444_0479.jpg" target="_blank" class="view_image"><img src="/data/editor/2112/acca495443ccdc3de075322dd960edb6_1638729444_0479.jpg" alt="acca495443ccdc3de075322dd960edb6_1638729444_0479.jpg" class="img-tag " style="width:570px;"/></a></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2pt;">&lt;무수리 최씨의 아들로 태어나 조선 21대, 52년간 조선을 통치한 영조&gt;</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br style="clear:both;" /></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사도 세자가 죽는 과정에서 노론은 시파(時派)와 벽파(辟派)로 분열을 한다. 사도 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자, 그 죽음을 동정하고 세자의 아들인 정조의 즉위까지 막지는 않겠다는 것이 노론 시파였다. </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그러나 이와 반대로 사도 세자는 마땅히 죽어야 하며, 그 아들 세손 마저 죽이거나 왕위에 오르지 못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 노론 벽파의 입장이었다.</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br /></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아이러니하게도 노론 시파와 벽파의 본거지는 정조의 외가였다. 정조의 외할아바지 홍봉한(洪鳳漢)은 시파, 작은 외할아버지 홍인한(洪麟漢)은 벽파였다. 노론은 사도 세자를 죽인 이후 세손인 정조를 제거하자는 당론을 정한다. </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br /></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a href="http://xn--289ak2iu9buvke3bs7m0vf.kr/bbs/view_img.php?img=%2Fdata%2Feditor%2F2112%2Facca495443ccdc3de075322dd960edb6_1638729639_9119.jpg" target="_blank" class="view_image"><img src="/data/editor/2112/acca495443ccdc3de075322dd960edb6_1638729639_9119.jpg" alt="acca495443ccdc3de075322dd960edb6_1638729639_9119.jpg" class="img-tag " style="width:374px;"/></a></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2pt;">&lt;정조의 외할아버지이자 노론 시파의 우두머리 홍봉한&gt;</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br style="clear:both;" /></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죄인의 아들은 임금이 될 수 없다”(罪人之子 不爲君主) “죄인지자, 불위군주”를 조직적으로 퍼뜨리며 정조를 제거하거나 왕위에 오르는 것을 반대 했다.</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br /></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다시 노론은 정조의 즉위를 지지하는 부홍파(扶洪派), 정조의 즉위를 반대하는 정순왕후와 경주김씨 가문은 공홍파(攻洪派)로 나뉘어져 두 외척간에 치열하게 대립한다. </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br /></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홍봉한을 중심으로 하는 풍산홍씨(豐山洪氏)가문과 정순왕후를 중심으로 하는 경주김씨(慶州金氏) 가문이 노론 안에서도 주도권을 놓고 치열하게 싸웠다.</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br /></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이들은 사도 세자를 죽일 때는 한 배를 탔다가, 사도 세자의 장인인 홍봉한이 사도 세자의 죽음을 동정하고 시파로 돌아서자, 정순왕후의 오빠인 김구주(金龜柱)가 곧바로 홍봉한을 공격하기 시작한다. </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br /></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노론은 부홍파와 공홍파로 나뉘어져 치열하게 왕위 계승 문제를 놓고 싸우며 대립한다. 권력은 아버지와 아들도 나누어 가질 수 없는 속성처럼 같은 노론이지만, 한치의 양보도 없이 주도권 다툼을 하게 된다. </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br /></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나이가 많고 몸이 쇠약해진 영조가 세손인 정조에게 왕위를 물려 주기 위해 대리청정을 시키려 하자, 노론 벽파와 공홍파들은 영조에게 “동궁은 노론이나 소론을 알 필요가 없고, 이조판서나 병조판서를 누가 할 수 있는지 알 필요가 없으며, 국사나 조사는 더욱 알 필요가 없습니다.”라고 말한다.</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br /></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이것은 세손이 세 가지 일을 알 필요가 없다는 삼불가지론(三不可知論)이다. 그러나 영조는 1775년 12월 8일 세손인 정조에게 대리청정을 강제로 시행하게 한다. 그러나 22일 신하들 중 대리청정 조참(朝參)에 참여한 신하는 한 명도 없었다. </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이것은 신하들이 세손인 정조를 자기들의 왕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했다. 영조는 곧바로 세손 정조에게 군사권(軍事權)을 넘긴다. 권력적 기반이 약한 정조가 군권마저 노론에게 빼앗긴다면 정조의 운명도 장담할 수 없는 불가피한 조처였다.</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br /></span></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영조와 정조는 신하들에게 불만을 표현하지는 못하고, 할아버지와 손자는 마음속으로 피눈물을 흘려야 했다. 임금을 능멸해도 화를 내지 못하는 왕이 되어 있었다. 왕이 신하의 눈치를 봐야 하는 시대였던 것이다.</span></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span></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연산군을 몰아내는 중종 반정 이후부터 택군(擇君)의 시대가 진행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한마디로 신하가 군주를 택하는 “택군”이었던 것이다. 왕권은 살아지고  바야흐로 신하가 왕을 선택하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었다.</span></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1776년 3월 3일 영조가 재위 52년을 기록하며 죽는다. 영조가 승하한지 5일 후 세손은 왕위에 오른다. 선왕인 영조의 시신이 있는 빈전 밖으로 정조는 대신들을 부르라 명을 내린다. </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br /></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여기에서 정조는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라고 정조가 왕위에 즉위 하는데 반대했던 세력들인 노론에게 선전포고를 했다. 정조도 참을 만큼 참았던 것을 대외적으로 공표했다.</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br /></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사도 세자 죽인 세력과 자기의 왕위 즉위를 반대한 세력은 같은 세력이라 정조는 생각했다. 정조의 공격은 사도 세자를 죽인 것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자신의 즉위에 반대한 것에 초점을 맞추어 노론에 공격 계획을 세웠다. </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br /></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정조의 즉위를 적극적으로 반대했던 외가의 홍인한 뿐만 아니라 노론의 주도적 인물들을 1차적으로 유배형을 단행한다. 정치에서 즉위하기 전까지는 어떻게든 참았지만, 왕이 된 이상 더이상 참지 않겠다는 것을 의미했다.</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 </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정조에게 노론과 벽파 공홍파가 반격을 준비하는데 바로 그것이 정조를 암살 기도 사건이었다. 사도 세자가 죽은 이후 조정은 노론 일당체제였다. 유일한 남인은 채제공(蔡濟恭)이었다. </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br /></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a href="http://xn--289ak2iu9buvke3bs7m0vf.kr/bbs/view_img.php?img=%2Fdata%2Feditor%2F2112%2Facca495443ccdc3de075322dd960edb6_1638729786_8662.jpg" target="_blank" class="view_image"><img src="/data/editor/2112/acca495443ccdc3de075322dd960edb6_1638729786_8662.jpg" alt="acca495443ccdc3de075322dd960edb6_1638729786_8662.jpg" class="img-tag " style="width:455px;"/></a></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2pt;">&lt;영조·정조때 유일하게 남인으로 재상까지 오른 채제공&gt;</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br style="clear:both;" /></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채제공은 사도 세자의 신원을 회복할 것을 주장하고 정조의 뜻을 추진한 핵심적인 인물이다. 그래서 정조는 채제공을 우의정(右議政)에 발탁하고 끝임없는 신뢰를 보낸다.</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br /></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채제공을 우의정에 앉게 하자, 노론의 저항은 정조의 전교를 거부하고, 왕명의 집행을 거부했다.</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정조는 신하들에게 “오늘날 조정에 임금이 있는가?, 신하가 있는가?, 윤리가 있는가?, 강상이 있는가, 국법이 있는가?, 기강이 있는가?”라며 대노했다.</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br /></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정조의 정치 개혁의 첫 순서로 안동 도산서원에서 별시(別試)를 거행한다. 이것은 공개적으로 영남 남인들을 등용하겠다면 노론에 대한 대외적 선전포고였다.</span> </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br /></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a href="http://xn--289ak2iu9buvke3bs7m0vf.kr/bbs/view_img.php?img=%2Fdata%2Feditor%2F2112%2Facca495443ccdc3de075322dd960edb6_1638730022_241.jpg" target="_blank" class="view_image"><img src="/data/editor/2112/acca495443ccdc3de075322dd960edb6_1638730022_241.jpg" alt="acca495443ccdc3de075322dd960edb6_1638730022_241.jpg" class="img-tag "/></a></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2pt;">&lt;도산서원 맞은 편 낙동강 상류 섬에서 별시가 진행되었다&gt;</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br style="clear:both;" /></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영조 때 이인좌(李麟佐)의 난 이후 65년 만에 영남 남인들에게 과거길이 열었고, 정조는 답안지를 직접 채점 했다. <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이 별시에서 상주(尙州) 출신의 강세백(姜世白)과 안동의 김희락(金熙洛)이 장원으로 선발되었다. </span></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span></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1795년 정조는 채제공을 좌의정, 이가환(李家煥)을 공조판서, 정약용(丁若鏞) 우부승지에 임명한다. 철저하게 노론을 견제하기 위해 남인들을 기용하는 전략을 강력하게 실현시킨다.</span></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br /></span></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그리고 정조는 서자(庶子) 출신이지만, 그들의 학문과 지식이 당대 최고였음에도 출신 성분 때문에 벼슬 길에 나가지 못하는 서자들에게 「서류소통절목(庶類疏通節目)」을 만들어 신분상 천대를 받던 서자들에게 벼슬 길을 열었다.</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br /></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 <a href="http://xn--289ak2iu9buvke3bs7m0vf.kr/bbs/view_img.php?img=%2Fdata%2Feditor%2F2112%2Facca495443ccdc3de075322dd960edb6_1638730160_9877.jpg" target="_blank" class="view_image"><img src="/data/editor/2112/acca495443ccdc3de075322dd960edb6_1638730160_9877.jpg" alt="acca495443ccdc3de075322dd960edb6_1638730160_9877.jpg" class="img-tag "/></a></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2pt;">&lt;정조를 만나면서 천재성이 세상 밖으로 나오기 시작한 다산 정약용&gt;</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br style="clear:both;" /></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당대 천재들이지만 서자 출신이라는 꼬리표 때문에 벼슬 길에 나가지 못한 이덕무(李德懋), 박제가(朴齊家), 유득공(柳得恭), 서이수(徐理修) 등 4명을 규장각 검서관으로 특채된다. </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br /></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이로써 정조는 노론 일당을 분쇄하기 위해 다당제와 사상·인적 다원화를 추구한다. 노론 일당체제에 대한 다원화는 여러 정책으로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노론은 상당한 위기감을 느끼기 시작한다.</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br /></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이러한 정조의 개혁 정치는 그동안 빛을 보지 못한 구성원들에게 한줄기 희망을 갖게 했었다. 그리고 이러한 영향으로 조선후기 실학(實學)이 싹트기 시작하고 번성하게 된다. </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br /></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정조가 이러한 일들을 결정하고 단행한  궁긍적인 목표는 조선을 정상적인 왕조 국가로 만드는 것이었다. 그전까지는 왕조 국가가 아닌 비정상적인 신하들이 좌지우지 하는 국가였다.</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br /></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1800년 정조(24년) 5월 30일 정조는 오회연교(五晦筵敎)를 내린다. 오회연교는 영조 이후 중요 시기마다 있었던 군신(</span><span style="letter-spacing:0pt;font-family:'굴림', Gulim;">君</span><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臣)</span>간 정치 의리에 있어서 의미 및 변화 말하는 것이었다. </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br /></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당파의 사적(私的) 의리를 관철시키기 위해 군주에게 맞서는 일부 신료들에게 경고하는 동시에 군주가 천명하는 정당한 의리에 적극 응하라는 것이었다.</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br /></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정조의 이러한 일련의 조치들은 사도 세자를 죽이고, 자신의 대리청정과 즉위를 방해하고, 심지어 자객을 보내 암살하려고 했던 노론 벽파는 긴장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br /></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정조는 반성하지 않고 옳은 길을 걷지 않으면 특단의 조치를 취하겠다는 경고를 강력하게 노론에게 보냈던 것이다. 정조의 오회연교로 노론은 궁지에 몰리고, 위기감을 느끼기 시작했다.</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br /></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그러나 정조는 오회연교를 발표하고, 6월 28일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만다. 이때 정조에게 약간의 종기가 있었는데, 노론 영수 심환지(沈煥之)의 측근이 <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어의(</span></span><span style="letter-spacing:0pt;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御</span><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醫</span><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span> 심인이었다. </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br /></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심인은 수은이 들어간 연훈방(烟薰方)을 2번 사용했다. 이것은 지금으로 보면 수은을 사용하는 극약처방이었다. <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곧바로 홍문관·사간원·사헌부인 삼사(三司)는 정순왕후와 심환지가 비호하던 어의 심인을 흉적(凶賊)이라며 공격한다. </span></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span></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대사간 유한녕(俞漢寧)은 순조가 즉위하는 7월 13일 어의 심인을 역의(逆醫), 심인을 국문하여 그 배후를 밝히는 동시에 관련자들을 국법에 따라 역적 죄로 다스려야 한고 강도 높게 주장한다. 대사간은 지금으로 말하면 검찰총장이다.<br /></span></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다산 정약용 역시 정조가 죽던 6월 28일 “시상(時相: 심환지)이 역의(逆醫) 심인을 천거하여 독약을 올리게 시켰다.”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을 봤을 때, 정조가 독살되었다는 것에 설득력을 얻기 시작한다.<br /><br /><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영조의 계비 정순왕후는 죽음을 헤매는 정조와 함께 있겠다고 신하를 물리친 상태에서 정조는 죽고 말았다. 그리고 정순왕후는 정조가 완전히 죽지도 않았는데, 인사권을 사용하여 윤행임(尹行恁)을 승정원 도승지로 임명한다. </span></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br /></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정조의 죽음은 곧 노론 벽파와 정순왕후의 부활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앞으로 심각한 권력 투쟁이 왕권과 신권(</span><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8.66px;">臣</span><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權)사이에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정조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순조이후부터 국가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나라로 간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것은 곧 안동김씨 세도정치 60년이 시작되는 것을 의미했다.  </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 </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그리고 정조의 죽음은 한마디로 조선의 국권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의미했다. 정조는 조선 최고의 부대인 장용영(壯勇營)을 설치하고, 무과 2000명을 합격시켜 호위와 국방에 만전을 기하고 왕권 강화를 실현시켰다. </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정조가 죽은 이후 심환지와 정순왕후는 곧바로 장용영을 혁파해 버린다. 이 장용영 혁파는 국력을 잃게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장용영 혁파는 100년 뒤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는 출발점이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노론의 심환지와 정순왕후는 조선의 모든 것을 과거로 회귀하도록 하였다.</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br /></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호학군주이며, 개혁군주인 정조가 더 오래 살았다면, 조선의 운명은 외세에 마구잡이로 짓밟히는 그런 역사의 결과는 초래되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된다. 적어도 어느 정도의 완충적으로 외세를 수용할 수 있었을 것이다.</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br /></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 <a href="http://xn--289ak2iu9buvke3bs7m0vf.kr/bbs/view_img.php?img=%2Fdata%2Feditor%2F2112%2Facca495443ccdc3de075322dd960edb6_1638730446_0825.jpg" target="_blank" class="view_image"><img src="/data/editor/2112/acca495443ccdc3de075322dd960edb6_1638730446_0825.jpg" alt="acca495443ccdc3de075322dd960edb6_1638730446_0825.jpg" class="img-tag " style="width:526px;"/></a><br style="clear:both;" /><span style="font-size:12pt;">&lt;조선 최고의 무과급제자 2000명으로 만들어진 조선 최고의 부대 장용영&gt;</span> </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br /></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그러나 시중에서 심환지와 정순왕후가 어의 심인을 적극적으로 변호하면서 좋지 못한 소문이 들끓자 정순왕후는 독단적으로 심인을 유배 보내기로 한다.</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br /></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그러나 여론이 더욱 악화되자 정순왕후는 7월 20일 “인심의 분노는 막기 어려워서 물정이 점점 격렬하여지니 따르지 않을 수가 없다”는 전교를 내려, 어의 심인을 8월 10일 사형시켰다. <br /><br />그러나 <a href="http://xn--289ak2iu9buvke3bs7m0vf.kr/bbs/view_img.php?img=http%3A%2F%2Flinkback.hani.co.kr%2Fimages%2Fonebyone.gif%3Faction_id%3D327e20cd9f13006bbefbda98252e07d" target="_blank" class="view_image"><img src="http://linkback.hani.co.kr/images/onebyone.gif?action_id=327e20cd9f13006bbefbda98252e07d" alt="onebyone.gif?action_id=327e20cd9f13006bbefbda98252e07d" class="img-tag "/></a>신하들이 국문(鞫問)할 것을 요청하자, 이것을 묵살하고 어의 심인을 사형시킨다. 국문도 없이 정순왕후가 갑작스럽게 어의 심인 처형하자, 신하들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정조가 독살되었다고 믿기 시작했다. </span><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심인의 처형은 정조 독살설이 전국적으로 유포되는 기폭제가 되었다.</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8월 15일에 경상도 인동부(仁同府), 인동의 장시경(張時景) 3형제가 서울로 진격하여 노론 벽파 세력을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하려 했다는 조작 사건이 일어난다. 이를 인동작변(仁同作變) 사건이다.</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br /></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 <a href="http://xn--289ak2iu9buvke3bs7m0vf.kr/bbs/view_img.php?img=%2Fdata%2Feditor%2F2112%2Facca495443ccdc3de075322dd960edb6_1638730551_1571.jpg" target="_blank" class="view_image"><img src="/data/editor/2112/acca495443ccdc3de075322dd960edb6_1638730551_1571.jpg" alt="acca495443ccdc3de075322dd960edb6_1638730551_1571.jpg" class="img-tag " style="width:427px;"/></a></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2pt;">&lt;대동여지도에서 인동도호부, 지금의 구미 인동&gt;</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 <br style="clear:both;" /></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정조가 갑작스럽게 승하했는데, 인동부사였던 노론 벽파 출신인 이갑회(李甲會)는 슬퍼하는 기색은 하나도 없이 풍악을 울리면서 아버지의 생일 상을 마련한다는 소식을 듣고 분개하던 장윤혁(張胤爀)이 이갑회의 초청을 거절한다. </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br /></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이갑회는 장윤혁을 괘심하게 여겨 추석날 장윤혁의 집에 소머리를 던져 놓고 임금이 승하했는데, 소를 도축하였다는 혐의로 장윤혁의 가노(家奴)를 구금한다. 그리고 이 사태로 장윤혁의 아들인 장시경(張時景)·장현경(張玄慶)·장시호(張時皥) 3형제와 인동장씨 일가들이 인동부 군졸들과 충돌하게 된다.</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br /></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이갑회는 장씨 3형제를 정조의 독살설에 연결시키면서 장씨일가가 관아를 습격하여 무기와 군량을 탈취한 후 서울로 진격하려고 하려 한다는 역모 혐의로 몰아가기 시작했다. 곧바로 이갑회는 경상감사 김이영(金履永)에게 장씨 형제들을 모반을 일으킨다고 보고 했다.</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 </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모반을 일으킬 힘도 없는 장시경 형제에게 인동부사 이갑회는 모반을 일으키려 했다는 역적죄를 씌우자, 장시경 형제는 천생산으로 올라가 낙수암에서 뛰어 내려 자살을 선택한다. </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경상감사 김이영은 8월 29일 조정에 이 사건을 보고하게 되고, 조정에서는 모반 협의를 조사하기 위해 안핵사(按覈使)로 이서구(李書九)가 파견된다. 노론에서 파견한 안핵사는 남인인 인동장씨에게 조금의 용서도 하지 않는 것은 당연했다.</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br /></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a href="http://xn--289ak2iu9buvke3bs7m0vf.kr/bbs/view_img.php?img=%2Fdata%2Feditor%2F2112%2Facca495443ccdc3de075322dd960edb6_1638730712_7122.jpg" target="_blank" class="view_image"><img src="/data/editor/2112/acca495443ccdc3de075322dd960edb6_1638730712_7122.jpg" alt="acca495443ccdc3de075322dd960edb6_1638730712_7122.jpg" class="img-tag "/></a></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2pt;">&lt;장시경 3형제가 억울한 역모사건의 누명을 쓰고 자살한 천생산&gt;</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br style="clear:both;" /></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이 사건으로 인해 장씨 일가(張氏一家)에게 대대적이고 무차별적이며 혹독한 처벌이 이어졌다. 인동부(仁同府)에서 인동현(仁同縣)으로 강등되어진다. </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자살을 선택한 장씨 형제들 중 장시호가 우연하게 살아남게 된다. 장시호외 2명은 서울로 압송되어 국문한 후, 노론의 영수 심환지는 장시호를 다시 경상도로 보내어 공개적으로 처형할 것을 명령한다.</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 </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10년이 흐른 후, 장윤종·장윤문의 아들 형제, 장시호의 4촌들은 석방되어 인동으로 돌아왔다. 이 일련의 과정과 상황에서 중앙 뿐만 아니라 지방에서까지 노론은 남인을 철저하게 탄압하고 가혹하게 처리했던 것이다. </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br /></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이 사건으로 인해 인동장씨 집안이 풍비박살이 났다. 장시호의 부인에 대한 애절하고 절박한 이야기가 전해오는데, 내용은 이러하다. 장시호의 배씨(裵氏) 부인은 장석규(張錫奎)를 임신하고 있었다.</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 </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장시호의 남겨진 부인 배씨와 한 달도 채 안된 아들, 그리고 딸은 전라도 강진(康津)의 신지도로 유배되었다. 배씨 부인은 그 외단 섬에서 바느질 품을 팔고, 밤에는 불을 밝혀 새벽녘에 이르도록 일을 했다. 그렇게 일을 하면서 배씨 부인은 절대로 남편에 대한 예의로 상복(喪服) 벗지 않았다.</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br /></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유배 온 부인을 관속(官屬)들이 부인과 17세의 딸을 겁탈하려 하자, 부인과 딸은 하염없는 눈물을 흘리며 바다에 빠져 자결한다. 마을 사람들이“간밤에 농짝 같은 큰 별이 앞바다에 떨어지더니 그 때가 배씨 모녀가 물에 빠진 시간이다.”라고 했다. </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사흘 만에 나타난 배씨 모녀 시체는 서로 껴안은 채 떠올라 마을 사람들이 슬퍼하며 장사 지냈다고 한다. 이때 장시호의 아들 장석규의 나이 9살이었다. </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span></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전라도 강진 지역에는 배씨 부인 모녀가 죽은 때만 되면 폭풍우가 일어 배가 오갈 수 없고, 극심한 가뭄이 찾아와 흉년이 된다는 전설이 오늘날까지 전해 오고 있다. </span></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span></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그런데 어머니와 누나가 죽었음에도 슬퍼할 겨를도 없이 장석규는 혼자서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했다. 그래야 가족들의 복수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span></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br /></span></span></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장석규는 글을 할 줄 알아야 복수를 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역적의 죄인이라고 아무도 글을 가르쳐 주지 않았다. 장석규는 공부하는 문제를 혼자서 하지 않을 수 없었다.</span></span></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span></span></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그러나 장석규는 악착같이 혼자서 독학으로 글을 배워 시간이 흐른 뒤 경전과 역사에 통달하게 되었다. <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장석규는 부모의 원수를 갚기 위해 이불을 깔지 않고, 고기를 먹지 않으며 복수를 위해 모든 것을 아끼고 절약했다. </span></span></span></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span></span></span></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그리고 글을 배우고 익힌 댓가로 양반집 딸인 차씨(車氏) 부인과 결혼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아들 기원(琪遠) 낳자 장석규는 “내 발이 이 섬을 떠나지 못해 누명을 씻을 길이 없더니, 이제야 네가 태어나 내 소원을 풀어 주겠구나.”하며 매우 기뻐했다.</span></span></span></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 </span></span></span></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장석규는 아들 기원이 15살이 되자, 기원을 서울로 보낸다. 이유는 임금이 행차하는 곳에 나가 엎드려 억울함과 무죄를 아뢰라는 것이 그때까지만 해도 유일한 방법이었다. </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br /></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장석규의 안타까운 사연을 알게 된 인동장씨 참봉 장석봉(張錫鳳)은 철종(哲宗)의 장인이자, 권력실세였던 안동김씨(安東金氏) 김문근(金汶根)에게 그간의 경위와 사연을 보고 하게 된다.</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br /></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a href="http://xn--289ak2iu9buvke3bs7m0vf.kr/bbs/view_img.php?img=%2Fdata%2Feditor%2F2112%2Facca495443ccdc3de075322dd960edb6_1638731053_2916.jpg" target="_blank" class="view_image"><img src="/data/editor/2112/acca495443ccdc3de075322dd960edb6_1638731053_2916.jpg" alt="acca495443ccdc3de075322dd960edb6_1638731053_2916.jpg" class="img-tag "/></a></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2pt;">&lt;세도정치의 주역으로 철종의 장인인 김문근의 묘비&gt;</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br style="clear:both;" /></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절대권력을 휘두르던 김문근은 흔쾌히 철종에게 보고하여, 장시호의 누명이 벗겨지게 한다. 장시호의<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 누명이 벗겨지자, 항상 혹독하게 살던 </span></span><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8.66px;">1861년 3월</span><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 병을 얻어 곧 죽게 되었다. </span></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br /></span></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그런데 차씨부인이 손가락을 끊어 피를 입에 넣으려 하자, 장석규는 “남자는 부인의 손가락을 끊게 하지 않는다오.”하며 죽는다. 어떻게 보면 장석규는 부모님의 원한과 신원회복을 위해 어떻게든 살았던 것이다.</span></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br /></span></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우리는 중·고등학교를 다닐 때 역사 시간에 조선시대 영조(英祖)와 그의 손자인 정조(正祖) 때는 인재를 고루 등용하는 탕평책(蕩平策)을 펼쳤다고 배웠다. </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br /></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조금만 시간을 할애하여 영조·정조 시기를 공부한다면 기존의 역사에서 배웠던 것과는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과연 우리가 배우고 알고 있는 역사적 진실들이 옳은가? 한번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 </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왜 그러면 역사 시간에 그렇게 배우고 가르쳤는가? 그것은 필자가 추측하건데 조선 중기 이후부터 조선후기 그리고 일제 강점기까지 당쟁에서 승리한 서인 노론(西人 老論) 세력들이 경제적인 부(富)와 정치권력을 독식하고 장악했기 때문이다. </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span></span></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조선 시대에는 노론으로, 일제 시대에는 친일을 하면서 노론의 후예와 자손들은 기득권을 계속 유지할 수 있었다. 이들은 1945년 해방된 한반도에 등장한 미군정(美軍政)의 후원을 받으며, 1948년 정부 수립에 까지 참여한다. </span></span></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br /></span></span></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항상 기득권을 누리던 서인 노론의 후손과 자손들은 대한민국의 정치·법·교육·문화의 독점적 지위를 차지했다. 자연스럽게 조상들을 미화하고 잘 못된 점을 감추어야 했다.</span></span></span></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span></span></span><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조선시대에는 왕이 아닌 서인 노론이 조선 지배했고, 친일을 한 행위들을 어떻게든 자연스럽게 숨겨야 했다. 이러한 것들이 자라나는 학생들의 교과서로 침투되어 탕평책을 기술되었던 것이다. </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br /></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국어 교과서에도 극심한 당쟁의 와중에 등장하는 편향된 그 시대 문학 작품들이 역사적 배경과 진실도 가려진 채 책에 실려 배우게 되었던 것이다.</span></p><p><span style="font-size:14pt;"><br /></span></p><p><span style="font-size:14pt;">1905년 나라를 일본에 팔아먹는 을사늑약에 가담한 을사오적(乙巳五賊)들은 박제순(朴齊純, 외부대신), 이지용(李址鎔, 내부대신), 이근택(李根澤, 군부대신), 이완용(李完用, 학부대신), 권중현(權重顯, 농상부대신)이다. </span></p><p><span style="font-size:14pt;"><br /></span></p><p><span style="font-size:14pt;">이들은 모두 조선  조선 후기를 폐쇄적인 사회로 만들었으며, 왕위에 군림하면서 권력을 좌지우지 했던 서인 노론의 자손들이었다.</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br /></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a href="http://xn--289ak2iu9buvke3bs7m0vf.kr/bbs/view_img.php?img=%2Fdata%2Feditor%2F2112%2Facca495443ccdc3de075322dd960edb6_1638731567_4419.jpg" target="_blank" class="view_image"><img src="/data/editor/2112/acca495443ccdc3de075322dd960edb6_1638731567_4419.jpg" alt="acca495443ccdc3de075322dd960edb6_1638731567_4419.jpg" class="img-tag "/></a></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span style="font-size:12pt;">&lt;나라를 팔아 먹은 이들은 조선을 지배했던 노론들이었다. 특히 이완용은 노론 당수였다.&gt;</span></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br /></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을사늑약을 적극적으로 진행한 학부대신 이완용은 고종황제(高宗皇帝) 때 노론의 우두머리인 노론당의 당수(黨首)였다. 이들은 적극적으로 친일(親日)의 길로 간다. </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br /></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200~300년 동안 노론이 집권하다 보니 어느 때 어떤 순간에도 정치 권력을 잃는 것은 죽는 것만 못하다고 생각했다. 이들 조선시대를 좌지우지 했던 노론 세력은 현대의 한국정치로 편입되어 기득권을 독점하는 경향을 뚜렷하게 나타냈다. </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br /></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정치권력을 잡는 DNA를 가져던 서인 노론들은 독립 운동보다 일제의 편에 서는 경우가 많았고, 나라를 </span><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되찾겠다는 독립 운동보다는 오히려 나라를 팔아먹는데 앞장서면서 어떠한 제약도 받지 않고 각 분야에서 기득권을 형성해 같다. </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br /></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그러나 조선 시대 정치에서 소외 되었던 소론과 남인들은 오히려 나라가 일본에 강탈당할 때 삭풍이 휘몰아치는 만주 벌판으로 나라를 되찾겠다는 일념으로 추위와 배고픔을 이겨내며, 일본과 맞서 싸운 사람들이 많았다.</span></p><br />]]></description>
	<dc:creator>이순락기자</dc:creator>
		<dc:date>Mon, 06 Dec 2021 05:02:27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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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김기훈의 역사와 인물】매학정(梅鶴亭)에서 그 옛날 천재들을 만나다.</title>
	<link>http://xn--289ak2iu9buvke3bs7m0vf.kr/bbs/board.php?bo_table=03004&amp;wr_id=121</link>
	<description><![CDATA[<br style="clear:both;" /><a href="http://xn--289ak2iu9buvke3bs7m0vf.kr/bbs/view_img.php?img=%2Fdata%2Feditor%2F2111%2F45674fd58536daffa9cabb7018802261_1638205089_7259.jpg" target="_blank" class="view_image"><img itemprop="image" content="/data/editor/2111/45674fd58536daffa9cabb7018802261_1638205089_7259.jpg" src="/data/editor/2111/45674fd58536daffa9cabb7018802261_1638205089_7259.jpg" alt="45674fd58536daffa9cabb7018802261_1638205089_7259.jpg" class="img-tag "/></a><br style="clear:both;" /><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lt;필자: 경북대 정치학박사, 현재 농부와 칼럼리스트로 활동 중&gt;</span></p><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br /></p><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line-height:1.5;"><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필자는 오래 전부터 매학정에 대한 글을 써기 위해 자료 수집과 사람들을 찾아 다녔다. 그러다가 필자는 올해 모든 것을 뒤로 한 채 농사일에 매진하게 되었다. </span></p><span style="font-size:14pt;"></span><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line-height:1.5;"><br /></p><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line-height:1.5;"><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한참 동안 매학정에 대한 것을 잊고 있을 때, 금오산의 구미성리학역사관 기획전시에서 “고산황기로 탄생 500주년 기념”으로 “매학을 벗 삼아 펼친 붓 나래”라는 제목으로 황기로선생에 대한 특별기획전을 한 것을 보고, 새삼 다시 역사와 인물에 대한 글을 써야겠다는 마음이 용솟음 치기 시작했다.</span></p><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br /></p><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line-height:1.5;"><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금오산을 정상으로 가다 보면 오른 쪽으로 큰 바위가 나타나는데, 거기에 “금오산의 깊고 아름다운 골짜기”라는 “금오동학(金烏洞壑)”이란 초서 형태의 명필의 암각이 나타난다. 금오동학의 주인공이 바로 고산 황기로(孤山 黃耆老)이다. 오늘은 이 천재를 만나러 가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span></p><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br /></p><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a href="http://xn--289ak2iu9buvke3bs7m0vf.kr/bbs/view_img.php?img=%2Fdata%2Feditor%2F2111%2F45674fd58536daffa9cabb7018802261_1638205397_6209.jpg" target="_blank" class="view_image"><img src="/data/editor/2111/45674fd58536daffa9cabb7018802261_1638205397_6209.jpg" alt="45674fd58536daffa9cabb7018802261_1638205397_6209.jpg" class="img-tag " style="width:729px;"/></a></p><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line-height:1.5;"><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lt;해동초성(海東草聖)으로 일컬어 지는 고산 황기로(孤山黃耆老)의 금오동학(金烏洞壑)&gt;</span></p><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br style="clear:both;" /></p><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line-height:1.5;"><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구미에서 33번 국도를 따라 가다가 현일중·고등학교 삼거리에서 우회전을 해 숭선대교를 지나기 전 왼쪽으로 낙동강변 언덕에 매학정이 있다. 유유히 흐르는 낙동강을 바라보며 수백년 동안 강바람을 이겨내며 지금까지 있다. 이 매학정(梅鶴亭)을 만든 이가 바로 고산 황기로이다.</span></p><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br /></p><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line-height:1.5;"><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이 매학정이 있는 곳은 구미시 고아읍 예강리이다. 예(禮)가 흐르는 강(江)이란 뜻에서 예강리가 되었다. 예전에 어른들이 “이국”이라 불렀다. 예곡(禮谷)을 옛 어른들은 “이국”하였던 것이다. “예(禮)가 흐르는 강(江)” 한마디로 멋진 표현이 아닐 수 없다. 지명을 이렇게 붙이게 된 것에는 반드시 무슨 사연이 있을 것이다.</span></p><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br /></p><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a href="http://xn--289ak2iu9buvke3bs7m0vf.kr/bbs/view_img.php?img=%2Fdata%2Feditor%2F2111%2F45674fd58536daffa9cabb7018802261_1638210098_9201.jpg" target="_blank" class="view_image"><img src="/data/editor/2111/45674fd58536daffa9cabb7018802261_1638210098_9201.jpg" alt="45674fd58536daffa9cabb7018802261_1638210098_9201.jpg" class="img-tag "/></a><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 </span></p><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line-height:1.5;"><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 &lt;고산 황기로는 매학정에서 매화를 아내로, 학을 자식으로 살다&gt;</span></p><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br style="clear:both;" /></p><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line-height:1.5;"><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그래서 한겨울 낙동강 강바람을 맞으며, 필자는 황기로에 대한 역사적 호기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오랜 시간 동안 역사의 수많은 사건들 속에서도 유유히 흐르고 있는 낙동 강변의 매학정은 황기로와 얽힌 이야기들을 우리에게 던져 줄 수 있는 열쇠가 된다고 하겠다. 거대한 강물을 힘차게 거슬러 오르는 물고기 떼처럼 과거 속으로, 역사 속으로 가겠다.</span></p><span style="font-size:14pt;"></span><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line-height:1.5;"><br /></p><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line-height:1.5;"><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한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율곡 이이(栗谷 李珥)를 모르거나 들어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율곡을 모른다면 한국 사람이 아니라고 해야 맞을 것이다. 우리가 지금 사용하고 있는 오천원권 지폐의 주인공이 바로 율곡 이이기 때문이다. </span></p><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line-height:1.5;"><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span></p><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line-height:1.5;"><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이것 뿐인가? 조선시대 과거시험에 9번이나 장원급제를 하여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으로 일컬어지며 조선 시대 전체를 통틀어 천재로 손꼽히는 인물이다. 느닷없이 황기로를 이야기 하고자 하면서 율곡 이이를 필자가 이야기 하는 것은 율곡 이이를 이야기 하지 않고는 제대로 된 황기로 선생을 이해 할 수 없기 때문이다.</span></p><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line-height:1.5;"><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span></p><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line-height:1.5;"><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어머니 신사임당은 5만원권 지폐의 주인공이다. 한마디로 한국에서 통화되고 있는 돈에 덕수이씨 가문의 사람들이 가장 많다고 해도 거짓말이 아니다. 우리나라 동전 100원에는 덕수 이씨 가문의 전설적인 영웅이며, 과거와 현재를 합쳐 전세계 해군제독 중 가장 뛰어난 이순신 장군이 있다.</span></p><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line-height:1.5;"><br /></p><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line-height:1.5;"><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덕수이씨 가문은 현재 약 5만명 정도인데, 한국의 금융과 통화 정책을 좌지우지 하는 인물들 역시 덕수이씨 가문의 사람들이 많다. 대표적인 사람이 한국은행 총재 이주열 총재이다. 이외에도 많은 덕수이씨 가문의 사람들은 훌륭한 조상을 본받아 한국사회에서 모든 분야에서 중추적 역할을 하고 있다.</span></p><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br /></p><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a href="http://xn--289ak2iu9buvke3bs7m0vf.kr/bbs/view_img.php?img=%2Fdata%2Feditor%2F2111%2F45674fd58536daffa9cabb7018802261_1638205760_979.jpg" target="_blank" class="view_image"><img src="/data/editor/2111/45674fd58536daffa9cabb7018802261_1638205760_979.jpg" alt="45674fd58536daffa9cabb7018802261_1638205760_979.jpg" class="img-tag "/></a></p><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line-height:1.5;"><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lt;9번 과거에 장원급제한 구도장원공 율곡 이이&gt;</span></p><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br style="clear:both;" /></p><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line-height:1.5;"><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1548년(명종 3년)에 율곡 이이가 16세 때, 어머니 신사임당(申師任堂)이 4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율곡은 이때부터 삶에 대한 회의와 죽음에 대해 생각에 빠져들어, 18세에 불경을 접하여 공부하게 되고, 19세에 금강산에 들어가 1년 동안 승려 생활을 하다가 다시 환속한다. </span></p><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br /></p><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line-height:1.5;"><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율곡의 금강산 입산하여 불교에 대한 귀의는, 당시 성리학적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던 사회로 율곡의 불교에 대한 귀의 했다는 것은 조선 시대에 반유교적 행위로 율곡을 평생 동안 뿐만 아니라, 그가 죽어서도 그를 따라 다니며 괴롭혔다. </span></p><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br /></p><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line-height:1.5;"><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이이는 다시 속세로 돌아와 당시로서는 늦은 나이인 22세에 성주목사(星州牧使) 노경린(盧慶麟)의 딸과 혼인을 하여 1년 동안 처가인 성주에서 처가살이 생활을 한다. 율곡이 노경린의 딸과 결혼하게 된 이유는 노경린이 한양에서 생활 할 때 율곡의 아버지 이원수(李元秀)와 친한 사이였기 때문이다. </span></p><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br /></p><h3 align="justify" style="margin:0px;padding:0px;font-family:'-apple-system', BlinkMacSystemFont, 'Malgun Gothic', '맑은 고딕', helvetica, 'Apple SD Gothic Neo', helvetica, '나눔바른고딕 옛한글', 'NanumBarunGothic YetHangul', sans-serif;background-color:rgb(255,255,255);"><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font-weight:normal;">율곡 이이가 결혼생활을 시작했을 때 어머니인 신사임당은 돌아가셨지만, 외가인 강원도 강릉 오죽헌에는 아직 </span></span><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font-weight:normal;">외할머니 </span><span style="font-weight:normal;"><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용인이씨</span><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span><span style="font-size:17px;"><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龍仁李氏)</span></span><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가 살아 계셨다. 율곡은 외할머니를 만나기 위해 경상도 성주에서 강원도 강릉으로 먼 길을 정처 없이 떠난다.</span><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 </span></span></h3><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br /></p><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line-height:1.5;"><a href="http://xn--289ak2iu9buvke3bs7m0vf.kr/bbs/view_img.php?img=%2Fdata%2Feditor%2F2111%2F45674fd58536daffa9cabb7018802261_1638206162_6201.jpg" target="_blank" class="view_image"><img src="/data/editor/2111/45674fd58536daffa9cabb7018802261_1638206162_6201.jpg" alt="45674fd58536daffa9cabb7018802261_1638206162_6201.jpg" class="img-tag "/></a><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 </span></p><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line-height:1.5;"><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lt;천재이자, 조선시대 여성들의 롤모델 신사임당&gt;</span></p><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br style="clear:both;" /></p><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line-height:1.5;"><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성주(星州)에서 길을 떠나 강릉으로 향하던 율곡 이이는 상주(尙州)에 도착하여, 안동 예안의 계상서당(溪上書堂)에 머물고 있던 조선 시대 최고의 학자인 퇴계 이황(退溪 李滉)을 만나고 갈 것인가 말 것인가를 고민한다. 조선 시대 학문에 뜻을 두었다면 누구나 퇴계를 만나 보는 것이 선비들의 꿈이었다.</span></p><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br /></p><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line-height:1.5;"><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율곡은 외할머니가 기다리고 있던 강릉을 뒤로 한 채, 안동 예안에서 벼슬을 버리고 학문에 심취해 있던 퇴계를 만나러 발걸음을 옮긴다. 그 해 3월 예안의 계상서당에서 조선 시대 최고의 학자인 58세의 퇴계와 조선시대 23세의 최고의 천재가 서로 만나 3일 동안 밤낮으로 학문에 대한 심도 있는 철학적 대화를 나눈다. </span></p><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br /></p><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a href="http://xn--289ak2iu9buvke3bs7m0vf.kr/bbs/view_img.php?img=%2Fdata%2Feditor%2F2111%2F45674fd58536daffa9cabb7018802261_1638206385_3914.jpg" target="_blank" class="view_image"><img src="/data/editor/2111/45674fd58536daffa9cabb7018802261_1638206385_3914.jpg" alt="45674fd58536daffa9cabb7018802261_1638206385_3914.jpg" class="img-tag " style="width:613px;"/></a></p><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line-height:1.5;"><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lt;퇴계 이황이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초기에 제자들을 가르치던 계상서당&gt;</span></p><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br style="clear:both;" /></p><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line-height:1.5;"><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퇴계는 율곡을 만나고 난 이후 공자(孔子)가 말한 “자기보다 늦게 태어난 사람이지만, 두려워 할만하다”는 후생가외(後生可畏)라고 평가 했다. 당시 퇴계와 율곡의 대화는 잘 알 수 없지만, 율곡에게 평생 문제가 되었던, 금강산에서 승려가 되었던 것과 앞으로 어떻게 학문을 해야 하는 것에 대해 퇴계에게 물었을 것이라고 필자는 추측한다.  </span></p><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br /></p><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line-height:1.5;"><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조선 시대 많은 역사적 장면이 있었지만, 퇴계와 율곡의 만남은 한국 철학사에 제일 첫 번째 명장면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 만남을 통하여 퇴계와 율곡은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맺게 되고, 율곡은 퇴계와 헤어진 이후에도 궁금하거나 의문이 있다면 편지를 통하여 퇴계에게 허심탄회하게 물었다.</span></p><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br /></p><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line-height:1.5;"><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1575년(선조 8년) 사림파가 동인(東人)과 서인(西人)으로 갈라지는 동서분당(東西分黨)에서 퇴계를 따르고 배웠던 인물들은 동인으로, 율곡을 따르고 지지하던 인물들은 서인으로 나누어지는 참혹한 당쟁(黨爭)이 시작된다. 학문적으로 퇴계 이황은 영남학파로 종장(宗匠)이 되고, 율곡 이이는 기호학파의 종장이 된다.</span></p><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br /></p><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a href="http://xn--289ak2iu9buvke3bs7m0vf.kr/bbs/view_img.php?img=%2Fdata%2Feditor%2F2111%2F45674fd58536daffa9cabb7018802261_1638206677_219.jpg" target="_blank" class="view_image"><img src="/data/editor/2111/45674fd58536daffa9cabb7018802261_1638206677_219.jpg" alt="45674fd58536daffa9cabb7018802261_1638206677_219.jpg" class="img-tag " style="width:530px;"/></a></p><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line-height:1.5;"><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                     &lt;동양의 대철학자 퇴계 이황&gt;</span></p><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line-height:1.5;"><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 </span><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 </span></p><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line-height:1.5;"><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사실 율곡은 사림(士林)이 동·서인간 갈등이 분당으로 치닫는 것을 막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그러나 동인들은 율곡을 서인이라고 지목하면서 율곡 이이는 피로감에 지쳐갔다. 결국 율곡 이이의 중재 노력은 물거품으로 끝나고, 삼사(三司)로부터 탄핵을 받아 이조판서의 벼슬을 내려놓고 고향으로 돌아간다.</span></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span><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line-height:1.5;"><br /></p><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line-height:1.5;"><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율곡 이이의 중재 노력이 좌절되면서 당쟁은 조선 후기의 정치를 극심하게 왜곡하게 되고, 조선의 역사를 비극적으로 만든다. 조선 중기 이후부터는 당쟁으로 승리한 서인들의 안방무대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이로써 성리학적 조선은 경직되고 폐쇄된 사회로 가고 말았다.</span></p><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br /></p><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line-height:1.5;"><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우리가 알고자 하는 매학정은 고산 황기로(孤山 黃耆老)와 옥산 이우(玉山 李瑀)를 빼놓고는 그 역사적 실마리를 풀지 못할 뿐만 아니라 이야기 할 수도 없다고 하겠다. 앞에서 매학정을 이야기 하는데, 왜 갑자기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를 거론하는 것을 좀 이상하다고 느꼈을 것이다. </span></p><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br /></p><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line-height:1.5;"><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그 이유는 다름 아니라 고산 황기로는 퇴계의 제자이며, 옥산 이우는 율곡 이이의 동생이기 때문이다. 율곡 이이의 동생 옥산 이우는 황기로의 사위가 되기 때문이다. 고산 황기로는 조선을 통틀어 서예(書藝)에서 가장 어렵다는 초서(草書)의 대가이다. 그래서 황기로는 본인의 글씨인 초서로 성인의 반열에까지 올랐다고 하겠다. </span></p><span style="font-size:14pt;"></span><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line-height:1.5;"><br /></p><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a href="http://xn--289ak2iu9buvke3bs7m0vf.kr/bbs/view_img.php?img=%2Fdata%2Feditor%2F2111%2F45674fd58536daffa9cabb7018802261_1638210518_2335.jpg" target="_blank" class="view_image"><img src="/data/editor/2111/45674fd58536daffa9cabb7018802261_1638210518_2335.jpg" alt="45674fd58536daffa9cabb7018802261_1638210518_2335.jpg" class="img-tag "/></a><br style="clear:both;" /><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보물 1625호로 지정된 황기로 초서 이군옥시(黃耆老 草書 - 李羣玉詩)</span></p><p align="justify" class="autosourcing-stub-extra" style="margin:11px 0px 7px;padding:0px;text-align:justify;font-family:Dotum;font-size:12px;font-style:normal;font-weight:normal;"><br /></p><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사람들은 그를 초성(草聖)이라 불렀다. 황기로는 조선의 왕희지(王羲之)라 불릴 만큼 그의 글씨는 예술의 극치를 보여주었는데, 과거 뿐만 아니라 현재에도 굉장한 평가를 받고 있는 것에 대해 누구도 부인 하지 못한다. 황기로의 초서 글씨는 보물로 지정된 것들도 있고, 거래된다면 몇 억을 호가한다.</span></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span><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br /></p><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line-height:1.5;"><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 </span><a href="http://xn--289ak2iu9buvke3bs7m0vf.kr/bbs/view_img.php?img=%2Fdata%2Feditor%2F2111%2F45674fd58536daffa9cabb7018802261_1638208381_3579.jpg" target="_blank" class="view_image"><img src="/data/editor/2111/45674fd58536daffa9cabb7018802261_1638208381_3579.jpg" alt="45674fd58536daffa9cabb7018802261_1638208381_3579.jpg" class="img-tag " style="width:446px;"/></a></p><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line-height:1.5;"><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lt;고산 황기로의 초서(草書), 신의 경지라 할 수 있다&gt;</span></p><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br style="clear:both;" /></p><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line-height:1.5;"><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황기로의 본관은 덕산황씨(德山黃氏)로 1521년에 선산에서 태어나 1534년(명종 18년)에 진사시에 합격한 이후 벼슬 길에 나가지 않고, 매학정에서 한평생 매화와 학을 키우면서 시와 거문고를 즐기며, 안빈낙도(安貧樂道)의 삶을 살은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아버지 황이옥(黃李沃) 때문이다.</span></p><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br /></p><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line-height:1.5;"><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황이옥의 상소로 기묘사화(己卯士禍)의 최대 희생양인 조광조(趙光祖)가 죽게 되었던 것이다. 조광조가 누구인가? 기묘사화는 훈구파 남곤(南袞)·홍경주(洪景舟)·심정(沈貞)등이 신진 사림인 조광조와 김정(金淨) 일파를 주초위왕(走肖爲王) 사건을 일으켜 신진 사림을 제거 했던 일이다.</span></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span><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line-height:1.5;"><br /></p><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a href="http://xn--289ak2iu9buvke3bs7m0vf.kr/bbs/view_img.php?img=%2Fdata%2Feditor%2F2111%2F45674fd58536daffa9cabb7018802261_1638206962_1696.jpg" target="_blank" class="view_image"><img src="/data/editor/2111/45674fd58536daffa9cabb7018802261_1638206962_1696.jpg" alt="45674fd58536daffa9cabb7018802261_1638206962_1696.jpg" class="img-tag " style="width:507px;"/></a></p><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line-height:1.5;"><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  &lt;왕도정치를 통한 개혁정치를 하고자 했던 조광조&gt;</span><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 </span></p><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br /></p><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line-height:1.5;"><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벌레가 갉아먹은 나뭇잎의 주초위왕(走肖爲王)은 그 동안 조광조에게 신임을 아끼지 않던 중종의 마음을 돌변하게 만든다. 벌레가 갉아먹은 나뭇잎의 주초위왕은 조광조가 왕이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span></p><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line-height:1.5;"><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span></span></p><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line-height:1.5;"><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그러나 사건이 조작되었다는 것을 알았던 중종도 이 기회를 삼아 항상 개혁을 주장하는 신진 사림을 조정에서 제거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개혁은 좋지만 굉장한 피로감을 동반한다.</span></span></p><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line-height:1.5;"><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 </span></p><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line-height:1.5;"><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조광조가 왕도 정치와 철인 정치를 외치며, 개혁 정치를 강력하게 주장하고 실천해 나가면서, 훈구파 뿐만 아니라 왕권이 약했던 중종마저 조광조와 그를 따르던 사람들을 제거하는데 의기투합하게 되었던 것이다. 조광조와 사림파는 죽음의 정치적 덫에 걸려 들었던 것이다.</span></p><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br /></p><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line-height:1.5;"><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조광조는 조선 시대 글을 읽을 줄 알거나, 갓을 쓴 선비라면 존경하지 않는 이가 없을 정도로 성리학을 공부하는 선비들에게 끼치는 영향력은 그야말로 대단했다. 정통 성리학과 조선이 개혁 되기를 원하는 사림파들의 중심에는 조광조가 있었던 것이다.</span></p><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line-height:1.5;"><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span></p><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line-height:1.5;"><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조광조는 조선 시대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과 같은 존재였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리고 조광조는 성리학을 전국적으로 확대하는 계기를 마련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span></p><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line-height:1.5;"><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span></p><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line-height:1.5;"><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기묘사화로 “조광조가 능주(지금의 화순)로 귀양 간 지 한 달 남짓 되어도 임금의 노여움은 아직 풀리지 않았다. 그리고 중종은 조광조를 죽이자는 상소를 원했지만, 아무도 상소를 올리지 않았다. 조광조를 죽이자고 상소를 올리는 것 자체는 선비이기를 포기하는 것과 같았다.</span></p><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line-height:1.5;"><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span></p><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line-height:1.5;"><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그러나 여기에 황이옥(黃李沃)·이래(李來)·윤세정(尹世貞) 등이 조광조를 죽이자는 상소를 올리게 된다. 옳고 그름의 판단을 떠나 이들은 출세욕에 눈이 먼 사람들이었다. 이로써 조선시대 모든 선비들의 존경을 받던 조광조는 이들의 상소로 말미암아 사사(賜死)된다.</span></p><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br /></p><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line-height:1.5;"><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중종은 조광조를 죽일 수 있도록 만든 황이옥에게 술을 내린다. 중종 실록에는 황이옥을 “조광조를 헐뜯어 임금의 뜻에 영합하니, 사람들이 모두 본디 성품이 흉악한 자다”라고 기록한다. 이로써 황이옥은 선비들의 사회에서는 더 이상 인정받을 수 없거니와 평생 손가락질을 받고 숨어 살아야 하는 운명을 가야 했다.</span></p><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br /></p><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line-height:1.5;"><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조선시대 선산(善山)에서 3형제 모두가 문과 급제한 가문은 진주하씨(晉州河氏)인 하강지(河綱地)·하위지(河緯地)·하기지(河紀地) 3형제와 덕산황씨(德山黃氏) 황린(黃璘)ㆍ황위(黃瑋)ㆍ황필(黃㻶) 3형제가 유일하다. </span></p><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line-height:1.5;"><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span></p><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line-height:1.5;"><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이 덕산 황씨 3형제 중 한분이 고산 황기로의 조부 황필이다. 황필은 아들 황이옥의 잘 못을 뼈저리게 느끼며 가문의 수치로 느끼며 살았을 것이다. <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황이옥의 상소로 조광조가 사사된 이후 황씨 집안은 벼슬 길에 나가지 않는 방향으로 삶을 선택한다. </span></span></p><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line-height:1.5;"><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span></span></p><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line-height:1.5;"><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따라서 황기로 역시 무시무시한 상황과 환경을 인식하며 성장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조부 황필은 손자 황기로에게 벼슬 길에 나가지 말 것을 당부했을 것이다. 그리고 낙동 강변에 매학정을 지어, 매화와 학을 키우면서 평생 시를 짓고, 글을 써며 살아 가기를 바랬을 것이다. 이로써 천재 황기로는 조부의 뜻에 따라 살아가게 되었다.</span></span></p><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line-height:1.5;"><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span></span></p><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line-height:1.5;"><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벼슬길에 나간들 모든 사람들에게 창피와 손가락질을 받으며 살아야 한다는 것을 조부 황필은 알았다. 그리고 조부 황필 역시 조광조와 학문적·정치적 궤적을 같이 하는 사림파였던 것이다.</span></span></p><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line-height:1.5;"><br /></p><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line-height:1.5;"><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조부 황필은 조선 시대 모든 선비들의 마음속의 스승이라고 할 수 있는 점필재 김종직(佔畢齋 金宗直)의 제자였던 것이다. 조광조는 어찌 보면 황필의 후배였던 것이다. 아끼는 후배를 아들이 죽였으니 그 얼마나 슬프고 고통스러웠겠는가?</span></p><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br /></p><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line-height:1.5;"><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점필재 김종직의 도통관과 학통은 한훤당 김굉필(寒暄堂 金宏弼)에게 이어지고, 이것은 다시 정암 조광조(靜庵 趙光祖)로 이어진다. 조선시대 성리학의 맥은 점필재 김종직(佔畢齋 金宗直) → 한훤당 김굉필(寒暄堂 金宏弼) → 정암 조광조(靜庵 趙光祖) → 회재 이언적(晦齋 李彦迪) → 퇴계 이황(退溪 李滉) 이렇게 이어진다. </span></p><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br /></p><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line-height:1.5;"><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황기로의 부친 황이옥의 조광조 사사 상소는 그야말로 이 조선 성리학의 도통관과 학통을 부정하는 일이며, 또한 황기로의 조부 황필에게는 스승 김종직을 부정하는 일이었던 것이다. 조선시대를 살아가는 선비들에게 조광조를 죽이는 일에 가담하는 것은 한마디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span></p><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line-height:1.5;"><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span></p><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line-height:1.5;"><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그래서 조부 황필은 황기로가 매학정(梅鶴亭)에서 매화와 학(鶴)을 키우며 살아 갈 것을 당부한 것일지도 모른다. 황기로가 벼슬길에 나갔다면 아버지 황이옥의 상소로 조광조가 죽었다는 꼬리표는 평생 따라 다니며 황기로를 괴롭혔을 것이다.</span></p><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br /></p><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line-height:1.5;"><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따라서 황기로는 조부의 뜻을 받들어 1534년(중종 29) 14세에 사마시에 합격하지만,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풍류를 즐기며 살았다. 조부 황필의 뜻에 따라 황기로는 평생 “매화를 아내로 삼고, 학을 자식처럼 키우며”, 찾아오는 이가 있으면 술과 시를 즐기며 거문고를 타면서 위대하면서도 예술적인 글을 남겼다. </span></p><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br /></p><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line-height:1.5;"><span style="font-size:14pt;"><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그러다가 흥에 취하면 신에 가까운 글씨를 남겼다. 천재성의 표현을 초서로 승화 시켰던 것이다. 천재가 천재성을 발휘하지 못하면 미쳐버리지 않겠는가? 그래서 그의 글씨는 사람이 썼다고 하기에는 믿기지 않을 정도이다. 글씨가 아닌 예술 작품이 되었다. </span></span></p><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br /></p><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line-height:1.5;"><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황기로는 조선 시대의 치명적 약점을 글씨로 승화 시키고, 극복한 삶을 살았던 것이다. 아마 황기로가 아버지의 과오가 없어 벼슬 길에 나갔다면, 불세출의 전무후무한 그러한 초서를 후대에 남겼겠는가? 그리고 초성이 되었겠는가? 아마 필자는 불가능했다고 판단한다.</span></p><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br /></p><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line-height:1.5;"><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당대의 이름 있는 선비들이라면, 고산 황기로를 만나보고 글씨 하나를 받아 보기 위해 천리 길도 마다하지 않고 찾아왔고, 황기로의 글씨를 받아보기 위해 어떠한 대가도 마다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매화와 학을 함께 하는 황기로를 신선으로 까지 묘사했고, 지금도 고산 황기로를 신선이라는 표현을 아끼지 않는다. </span></p><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br /></p><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line-height:1.5;"><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조선의 이름 있는 선비들은 황기로를 초서의 성인이라 하여 초성(草聖)으로 불렀다. 그래서 현재에도 황기로의 초서 한 장이 값을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다. 황기로의 초서 작품 중에서도 특히 칡으로 만든 칡 붓인 갈필(葛筆)로 쓴 초서는 그의 예술성을 더 높이 평가하고 있다.</span></p><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 </span></p><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line-height:1.5;"><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현재의 구미시 고아읍 대망리를 조선시대에는 망장(網場)이라 불렀는데, 그 곳에는 금수골이라는 칡넝쿨이 많은 골자기가 있었다고 한다. 그 곳에서 황기로는 숯으로 칡 잎에 글씨 연습을 너무나 많이 하여 비가 오면 골자기 냇물이 숯 검정으로 새까맣게 되어 흘렀다고 전해진다. 황기로는 초성이라 불려 질만큼 되기까지 남다른 노력을 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span></p><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br /></p><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line-height:1.5;"><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영주에 있는 소수서원(紹修書院)은 1541년(중종 36년)에 풍기군수인 주세붕(周世鵬)이 세웠고, 서원이 세워진 한참 후에야 경렴정(景濂亭) 정자의 현판을 고산 황기로가 쓰게 된다. 일화에는 퇴계 이황(退溪 李滉)이 황기로에게 초서체의 현판 글씨를 부탁한다.</span></p><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br /></p><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a href="http://xn--289ak2iu9buvke3bs7m0vf.kr/bbs/view_img.php?img=%2Fdata%2Feditor%2F2111%2F45674fd58536daffa9cabb7018802261_1638207172_3496.jpg" target="_blank" class="view_image"><img src="/data/editor/2111/45674fd58536daffa9cabb7018802261_1638207172_3496.jpg" alt="45674fd58536daffa9cabb7018802261_1638207172_3496.jpg" class="img-tag "/></a></p><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line-height:1.5;"><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lt;퇴계 이황이 고산 황기로에게 부탁한 소수서원 경렴정 현판&gt;</span></p><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br style="clear:both;" /></p><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line-height:1.5;"><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퇴계를 본 황기로는 긴장하지 않을 수 없어 식은땀을 흘리다가 퇴계가 자리를 비켜주자, 그 때서야 일필휘지(一筆揮之)로 경렴정(景濂亭)이라는 현판의 글씨를 썼다고 한다. 경렴정의 현판이 워낙 명필이라 진본은 박물관에 보관하고 지금에 있는 것은 모조품이라고 한다.</span></p><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line-height:1.5;"><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span></p><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line-height:1.5;"><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퇴계 이황은 경(敬)을 항상 강조하는 철학관을 가졌기 때문에 글씨 역시 자유분방한 것을 싫어하는 경향이 강했다. 따라서 퇴계는 사람들이 글을 쓸 때도 바르게 써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하게 된다. </span></p><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line-height:1.5;"><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span></p><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line-height:1.5;"><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퇴계는 “매사를 하나같이 바르게 하라”는 가르침을 제자들과 사람들에게 엄히 가르쳤지만, 퇴계의 매학정시(梅鶴亭詩)에서 알 수 있듯이 황기로에게 만큼은 예외적으로 관용을 베풀었다. 이러한 퇴계의 배려는 황기로에게 더없는 기회였으며, 황기로는 퇴계의 이러한 배려에 부응하고자 더 열심히 노력하여 초서의 대가가 될 수 있었다고 하겠다. </span></p><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br /></p><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line-height:1.5;"><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 퇴계 이황은 황기로에게 “백학이여 매화 늙음을 한탄치 마라. 장욱(張旭)처럼 글씨 쓰며 노년을 즐기리라” 노래하고 있다. 장욱은 중국 당나라 때의 초서의 대가로 초성(草聖)으로 불려진 인물이다. </span></p><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line-height:1.5;"><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span></p><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line-height:1.5;"><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당나라 때 이백(李白)의 시와 배민(裵旻)의 검무, 그리고 장욱의 글씨가 삼절(三絶)로 유명했다. 퇴계는 황기로를 당나라 글씨로 유명한 장욱에 비교했던 것이다. 이로써 황기로의 글씨는 용이 승천하는 일필휘지의 초서체가 만들어진 것이다.</span></p><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br /></p><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line-height:1.5;"><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영주의 사계(砂溪) 장여화(張汝華)가 전계초당(箭溪草堂)을 짓고 편액을 써줄 것을 황기로에게 청하자, “내가 흥이 날 때 휘호할 것이니 기다리라”고 했다. 며칠 뒤 산사를 거닐다 갑자기 “내가 지금 흥이 났으니 종이와 붓을 준비하라”고 통보한다.</span></p><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br /></p><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line-height:1.5;"><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황기로 자신은 산에서 칡넝쿨 줄기를 이빨로 씹어 갈근필(葛根筆)을 만들어 전계초당 넉 자를 썼다. 황기로는 전계초당(箭溪草堂) 쓰고는 “내 평생의 득의작(得意作)”이라며 글을 써 달라는 장여화보다 더 기뻐했다고 한다. 득의작(得意作)이란 예술가가 만들어낸 창작물 중에서 다른 사람들보다 자신이 더 좋아하는 작품을 말한다.</span></p><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br /></p><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line-height:1.5;"><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선산출신 이증영(李增榮)이 합천군수로 있는 동안 극심한 흉년이 닥치자, 백성들을 몸소 구휼하고 청렴하게 관직 생활을 하여 합천 백성들이 이증영에 대한 감사한 마음을 표현할 길이 없었다. 백성들은 이증영에 대한 고마움의 보답으로 이증영 유애비(遺愛碑)를 세우기로 한다.</span></p><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line-height:1.5;"><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span></p><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line-height:1.5;"><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유애비의 글은 남명 조식(南冥 曺植)이 쓴다. 그리고 남명 조식은 글씨를 황기로에게 부탁한다. 남명 조식 역시 황기로가 신선에 가까운 글씨의 재능을 알아 봤고, 이미 오래전부터 두터운 교분을 가지고 있었다.</span></p><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br /></p><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a href="http://xn--289ak2iu9buvke3bs7m0vf.kr/bbs/view_img.php?img=%2Fdata%2Feditor%2F2111%2F45674fd58536daffa9cabb7018802261_1638207375_5252.jpg" target="_blank" class="view_image"><img src="/data/editor/2111/45674fd58536daffa9cabb7018802261_1638207375_5252.jpg" alt="45674fd58536daffa9cabb7018802261_1638207375_5252.jpg" class="img-tag "/></a></p><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line-height:1.5;"><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lt;합천군수 이증영의 유애비, 남명 조식과 고산 황기로가 만나다&gt;</span></p><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br style="clear:both;" /></p><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line-height:1.5;"><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남명 조식이 누구인가? 당대 조선에서 퇴계 이황과 쌍벽을 이루던 대학자가 아니었던가! 한사람은 경상도 좌도에서, 한사람은 경상도 우도에서, 서로가 학문과 도(道)를 닦으면서 천하의 인재를 길러 낸 대학자이자, 철학자들이었다. 황기로는 과분할 정도로 많은 이들로부터 사랑을 받았음에 틀림이 없다.</span></p><span style="font-size:14pt;"></span><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line-height:1.5;"><br /></p><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a href="http://xn--289ak2iu9buvke3bs7m0vf.kr/bbs/view_img.php?img=%2Fdata%2Feditor%2F2111%2Fd0b94163be3f3650b4121305dcdff47b_1638213108_1332.jpg" target="_blank" class="view_image"><img src="/data/editor/2111/d0b94163be3f3650b4121305dcdff47b_1638213108_1332.jpg" alt="d0b94163be3f3650b4121305dcdff47b_1638213108_1332.jpg" class="img-tag "/></a><br style="clear:both;" /><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lt;퇴계 이황과 쌍벽을 이루었던 남명 조식&gt;</span></p><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br /></p><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line-height:1.5;"><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황기로의 사위 옥산 이우(玉山 李瑀)와 그의 형인 율곡 이이(栗谷 李珥)는 덕수이씨 형제이다. 덕수이씨는 지금의 개성 개풍군 덕수리를 관향(貫鄕)으로 하는 성씨이다. 율곡 이이와 옥산 이우가 외가인 강원도 강릉 오죽헌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span></p><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br /></p><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line-height:1.5;"><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그러나 그들의 고향은 엄연히 아버지 이원수의 고향인 경기도 파주 율곡리가 그들의 고향이었다. 그래서 이이는 자신의 호(號)를 율곡(栗谷)으로 쓰게 된 것이다. 율곡은 밤나무 골짜기라는 뜻이다. </span></p><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line-height:1.5;"><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span></p><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line-height:1.5;"><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사람들이 율곡하면 "나도 밤나무, 너도 밤나무 이야기"를 들어 보았을 것이다. 율곡이 호랑이에게 물려 가지 않게 하기 위해서 천(千) 그루의 밤나무를 심었는데, 두(二) 그루가 죽어 998 그루가 되었다. 두 그루가 죽었으니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span></p><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line-height:1.5;"><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span></p><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line-height:1.5;"><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그런데 갑자기 "나도 밤나무" 했다. 그리고 옆에 있던 나무에게 "너도 밤나무"잖아 해서 천 그루의 밤나무를 채워 율곡이 호랑이에게 물려 가지 않았다는 "나도 밤나무와 너도 밤나무" 전설이 오늘 날까지 전해지고 있다.</span></p><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line-height:1.5;"><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span></p><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line-height:1.5;"><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율곡 이이와 파(派)는 다르지만, 덕수이씨(德水李氏)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바로 임진왜란에서 바람 앞에 등불인 조선을 구한 충무공 이순신(忠武公 李舜臣) 장군이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과 율곡 이이 사이에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span></p><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line-height:1.5;"><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 </span></p><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a href="http://xn--289ak2iu9buvke3bs7m0vf.kr/bbs/view_img.php?img=%2Fdata%2Feditor%2F2111%2F45674fd58536daffa9cabb7018802261_1638207641_2562.jpg" target="_blank" class="view_image"><img src="/data/editor/2111/45674fd58536daffa9cabb7018802261_1638207641_2562.jpg" alt="45674fd58536daffa9cabb7018802261_1638207641_2562.jpg" class="img-tag "/></a></p><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line-height:1.5;"><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lt;최고의 영웅으로 평가 받는 충무공 이순신장군&gt;</span></p><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br style="clear:both;" /></p><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line-height:1.5;"><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1576년(선조 9년)에 이순신은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 봉사를 거쳐, 전라도 종 4품의 수군만호(水軍萬戶)가 된다. 그러나 1583년 5월 병조정랑을 맡은 서익(徐益)과 서인(西人)들은 이순신에게 부당한 명령을 내리고 뇌물을 요구했지만, 이순신은 이를 수용하지 않고 단호히 거절한다. </span></p><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br /></p><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line-height:1.5;"><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이에 병조정랑 서익은 이순신이 동인(東人)들, 특히 서애 유성룡(西厓 柳成龍)과 친하다는 이유를 들어 모함과 흉계를 꾸며, 3년전에 이순신이 맡은 계급으로 강등시킨다. 이때부터 힘없는 이순신은 당쟁의 희생양이 되어 끊임없이 위기에 처해진다. </span></p><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br /></p><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a href="http://xn--289ak2iu9buvke3bs7m0vf.kr/bbs/view_img.php?img=%2Fdata%2Feditor%2F2111%2F45674fd58536daffa9cabb7018802261_1638207756_4702.jpg" target="_blank" class="view_image"><img src="/data/editor/2111/45674fd58536daffa9cabb7018802261_1638207756_4702.jpg" alt="45674fd58536daffa9cabb7018802261_1638207756_4702.jpg" class="img-tag " style="width:586px;"/></a></p><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line-height:1.5;"><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lt;임진왜란 때 전란을 지휘하고 수습한 서애 류성룡&gt;</span></p><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br style="clear:both;" /></p><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line-height:1.5;"><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그해 12월 율곡 이이는 조정을 좌지우지하는 이조판서에 올랐다. 율곡이이는 류성룡에게 이순신이 같은 덕수이씨 문중 사람이니, 이순신을 만나보기를 원한다는 뜻을 전한다. 류성룡은 이순신을 찾아가 율곡의 뜻을 전하니 이순신은 이렇게 말했다. </span></p><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br /></p><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line-height:1.5;"><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나와 율곡은 같은 덕수 가문(家門)이라고는 하지만, 그가 이조판서의 자리에 있을 때 만난다는 것은 옳지 못한 일이오.” 하면서 이순신은 율곡과 류성룡의 청을 단번에 거절한다. 이후 서인 세력들은 이순신의 계급을 강등시키고, 이순신이 예전에 근무 하던 훈련원으로 보내 버린다.</span></p><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br /></p><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line-height:1.5;"><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1년이 흘러 이순신은 다시 좌천되어, 함경도 병마절도사의 하급 군관으로 임명되어 국경을 침범하는 여진족 추장을 사로잡는 혁혁한 공을 세운다. <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하지만, 북병사 김우서(北兵使 金禹瑞)는 이순신이 군사적 명령 없이 독자적 행동이라며, 오히려 이순신을 처벌해야 한다는 장계를 조정에 올린다.</span></span></p><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line-height:1.5;"><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span></span></p><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line-height:1.5;"><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이로써 이순신의 전공은 사라지고 위기에 직면한다. 조정에서는 이순신의 전공도 없애는 동시에, 처벌도 없게 하는 조치를 취한다. </span><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불굴의 의지와 용기를 가진 이순신에게는 항상 불운이 따라 다니기 시작한다.</span></p><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line-height:1.5;"><span style="font-size:14pt;"></span></p><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br /></p><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line-height:1.5;"><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이순신은 아버지 3년 상을 모시고, 다시 함경도 조산 만호와 녹둔도 녹전관에 임명되었는데, 여진족의 기습으로 조선 백성 60여명이 포로로 잡혀가는 위급한 상황이 발생한다.</span></p><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line-height:1.5;"><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span></p><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line-height:1.5;"><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이에 이순신은 적진으로 뛰어들어 적장 4명의 목을 베고, 재물과 포로를 구출하였다. 하지만 이순신도 다리에 화살을 맞고 전사자가 10여명이 나왔다. 이 결과에 대해 이순신은 책임을 질 수밖에 없는 상황에 직면한다.</span></p><span style="font-size:14pt;"></span><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line-height:1.5;"><br /></p><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line-height:1.5;"><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당시 북병사를 맡고 있던 이일(李鎰)은 이순신이 병력 증강을 요구했음에도 이를 무시한 것이 밝혀 질까봐 두려워 이순신의 목을 베야 한다고 조정에 장계를 올린다. 나중에 북병사 이일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상주 북천 전투에서 병사들을 버리고 도망치는 비겁한 장수였다.</span></p><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line-height:1.5;"><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span></p><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line-height:1.5;"><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따라서 이순신은 자기의 임무를 충실히 수행했다는 자기 변호의 상소를 올렸지만, 조정에서는 이순신에게 곤장을 때리고 계급을 완전히 빼앗는 백의종군을 시킨다. 이것이 이순신의 제1차 백의종군인 것이다. 우리들이 잘 아는 임진왜란 중의 이순신 장군의 백의종군은 제2의 백의종군인 것이다.</span></p><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br /></p><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line-height:1.5;"><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이순신은 무과 급제 이후 항상 시기 질투와 모함, 그리고 죽음의 문턱에 까지 가는 생애를 살았다. 그렇다고 이순신은 높은 사람에게 부탁과 청탁을 하지 않고 고지식할 정도로 타협하지 않았다. </span></p><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line-height:1.5;"><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span></p><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line-height:1.5;"><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사실 율곡 이이와 이순신은 같은 덕수이씨 문중으로 항렬 상 이순신이 아재뻘이 됨에도 조카뻘인 율곡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는다. 충무공 이순신과 율곡 이이는 촌수로 19촌이 된다.</span></p><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br /></p><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line-height:1.5;"><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승승장구하고 있던 율곡은 이순신에게 도움을 주려 했지만, 이순신은 그것을 단호히 거절했다. 이순신이 임진왜란에서 23전 23승을 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어떠한 위기 속에서도 꺾이지 않는 의지와 용기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다.</span></p><span style="font-size:14pt;"></span><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line-height:1.5;"><br /></p><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line-height:1.5;"><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이순신은 정읍현감으로 있다가 친구인 류성룡이 영의정에 오르자, 류성룡은 이순신을 전라좌수사로 발탁한다. 정읍현감은 지금의 대위 정도 계급이며, 좌수사는 지금의 투 스타(two star)인 소장<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span></span><span style="letter-spacing:0pt;font-family:'굴림', Gulim;"><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小將</span>)</span><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정도이다. 이순신은 6단계를 뛰어 넘는 있을 수 없는 진급을 한 것이다. 류성룡은 오래전부터 이순신의 사람 됨과 그의 지혜와 용기를 익히 알았기 때문에 모든 것을 책임지고 진급시켰던 것이다. </span></p><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line-height:1.5;"><br /></p><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line-height:1.5;"><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그래서 이순신 장군 집안의 후손들과 류성룡의 자손들 사이에는 수백년 동안 끊이지 않는 교류를 해 왔다. 사람은 누구를 만나 것에 따라 인생의 운명이 바뀐다는 것을 이순신과 류성룡의 일화에서도 알 수 있는 것이다. 만약 류성룡의 이순신 좌수사 발탁이 없었다면 조선은 임진왜란 때 끝나는 왕조가 되었을 것이다.</span></p><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br /></p><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line-height:1.5;"><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잠시 율곡 이이와 충무공 이순신의 관계를 살펴봤다. 다시 돌아가서 율곡 이이의 동생 옥산 이우와 그의 장인 고산 황기로를 살펴보겠다. 옥산 이우는 조선 최고의 명필이라 일컬어지는 고산 황기로의 사위가 되면서 덕수이씨가 선산(善山)지역에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고 하겠다. </span></p><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br /></p><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line-height:1.5;"><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옥산 이우가 황기로의 사위가 된 사연에는 여러 가지 설이 분분하다. 첫 번째, 율곡 이이와 옥산 이우의 아버지 이원수가 을사사화(乙巳士禍)에 화를 입고, 성주에 유배되어 있던 묵재 이문건(默齋 李文楗)과 교류하다가 이원수가 평소 이문건과 친하던 고산 황기로를 만나게 되면서 옥산 이우가 황기로의 사위가 되었다는 것이다. </span></p><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line-height:1.5;"><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 </span></p><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line-height:1.5;"><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두 번째는 율곡 이이가 성주에서 강릉 오죽헌(烏竹軒)에 있던 외할머니를 찾아가다가 도중 조선 최고의 학자인 퇴계 이황을 만나러 안동 예안을 찾아가기로 결심하고 길을 떠난다. </span></p><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line-height:1.5;"><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span></p><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line-height:1.5;"><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그런데 선산에 들러 조선 최고의 명필가로 알려져 있던 매학정의 황기로를 찾아 동생 이우가 있는데, 아직 결혼을 하지 않았다고 하니, 황기로는 그러면 나에게도 무남독녀 고명 딸이 있으니 결혼 시키는 것이 좋지 않겠소? 하여 옥산 이우가 황기로의 사위가 되었다는 것이다.</span></p><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br /></p><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line-height:1.5;"><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세 번째는 율곡 이이가 안동 예안의 계상서당에서 퇴계 이황을 만나 3일 밤낮을 앞으로 나갈 학문에 대한 이야기와 자기 신변에 대한 이야기를 하던 도중 율곡이 저에게 동생이 있습니다. 하니 퇴계가 그러면 제자인 황기로에게 좋은 딸이 있는데 서로 결혼 시키는게 좋지 않겠소? 해서 율곡 이이의 동생인 옥산 이우가 황기로의 사위가 되었다는 것이다.</span></p><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line-height:1.5;"><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span></p><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line-height:1.5;"><span style="font-size:14pt;"><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그런데 여기서 하나 주목할 만한 이야기가 있다. 율곡 이이는 9번의 장원을 차지한 천재였다. 조선 시대 과거 시험은 친가로 4대까지 할머니들을 포함해 조상의 이름과 본관 알아야 했고, 외가 또한 4대까지 할아버지들의 이름과 할머니의 본관을 알아야만 시험에 응시할 수 있었다.</span></span></p><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line-height:1.5;"><span style="font-size:14pt;"><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span></span></p><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line-height:1.5;"><span style="font-size:14pt;"><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율곡 이이의 외가는 평산신씨(平山申氏) 집안이다. 율곡 이이의 외가 고조부는 대제학과 좌의정을 지낸 신개(申槩) 대감이다. 그 부인이 군사(郡事) 김가명(金可銘)의 딸이다. 그러니 김가명의 딸은 율곡 이이에게 외고조모가 된다. 외고조모가 바로 선산김씨(善山金氏, 들성김씨)로 불리는 김가명의 딸이었던 것이다. </span></span></p><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line-height:1.5;"><span style="font-size:14pt;"><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span></span></p><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line-height:1.5;"><span style="font-size:14pt;"><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이러한 사정으로  율곡 이이에게는  본래부터 선산 땅이 낯설지가 않은  곳이었다. 외고조모의 고향이자, 조선 성리학의 출발점인 선산에서 율곡 이이는 고산 황기로를 만나는 것은 새로운 안식처에 도착한 것이나 마찬가지였을 것이다.<br /><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   <a href="http://xn--289ak2iu9buvke3bs7m0vf.kr/bbs/view_img.php?img=%2Fdata%2Feditor%2F2111%2Fd0b94163be3f3650b4121305dcdff47b_1638213197_0643.jpg" target="_blank" class="view_image"><img src="/data/editor/2111/d0b94163be3f3650b4121305dcdff47b_1638213197_0643.jpg" alt="d0b94163be3f3650b4121305dcdff47b_1638213197_0643.jpg" class="img-tag "/></a></span></span></span></p><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line-height:1.5;"><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lt;선산 내고리에 있는 옥산 이우의 산소 전경&gt;</span></p><span style="font-size:14pt;"></span><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line-height:1.5;"><br /></p><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line-height:1.5;"><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옥산 이우가 황기로의 사위가 된 것에는 어느 것이 정확하지 않지만, 분명한 것은 시(時)·서(書)·화(畵) 3절로 당대 최고가는 고산 황기로가 일찍부터 하나밖에 없는 무남독녀의 사위감을 찾고 있었다는 것은 분명하겠다.</span></p><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line-height:1.5;"><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span></p><p align="justify" style="text-align:justify;line-height:1.5;"><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율곡 이이는 안동 예안 계상서당에 머물고 있던 퇴계 이황을 찾아가면서 매학정에 머물고 있던 황기로를 찾는다. <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율곡 이이는 황기로를 만나기 위해 매학정을 들러 아름다운 매학정을 노래하는 “매학정을 찾는다”는 방매학정(訪梅鶴亭)이라는 긴 장문의 시(詩)를 남긴다. <span style="font-size:14pt;"><span style="font-size:14pt;"></span></span></span></span></p>]]></description>
	<dc:creator>이순락기자</dc:creator>
		<dc:date>Tue, 30 Nov 2021 01:57:30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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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김기훈의 역사와 인물】조국의 독립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친 사람들을 찾아가다.</title>
	<link>http://xn--289ak2iu9buvke3bs7m0vf.kr/bbs/board.php?bo_table=03004&amp;wr_id=120</link>
	<description><![CDATA[<p><span style="font-size:12pt;"><a href="http://xn--289ak2iu9buvke3bs7m0vf.kr/bbs/view_img.php?img=http%3A%2F%2Fwww.xn--289ak2iu9buvke3bs7m0vf.kr%2Fdata%2Feditor%2F2106%2F8f14facfb48854d6658e2a7f04f970c0_1623776311_5837.jpg" target="_blank" class="view_image"><img itemprop="image" content="http://www.xn--289ak2iu9buvke3bs7m0vf.kr/data/editor/2106/8f14facfb48854d6658e2a7f04f970c0_1623776311_5837.jpg" src="http://www.xn--289ak2iu9buvke3bs7m0vf.kr/data/editor/2106/8f14facfb48854d6658e2a7f04f970c0_1623776311_5837.jpg" alt="8f14facfb48854d6658e2a7f04f970c0_1623776311_5837.jpg" class="img-tag "/></a></span></p><p><span style="font-size:12pt;">&lt;필자: 경북대 정치학박사, 현재 농부와 칼럼리스트로 활동&gt;</span></p><p><span style="font-size:12pt;"><br style="clear:both;" /><span style="font-size:14pt;">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면서 대한제국의 외교권은 일본의 손에 넘어간다. 고종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회복하기 위해 1907년 6월 헤이그 평화회의에 이상설(李相卨)·이준(李儁)·이위종(李瑋鍾)을 비밀리에 파견한다. 이 평화회의의 목적은 열강들이 서로 충돌하지 않고, 약소국을 자기들 입맛에 맞게 차지하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에 일본의 손에 넘어간 작은 나라, 조선은 애초부터 관심이 없었다.</span></span></p><p><span style="font-size:12pt;"><br /></span></p><p><a href="http://xn--289ak2iu9buvke3bs7m0vf.kr/bbs/view_img.php?img=http%3A%2F%2Fwww.xn--289ak2iu9buvke3bs7m0vf.kr%2Fdata%2Feditor%2F2106%2F8f14facfb48854d6658e2a7f04f970c0_1623772763_3035.jpg" target="_blank" class="view_image"><img src="http://www.xn--289ak2iu9buvke3bs7m0vf.kr/data/editor/2106/8f14facfb48854d6658e2a7f04f970c0_1623772763_3035.jpg" alt="8f14facfb48854d6658e2a7f04f970c0_1623772763_3035.jpg" class="img-tag " style="width:469px;"/></a></p><p><span style="font-size:12pt;">&lt;헤이그평화회의 밀사로 파견된 이상설, 이준, 이위종&gt;</span></p><p><br style="clear:both;" /></p><span style="font-size:12pt;"></span><p><span style="font-size:14pt;">헤이그 평화회의에 참석한 3명의 밀사는 각국 대표에게 대한제국의 외교권 회복을 역설했지만, 모두 외면당하거나 조롱당했다. 외교권을 회복하려는 모든 것이 실패하자, 밀사의 대표를 맡은 이상설은 통한의 슬픔을 간직한채 귀국하지 않고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에 정착한다. </span></p><p><span style="font-size:14pt;"><span style="font-size:14pt;">​</span></span></p><p><span style="font-size:14pt;"><span style="font-size:14pt;">이상설이 귀국하지 않은 이유는 "세계!  어느 나라도 조선을 도와주지 않기 때문에, 독립은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쟁취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상설은 먼저 독립전쟁을 하기 위해서는 “독립군 기지건설”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후부터 이상설은 국외에서 국내로 자기와 뜻을 같이 할 동지와 사람들에게 동참할 것을 호소하기 시작한다. 이상설의 독립군 기지건설에 동참하는 대표적인 사람과 가문이 있었다.</span></span></p><p><span style="font-size:14pt;"> </span></p><p><span style="font-size:14pt;">그 가문으로는 경북 구미의 왕산 허위가문, 서울의 우당 이회영 6형제, 안동의 석주 이상룡 가문, 안동의 백하 김대락 가문들이 편안한 삶을 뒤로 하고 추위와 배고픔이 기다리는 만주벌판으로 조국독립을 위해 뒤돌아 보지 않고 달려간다. </span></p><p><span style="font-size:12pt;"><br /></span></p><p><span style="font-size:14pt;">특히 석주 이상룡(石洲 李相龍)선생과 백하 김대락은 안동을 대표하는 명문가이면서 안동지역 독립운동을 이끌었다. 그리고 안동 출신 독립운동가는 무려 1000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있었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한번쯤은 임시정부 초대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과 그의 고택인 임청각(臨淸閣)을 보거나 들어보았을 것이다.</span></p><p><span style="font-size:14pt;"> </span></p><p><a href="http://xn--289ak2iu9buvke3bs7m0vf.kr/bbs/view_img.php?img=http%3A%2F%2Fwww.xn--289ak2iu9buvke3bs7m0vf.kr%2Fdata%2Feditor%2F2106%2F8f14facfb48854d6658e2a7f04f970c0_1623772862_8452.jpg" target="_blank" class="view_image"><img src="http://www.xn--289ak2iu9buvke3bs7m0vf.kr/data/editor/2106/8f14facfb48854d6658e2a7f04f970c0_1623772862_8452.jpg" alt="8f14facfb48854d6658e2a7f04f970c0_1623772862_8452.jpg" class="img-tag " style="width:618px;"/></a></p><p><span style="font-size:12pt;">&lt;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선생&gt;</span></p><p><br style="clear:both;" /></p><span style="font-size:12pt;"></span><p><span style="font-size:14pt;">임청각은 99칸으로 만석꾼의 위용을 자랑하며, 임청각의 노비가 무려 400여명 되었다고 한다. 석주 이상룡 선생은 독립운동을 위해 만주로 망명하면서 이들 노비를 모두 해방시키고, 만석에 가까운 모든 재산을 독립운동에 투신한다. 이상룡의 독립운동에 대한 일제의 첫번째 조치는 임청각의 정기를 끊기 위해 철도를 놓아버리는 잔혹한 짓을 한다. </span></p><p><span style="font-size:12pt;"><br /></span></p><p><a href="http://xn--289ak2iu9buvke3bs7m0vf.kr/bbs/view_img.php?img=http%3A%2F%2Fwww.xn--289ak2iu9buvke3bs7m0vf.kr%2Fdata%2Feditor%2F2106%2F8f14facfb48854d6658e2a7f04f970c0_1623773238_382.jpg" target="_blank" class="view_image"><img src="http://www.xn--289ak2iu9buvke3bs7m0vf.kr/data/editor/2106/8f14facfb48854d6658e2a7f04f970c0_1623773238_382.jpg" alt="8f14facfb48854d6658e2a7f04f970c0_1623773238_382.jpg" class="img-tag "/></a><span style="font-size:14pt;"> </span></p><p><span style="font-size:12pt;">&lt;이상룡선생의 99칸 임청각이 일제 의해 훼손되고 임청각 앞에는 철도가 놓인다&gt;</span></p><p><br style="clear:both;" /></p><span style="font-size:12pt;"></span><p><span style="font-size:14pt;">이상룡 선생은 1896년 의병활동을 지원하기 시작하여 국권회복운동에 삶 전체를 걸게 된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1만 5천 냥을 들여 정예의병을 창설하지만 의병의 실체가 발각되어 실패하자, 이상룡은 그전까지 유학을 고집하던 것을 버리고 신학문을 받아들이는 동시에 애국계몽운동으로 전환한다. </span></p><p><span style="font-size:12pt;"><br /></span></p><p><span style="font-size:14pt;">그러다가 1910년 강제병합이 이루어지자, 1911년 1월 5일 52세의 나이로 만주로 망명길에 오른다. 그가 망명 과정을 자세히 기록한 망명일기인 『서사록(西徙錄)』에 처음 떠나는 심정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행장을 수습하여 호연히 문을 나서니 여러 일족들이 모두 눈물을 뿌리며 전송하였다”라고 나온다. </span></p><p><span style="font-size:12pt;"><br /></span></p><p><span style="font-size:14pt;">석주 이상룡 선생의 본명은 이상희(李象羲)였다. 만주로 망명하여 이상룡으로 개명하게 된다. 이유는 중국인들과 동화되기 위해서이다. 이상룡은 1910년 일본이 대한제국을 강제로 병합하자, 조선의 선비로서 죽지 못한 것을 후회하면서 “한번의 죽음뿐이다”라는 각오로 1911년 전 가족과 함께 중국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투신한다. </span></p><p><span style="font-size:12pt;"><br /></span></p><p><span style="font-size:14pt;">그리고 석주 이상룡은 중국의 만주 땅을 중국 땅이 아닌 과거 단군 성조와 고구려의 땅으로 인식하였다는 것이다. 이상룡 선생의 손자며느리는 왕산 허위가문의 허은(許銀) 여사였다. </span></p><p><span style="font-size:14pt;">​</span></p><p><span style="font-size:14pt;">허은 여사는 16살의 어린 나이에 이상룡의 손자 이병화와 결혼한다. 허은 여사가 직접 기술한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 독립운동을 위해 만주로 망명하게 되는 것을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span></p><p><span style="font-size:12pt;"><br /></span></p><p><a href="http://xn--289ak2iu9buvke3bs7m0vf.kr/bbs/view_img.php?img=http%3A%2F%2Fwww.xn--289ak2iu9buvke3bs7m0vf.kr%2Fdata%2Feditor%2F2106%2F8f14facfb48854d6658e2a7f04f970c0_1623773042_5175.jpg" target="_blank" class="view_image"><img src="http://www.xn--289ak2iu9buvke3bs7m0vf.kr/data/editor/2106/8f14facfb48854d6658e2a7f04f970c0_1623773042_5175.jpg" alt="8f14facfb48854d6658e2a7f04f970c0_1623773042_5175.jpg" class="img-tag "/></a></p><p><span style="font-size:12pt;">&lt;이상룡선생의 손자며느리,『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저자 허은여사&gt;</span></p><p><br style="clear:both;" /></p><span style="font-size:12pt;"></span><p><span style="font-size:14pt;">“이시영 씨댁은 이 참판댁이라 불렀다. 대대로 높은 벼슬을 많이 하여 지체 높은 집안이다. 여섯 형제분인데 특히 이회영·이시영 씨는 관직에 있을 때도 배일사상이 강하여 비밀결사대의 동지들과 긴밀한 관계를 취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합방이 되자 이동녕 씨 그리고 우리 시할아버지(이상룡)과 의논하여 만주로 망명하기로 했다.”라고 허은 여사는 기록하고 있다.</span></p><p><span style="font-size:12pt;"><br /></span></p><p><span style="font-size:12pt;"><a href="http://xn--289ak2iu9buvke3bs7m0vf.kr/bbs/view_img.php?img=http%3A%2F%2Fwww.xn--289ak2iu9buvke3bs7m0vf.kr%2Fdata%2Feditor%2F2106%2F8f14facfb48854d6658e2a7f04f970c0_1623773345_2452.jpg" target="_blank" class="view_image"><img src="http://www.xn--289ak2iu9buvke3bs7m0vf.kr/data/editor/2106/8f14facfb48854d6658e2a7f04f970c0_1623773345_2452.jpg" alt="8f14facfb48854d6658e2a7f04f970c0_1623773345_2452.jpg" class="img-tag "/></a></span></p><p><span style="font-size:12pt;">&lt;삼한갑족으로 불려질 만큼 조선 최고의 부와 명예를 가진 집안 우당 이회영 6형제&gt;</span></p><p><span style="font-size:12pt;"><br style="clear:both;" /></span></p><p><span style="font-size:14pt;">허은 여사는 일창 허발(一蒼 許坺)의 딸이다. 조부는 범산 허형(凡山 許蘅)이며, 왕산 허위(旺山 許蔿)와는 사촌이 된다. 따라서 석주 이상룡선생의 손자며느리, 허은 여사는 민족시인 이육사(李陸史)의 어머니 허길 여사의 조카가 되는 것이다. 이육사는 퇴계 이황의 14대손이다. 이육사의 광야, 청포도, 절정이라는 위대한 시들은 이러한 시대적 상황과 민족이 직면한 상황을 가슴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span></p><p><span style="font-size:12pt;"><br /></span></p><p><span style="font-size:14pt;"><a href="http://xn--289ak2iu9buvke3bs7m0vf.kr/bbs/view_img.php?img=http%3A%2F%2Fwww.xn--289ak2iu9buvke3bs7m0vf.kr%2Fdata%2Feditor%2F2106%2F8f14facfb48854d6658e2a7f04f970c0_1623773707_0563.jpg" target="_blank" class="view_image"><img src="http://www.xn--289ak2iu9buvke3bs7m0vf.kr/data/editor/2106/8f14facfb48854d6658e2a7f04f970c0_1623773707_0563.jpg" alt="8f14facfb48854d6658e2a7f04f970c0_1623773707_0563.jpg" class="img-tag "/></a><br style="clear:both;" /><span style="font-size:12pt;"> &lt;왕산 허위일가들 대부분은 해외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전생애를 바친다&gt;</span></span></p><p><span style="font-size:14pt;"><br /></span></p><p><span style="font-size:14pt;">구미 임은동 왕산 허위 가문은 독립운동 서훈을 받은 사람만 무려 14명이 된다. 그러나 아직도 독립운동에 참여하고도 그 공로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적지 않은 실정이다. <span style="font-size:14pt;">그렇다면 왕산 허위는 도대체 누구인가? </span></span></p><p><span style="font-size:14pt;"><span style="font-size:14pt;">​</span></span></p><p><span style="font-size:14pt;"><span style="font-size:14pt;">일본이 1896년 명성황후를 시해하자 김천에서 의병을 일으켜 저항하다가 해산했다가 1906년 전국의병인 13도창의군 군사장을 맡다가 이후 대장을 맡아 서울진공작전을 펼치다 작전이 실패하면서 일본군에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 제1호 사형수가 된다. </span></span></p><p><span style="font-size:12pt;"><span style="font-size:12pt;"><br /></span></span></p><p><span style="font-size:14pt;">청송 진보에서 의병을 이끌었던 허씨가문의 맏형, 방산 허훈(舫山 許薰) 그리고 성산 허겸이 모두 허위의 형제들이다. 허씨 가문의 맏형, 허훈은 의병활동과 동생들의 국권회복 운동에 전재산 3천두락(60만평)을 내놓는다. 허위 선생이 사형되고 1910년 일제가 대한제국을 강제병합하자, 허씨 가문의 대부분의 형제들과 가족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 추위와 배고픔이 기다리는 머나먼 만주로 향했다.</span></p><p><span style="font-size:12pt;"><br /></span></p><p><span style="font-size:14pt;">1909년 조선통감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안중근(安重根)의사가 왕산 허위선생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고 한다. “우리 이천만 동포에게 허위와 같은 진충갈력(盡忠竭力) 용맹의 기상이 있었던들 오늘과 같은 국욕(國辱)을 받지 않았을 것이다. 본시 고관이란 제 몸만 알고 나라는 모르는 법이지만, 허위는 그렇지 않았다. 따라서 허위는 관계(官界) 제일의 충신이라 할 것이다.”라고 안중근은 허위를 평가했다. </span></p><p><span style="font-size:12pt;"><br /></span></p><p><span style="font-size:14pt;">이상룡 선생은 1910년 강제 병합되기 이전 1909년 2월 안동경찰서에 끌려가 약 1개월 동안 혹독한 고문과 조사를 받다가 석방된 이후 대한협회 안동지회를 만들고 안동지역 젊은이들에게 독립사상을 고취시킨다. <span style="font-size:14pt;">그러나 대한협회가 친일단체인 일진회와 제휴를 하자 안동지회는 대한협회와 갈등과 충돌을 하면서 더 이상 일제치하에서는 독립운동이 어렵다고 판단한다.</span></span></p><p><span style="font-size:12pt;"><br /></span></p><p><span style="font-size:14pt;">석주 이상룡 일가는 1911년 1월 27일 발거(썰매 수레)를 타고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간다. 석주 이상룡은 압록강을 건너면서 그 감회를 시로 옮긴다. 나라를 되찾겠다고 망명길에 오른 민족의 정신적 지도자는 가슴 저미는 시를 홀로 남기고 떠난다.</span></p><p><span style="font-size:12pt;"><br /></span></p><p><span style="font-size:14pt;">“칼날보다 날카운 삭풍이, 차갑게 살을 도려내네, 내살 도려지는 건 참을 수 있지만, 창자 끊어지는데 어찌 슬프지 않으랴. 이 머리는 차라리 자를 수 있지만, 이 무릎을 꿇어 종이 될 수는 없도다, 누구를 위해 머뭇거릴 것인가, 홀연히 나는 가리라.” </span></p><p><span style="font-size:12pt;"><br /></span></p><p><span style="font-size:12pt;"><a href="http://xn--289ak2iu9buvke3bs7m0vf.kr/bbs/view_img.php?img=http%3A%2F%2Fwww.xn--289ak2iu9buvke3bs7m0vf.kr%2Fdata%2Feditor%2F2106%2F8f14facfb48854d6658e2a7f04f970c0_1623774188_7528.jpg" target="_blank" class="view_image"><img src="http://www.xn--289ak2iu9buvke3bs7m0vf.kr/data/editor/2106/8f14facfb48854d6658e2a7f04f970c0_1623774188_7528.jpg" alt="8f14facfb48854d6658e2a7f04f970c0_1623774188_7528.jpg" class="img-tag "/></a></span></p><p><span style="font-size:12pt;">&lt;안동 천전리의 의성김씨 집성촌인 내앞마을 전경&gt;</span></p><p><span style="font-size:12pt;"><br style="clear:both;" /></span></p><p><span style="font-size:14pt;">이상룡 일가가 도착한 곳은 만주의 횡도촌이다. 이곳에는 이회영 일가와 김대락 일가가 이상룡 일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span style="font-size:14pt;">안동에서 임하댐과 청송방향으로 가다가 왼쪽으로 천전리(川前里)가 나온다. 사람들은 이곳을 내앞 마을이라 부른다. 내앞 마을은 의성김씨 집성촌으로 오래전부터 경상도에서 4대 길지(吉地)로 평가한다.</span></span></p><p><span style="font-size:12pt;"><span style="font-size:12pt;"><br /></span></span></p><p><span style="font-size:12pt;"><span style="font-size:14pt;"><a href="http://xn--289ak2iu9buvke3bs7m0vf.kr/bbs/view_img.php?img=http%3A%2F%2Fwww.xn--289ak2iu9buvke3bs7m0vf.kr%2Fdata%2Feditor%2F2106%2F8f14facfb48854d6658e2a7f04f970c0_1623773789_4647.jpg" target="_blank" class="view_image"><img src="http://www.xn--289ak2iu9buvke3bs7m0vf.kr/data/editor/2106/8f14facfb48854d6658e2a7f04f970c0_1623773789_4647.jpg" alt="8f14facfb48854d6658e2a7f04f970c0_1623773789_4647.jpg" class="img-tag " style="width:641px;"/></a><br style="clear:both;" /> <span style="font-size:12pt;">&lt;백하 김대락의 생가 백하구려와 바위돌, 이 바위돌 위에서 협동학교 교사의 목이 베어진다&gt;</span></span></span></p><p><span style="font-size:12pt;"><span style="font-size:12pt;"><br /></span></span></p><p><span style="font-size:14pt;">이러한 마을 입구에 커다란 고택이 나오는데, 그곳을 보면 백하구려(白下舊廬)라는 큰 글자가 있다. 이것은 백하 김대락의 생가로 “백두산 아래에서 오두막 집을 짓고 살겠다”는 뜻으로 독립운동에 모든 것을 걸겠다는  뜻이 담겨져 있다. 이집에 들어 가면 이집 가문에 대한 독립유공자 서훈이 벽에 가득하다.</span></p><p><span style="font-size:14pt;">​</span></p><p><span style="font-size:14pt;">그</span><span style="font-size:14pt;">래서 김대락은 “백두산 아래”라는 뜻의 호(號)를 백하(白下)를 쓴다. 사실 독립운동사에서 김대락을 일반인들은 잘 들어보지 못한 인물이다. 하지만 백하 김대락을 모르면 독립운동사를 모른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우리 역사에서 독립운동을 이야기하면 김구선생만 떠올리는 것은 우리 역사의 스펙트럼이 이념 대결로 변질되었기 때문이다. </span></p><p><span style="font-size:12pt;"><br /></span></p><p><span style="font-size:14pt;">백하 김대락 선생이 만주로 망명하기 이전 1907년 안동지역 최초로 근대식 학교인 협동학교를 개교했다. 당시 시대의 변화를 받아들인 김대락은 안동 유림뿐만 아니라 영남지역에 커다란 바람을 불러 일으켰다.  <span style="font-size:14pt;">그러나 이러한 새로운 변화를 거부하던 보수유림인 위정척사파들은 협동학교가 있는 김대락 집을 습격하여 협동학교 교사들을 살해하는 참극을 벌인다.</span></span></p><p><span style="font-size:12pt;"><span style="font-size:14pt;">​</span></span></p><p><span style="font-size:12pt;"><span style="font-size:14pt;">아직도 김대락 생가인 백하구려에는 커다란 바위가 있는데, 그 바위 위에 교사들의 목을 자르는 잔인한 짓을 벌였다. <span style="font-size:14pt;">백하 김대락의 여동생 김우락(金宇洛)이 바로 석주 이상룡선생의 부인이다. 혈연으로 얽힌 관계는 훗날 빛나는 독립운동사를 남긴다.</span></span></span></p><p><span style="font-size:12pt;"><span style="font-size:14pt;"><span style="font-size:14pt;">​</span></span></span></p><p><span style="font-size:12pt;"><span style="font-size:14pt;"><span style="font-size:14pt;">따라서 김대락과 이상룡은 처남매부지간으로 독립운동에 뜻을 두고 함께 망명을 결정한다. 김대락 선생은 이상룡선생보다 먼저 만주로 망명을 하게 된다. 김대락 역시 만주를 고조선과 고구려의 땅으로 인식하여 타국이 아니라는 인식이 저변에 깔려 있었다.</span></span></span></p><p><span style="font-size:14pt;"> </span></p><p><span style="font-size:14pt;">김대락은 당시 65세의 노인이었다. 독립운동사에서 그 유명한 김동삼(金東三)이 바로 김대락의 집안 조카였다. 김대락은 아들 김형식과 김동삼을 데리고 망명길에 올랐다. 김대락은 “식민지 땅에서 자손들을 낳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 만삭의 손자며느리도 데리고 간다. </span></p><p><span style="font-size:12pt;"><br /></span></p><p><span style="font-size:14pt;">김대락은 망명길에서 증손자를 보았는데, 식민지가 아닌 중국에서 낳아 통쾌하다는 듯에서 증손자의 이름을 쾌당(快唐)으로 지었고, 둘째 증손자는 고구려 시조의 주몽의 땅에서 태어났다는 뜻에서 기몽(麒夢)으로 지을 정도로 일제를 배척했으며, 김대락은 횡도촌에 학교를 열어 후학들을 양성해 나간다. </span></p><p><span style="font-size:12pt;"><br /></span></p><p><span style="font-size:14pt;">김대락이 죽은 이후 백하의 정신을 계승하는 사람이 바로 집안 조카 일송 김동삼(一松 金東三)과 동산 류인식(東山 柳寅植)이다. 김대락, 이상룡, 김동삼, 류인식은 당시 기존의 유림에서 새로운 시대에 맞는 새로운 신문물과 신학문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사상을 가진 유림을 혁신유림(革新儒林)이라 정의한다. </span></p><p><span style="font-size:12pt;"><br /></span></p><p><span style="font-size:12pt;"><a href="http://xn--289ak2iu9buvke3bs7m0vf.kr/bbs/view_img.php?img=http%3A%2F%2Fwww.xn--289ak2iu9buvke3bs7m0vf.kr%2Fdata%2Feditor%2F2106%2F8f14facfb48854d6658e2a7f04f970c0_1623773972_3997.jpg" target="_blank" class="view_image"><img src="http://www.xn--289ak2iu9buvke3bs7m0vf.kr/data/editor/2106/8f14facfb48854d6658e2a7f04f970c0_1623773972_3997.jpg" alt="8f14facfb48854d6658e2a7f04f970c0_1623773972_3997.jpg" class="img-tag "/></a></span></p><p><span style="font-size:12pt;">&lt;일제의 국권침탈이후 안동출신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들이며, 대표적인 혁신유림&gt;</span></p><p><span style="font-size:14pt;"> <br style="clear:both;" /></span></p><p><span style="font-size:14pt;">김대락의 또 다른 여동생 김락(金洛)은 예안의병을 일으킨 퇴계 이황의 후손인 향산 이만도(響山 李晩燾)의 며느리가 된다. 향산 이만도는 퇴계 이황의 11대 손으로 1866년 장원급제 하여 벼슬생활을 하다가 1895년 명성황후 시해와 단발령이 시행되자 의병을 일으킨다. </span></p><p><span style="font-size:14pt;">​</span></p><p><span style="font-size:14pt;">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을사5적의 죄상과 을사늑약을 폐기해야 한다는 통렬한 상소문을 올리고 영양 일월산으로 들어가 산나물을 뜯어 먹고 살았다. <span style="font-size:14pt;">1910년 8월 29일(경술국치) 나라가 완전히 일본으로 넘어갔다는 소식을 접하자 절명 단식에 들어간다. </span></span></p><p><span style="font-size:14pt;"><span style="font-size:14pt;">​</span></span></p><p><span style="font-size:14pt;"><span style="font-size:14pt;">향산 이만도는 그냥 예사 선비가 아니었다. 안동지역의 유림을 대표하는 사람이었기에 만약 이만도가 죽는다면 일본으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정치적 상황이 발생한다고 판단했다.</span></span></p><p><span style="font-size:12pt;"><span style="font-size:12pt;"><br /></span></span></p><p><span style="font-size:12pt;"><span style="font-size:12pt;"><a href="http://xn--289ak2iu9buvke3bs7m0vf.kr/bbs/view_img.php?img=http%3A%2F%2Fwww.xn--289ak2iu9buvke3bs7m0vf.kr%2Fdata%2Feditor%2F2106%2F8f14facfb48854d6658e2a7f04f970c0_1623774763_4575.jpg" target="_blank" class="view_image"><img src="http://www.xn--289ak2iu9buvke3bs7m0vf.kr/data/editor/2106/8f14facfb48854d6658e2a7f04f970c0_1623774763_4575.jpg" alt="8f14facfb48854d6658e2a7f04f970c0_1623774763_4575.jpg" class="img-tag " style="width:534px;"/></a></span></span></p><p><span style="font-size:12pt;"><span style="font-size:12pt;">&lt;향산 이만도선생의 절명단식 순국유허비&gt;</span></span></p><p><span style="font-size:12pt;"><span style="font-size:12pt;"><br style="clear:both;" /></span></span></p><p><span style="font-size:14pt;">그래서 일본은 강제로 이만도에게 음식을 먹이려고 했다. 그러나 이만도는 일본의 폭력과 회유에 끝까지 굴복하지 않고 끝내 절명단식으로 죽는다. 이만도의 절명단식은 안동 많은 사람들에게 독립운동에 대한 도화선이 되었던 것이다. 이만도의 며느리가 바로 김대락의 여동생 김락이었던 것이다. </span></p><p><span style="font-size:14pt;">  </span></p><p><span style="font-size:14pt;">이만도의 죽음을 목격한 아들 이중업(李中業)과 손자 이동흠(李棟欽) 그리고 며느리 김락은 이후부터 모든 삶을 독립운동에 투신한다. 이만도의 죽음은 퇴계이황의 후손들뿐만 아니라 안동전체에 독립에 대한 의지와 행동을 불러 일으킨다. 이만도의 죽음은 조선 선비의 마지막 자존심이 죽은 것이나 다름없었다.</span></p><p><span style="font-size:14pt;"><span style="font-size:14pt;">​</span></span></p><p><span style="font-size:14pt;"><span style="font-size:14pt;">김대락의 여동생 김락은 57세의 나이로 비밀리에 독립운동을 후원하고, 만세시위를 주도하다가 경찰에 체포되어 경찰의 잔혹한 고문으로 두 눈을 잃게 된다. 죽은 자보다 살아남은 자의 고통은 보지 않아도 눈에 들어 올 것이다.삶 그 자체가 고통이었을 것이다.</span></span></p><p><span style="font-size:12pt;"><br /></span></p><p><span style="font-size:14pt;">이상룡과 김대락이 망명한 이후 국내에서는 데라우치 암살사건이라는 명목으로 “105인 사건”이 발생시켜 독립운동에 투신할 많은 사람들을 강제로 투옥시키고, 혹독하면서도 잔인한 고문가하면서 국내뿐만 아니라 국외의 국권회복 운동은 시련을 맞이하게 되었다. </span></p><p><span style="font-size:14pt;"><br /></span></p><p><span style="font-size:14pt;">따라서 독립운동에 투신할 많은 사람들에게 독립에 대한 의지와 행동을 좌절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이상룡·이회영·김대락은 독립운동에 대한 많은 지원과 동력을 잃게 되는 상황이 벌어진다.</span></p><p><span style="font-size:12pt;"><br /></span></p><p><a href="http://xn--289ak2iu9buvke3bs7m0vf.kr/bbs/view_img.php?img=http%3A%2F%2Fwww.xn--289ak2iu9buvke3bs7m0vf.kr%2Fdata%2Feditor%2F2106%2F8f14facfb48854d6658e2a7f04f970c0_1623774924_6931.jpg" target="_blank" class="view_image"><img src="http://www.xn--289ak2iu9buvke3bs7m0vf.kr/data/editor/2106/8f14facfb48854d6658e2a7f04f970c0_1623774924_6931.jpg" alt="8f14facfb48854d6658e2a7f04f970c0_1623774924_6931.jpg" class="img-tag "/></a></p><p><span style="font-size:12pt;">&lt;일본이 신민회의 간부들을 체포하기 위해 조작한 105인 사건&gt;</span></p><p><br style="clear:both;" /></p><span style="font-size:12pt;"></span><p><span style="font-size:14pt;">그리고 또 다른 문제가 발생하는데, 그것은 횡도촌에서 조선인들이 중국인들과 토지 매입 등으로 커다란 갈등이 발생한다. 문제가 심각져 가자, 우당 이회영이 청나라 조정의 실력자들을 설득시켜 토지매입 문제를 해결해 나간다. </span></p><p><span style="font-size:14pt;"><br /></span></p><p><span style="font-size:14pt;">이회영의 노력으로 조선인들은 봉천성 삼원보를 옮겨 간다. 그리고 새 보금자리에 조선인 2000호가 자리 잡게 되고, 이상룡·이회영·김대락은 실질적인 삼원보의 우뚝한 지도자들이었다. 그리고 지도자답게 이들은 경학사(耕學社)를 설립한다. 교육이 독립의 첫길이며, 끝이라고 생각했다.</span></p><p><span style="font-size:12pt;"><br /></span></p><p><span style="font-size:14pt;">경학사는 “낮에는 농사를 짓는 농본주의와 밤에는 공부하는 주경야독”을 표방했다. 이상룡은 “아아! 사랑할 것은 한국이요, 슬픈 것은 한민족이로구나!”시작하면서 조선인들의 미래의 목표는 반드시 독립이라는 것을 천명한다.</span><br /><span style="font-size:14pt;">  </span><br /><span style="font-size:14pt;">1911년 4월 경학사를 결성한 망명객들은 독립운동을 전개할 독립군 양성을 위해 무관학교 건설에 박차를 가한다. 망명객들은 옥수수 창고를 빌려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를 개교한다.처음에는 신흥강습소로 출발한다. 신흥강습소는 다시 신흥무관학교로 탈바꿈하게 된다. 신민회(新民會)의 신(新)과 다시 일어선다는 흥(興)을 합쳐 신흥무관학교가 탄생하는 것이다.</span></p><p><span style="font-size:12pt;"><br /></span></p><p><a href="http://xn--289ak2iu9buvke3bs7m0vf.kr/bbs/view_img.php?img=http%3A%2F%2Fwww.xn--289ak2iu9buvke3bs7m0vf.kr%2Fdata%2Feditor%2F2106%2F8f14facfb48854d6658e2a7f04f970c0_1623775149_7181.jpg" target="_blank" class="view_image"><img src="http://www.xn--289ak2iu9buvke3bs7m0vf.kr/data/editor/2106/8f14facfb48854d6658e2a7f04f970c0_1623775149_7181.jpg" alt="8f14facfb48854d6658e2a7f04f970c0_1623775149_7181.jpg" class="img-tag "/></a></p><p><span style="font-size:12pt;">&lt;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은 청산리, 봉오동전투, 의열단원으로 활동 했다&gt;</span><span style="font-size:12pt;"> </span></p><span style="font-size:12pt;"></span><p><span style="font-size:12pt;">​</span></p><p><span style="font-size:14pt;"><span style="font-size:14pt;">만주벌판에서 독립의 의지를 불태우던 김대락은 독립의 의지를 불태우다가, 1914년 12월 10일 따뜻한 조국의 품이 아닌 만리타향에서 차디찬 삭풍을 맞으며 죽는다. 김대락이 남긴『백하일기』는 만주에 망명하여 정착하는 과정을 세밀하게 기록하여 아주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span></span></p><p><span style="font-size:12pt;"><br /></span></p><p><span style="font-size:14pt;">석주 이상룡과 우당 이회영은 당시 조선 팔도에서 알아주는 갑부들이었다. 그리고 대대로 조선의 대표하는 명문가 반열에 올라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일제의 식민통치가 시작되자, 모든 부귀영화를 한 순간에 버리고, 빼앗긴 조국을 되찾는 밀알이 되고자 얼어붙은 땅을 향하여 거침없이 달려갔다. 살을 도려내는 추위가 기다리는 만주벌판에서 그들은 독립을 위해 삶 전체를 바친다.</span></p><p><span style="font-size:12pt;"><br /></span></p><p><span style="font-size:14pt;">허은 여사는 1932년 5월 시조부인 이상룡 선생이 조국의 품이 아닌 순국하자, 시조모 김우락과 시어머니 이중숙을 모시고 귀국길에 오른다. 허은 여사가 돌아 온 조국에서의 삶, 또한 만주벌판 못지 않은 혹독한 어려움이 기다리고 있었다. 일제의 감시하에 숨어지내면서 생계를 해결해야 했기 때문에 상상만해도 끔직한 일이었다. </span></p><p><span style="font-size:14pt;">​</span></p><p><span style="font-size:14pt;">조선 최고의 부자 며느리들이 조국을 되찾겠다는 민족의 지도자의 의지와 노력 때문에 그렇게 여자들은 삶이 아닌 삶으로 자기를 희생하면서 살았던 것이다. <span style="font-size:14pt;">일제치하에서 독립운동가 가족들이 환영받을리 없었는 것은 당연했고 항상 감시의 대상이었다. 독립운동은 그야말로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가장 혹독한 삶이었기 때문이다.</span></span></p><p><span style="font-size:12pt;"><br /></span></p><p><span style="font-size:12pt;"><span style="font-size:14pt;">​<a href="http://xn--289ak2iu9buvke3bs7m0vf.kr/bbs/view_img.php?img=http%3A%2F%2Fwww.xn--289ak2iu9buvke3bs7m0vf.kr%2Fdata%2Feditor%2F2106%2F8f14facfb48854d6658e2a7f04f970c0_1623776168_4736.jpg" target="_blank" class="view_image"><img src="http://www.xn--289ak2iu9buvke3bs7m0vf.kr/data/editor/2106/8f14facfb48854d6658e2a7f04f970c0_1623776168_4736.jpg" alt="8f14facfb48854d6658e2a7f04f970c0_1623776168_4736.jpg" class="img-tag "/></a></span></span></p><p><span style="font-size:12pt;"><span style="font-size:14pt;"><span style="font-size:12pt;">&lt;6형제 중 유일하게 살아서 귀국하여 초대 부통령을 역임한 이시영선생&gt;</span> </span></span></p><p><span style="font-size:12pt;"><span style="font-size:14pt;">​</span></span></p><p><span style="font-size:12pt;"><span style="font-size:14pt;">1945년 해방이 되고 1948년 이승만 정부가 들어서자, 이러한 이회영·이시영 6형제들이 독립운동에 기여한 막대한 공로가 인정되어 이시영은 초대 부통령이 된다. 그리고 이승만대통령은 이시영에게 독립운동에 바친 6형제의 전 재산을 정부차원에서 돌려주겠다는 의견을 이시영부통령에게 묻는다.</span></span></p><p><span style="font-size:12pt;"><span style="font-size:14pt;">​</span></span></p><p><span style="font-size:12pt;"><span style="font-size:14pt;">이시영부통령의 답변은 “재산을 되찾으려고 형님들께서 독립운동 한 것이 아닙니다.”하고 단호히 거절한다. 그리고 이시영은 부통령은 이승만의 독재에 가까운 정치와 정치적 노선이 다르자, 부통령직에서 사임한다. 우당 이회영 형제들의 재산은 현재 돈의 가치로 환산할 수가 없을 정도이다. 당시 경기도 양평 땅 대부분이었다고 한다.</span></span></p><p><span style="font-size:12pt;"><span style="font-size:12pt;"><br /></span></span></p><p><span style="font-size:14pt;"><span style="font-size:14pt;">1990년 독립운동에 전재산과 전가족을 받쳐던 이상룡선생의 유해가 조국의 품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이상룡의 손자 이병화(李炳華)선생이 독립운동에 기여한 공이 인정되어 독립장에 추서된다. </span></span></p><p><span style="font-size:14pt;"><span style="font-size:14pt;">​</span></span></p><p><span style="font-size:14pt;"><span style="font-size:14pt;">상상만해도 아무나 할 수 없는 일들을 같은 하늘아래 숨쉬었던 사람들이 했었다. 나라를 팔아먹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팔아 먹은 나라를 되찾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도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span></span></p><p><span style="font-size:14pt;"><span style="font-size:14pt;">​</span></span></p><p><span style="font-size:14pt;"><span style="font-size:14pt;">이 나라에서 태어나고 살아 남은 자로서 나라를 위해 이들의 숭고한 희생과 업적을 적어도 기억하고 존경하는 것이 살아 숨쉬는 자의 몫이 아닐까 한다.</span> </span></p><p><br /></p><p><span style="font-size:14pt;"><br /></span></p>]]></description>
	<dc:creator>이순락기자</dc:creator>
		<dc:date>Wed, 16 Jun 2021 00:58:42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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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김기훈의 역사와 인물】김승동 송덕비(金升東 頌德碑)를 찾아가다.</title>
	<link>http://xn--289ak2iu9buvke3bs7m0vf.kr/bbs/board.php?bo_table=03004&amp;wr_id=119</link>
	<description><![CDATA[<p> </p><p><a href="http://xn--289ak2iu9buvke3bs7m0vf.kr/bbs/view_img.php?img=http%3A%2F%2Fwww.xn--289ak2iu9buvke3bs7m0vf.kr%2Fdata%2Feditor%2F2106%2F0e9de8543db2611cfa2b6eb5886b5765_1622531660_5115.jpg" target="_blank" class="view_image"><img itemprop="image" content="http://www.xn--289ak2iu9buvke3bs7m0vf.kr/data/editor/2106/0e9de8543db2611cfa2b6eb5886b5765_1622531660_5115.jpg" src="http://www.xn--289ak2iu9buvke3bs7m0vf.kr/data/editor/2106/0e9de8543db2611cfa2b6eb5886b5765_1622531660_5115.jpg" alt="0e9de8543db2611cfa2b6eb5886b5765_1622531660_5115.jpg" class="img-tag "/></a></p><p><span style="font-size:14pt;">​<span style="font-size:12pt;">&lt;필자: 경북대 정치학박사, 현재 농부와 칼럼리스트로 활동 중&gt;</span></span></p><p><span style="font-size:14pt;">​</span></p><p><span style="font-size:14pt;">영남의 명산이며 구미의 상징이라면 당연히 금오산이다. 그리고 여기에 덧붙이자면 금오산을 한층 더 빛내는 것이 있다면 단언컨대 금오산저수지 일 것이다. 아마도 금오산저수지는 금오산의 화룡점정(畫龍點睛)이라 말할 수 있다. </span></p><p><br /></p><p><a href="http://xn--289ak2iu9buvke3bs7m0vf.kr/bbs/view_img.php?img=http%3A%2F%2Fwww.xn--289ak2iu9buvke3bs7m0vf.kr%2Fdata%2Feditor%2F2106%2F0e9de8543db2611cfa2b6eb5886b5765_1622531731_1257.jpg" target="_blank" class="view_image"><img src="http://www.xn--289ak2iu9buvke3bs7m0vf.kr/data/editor/2106/0e9de8543db2611cfa2b6eb5886b5765_1622531731_1257.jpg" alt="0e9de8543db2611cfa2b6eb5886b5765_1622531731_1257.jpg" class="img-tag "/></a> </p><p><span style="font-size:12pt;">&lt;금오산을 더욱 아름답게 만드는 금오산 저수지 모습&gt;</span></p><p><span style="font-size:14pt;">​</span><br /><span style="font-size:14pt;">금오산은 시민들에게 힐링과 깨끗한 자연환경을 사시사철 제공하기 때문에 구미시민들은 거룩하고 위대한 금오산을 사랑하고 아끼지 않을 수 없다. 또 한편 금오산은 조선 성리학의 출발점이라는 위대한 철학적·역사적 위상을 가지고 있다고 하겠다. </span></p><p><span style="font-size:14pt;">​</span><br /><span style="font-size:14pt;">금오산을 더더욱 빛내고 있는 금오산저수지는 1947년 대한민국이 일본으로부터 해방된 이후에 준공된다. 이 금오산 저수지를 처음 계획하고 준공한 사람이 바로 김승동(金升東) 구미면장이다.  필자가 사는 동네 들성마을에서는 그분을 “주사할배”라고 불렀다. 이유는 그의 첫 벼슬이 주사(主事)였기 때문이다.</span></p><p><span style="font-size:14pt;">​</span><br /><span style="font-size:14pt;">김승동은 1878년(고종 15년)에 교관 김인원(敎官 金麟遠)의 아들로 고아읍 원호리  들성마을에서 태어난다. 김승동의 12대 조부가 바로 금오산 저수지를 정면으로 내려다보는 곳에 잠들어 계시는 조선 최고의 청백리로 일컬어지는 구암 김취문(久庵 金就文)선생이다. </span></p><p><span style="font-size:14pt;">​</span><br /><span style="font-size:14pt;">김승동은 고종이 대한제국의 황제로 있을 때 주사(主事) 시험에 급제하여, 첫 발령지가 충청남도 관찰부 주사(9품)로 벼슬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시간이 흘러 경상도관찰부 주사(道觀察部 主事)로 벼슬생활을 하다가 6품 승훈랑(承訓郞)으로 승진한다.</span></p><p><span style="font-size:14pt;">​</span><br /><span style="font-size:14pt;">그러나 1905년 을사늑약과 1910년 일본이 대한제국을 강제로 병합함으로써 대한제국에서 벼슬하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본의 식민통치체제로 편입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 대체적인 시류였고 역사였다. 간혹 벼슬을 버리고 독립운동에 투신하는 일도 있었지만, 대부분 식민통치 체제 속으로 편입되어 간 것이 우리의 역사이다.</span></p><p><span style="font-size:14pt;">​</span><br /><span style="font-size:14pt;">김승동 역시 이 시류와 무관하지 않게 일제치하에서 벼슬을 할 수밖에 없는 길을 간다. 그러나 김승동은 나름대로의 식민지에 살고 있었던 사람들에게 무엇을 해야 한다는 사명감마저는 잃지 않았다. 그것은 바로 식민지통치하에 신음하고 있던 많은 사람들에게 벼슬아치로서 베푸는 삶을 선택한다. </span></p><p><span style="font-size:14pt;">​</span><br /><span style="font-size:14pt;">당시 구미는 행정단위 상 “면(面)”이었다. 김승동은 구미면장을 20년간 재직하면서 많은 봉사와 구미가 직면한 일들을 하는 것이 식민지 치하에서 고통 받는 구미 사람들에게 본인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span></p><p><span style="font-size:14pt;"> </span><br /><span style="font-size:14pt;"> 당시 구미는 아주 보잘 것 없는 농촌의 시골이었다. 따라서 농사를 주업으로 삼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농사에 필수적인 것은 땅과 물이다. 지금의 구미는 관개시설이 제대로 되어 있어 어디를 가던 물이 풍부하지만, 당시로서는 관개시설은 고사하고 물도랑 하나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았다.</span></p><p><span style="font-size:14pt;">​</span><br /><span style="font-size:14pt;">농사를 짓는 농부들에게 물이 제대로 공급 된다는 것은 대단한 하늘의 축복이면서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일이었다. 오죽하면 “자식 입에 밥 들어가는 것과 논에 물 들어가는 것이 제일 좋다!”고 했을까? 금오산 폭포의 이름이 대혜폭포이다. 이렇게 이름지은 것은 금오산의 물로 사람들이 큰 은혜를 입었다고 해서 대혜(大惠)폭포로 이름지어졌다고 하겠다.</span></p><p><span style="font-size:14pt;">​</span><br /><span style="font-size:14pt;">이러한 사정을 잘 알던 김승동 면장은 금오산에서 내려오는 물을 농사에 이용하기 위해서 금오산 저수지를 건설할 계획을 세우고, 그가 20년간 재직하는 동안 저수지 완공을 목표로 지속적으로 노력과 실행을 감행한다. 보통 사람들 같으면 그냥 일제 치하에서 자리만 차지하고 앉아 수탈에만 앞장 섰을 것이다. 그러나 김승동은 그렇지 않았다.</span></p><p><span style="font-size:14pt;">​</span><br /><span style="font-size:14pt;">금오산저수지 둑 공사는 1945년 해방이 된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추진되어 1947년에 준공된다. </span><br /><span style="font-size:14pt;">그리고 1947년 준공된 이후 이것을 기념하기 위해서 구미면민들은 표지석 세운다. 당시 구미사람들은 저수지 완공 공사를 금오제(金烏堤 금오산저수지 둑) 완공 공사로 표기했었다.</span></p><p><br /></p><p><a href="http://xn--289ak2iu9buvke3bs7m0vf.kr/bbs/view_img.php?img=http%3A%2F%2Fwww.xn--289ak2iu9buvke3bs7m0vf.kr%2Fdata%2Feditor%2F2106%2F0e9de8543db2611cfa2b6eb5886b5765_1622531770_334.jpg" target="_blank" class="view_image"><img src="http://www.xn--289ak2iu9buvke3bs7m0vf.kr/data/editor/2106/0e9de8543db2611cfa2b6eb5886b5765_1622531770_334.jpg" alt="0e9de8543db2611cfa2b6eb5886b5765_1622531770_334.jpg" class="img-tag "/></a> </p><p><span style="font-size:14pt;">&lt;1947년 금오산 저수지 준공 기념 표지석&gt;</span></p><p><span style="font-size:14pt;">​</span></p><p><span style="font-size:14pt;">금오산 저수지가 완공되어 농사를 짓는 많은 사람들에게 해택이 돌아가자, 구미 면민들은 구미 면 4곳에 구미면장 김승동 송덕비(龜尾面長 金昇東 頌德碑)를 세운다. 안타깝게도 구미가 급성장하면서 4개 중 3개는 사라지고, 지금은 한 개만 남아 뒹굴고 있는 것을 그의 묘 앞으로 옮겨 놓은 실정이다.</span></p><p><span style="font-size:14pt;">​</span><br /><span style="font-size:14pt;">​<a href="http://xn--289ak2iu9buvke3bs7m0vf.kr/bbs/view_img.php?img=http%3A%2F%2Fwww.xn--289ak2iu9buvke3bs7m0vf.kr%2Fdata%2Feditor%2F2106%2F0e9de8543db2611cfa2b6eb5886b5765_1622531794_4891.jpg" target="_blank" class="view_image"><img src="http://www.xn--289ak2iu9buvke3bs7m0vf.kr/data/editor/2106/0e9de8543db2611cfa2b6eb5886b5765_1622531794_4891.jpg" alt="0e9de8543db2611cfa2b6eb5886b5765_1622531794_4891.jpg" class="img-tag "/></a></span></p><p><span style="font-size:12pt;">&lt;김승동 면장 송덕비&gt;</span></p><p><br /></p><p><span style="font-size:14pt;">             <a href="http://xn--289ak2iu9buvke3bs7m0vf.kr/bbs/view_img.php?img=http%3A%2F%2Fwww.xn--289ak2iu9buvke3bs7m0vf.kr%2Fdata%2Feditor%2F2106%2F0e9de8543db2611cfa2b6eb5886b5765_1622532017_3246.png" target="_blank" class="view_image"><img src="http://www.xn--289ak2iu9buvke3bs7m0vf.kr/data/editor/2106/0e9de8543db2611cfa2b6eb5886b5765_1622532017_3246.png" alt="0e9de8543db2611cfa2b6eb5886b5765_1622532017_3246.png" class="img-tag "/></a> </span></p><p><a href="http://xn--289ak2iu9buvke3bs7m0vf.kr/bbs/view_img.php?img=http%3A%2F%2Fwww.xn--289ak2iu9buvke3bs7m0vf.kr%2Fdata%2Feditor%2F2106%2F0e9de8543db2611cfa2b6eb5886b5765_1622532029_5003.png" target="_blank" class="view_image"><img src="http://www.xn--289ak2iu9buvke3bs7m0vf.kr/data/editor/2106/0e9de8543db2611cfa2b6eb5886b5765_1622532029_5003.png" alt="0e9de8543db2611cfa2b6eb5886b5765_1622532029_5003.png" class="img-tag "/></a> </p><p><span style="font-size:14pt;"><span style="font-size:12pt;">&lt;당시 매일신보에 실린 김승동면장 공덕비 기사&gt; </span>            </span><br /><span style="font-size:14pt;">                   </span></p><p><span style="font-size:14pt;">당시 신문에 난 기사를 해석하면 “경상북도 선산군 구미면장(龜尾面長) 김승동(金升東)씨는 在職 중년에 치적(治績)이 우량(優良)할 뿐만아니라 면내(面內) 빈민(貧民)132호(戶)에 대하여, 양차(兩次)호세(戶稅)를 대납(代納)하는 등 특별한 뜻을(特志)를 시(施)함이 한(一)둘(二)에 그치지(止)치 아니함으로 면내 面民有志의 발의(發議)에 의하야, 면내 주요지역 4개소(面內主要地 4開處)에 좌측의 기록문(左 記文)과 같은(如한) 송덕비(頌德碑)를 건설하고, 앞으로(今後) 앞에 있는 이름 김승동(一層氏)을 흠모(欽慕)한다는 뜻(意)을 표(表 )하였다더라.”였다. </span></p><p><br /><span style="font-size:14pt;">​김승동의 첫 번째 손꼽을 일이 금오산 저수지 준공이라면 두 번째 손꼽을 일은 바로 금오산 절벽에 있는 도선굴에 사람이 왕래 할 수 있도록 길을 열었다는 것이다. 지금이야, 도선굴에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지만, 옛날 당시로서는 많은 사람들이 다치고 죽는 경우가 비일비재하게 발생했다. 당시 절벽 속의 도선굴로 사람들이 가려면, 아무 장비도 없는 상태에서 목숨을 담보로 엉금엄금 기어서 조금씩 갔다고 한다. </span></p><p><br /></p><p><span style="font-size:14pt;">사람들이 도선굴에 오르는 것이 이래서는 안되겠다고 마음먹은 김승동 면장은 이러한 모습들을 보고 도선굴에 오르는 구미 사람들의 안전을 위해 길을 만들고 안전장치를 설치하였다. 그리고 그는 도선굴 앞에 금오산굴통로기(金烏山窟通路記)라는 작은 비석을 하나 세운다. 짧은 글 속에 금오산에 대한 생각을 김승동은 명문장으로 금오산의 역사와 감회를 비석에 새긴다. 그 내용을 해석하면 다음과 같다.</span></p><p><br /></p><p><span style="font-size:14pt;">"금오산(金烏山)은 선산(善山) 고을의 진산(鎭山)이다. 선산읍 남쪽 40리에 있는데, 옛 고려(高麗) 말기에 야은(冶隱 : 吉再) 선생이 고려에 대한 망복(罔僕)의 절개를 지키기 위해 귀향하여 금오산 아래 은거(隱居)하였으니, 이로부터 더욱 드러나게 되었다.</span></p><p><br /></p><p><span style="font-size:14pt;">상전하는 바, 대각국사(大覺國師)가 이 산을 보고 중국의 숭산(嵩山)과 흡사하다 하여 남숭산(南嵩山)이라 하였는데, 산에 기이하고 절묘한 경치가 많다. 그 중간쯤에 작은 물줄기가 떨어지는 거대한 폭포(대혜폭포)가 있어, 온 산의 물이 모여 흘러드는 까닭에 폭포가 떨어지는 곳이 자연히 못(潭)이 되었다.</span></p><p><span style="font-size:14pt;"> </span></p><p><span style="font-size:14pt;">절벽 아래로 가늘게 떨어지는 높이가 수백 척이나 되니, 물의 량은 적으나 그 형세는 높아 물줄기가 흩어지며 떨어지는 형상이다. 그 옆에 거대한 혈(穴:굴)이 절벽의 3분의 2 지점 높이에 있어 위로 바라볼 수 있으나, 절벽을 타고 오르기는 불가하여 매번 이곳을 노니는 사람들의 한탄이 되었다.</span></p><p><br /></p><p><span style="font-size:14pt;">​&lt;선산군지 善山郡誌&gt; 기록에 의하면 옛적 도선(道詵)이라는 스님이 이 굴 속에 거처하며 수도하였다 하고, 그 뒤에 나의 선조 욕담(浴潭)선생이 또한 임진왜란 때 이 도선굴에서 피란하셨다. 일찍이 대혜폭포 아래 못에 목욕하시며 스스로 호(號)를 욕담(浴潭)이라 하여 이끼 낀 절벽에 두 글자를 새겼는데, 지금도 그 흔적이 완연하다. 더욱이 당시에 어떻게 절벽 한 가운데 위치한 굴속으로 드나들었는지 알 수 없다.</span></p><p><br /></p><p><span style="font-size:14pt;">정축년(1937) 봄에 내가 길을 만들자는 뜻을 발의하니, 모두들  의론을 함께하였다. 이에 절벽 옆으로 암석을 깎아 잔도(棧道)를 만들고 쇠줄로 난간을 설치하여 굴로 통하게 하였으니, 헤아려보건대 높이 21척, 넓이 24척, 길이 25척으로 굴 안에는 기와 조각, 쇠그릇 등이 아직까지 묻혀있어 옛 사람의 자취를 믿을 수 있었다.</span></p><p><br /><span style="font-size:14pt;">그러하나 산의 형세가 어찌 변하겠는가? 일을 벌이기 좋아하는 호사자(好事者)의 훼손인가? 모두가 알지 못할 것이리라. 길이 이미 관통하게 되자 시인(詩人:騷人)과 유람객(翫客)들의 왕래가 끊이지 않아 마침내 한 구역 승경(勝景)을 더하게 되었다.</span></p><p><span style="font-size:14pt;"> </span></p><p><span style="font-size:14pt;">모두 말하기를 "이 공(功)에 기록이 없을 수 없다." 하기로, 내가 면장(面長:구미면장)의 직책에 있으면서 실지로 이 일을 맡아서 감독하였기에 곧 돌에 새겨 기록을 남겨 뒷날 올라오는 사람에게 보이기 위함이니, 명승지를 보호하는 하나의 역사라고 하겠다. 구미 면장(面長) 김승동(金升東) 기록함."</span></p><p><br /></p><p><a href="http://xn--289ak2iu9buvke3bs7m0vf.kr/bbs/view_img.php?img=http%3A%2F%2Fwww.xn--289ak2iu9buvke3bs7m0vf.kr%2Fdata%2Feditor%2F2106%2F0e9de8543db2611cfa2b6eb5886b5765_1622531823_4362.jpg" target="_blank" class="view_image"><img src="http://www.xn--289ak2iu9buvke3bs7m0vf.kr/data/editor/2106/0e9de8543db2611cfa2b6eb5886b5765_1622531823_4362.jpg" alt="0e9de8543db2611cfa2b6eb5886b5765_1622531823_4362.jpg" class="img-tag "/></a> </p><p><span style="font-size:12pt;">&lt;금오산 도선굴 앞에 있는 김승동면장의 금오산굴통로기(金烏山窟通路記)비문&gt;</span></p><p><br /></p><p><span style="font-size:14pt;">김승동의 세 번째 손꼽을 일은 바로 면장으로 재직하면서 장학사업과 많은 빈민들의 세금감면과 구휼활동이었다. 당시 일제 치하에서 김승동은 젊은이들이 학업을 게을리 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에 많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당시 김승동의 교육에 대해 상당한 관심과 노력으로 많은 인재들을 배출되었다고 사람들의 입으로 전해 오고 있다.</span></p><p><br /></p><p><span style="font-size:14pt;">김승동은 어쩌면 식민지 조국에서 어떻게 하면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과 혜택을 줄 것인가를 깊이 있게 고민했다고 하겠다. 이렇게 사람들을 돕는 것이, 김승동 자기 자신만의 독립운동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라고 필자는 추측해 본다. 지금 현재 김승동 면장의 증손녀 김정숙씨는 서울대 약학과를 거쳐 미국 워싱턴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하버드에서 객원교수를 거쳤다. 그리고 노무현 대통령 때 식품의약품안전청 청장을 역임했다. </span></p><p><br /></p><br /><br />]]></description>
	<dc:creator>이순락기자</dc:creator>
		<dc:date>Tue, 01 Jun 2021 15:39:53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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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김기훈의 역사와 인물】 역사적 비극의 중심에 있었던 신천강씨(信川康氏)를 찾아가다.</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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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a href="http://xn--289ak2iu9buvke3bs7m0vf.kr/bbs/view_img.php?img=http%3A%2F%2Fwww.xn--289ak2iu9buvke3bs7m0vf.kr%2Fdata%2Feditor%2F2101%2F9f565315ada2f1ddd9722527613d3ffc_1610107812_4008.jpg" target="_blank" class="view_image"><img itemprop="image" content="http://www.xn--289ak2iu9buvke3bs7m0vf.kr/data/editor/2101/9f565315ada2f1ddd9722527613d3ffc_1610107812_4008.jpg" src="http://www.xn--289ak2iu9buvke3bs7m0vf.kr/data/editor/2101/9f565315ada2f1ddd9722527613d3ffc_1610107812_4008.jpg" alt="9f565315ada2f1ddd9722527613d3ffc_1610107812_4008.jpg" class="img-tag "/></a><br style="clear:both;" /><span style="font-size:12pt;">&lt;필자: 경북대 정치학박사, 前구미회 부회장, 새로넷방송 시청자위원&gt;</span><br style="clear:both;" /><p><br /></p><p><span style="font-size:14pt;">언젠가 TV에서 고려말, 조선건국 과정을 소설적으로 그린 “육룡이 나르샤” 드라마가 방영된 적이 있었다. 필자는 이 드라마에서 삼한 제일 검, 이방지를 비롯하여 고려 최고의 검법인 곡산검법의 소유자인 척사광, 그리고 조선 제일 검의 소유자 무휼이 나와서 드라마 속에서 그들의 무술 실력을 겨루는 것을 한 때 재미있게 보았다.</span></p><p><span style="font-size:14pt;"><br /></span></p><p><span style="font-size:14pt;">여기서 분명한 역사적 사실은 실제로 곡산검법이 있었다는 것이다. 곡산검법은 고려시대 최고의 장군이며, 최고의 무술가인 척준경(拓俊京)이 사용한 검법이 바로 곡산검법이다. 그리고 곡산 척씨의 시조가 바로 척준경 장군이다. 실제로 척준경 장군은 놀라운 검술 실력으로 검신(劍神)으로 불려졌다. 곡산검법을 선 보인 척사광은 척준경장군의 4대손이다.</span></p><p><span style="font-size:14pt;"><br /></span></p><p><span style="font-size:14pt;"><a href="http://xn--289ak2iu9buvke3bs7m0vf.kr/bbs/view_img.php?img=http%3A%2F%2Fwww.xn--289ak2iu9buvke3bs7m0vf.kr%2Fdata%2Feditor%2F2101%2F9f565315ada2f1ddd9722527613d3ffc_1610108004_538.jpg" target="_blank" class="view_image"><img src="http://www.xn--289ak2iu9buvke3bs7m0vf.kr/data/editor/2101/9f565315ada2f1ddd9722527613d3ffc_1610108004_538.jpg" alt="9f565315ada2f1ddd9722527613d3ffc_1610108004_538.jpg" class="img-tag " style="width:463px;"/></a><br style="clear:both;" /><span style="font-size:12pt;">&lt;고려시대 검신으로 불려졌던 곡산검법의 창시자 척준경장군&gt;</span></span></p><p><span style="font-size:14pt;"><br /></span></p><p><span style="font-size:14pt;">곡산(谷山)은 황해도 북동부에 위치한 군으로 신천(信川), 재령(載寧)이라고 하기도 한다. 따라서 곡산 · 신천 · 재령은 동일한 장소이며, 물산이 풍부하여 사람 살기에 좋은 곳이었다. 그래서 신천을 본관으로 하는 신천강씨(信川康氏)가 있다. 신천강씨의 시조는 신라시대 성골장군(聖骨將軍)을 지낸 강호경(康虎景)이며, 중시조는 고려 명종(明宗) 때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낸 강지연(康之淵)이다.</span></p><p><span style="font-size:14pt;"> </span></p><p><span style="font-size:14pt;">재령을 본관으로 하는 재령이씨(載寧李氏)가 있고, 곡산한씨(谷山韓氏) 등이 있다. 모두 역사에서 훌륭한 인물들이 많아 손색없는 명문가의 평가를 받고 있었으며, 현재도 그 평가는 여전하다.</span></p><p><span style="font-size:14pt;"> </span></p><p><span style="font-size:14pt;">특히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李成桂)의 부인 신덕왕후(神德王后)가 신천강씨이다. 고려가 패망한 가장 큰 원인으로는 권문세족의 토지겸병으로 많은 토지가 권문세족에게 과도하게 집중되면서 전국적으로 너도나도 사전(私田)의 확대하면서 국고(國庫)가 바닥나면서 국가의 재정이 파탄에 이를 것이 중요한 원인이었다.</span></p><p><span style="font-size:14pt;"> </span></p><p><span style="font-size:14pt;">이러한 권문세족의 사전(私田) 확대로 국고의 재정 파탄나자, 백성들의 삶은 고통 그 자체였다. 성리학으로 무장한 신진세력에게는 무엇보다 새로운 개혁이나 혁명이 필요했다. 이러한 국가재정의 파탄과 아울러 홍건적 · 왜구 · 변방 오랑캐의 침략 등 정치적 · 군사적으로 많은 위기에 외부적으로 직면해 있었다.</span></p><p><span style="font-size:14pt;"> </span></p><p><span style="font-size:14pt;">이러한 내외적(內外的) 위기와 맞물려 권문세족과 새롭게 성장한 신진사대부의 내부적 대립은 고려왕조의 패망에 결정적인 원인으로 고착화 되어 갔다. 이러한 위기로 기울어져 가는 고려의 마지막 희망으로 떠오르는 영웅이 등장하는데, 그가 바로 조선을 세우는 이성계(李成桂)였다.</span></p><p><span style="font-size:14pt;"><br /></span></p><p><span style="font-size:14pt;"> <a href="http://xn--289ak2iu9buvke3bs7m0vf.kr/bbs/view_img.php?img=http%3A%2F%2Fwww.xn--289ak2iu9buvke3bs7m0vf.kr%2Fdata%2Feditor%2F2101%2F9f565315ada2f1ddd9722527613d3ffc_1610108065_7402.jpg" target="_blank" class="view_image"><img src="http://www.xn--289ak2iu9buvke3bs7m0vf.kr/data/editor/2101/9f565315ada2f1ddd9722527613d3ffc_1610108065_7402.jpg" alt="9f565315ada2f1ddd9722527613d3ffc_1610108065_7402.jpg" class="img-tag "/></a></span></p><p><span style="font-size:14pt;"><span style="font-size:12pt;">&lt;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의 어진&gt;</span></span></p><p><span style="font-size:14pt;"><span style="font-size:12pt;">​</span> </span></p><p><span style="font-size:14pt;">1355년(공민왕 4년) 홍건적(紅巾賊)의 1차 침략으로 고려의 정치적 위기는 더해 갔고, 1361년 홍건적의 2차 침략이 일어난다. 고려 동북면의 원나라 지방군벌 이성계가 기병을 이끌고 개경 탈환전에 참가해 가장 먼저 성안으로 돌입하여 홍건적을 몰아낸다. 그리고 남쪽에서는 왜구들의 침략하자, 이성계가 이를 물리친다. </span></p><p><span style="font-size:14pt;"><br /></span></p><p><span style="font-size:14pt;">이성계의 이러한 활약으로 “백전백승”의 이성계 장군으로 이름을 떨치기 시작했고, 고려의 조정의 많은 대신들과 백성들로부터 영웅이라는 평가를 받기 시작한다. 따라서 이성계는 “변방의 촌놈”에서 일약 영웅으로 위기의 고려사회에 당당히 등장하게 되었다.</span></p><p><span style="font-size:14pt;"><br /></span></p><p><span style="font-size:14pt;">사실 이성계의 아버지 이자춘(李子春)은 몽고가 세운 원(元)나라에 귀순하여 원나라 다루가치(達魯花赤)의 벼슬을 했다. 그러나 고려 공민왕이 원나라가 세운 철령 이북지역의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를 공격하여 탈환할 때, 이자춘과 이성계는 쌍성총관부 탈환에 큰 공을 세우면서 다시 고려인으로 돌아온다. </span></p><p><span style="font-size:14pt;"> </span></p><p><span style="font-size:14pt;">이성계는 고려의 동북지역을 호령하는 군사적 기반으로 고려를 침략하는 외적을 물리쳐 전공을 세웠지만, 엄연히 고려의 귀족사회로 들어가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고려 귀족사회에서는 그 때까지만 해도 이성계를 일개 군벌(軍閥)세력으로 평가했던 것이다. 고려의 정치 중심에 편입되기 위해서는 이성계를 후원해 줄 권문세족과 학문으로 무장한 엘리트 신진세력이 필요했다.</span></p><p><span style="font-size:14pt;">   </span><br /><span style="font-size:14pt;">따라서 이성계는 귀족사회였던 고려의 중심으로 가기 위해서는 그를 후원해 줄 막강한 정치적 기반과 경제적 기반을 갖춘 권문세족이 필요했다. 이것을 뒷받침 해주는 가문이 바로 신덕왕후의 신천강씨였다. 이성계가 신덕왕후와 혼인을 하면서 이성계는 명실상부한 고려사회의 권문세족으로 편입될 수 있었다.</span></p><p><span style="font-size:14pt;"> </span></p><p><span style="font-size:14pt;">이후부터 이성계는 처가의 정치적·경제적 기반을 발판으로 고려 말 혼란한 정치의 중심에 설 수 있게 되었다.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는 신천강씨와 정략적 결혼을 통해 고려사회 중심으로 편입되고자 했던 것이다.</span></p><p><span style="font-size:14pt;"><br /></span></p><p><span style="font-size:14pt;">이성계와 신덕왕후가 결혼하게 되는 재미있는 설화가 있다. 전쟁터를 누비던 이성계가 황해도 곡산(谷山)을 지나다가 용연(龍淵)이라는 우물가에서 물을 긷고 있던 강씨처녀에게 물을 얻어먹기 위해 물을 청한다. </span></p><p><span style="font-size:14pt;">​</span></p><p><span style="font-size:14pt;">이성계의 청을 받은 강씨처녀는 표주박으로 물을 떠 물 위에 버들잎을 띄워 이성계에게 준다. </span></p><p><span style="font-size:14pt;">그러자 이성계는 “물에 왜 버들잎을 띄웠소?” 묻자, 강씨처녀는 “물도 급하게 먹으면 체합니다.”라고 답한다.</span></p><p><span style="font-size:14pt;">​</span></p><p><span style="font-size:14pt;">이성계는 그 처녀의 미모와 마음씨에 반해 결혼했다는 설화가 전해져 온다. 이 강씨처녀가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는데, 정치적·경제적 기반을 마련해 준 신덕왕후였다.</span></p><p><span style="font-size:14pt;">​</span><br /><span style="font-size:14pt;"> <a href="http://xn--289ak2iu9buvke3bs7m0vf.kr/bbs/view_img.php?img=http%3A%2F%2Fwww.xn--289ak2iu9buvke3bs7m0vf.kr%2Fdata%2Feditor%2F2101%2F9f565315ada2f1ddd9722527613d3ffc_1610108122_6585.jpg" target="_blank" class="view_image"><img src="http://www.xn--289ak2iu9buvke3bs7m0vf.kr/data/editor/2101/9f565315ada2f1ddd9722527613d3ffc_1610108122_6585.jpg" alt="9f565315ada2f1ddd9722527613d3ffc_1610108122_6585.jpg" class="img-tag "/></a><br style="clear:both;" /></span><span style="font-size:12pt;">&lt;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할 수 있도록 정치적</span><span style="font-size:12pt;">·경제적 기반을 마련한 신덕왕후&gt;</span></p><p><br /><span style="font-size:14pt;">그리고 신진사대부 중 고려는 이미 그 생명을 다했으니, 새로운 나라와 왕조를 건설하자는 급진적인 생각을 가진 신진세력들이 있었는데, 그들이 바로 정도전(鄭道傳)·조준(趙浚)·권근(權近)·심효생(沈孝生)·남은(南誾)·하륜(河崙) 등이었다. </span></p><p><span style="font-size:14pt;">​</span></p><p><span style="font-size:14pt;">이들이 이성계를 적극적으로 지원하면서  고려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조선이라는 새로운 나라와 왕조가 탄생한다. 조선을 개국하는데 ,그 중심에는 삼봉 정도전(三峯 鄭道傳)이 있었으며, 조선의 모든 제도와 기틀을 설계한다.</span></p><p><span style="font-size:14pt;"><br /></span></p><p><span style="font-size:14pt;"> <a href="http://xn--289ak2iu9buvke3bs7m0vf.kr/bbs/view_img.php?img=http%3A%2F%2Fwww.xn--289ak2iu9buvke3bs7m0vf.kr%2Fdata%2Feditor%2F2101%2F9f565315ada2f1ddd9722527613d3ffc_1610108243_7281.jpg" target="_blank" class="view_image"><img src="http://www.xn--289ak2iu9buvke3bs7m0vf.kr/data/editor/2101/9f565315ada2f1ddd9722527613d3ffc_1610108243_7281.jpg" alt="9f565315ada2f1ddd9722527613d3ffc_1610108243_7281.jpg" class="img-tag "/></a></span></p><p><span style="font-size:14pt;"><span style="font-size:12pt;">&lt;조선개국의 일등 공신 정도전, 왕권 중심의 국가가 아닌 재상중심주의 국가를 설계하다&gt;</span></span></p><p><span style="font-size:14pt;"><span style="font-size:12pt;">​</span> </span></p><p><span style="font-size:14pt;">그러나 이성계의 조선건국 이후 내부적으로 조선의 정치의 근간을 잡는 방향에서 왕권(王權) 중심이냐, 아니면 재상중심주의의 신권(臣權)이냐를 놓고 갈등과 대립이 일어난다. 조선의 개국에 참여했던 신진사대부 세력들 속에서도 이 문제를 놓고, 첨예하게 대립과 갈등으로 분열하기 시작한다.</span></p><p><span style="font-size:14pt;"> </span></p><p><span style="font-size:14pt;">조선이 개국되고 얼마 있지 않아, 1392년 8월 정도전을 중심으로 태조 이성계의 부인 신덕왕후(神德王后)의 둘째아들 이방석(李芳碩)을 세자로 책봉하면서 조선의 개국과정에 참여했던 세력들 속에서 다시 대립과 불만이 노골적으로 표출된다.</span></p><p><span style="font-size:14pt;"> </span></p><p><span style="font-size:14pt;">1398년(태조 7) 8월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드디어 이성계의 다섯째 이방원(李芳遠)이 정도전, 남은, 심효생과 세자 이방석을 살해하고, 둘째형인 정종(定宗) 이방과(李芳果)를 허수아비 왕으로 앉힌다. 이후 1400년(정종 2년)에 이방간(李芳幹)이 제2차 왕자의 난을 일으키자, 이방원은 이를 진압하면서 실권을 잡는다.</span></p><p><span style="font-size:14pt;"> </span></p><p><span style="font-size:14pt;">신변의 위협을 느낀 정종은 상왕으로 물러나고, 이방원은 왕위에 올라 강력한 왕권을 행사하는 태종(太宗)이 되는 것이다. 왕자의 난 이후 태종 이방원은 아버지 이성계의 정치적·경제적 기반을 만들어 준 신천강씨를 가만히 둘리가 없었다. </span></p><p><span style="font-size:14pt;">​</span></p><p><span style="font-size:14pt;">이미 죽은 신덕왕후의 무덤을 훼손하고 묘비를 뽑아다 다리를 만드는데 사용한다. 그리고 태종 이방원은 신덕왕후의 모든 것을 지워버리고 역사에서 완전히 왜곡해 버린다. <span style="font-size:14pt;">이 정도라면 신천강씨들에게 태종 이방원은 얼마나 혹독한 핍박을 했겠는가? 생각하지 않아도 알 수가 있을 것이다.</span></span></p><p><span style="font-size:14pt;"><span style="font-size:14pt;">​</span></span></p><p><span style="font-size:14pt;"><span style="font-size:14pt;">신천강씨는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할 수 있도록 만든 권문세가임에도 직격탄을 맞아 죽거나 전국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신천강씨는 태종이 왕으로 있을 동안뿐만 아니라 오래도록 조선사회의 정치에 외면 받아야 하는 험난한 길을 걷는다. </span></span></p><p><span style="font-size:14pt;"><span style="font-size:14pt;"><br /></span></span></p><p><span style="font-size:14pt;">현재 제주도에 가장 많은 성씨 중 하나가 바로 신천강씨이다. 그 이유는 신덕왕후의 사촌오빠 강영(康永)은 전라감사를 하고 있으면서 불안한 나날을 보내다가, 1402년 신덕왕후의 원수를 갚겠다고 조사의(趙思義)와 신덕왕후의 사촌인 강현(康顯)이 태조 이성계를 다시 옹립한다는 명분으로 조사의와 강현이 난을 일으켜 실패한다.</span></p><p><span style="font-size:14pt;"> </span></p><p><span style="font-size:14pt;">전라감사 강영은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자신에게 미칠 화를 피해 제주도로 건너간다. 그래서 제주도의 신천강씨들은 강영을 입도조(入島祖)로 모시고 있다. 이러한 원인으로 제주도에 신천강씨가 많이 살게 되었다.</span></p><p><span style="font-size:14pt;"><br /></span></p><p><span style="font-size:14pt;"><a href="http://xn--289ak2iu9buvke3bs7m0vf.kr/bbs/view_img.php?img=http%3A%2F%2Fwww.xn--289ak2iu9buvke3bs7m0vf.kr%2Fdata%2Feditor%2F2101%2F9f565315ada2f1ddd9722527613d3ffc_1610108347_3853.jpg" target="_blank" class="view_image"><img src="http://www.xn--289ak2iu9buvke3bs7m0vf.kr/data/editor/2101/9f565315ada2f1ddd9722527613d3ffc_1610108347_3853.jpg" alt="9f565315ada2f1ddd9722527613d3ffc_1610108347_3853.jpg" class="img-tag "/></a><br style="clear:both;" /><span style="font-size:12pt;">&lt;신천강씨 제주도 입도조 강영의 묘, 전라감사 강영의 묘는 금계포란형의 명당이라고 한다&gt;</span></span></p><p><span style="font-size:14pt;"><span style="font-size:12pt;">​</span> </span></p><p><span style="font-size:14pt;">필자가 살고 있는 원호리 들성마을에서 점터고개를 넘으면, 고아읍 대망리(大望里)가 나온다. 대망리는 옛날부터 신천강씨들의 집성촌을 구성하고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대망리를 망장촌(網場村)으로 불려 왔다. </span></p><p><span style="font-size:14pt;"><br /></span></p><p><span style="font-size:14pt;">그리고 이 망장촌에는 생육신의 한분인 경은 이맹전(耕隱 李孟專)선생이 세조가 단종을 폐하고 왕위를 찬탈하자, 벼슬을 버리고 생육신으로 귀머거리·맹인의 흉내를 내면서 숨어 살았던 곳이다. 그래서 현재에도 옛 어른들은 망장 또는 망정으로 부르기도 한다.</span></p><p><span style="font-size:14pt;"> </span></p><p><span style="font-size:14pt;">망장(網場)이라 이름 붙여진 것은 선산의 비봉산(飛鳳山)의 봉황이 날아가면 선산이 망한다는 의미에서 날아가는 봉황을 잡기 위해 “그물(網)을 쳐서 잡는다.”라는 비보풍수(裨補風水)에 의해 망장이라는 지명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망장은 세월을 거쳐 대망리로 바뀐다. 그리고 대망(大望)은 “큰 희망”을 갖는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span></p><p><span style="font-size:14pt;"><br /></span></p><p><span style="font-size:14pt;"> <a href="http://xn--289ak2iu9buvke3bs7m0vf.kr/bbs/view_img.php?img=http%3A%2F%2Fwww.xn--289ak2iu9buvke3bs7m0vf.kr%2Fdata%2Feditor%2F2101%2F9f565315ada2f1ddd9722527613d3ffc_1610108489_3271.jpg" target="_blank" class="view_image"><img src="http://www.xn--289ak2iu9buvke3bs7m0vf.kr/data/editor/2101/9f565315ada2f1ddd9722527613d3ffc_1610108489_3271.jpg" alt="9f565315ada2f1ddd9722527613d3ffc_1610108489_3271.jpg" class="img-tag "/></a><br style="clear:both;" /><span style="font-size:12pt;">&lt;신천강씨 세거지인 고아읍 대망리의 모습&gt;</span><br style="clear:both;" /> </span></p><p><span style="font-size:14pt;">그러면 봉황을 날아가지 못하게 한다는 망장촌에 세거하는 신천강씨들은 어떻게 해서 선산(善山)으로 왔을까? 하는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다. 한 가지 단서는 고려시대와 조선전기까지만 하더라도 결혼을 하면 남자가 처가(妻家)로 장가를 가서 사는 서류부가혼(壻留婦家婚) 또는 남귀여가혼(男歸女家婚)으로 인해 새로운 세거지를 형성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해 볼 수 있다.</span></p><p><span style="font-size:14pt;"><span style="font-size:14pt;"><br /></span></span></p><p><span style="font-size:14pt;">그렇다면 고려시대 권문세족으로 이성계를 도와 조선을 개국한 선산의 신천강씨들을 찾아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는 것도 재미있는 역사 여행이 될 것이다. </span></p><p><span style="font-size:14pt;">​</span></p><p><span style="font-size:14pt;">신천강씨 선산의 파조(派祖)는 고려 1300년 중후반에 강인석(康仁碩)이 지금의 팔공산 뒤에 있는 군위군 부계면 대율리(大栗里)에 부림홍씨(缶林洪氏, 지역에서는 “한밤홍씨”라 함)로 장가를 들어 군위군에 첫번째 터전을 잡게 되면서 강인석은 신천 <span style="font-size:14pt;">강씨의 입향조(入鄕祖)가 된다.</span></span></p><p><span style="font-size:14pt;"><br style="clear:both;" /></span></p><p><span style="font-size:14pt;"><a href="http://xn--289ak2iu9buvke3bs7m0vf.kr/bbs/view_img.php?img=http%3A%2F%2Fwww.xn--289ak2iu9buvke3bs7m0vf.kr%2Fdata%2Feditor%2F2101%2F9f565315ada2f1ddd9722527613d3ffc_1610108625_2394.jpg" target="_blank" class="view_image"><img src="http://www.xn--289ak2iu9buvke3bs7m0vf.kr/data/editor/2101/9f565315ada2f1ddd9722527613d3ffc_1610108625_2394.jpg" alt="9f565315ada2f1ddd9722527613d3ffc_1610108625_2394.jpg" class="img-tag " style="width:385px;"/></a><br style="clear:both;" /><span style="font-size:12pt;">&lt;군위 부계면 부림홍씨 세거지인 한밤마을 상징하는 잣나무&gt;</span></span></p><p><span style="font-size:14pt;"><br /></span></p><p><span style="font-size:14pt;">이후 강인석의 아들 강윤리(康允釐)가 선산의 일선김씨(一善金氏)와 혼인을 하면서 처가인 선산 몽대면(夢大面, 몽대면은 현재 구미시 산동읍)으로 옮겨와 신천강씨들의 터전을 선산에 다시 잡게 되면서 세거하게 되었다. 강윤리는 강거의(康居義), 강거례(康居禮), 강거보(康居寶), 강거민(康居敏) 네명의 아들을 두게 되면서 가문이 번성해 진다.</span></p><p><span style="font-size:14pt;"><br /></span></p><p><span style="font-size:14pt;">고려시대 두문동 72현 중 최고의 충신으로 일컬어지는 농암 김주((籠巖 金澍)의 손자로 세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대사성(大司成)과 대사헌(大司憲)을 지낸 김지경(金之慶)의 장인이 바로 신천강씨 강거례이다. </span></p><p><span style="font-size:14pt;">​</span></p><p><span style="font-size:14pt;">강거례는 조선 중종 때 우의정(右議政)과 좌의정(左議政)을 거친 병암 김응기(屛庵 金應箕)의 외할아버지가 된다. 또한 강거례는 강호 김숙자(江湖 金叔滋)의 딸을 며느리로 맏는다. 이로써 신천강씨는 혼인관계에 있어서 부림홍씨, 일선김씨와는 불가분의 관계를 형성하게 된다.</span></p><p><span style="font-size:14pt;"> </span></p><p><span style="font-size:14pt;">여기서 특이한 것은 강거례는 딸을 일선김씨에게 시집보내고, 며느리를 일선김씨에서 받아들인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보건대, 선산에 정착한 신천강씨들은 일선김씨(一善金氏)들과 불가분의 혼인관계를 형성한다. 강거례의 아들 강척(康惕)은 강호 김숙자의 딸을 부인으로 맞아들임으로서 점필재 김종직(佔畢齋 金宗直)과는 처남매부지간이 된다.</span></p><p><span style="font-size:14pt;"><br /></span></p><p><span style="font-size:14pt;">강척과 일선김씨 부인 사이에 무명재 강백진(無名齋 康伯珍), 임경당 강중진(臨鏡堂 康仲珍) 형제가 밀양 외가에서 태어난다. 그래서 강백진과 강중진은 외삼촌인 김종직으로부터 당대 최고 수준의 정통 성리학을 배울 수가 있었다. </span></p><p><span style="font-size:14pt;">​</span></p><p><span style="font-size:14pt;">그러나 이것은 강백진·강중진 형제도 조선사회를 뒤흔들었던 사화(士禍)에 휘말리지 않을 수 없었다. 점필재 김종직이 누구인가? 조선시대 모든 선비들로부터 한 몸에 존경을 받았던 절의파(節義派) 선비가 아니었던가!</span></p><p><span style="font-size:14pt;"><br /></span></p><p><span style="font-size:14pt;"><a href="http://xn--289ak2iu9buvke3bs7m0vf.kr/bbs/view_img.php?img=http%3A%2F%2Fwww.xn--289ak2iu9buvke3bs7m0vf.kr%2Fdata%2Feditor%2F2101%2F9f565315ada2f1ddd9722527613d3ffc_1610108719_4372.jpg" target="_blank" class="view_image"><img src="http://www.xn--289ak2iu9buvke3bs7m0vf.kr/data/editor/2101/9f565315ada2f1ddd9722527613d3ffc_1610108719_4372.jpg" alt="9f565315ada2f1ddd9722527613d3ffc_1610108719_4372.jpg" class="img-tag "/></a><br style="clear:both;" /><span style="font-size:12pt;">&lt;선산출신 선비들이 과거에 급제한 명단이다. 1447년 강백진은 식년문과에 3등으로 합격한다&gt;</span></span></p><p><span style="font-size:14pt;"><br /></span></p><p><span style="font-size:14pt;">점필재 김종직은 조선시대 성리학의 종장(宗匠)으로 일컬어지는 사림(士林)들로부터 가장 존경을 받았던 선비 중의 선비, 학자 중의 학자였다. 그리고 후대 학자들에게 야은 길재(冶隱 吉再)의 도통(道統)과 학통(學統)을 잇는 가교역할을 하며, 굴곡진 조선시대를 살아가는 선비들의 가슴 속에 잊혀지지 않은 인물이었다.</span></p><p><span style="font-size:14pt;"> </span></p><p><span style="font-size:14pt;">강백진·강중진 형제가 김종직과 혈연적 관계를 맺으면서 김종직과 같은 사림파(士林派)의 피가 흐르면서 그들에게 앞으로 다가올 운명도 순탄하지 않게 된다. 그것은 조선시대 선비들이 화를 당하는 사화(士禍)에 자유로울 수 없었다는 것이다.</span></p><p><span style="font-size:14pt;"><br /></span></p><p><span style="font-size:14pt;">점필재 김종직은 조선시대에 태어나서 학문에 뜻을 두었다면, 누구나 한번쯤 그의 제자가 되고 싶어 했던 젊은 선비들의 가슴속에 죽지 않고 살아 숨 쉬는 시대의 스승이었다라고 평가할 수 있다. 김종직의 수많은 제자들, 그들의 높은 학문과 절의(節義)는 정치적 권력과 경제적인 기반을 차지한 훈구파들에게는 타도의 대상이었던 것이다.</span></p><p><span style="font-size:14pt;">  </span></p><p><span style="font-size:14pt;">스승 김종직에게 학문을 배우고 익혔다는 이유로, 수많은 제자들과 선비들이 죽거나 유배를 가게 된다. 그러나 그의 제자들과 동지들은 죽음과 시련을 거부하지 않고, 그 피바람에 당당히 맞서며 달갑게 받아들였다. 그들은 오히려 김종직의 제자가 되어 학문을 수학했다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했다.</span></p><p><span style="font-size:14pt;"><br /></span></p><p><span style="font-size:14pt;">조선시대 사림파(士林派)가 화(禍)를 입는 최초의 무오사화(戊午士禍)는 1498년(연산군 4년)에 류자광(柳子光) · 이극돈(李克墩)이 역사를 기록하는 사관 김일손(金馹孫)이 사초(史草)에 스승 김종직이 세조가 단종을 폐위하고, 왕위를 찬탈하는 것을 비난하는 조의제문(弔義帝文)을 기록하면서 발단이 되었다. </span></p><p><span style="font-size:14pt;"><br /></span></p><p><span style="font-size:14pt;">조의제문은 중국 초나라 항우(項羽)가 초나라 회왕(懷王)을 죽인 것을 빗대어, 세조(世祖)가 단종(端宗)을 죽이고 왕위를 찬탈한 것을 비난하는 내용이었다. 김종직의 조의제문으로 그것을 기록한 제자 김일손뿐만 아니라 김종직과 연관된 많은 제자들과 사람들이 죽거나 유배를 갔다.</span></p><p><span style="font-size:14pt;"> </span></p><p><span style="font-size:14pt;">김종직의 학문을 이어받는 직계 제자 김굉필(金宏弼)도 유배를 간다. 그리고 강백진도 스승이자 외삼촌이 김종직이라는 이유로 유배를 간다. 사실 무오사화는 훈구파가 사림파를 공격하는 서막에 불과했다. 김종직과 그의 제자들의 등장은 훈구파가 차지하고 있던 기득권에 대한 개혁을 주장하면서 사림파와 훈구파사이에 갈등과 대립이 폭발했던 것이다.</span></p><p><span style="font-size:14pt;">​</span></p><p><span style="font-size:14pt;">사림파는 학문과 절의(節義)로서 무장한 선비집단이었기 때문에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사림파 이들에게 또 다시 시련이 닥치는데, 그것은 1504년(연산군 10년)에 임사홍(任士洪)이 연산군의 어머니 폐비윤씨 복위문제를 거론하면서 갑자사화(甲子士禍)를 일으킨다.</span></p><p><span style="font-size:14pt;"> </span></p><p><span style="font-size:14pt;">무오사화에서 사림파를 완전히 제거하지 못한 것을 해결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지만, 임사홍과 권력의 대립관계에 있었던 훈구파들도 그 대상이 되었다. 이 때에도 김종직의 제자들인 정여창(鄭汝昌)·남효온(南孝溫) 등은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한다.</span></p><p><span style="font-size:14pt;"><br /></span></p><p><span style="font-size:14pt;">유배생활을 하던 김종직의 제자 김굉필과 강백진은 참수형을 당한다. 1492년(성종 23년) 7월 김종직은 죽음을 예감하면서 본인이 쓴 모든 서적을 생질 강백진에게 맡긴다. 1492년 8월 19일 조선의 최고 위대한 학자였던 절의파 선비 김종직은 생을 마감한다. 강백진은 외삼촌이자 스승이었던 김종직의 모든 서적을 가져 있다는 이유로 죽었던 것이다.</span></p><p><span style="font-size:14pt;"><br /></span></p><p><span style="font-size:14pt;">연산군은 “김굉필과 강백진을 저작거리에 효수(梟首)하라” 이후 연산군은 의금부의 명을 받드는 관리들에게 “김굉필과 강백진이 죽음에 다다라 무슨 말을 하였는가?” 묻자 관리들이 답하기를 “모두 한마디도 말도 없이 죽음 앞에 당당히 나갔습니다.”라고 했다고 역사의 기록은 전한다.</span></p><p><span style="font-size:14pt;"><br /></span></p><p><span style="font-size:14pt;"> <a href="http://xn--289ak2iu9buvke3bs7m0vf.kr/bbs/view_img.php?img=http%3A%2F%2Fwww.xn--289ak2iu9buvke3bs7m0vf.kr%2Fdata%2Feditor%2F2101%2F9f565315ada2f1ddd9722527613d3ffc_1610108905_4793.jpg" target="_blank" class="view_image"><img src="http://www.xn--289ak2iu9buvke3bs7m0vf.kr/data/editor/2101/9f565315ada2f1ddd9722527613d3ffc_1610108905_4793.jpg" alt="9f565315ada2f1ddd9722527613d3ffc_1610108905_4793.jpg" class="img-tag "/></a><br style="clear:both;" /><span style="font-size:12pt;">&lt;무명재 강백진의 글씨, 성균관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gt;</span></span></p><p><span style="font-size:14pt;"><br style="clear:both;" /></span></p><p><span style="font-size:14pt;">여기서 김종직이 살아 있을 때 김굉필에게 “우리의 도(道)는 본래 굴곡이 많다”라고 했던 것이 이러한 죽음을 예견했는지도 모른다. 조선 최고의 선비들이 하루아침에 죽거나 시신이 무덤에서 파헤쳐져 뼈 가루가 되어 없어져도, 그들은 죽음 앞에서도 스승 김종직을 따랐던 것을 영광으로 생각했을 것이다.</span></p><p><span style="font-size:14pt;"><br /></span></p><p><span style="font-size:14pt;">강백진의 동생 강중진은 1519년(중종 14년)에 남곤(南袞)·심정(沈貞)·홍경주(洪景舟) 등이 김굉필의 제자 조광조(趙光祖)와 사림파를 제거할 목적으로 기묘사화(己卯士禍)를 일으킨다. 이 기묘사화로 조광조와 같은 사림파로 지목된 강중진도 곤장형을 받고 유배를 간다.</span></p><p><span style="font-size:14pt;"> </span></p><p><span style="font-size:14pt;">조선시대 선비답게 옳고, 바르게 산다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하지만 김종직을 따르던 사림파 선비들은 죽음이 비록 다가와도 그것을 피하지 않고, 옳은 길을 가고자 하는 순교(殉敎) 집단이었다.</span></p><p><span style="font-size:14pt;"> </span></p><p><span style="font-size:14pt;">강씨(康氏) 가문의 화(禍)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강중진의 손자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친다. 그것은 강중진의 손자들인 강경선(康景善) · 강유선(康惟善) 형제들에게 이어진다. 강유선은 송당학파(松堂學派)의 진락당 김취성(眞樂堂 金就成)에게 학문을 배웠다.</span></p><p><span style="font-size:14pt;"><br /></span></p><p><span style="font-size:14pt;">이후 강유선은 1537년(중종 32년) 사마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간다. 1545년 인종이 즉위하자, 성균관 유생들의 우두머리가 되어 조광조(趙光祖)의 신원 회복을 주장하고 관철시키면서 전국적으로 주목을 받게 된다.</span></p><p><span style="font-size:14pt;"> </span></p><p><span style="font-size:14pt;">이 일로 강유선은 훈구파 세력의 눈에는 가시와 같은 존재가 되었다. 1545년(명종 1년) 소윤(小尹)으로 일컬어지는 윤원형(尹元衡)이 대윤(大尹)으로 일컬어지는 윤임(尹任) 일파를 숙청하고 제거하는 을사사화(乙巳士禍)를 일으킨다. 윤원형이 일으킨 을사사화로 선산을 중심으로 하고 있던 송당학파(松堂學派)는 완전히 궤멸되는 수순을 밟는다.</span></p><p><span style="font-size:14pt;"><br /></span></p><p><span style="font-size:14pt;">을사사화의 연장선상에서 양재역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을 일으켜 많은 사림파를 다시 제거한다. 그 대표적으로 희생된 사림파는 조광조와 막역했던 당대 최고의 석학으로 평가받던 회재 이언적(晦齋 李彦迪) · 소재 노수신(穌齋 盧守愼) · 유희춘(柳希春) · 백인걸(白仁傑)등 20여명이 유배를 가 비참한 삶을 산다.</span></p><p><span style="font-size:14pt;"> </span></p><p><span style="font-size:14pt;">그리고 소윤 윤원형은 1549년 이홍남(李洪男) 형제의 역모 사건에 성균관 유생 강유선이 연루되었다는 거짓 자백을 이용해 강유선을 때려서 죽이는 장살(杖殺)형을 가한다. 강유선의 나이 30세였다. 이 일로 강유선의 형인 강경선은 평민으로 전락하고, 동생의 죽음을 몹시 슬퍼하다가 술로 나날을 보내다가 안타깝게 죽는다.</span></p><p><span style="font-size:14pt;"><br /></span></p><p><span style="font-size:14pt;">신천강씨는 조선건국의 제일 큰 숨은 조력자였음에도 권력투쟁의 정치적 희생물이 되었다. 그리고 조선의 선비들로부터 “문장과 도덕으로 조선시대 사대부의 영수”라는 평가를 받던 김종직과의 혈연관계로 무명재 강백진과 임경당 강중진은 당시 사화의 희생양이 되었다. 그리고 강경선·강유선 형제들이 정치적 희생물이 되면서 가슴 아픈 역사를 가진 가문(家門)이 되었다. </span></p><p><span style="font-size:14pt;"><br /></span></p><p><span style="font-size:14pt;">선산의 신천강씨 외손들 중에 김여물(金汝岉)장군이 있다. 김여물은 1577년(선조 10년)에 15명을 선발하는 알성시 갑과에 장원을 급제를 한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충주 탄금대 전투에 신립(申砬)장군의 종사관(<span class="sub">從事官)</span>으로 서애 류성룡(西厓 柳成龍)에게 발탁된다. 종사관 김여물은 신립장군과 함께 탄금대에서 장렬히 왜적과 싸우다 전사한다. </span></p><p><span style="font-size:14pt;"><br /></span></p><p><span style="font-size:14pt;">김여물의 아버지 순천김씨(順天金氏) 김훈(金壎)은 창원부사(昌原府使)를 한 망장촌의 강의(康顗)의 딸과 결혼하면서 선산에 정착하게 된다. 김여물의 외할아버지인 강의(康顗)는 바로 임경당 강중진의 아들로서 명종 때 일어나는 “이홍남 역모사건”에 희생되는 강경선· 강유선형제의 아버지가 된다.</span></p><p><span style="font-size:14pt;">​</span></p><p><span style="font-size:14pt;">김여물의 아들 김류(金瑬)는 1623년 광해군을 폐하고, 인조반정(仁祖反正)을 성공시키는 핵심인물이었다. 김류는 얼마 있지 않아, 인조 때 영의정(領議政)에까지 올라 순천김씨들이 조선후기 정치에 등장하여 막강한 정치력을 행사 할 수 있도록 만든다.</span></p><p><span style="font-size:14pt;"><br /></span></p><p><span style="font-size:14pt;"><a href="http://xn--289ak2iu9buvke3bs7m0vf.kr/bbs/view_img.php?img=http%3A%2F%2Fwww.xn--289ak2iu9buvke3bs7m0vf.kr%2Fdata%2Feditor%2F2101%2F9f565315ada2f1ddd9722527613d3ffc_1610109034_9543.jpg" target="_blank" class="view_image"><img src="http://www.xn--289ak2iu9buvke3bs7m0vf.kr/data/editor/2101/9f565315ada2f1ddd9722527613d3ffc_1610109034_9543.jpg" alt="9f565315ada2f1ddd9722527613d3ffc_1610109034_9543.jpg" class="img-tag "/></a><br style="clear:both;" /><span style="font-size:12pt;">&lt;김여물이 탄금대 전투를 앞두고 그 아들 김류에게 보낸 서찰&gt;</span></span></p><p><span style="font-size:14pt;"><br /></span></p><p><span style="font-size:14pt;">구미시 고아읍 예강리 부근의 접성산 입구에 시묘암(侍墓巖)이 있다. 이 시묘암 이야기는 고아읍 대망리에 살던 강거민 부부와 양아들 심회(沈澮)가 얽힌 이야기이다. 태종 이방원은 절대적 왕권을 공고히 하고 왕권을 강화하는 차원에서 본인의 처가를 풍비박살 낸다. </span></p><p><span style="font-size:14pt;"><br /></span></p><p><span style="font-size:14pt;">태종의 처남들인 민무구(閔無咎)·민무질(閔無疾)형제가 어린세자를 이용하여 권력을 잡으려 했다 죄목을 들어 죽이면서 태종의 처가인 여흥민씨(驪興閔氏)가문을 멸문지화시킨다. 태종은 세종이 정치하는 동안 외척이 발호하여 정치에 관여하는 것을 원천봉쇄 버렸다.</span></p><p><span style="font-size:14pt;"><br /></span></p><p><span style="font-size:14pt;">또한 세종의 장인이자 태종의 사돈인 영의정 심온(沈溫)이 명나라에 사은사(謝恩使)로 가면서 신하들이 세종과 심온에게 사람들의 관심과 이목이 집중되자, 군권(軍權)을 쥐고 있던 태종은 곧바로 세종의 장인인 영의정 심온이 역모 준비한다는 죄목을 들어 사돈집마저 풍비박살 낸다. 세종의 처가가 세종이 왕권을 행사하는 동안 정치에 관여하는 것을 원천봉쇄해 버렸던 것이다. </span></p><p><span style="font-size:14pt;">​</span></p><p><span style="font-size:14pt;">태종의 세종의 외가와 처가에 대한 이러한 조치는, 이후 세종이 정치의 전면에 등장했을 때, 외가와 처가의 권력이 발호하여 정치를 혼탁하게 하는 것을 미연에 방지한 효과로 나타났다고 할 수 있겠다. 이로써 세종은 성군(聖君)이 될 수 있다는 것이 지배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span></p><p><span style="font-size:14pt;"> </span></p><p><span style="font-size:14pt;">하루아침에 세종의 장인이자, 영의정이었던 심온 집안은 공중분해 되어버렸다. 심온은 5남 6녀를 두었는데, 첫째가 세종의 부인인 소헌왕후였고, 마지막 아들이 심회(沈澮)였다. 어린 심회를 키우던 유모는 심씨 가문에 닥친 화를 피하기 위해 심회를 등에 업고 도망치기 시작하여, 지금의 선산의 대망리까지 오게 되었다. </span></p><p><span style="font-size:14pt;"><br /></span></p><p><span style="font-size:14pt;">선산에 터전을 잡은 강윤리의 넷째 아들은 강거민이다. 강거민은 슬하에 자식이 없었다. 강거민 부부는 한날한시에 꿈을 꾸었는데, 용(龍)이 삼밭에 웅크리고 있는 기이한 꿈을 꾸자 한밤에 삼밭으로 가 보았다. 그런데 유모가 추위와 배고픔에 어린 아이를 끌어 앉고 있는 것이었다.</span></p><p><span style="font-size:14pt;"><br /></span></p><p><span style="font-size:14pt;">자식이 없던 강거민은 어린 심회를 집으로 데려가 정성을 다해 키웠다. 심회가 15세가 되었을 때 아버지 심온의 역적 누명이 풀리자, 한양으로 올라가 벼슬길에 나간다. 심회는 1466년(세조 12년)에는 좌의정이 되고 곧이어 영의정이 된다. </span></p><p><span style="font-size:14pt;"><br /></span></p><p><span style="font-size:14pt;">1472년(성종 3년)에 강거민이 세상을 떠나자, 선산으로 와서 부모의 예로서 상을 치루고, 양어머니 전씨(全氏)가 돌아가시자 영의정의 벼슬을 내려놓고 선산으로 돌아와 시묘살이를 정성껏 마음을 다해 6년간 한다.</span></p><p><a href="http://xn--289ak2iu9buvke3bs7m0vf.kr/bbs/view_img.php?img=http%3A%2F%2Fwww.xn--289ak2iu9buvke3bs7m0vf.kr%2Fdata%2Feditor%2F2101%2F9f565315ada2f1ddd9722527613d3ffc_1610109870_3689.jpg" target="_blank" class="view_image"><img src="http://www.xn--289ak2iu9buvke3bs7m0vf.kr/data/editor/2101/9f565315ada2f1ddd9722527613d3ffc_1610109870_3689.jpg" alt="9f565315ada2f1ddd9722527613d3ffc_1610109870_3689.jpg" class="img-tag " style="width:416px;"/></a><span style="font-size:14pt;"><a href="http://xn--289ak2iu9buvke3bs7m0vf.kr/bbs/view_img.php?img=http%3A%2F%2Fwww.xn--289ak2iu9buvke3bs7m0vf.kr%2Fdata%2Feditor%2F2101%2F9f565315ada2f1ddd9722527613d3ffc_1610109840_8929.jpg" target="_blank" class="view_image"><img src="http://www.xn--289ak2iu9buvke3bs7m0vf.kr/data/editor/2101/9f565315ada2f1ddd9722527613d3ffc_1610109840_8929.jpg" alt="9f565315ada2f1ddd9722527613d3ffc_1610109840_8929.jpg" class="img-tag " style="width:340px;"/></a></span><br style="clear:both;" /><span style="font-size:14pt;"></span></p><p><span style="font-size:14pt;"><span style="font-size:14pt;"><span style="font-size:12pt;">&lt;심회가 강거민 양부모님을 위해 영의정을 내려 놓고 6년간 시묘살이를 했다는 시묘암&gt;</span></span></span></p><p><span style="font-size:14pt;"><br /></span></p><p><span style="font-size:12pt;"><span style="font-size:14pt;"><span style="font-size:14pt;">심회가 시묘살이를 했다는 바위가 바로 고아읍 예강리에 있는 시묘암(侍墓巖)이다. 안타깝게도 심회 역시 연산군 때 일어나는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부관참시를 당하는 가슴 아픈 일을 겪는다. </span></span></span></p><p><span style="font-size:14pt;"><br /></span></p><p><span style="font-size:14pt;">강거민과 심회의 이런 인연으로 청송심씨(靑松沈氏)와 신천강씨는 오늘날에도 형제처럼 지내고 있다. 파란만장한 역사의 한 중심에 서 있었던 신천강씨들의 역사를 보면 필자는 경외감을 가질 수밖에 없다. 이러한 역사적 굴곡과 비극의 중심에 신천강씨가 있었다. </span></p><p><span style="font-size:14pt;">​</span></p><p><span style="font-size:14pt;">그러나 오늘날에는  신천강씨는 암울한 과거의 잊고, 각 분야에서 후손들이 명문가로서 손색없는 역할을 다하고 있는 가문이라고 평가할 만하다. 굴곡진 역사 속에서 끊임없는 희망을 끈을 놓지 않은 신천강씨 가문에게 개인적으로 경의를 표한다.</span></p>]]></description>
	<dc:creator>이순락기자</dc:creator>
		<dc:date>Fri, 08 Jan 2021 20:18:35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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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김기훈의 역사와 인물】 충신 김종무(金宗武)! 장렬한 최후를 맞았지만, 그의 충절은 역사에 영원히 빛나다.</title>
	<link>http://xn--289ak2iu9buvke3bs7m0vf.kr/bbs/board.php?bo_table=03004&amp;wr_id=116</link>
	<description><![CDATA[<p><a href="http://xn--289ak2iu9buvke3bs7m0vf.kr/bbs/view_img.php?img=http%3A%2F%2Fwww.xn--289ak2iu9buvke3bs7m0vf.kr%2Fdata%2Feditor%2F2101%2F1953e773830408cbfe015f5c9392fb67_1609660464_0452.jpg" target="_blank" class="view_image"><img itemprop="image" content="http://www.xn--289ak2iu9buvke3bs7m0vf.kr/data/editor/2101/1953e773830408cbfe015f5c9392fb67_1609660464_0452.jpg" src="http://www.xn--289ak2iu9buvke3bs7m0vf.kr/data/editor/2101/1953e773830408cbfe015f5c9392fb67_1609660464_0452.jpg" alt="1953e773830408cbfe015f5c9392fb67_1609660464_0452.jpg" class="img-tag "/></a> </p><p><span style="font-size:12pt;">&lt;경북대 정치학박사, 前구미회 부회장, 새로넷방송 시청자위원&gt;</span></p><p><br /></p><p><span style="font-size:14pt;">구미시민이라면 고아읍 원호리에 있는 들성지 주위의 산책길 돌아봤을 것이다. 그리고 원호 푸르지오 옆으로 있는 “들성마을” 표지석과 대로변에 정려각(旌閭閣)을 한번쯤은 보았을 것이다. 사실 이곳은 선산김씨(善山金氏) 일명, 들성김씨들이 살았던 “웃골”이라는 집성촌이었는데 도시화의 물결로 지금은 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span></p><p><br /></p><p><span style="font-size:14pt;">필자가 이야기 하고자 하는 것은 그 중에서도 “충신김종무정려비(忠臣金宗武旌閭碑)”에 대해서이다. 김종무(金宗武)는 필자가 지난번 쓴 「금오산에서 조선 최고의 청백리, 구암 김취문(久庵 金就文)을 만나다」의 주인공 조선 최고의 청백리라고 할 수 있는 구암 김취문(久庵 金就文)의 큰아들이다. </span></p><p><br /></p><p><a href="http://xn--289ak2iu9buvke3bs7m0vf.kr/bbs/view_img.php?img=http%3A%2F%2Fwww.xn--289ak2iu9buvke3bs7m0vf.kr%2Fdata%2Feditor%2F2101%2F1953e773830408cbfe015f5c9392fb67_1609660523_3266.jpg" target="_blank" class="view_image"><img src="http://www.xn--289ak2iu9buvke3bs7m0vf.kr/data/editor/2101/1953e773830408cbfe015f5c9392fb67_1609660523_3266.jpg" alt="1953e773830408cbfe015f5c9392fb67_1609660523_3266.jpg" class="img-tag "/></a></p><p><span style="font-size:12pt;">&lt; 구미시 고아읍 원호리 들성마을에 있는 충신 김종무정려비, 조선 숙종 원년에 세워졌다&gt;</span></p><p><br style="clear:both;" /></p><p><span style="font-size:14pt;">1592년 (선조25년) 4월 13일, 조선은 개국(開國)이래 한번 겪어보지 못한 전쟁의 서막이 열리는 날이다. 우리는 이 날에 일어난 일본과의 전쟁을 임진왜란(壬辰倭亂)이라 역사에 기록하고 있다. 이 전쟁으로 조선전기와 후기를 나누는 분수령이 되며, 조선은 전쟁의 후유증을 극복하는데 수백년이 걸린다.</span></p><p><span style="font-size:14pt;">​</span></p><p><span style="font-size:14pt;">그러나 정작 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분로쿠·케이초오노 에키(文祿慶長の役), 도요토미 히데요시의(豐臣秀吉)의 조선출병(朝鮮出兵), 조선역(朝鮮役)으로 기록하는 것은 일본인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큰 역사적 사건으로 평가하지 않기 위해서이다.</span></p><p><br /></p><p><span style="font-size:14pt;">임진왜란으로 조선에 침략한 일본인의 학살로 조선인 60~80만명이 죽었다고 한다.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선두로 20만명을 이끌고 첨사 정발(僉事 鄭撥)이 지키고 있던 부산진을 함락시킨다. 정발은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무장의 모습으로 끝까지 장렬하게 싸우다 전사한다. 그러나 최고지휘관 경상좌수사를 맡던 박홍(朴弘)은 왜군이 쳐들어왔다는 말을 듣고, 무기와 식량을 불 지르고 성을 버리고 도망간다.</span></p><p><span style="font-size:14pt;"> </span></p><p><span style="font-size:14pt;">이후 왜적들은 동래부사 송상현(宋象賢)이 지키고 있던 동래성으로 진격한다. 좌수사 박홍의 도망처럼 여기서도 군사권의 최고책임자 지위에 있던 병마절도사인 좌병사 이각(李珏)은 백성들과 동래성의 무기와 식량을 버리고 성 밖으로 나가 도망쳐 버린다. </span></p><p><br /></p><p><span style="font-size:14pt;">왜군은 동래부사 송상현에게 “전즉전 부전측 가아도(戰則戰 不戰則 假我道), 싸우려면 싸우고, 싸우지 않으려면 우리에게 길을 빌려 달라.”는 뜻을 전달하자, 송상현은 “사이 가도난(死易 假道難), 죽기는 쉬워도 길 빌리는 것은 어렵다.” 왜적들에게 전달하면서 왜군의 동래성 공격이 시작되자 동래부사 송상현을 중심으로 성안의 모든 사람들이 끝까지 항전을 하였지만, 오래지 않아 동래성은 함락되고 성안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전사하거나 왜적의 포로가 된다. </span></p><p><br /></p><p><span style="font-size:14pt;">여기서 눈여겨 볼 것은 경상좌수사 박홍과 좌병사 이각이 식량과 무기를 버리고 도망친 것을 비롯하여, 경상우수사 원균(元均)은 노량진으로 도망가면서 경상우수영의 전선(戰船) 백여척과 화포·무기를 바다에 침몰시킨다. 또한 남해현령은 식량과 무기창고에 불을 지른 후 도망쳤다. 군사최고책임자들의 이 같은 행동들은 왜적이 북상하는데, 장애물을 조선 군사최고책임자들이 스스로 없에 줌으로서 왜군은 힘들이지 않고 북쪽으로 진격할 수 있었다.</span></p><p><br /></p><p><span style="font-size:14pt;">이후부터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왜적의 선봉대는 거침없이 말 그대로 파죽지세(破竹之勢)로 임금이 있는 한양을 향해 북상하게 된다. 조정은 4월17일 왜적이 쳐들어왔다는 보고 받자, 4월 19일 군사책임의 전권을 행사하는 도체찰사에 류성룡(都體察使 柳成龍)을 임명한다. 류성룡은 전란을 대비해 이미 이순신(李舜臣)을 전라좌수사, 권율(權慄)을 의주목사에 발탁했던 유비무환(有備無患)을 알았던 사람이다. </span></p><p><span style="font-size:14pt;">​</span></p><p><span style="font-size:14pt;">그리고 그가 저술한 징비록(懲毖錄)을 통하여 현대인들은 임진왜란이 어떻게 진행되며, 전란을 어떻게 수습했는가를 알 수 있었다. 류성룡이 1592년 (선조25년)부터 1598년까지 7년 동안에 걸친 임진왜란에 대하여 집필한 징비록은 현재 국보 제132호 지정되어 있다. 류성룡의 이러한 업적을 기리기 위해 한국 해군은 한국 최고의 전함인 이지스함을 서애 류성룡함으로 이름 붙였다.</span></p><p><br /></p><p><a href="http://xn--289ak2iu9buvke3bs7m0vf.kr/bbs/view_img.php?img=http%3A%2F%2Fwww.xn--289ak2iu9buvke3bs7m0vf.kr%2Fdata%2Feditor%2F2101%2F1953e773830408cbfe015f5c9392fb67_1609660850_0052.jpg" target="_blank" class="view_image"><img src="http://www.xn--289ak2iu9buvke3bs7m0vf.kr/data/editor/2101/1953e773830408cbfe015f5c9392fb67_1609660850_0052.jpg" alt="1953e773830408cbfe015f5c9392fb67_1609660850_0052.jpg" class="img-tag "/></a></p><p>&lt;조선최고의 명재상 서애 류성룡 영정&gt;</p><p><br style="clear:both;" /></p><p><span style="font-size:14pt;">도순변사 신립(都巡邊使 申砬), 순변사 이일(巡邊使 李鎰), 종사관 김여물(從事官 金汝岉), 경상우도초유사 김성일(慶尙右道 招諭使 金誠一), 경상좌도안집사 김륵(慶尙左道安集使 <span style="font-size:14pt;">金玏</span>)을 각각 임명하여 민심을 수습하는 한편 각 지역의 의병(義兵)이 일어나도록 하기 위해서 비상개각을 단행한다.</span></p><p><br /></p><p><span style="font-size:14pt;">왜적은 부산 → 울산 → 경주 → 영천 → 대구 → 인동 → 선산 → 상주로 진격하고 있었다. 상주는 문경을 거쳐 한양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이며, 당시 상주는 사통팔달의 교통의 중심지였다. 상주가 함락되면 전쟁은 걷잡을 수 없는 상황으로 전개되기 때문에 어떻게든 상주에서 적을 차단하는 작전을 전개해야 했다.</span></p><p> <a href="http://xn--289ak2iu9buvke3bs7m0vf.kr/bbs/view_img.php?img=http%3A%2F%2Fwww.xn--289ak2iu9buvke3bs7m0vf.kr%2Fdata%2Feditor%2F2101%2F1953e773830408cbfe015f5c9392fb67_1609661263_0407.jpg" target="_blank" class="view_image"><img src="http://www.xn--289ak2iu9buvke3bs7m0vf.kr/data/editor/2101/1953e773830408cbfe015f5c9392fb67_1609661263_0407.jpg" alt="1953e773830408cbfe015f5c9392fb67_1609661263_0407.jpg" class="img-tag "/></a> </p><p>&lt;상주 북천 임란전적지 일대, 임진왜란 때 상주 북천에서 전투 일아난 곳으로 추정하고 있다&gt;</p><p><br /></p><p><span style="font-size:14pt;">상주를 막지 못하면 왜적이 한양으로 가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4월 23일 순변사 이일은 종사관에 문관출신의 박호(朴箎)·윤섬(尹暹)과 중앙군 60명을 이끌고 상주에 도착한다. 순변사 이일은 전라도수군절도사로 있다가, 1583년(선조 16년) 여진족 니탕개(尼湯介)가 조선 국경지역을 침략하자, 이를 격퇴하고 두만강을 건너가 여진족 공격하여 공을 세운 인물이며 기병전에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그래서 순변사 이일은 상주에서 왜적과 전면전, 그것도 기마병을 이용한 작전을 구상하고 있었다. </span></p><p><br /></p><p><span style="font-size:14pt;">이일은 말을 타고 전쟁을 하는 기병전에 강한 측면이 있었기 때문에 역마를 이용한 군사작전을 위해 11개 역(驛)의 찰방(察訪)들에게 역마동원령을 내렸다. 그러나 역마동원령에 말을 몰고 상주에 도착한 사람은 선산 출신의 사근도 찰방(沙斤道 察訪) 김종무(金宗武) 한사람뿐이었다. 역마동원령에 따라 김종무는 사근도에서 말을 관리하는 역노(驛奴) 100여명과 전투에 사용할 군마 130~150여필을 가지고 상주성으로 도착했다.</span></p><p><br /></p><p><span style="font-size:14pt;">순변사 이일이 상주에 도착했을 때는 상주목사 김해(金澥)는 순변사를 기다린다는 핑계대고 산속으로 도망가고 없었다. 판관 권길(權吉)이 상주성을 지키고 있었다. 순변사 이일은 군사가 없는 것을 확인하고 분노하여 판관 권길을 목을 베어 죽이려 한다.  이 때 김종무는 순변사 이일에게 도망간 “백성들에게 곡식을 나누어 주고, 그들과 함께 싸워야 합니다.”라고 건의하는 함으로서 상주 판관 권길은 군사를 모을 것 순변사 이일에게 약속하고, 밤낮으로 백성과 군사들을 독려하여 수백 명을 모은다. </span></p><p><br /></p><p><span style="font-size:14pt;">4월 25일 새벽 왜적의 상주성 공격이 시작된다. 그런데 순변사 이일은 임진왜란이 그 전의 전쟁 양상과 전혀 다르다는 것을 파악하지 못하고, 기존의 기마전과 진법(陣法)을 통한 전투를 준비했던 것이다. 이미 왜적은 서양에서 수입된 총을 사용하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총을 이용한 전쟁의 개념을 알지 못한 이일은 그에 대한 대비를 전혀 하지 못했다. </span></p><p><br /></p><p><span style="font-size:14pt;">4월 24일 개령현(開寧縣)의 농민이 찾아와 순변사 이일에게 “왜적이 상주 가까이 왔습니다.”하지만, 이일은 이 보고를 허위보고라고 믿고 목을 베려 하였다. 그러나 농민은 다급하게 “제 말이 맞는지 아닌지는 내일 아침에 왜적들이 쳐들어오는지 아닌지 확인한 다음 죽이시면 되지 않습니까?”하자, 이일은 농민을 옥에 가두었다. 아침이 되어도 아무 일이 없자, 이일은 농민의 목을 베어 허위보고의 본보기로 모든 군사들에게 보였다.</span></p><p><br /></p><p><span style="font-size:14pt;">상황이 이렇게 흘러가자, 왜적의 척후병이 몰래 나타나 척후활동을 하여도 어느 누구 하나 순변사에게 보고를 하려 하지 않았다. 한마디로 상주전투는 작전보다는 경계에 실패한 전투였다. 그리고 순변사 이일은 왜적이 육전(陸戰)에 약하다는 계산으로 상주성 안에서 방어적 전투를 하려는 것이 아니라, 넓은 벌판에서 왜적과 전면전을 생각했다. 그래서 상주 북천(北川)에서 군사들에게 진(陣)을 연습시키고 있었다</span>.</p><p><br /></p><p><span style="font-size:14pt;">전면전에 대해 모든 참모들이 반대했음에도 순변사 이일은 강력하게 북천전투를 기획하고 실행에 옮겼다. 그리고 왜적의 척후병이 나타나 조선의 상주성의 모든 것을 파악하고 있을 때, 순변사 이일은 그것을 간파하지 못했다. 상주성 안에서 불이 나고 연기가 피어오르자, 그때서야 왜적이 나타난 것을 알고 급하게 전투태세를 취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span></p><p><br /></p><p><span style="font-size:14pt;">넓은 벌판에 진을 갖춘 상주의 조선군은 왜적의 화승총의 공격을 당해 낼 수가 없었다. 왜적의 공격에 상주에 집결한 조선군은 진영과 대오는 순식간에 무너지기 시작한다. 그러나 순변사 이일의 종사관인 박호, 윤섬 그리고 사근도 찰방 김종무와 이경류(李慶流)등은 장렬히 싸웠다. 중과부적이라는 전세를 파악한 순변사 이일은 도망치기로 마음먹고 참모들에게 “나를 따르라”하자, 함께 싸우던 참모들은 일제히 “장차 무슨 면목으로 임금을 뵈올 수 있겠습니까?” 하며 끝까지 사우다 장렬히 전사한다.</span></p><p><br /></p><p><span style="font-size:14pt;">또한 사근도 찰방 김종무 · 이경류 · 판관 권길 ·호장 박걸 등이 조선 최고의 장수라고 할 만한 순변사 이일이 도망친 전투에서 최후까지 장렬하게 싸우다 전사한다. 이들이 장렬하게 싸우고 죽는 동안 순변사 이일은 상주를 도망쳐 충주의 신립 장군이 있는 탄금대로 도망가자, 전투를  치열하게 벌이고 있던 군사들마저 대열을 이탈하여 도망치기 시작했다. </span></p><p><br /></p><p><span style="font-size:14pt;">사근도 찰방 김종무는 그의 고향이 선산 들성마을이었다. 선산을 거쳐야 상주로 갈 수 있었지만, 풍전등화의 위기 속에서 사적인 가족의 안위는 돌아 볼 수가 없었다. 고향 땅에 가족을 뒤로 한채 상주 북천으로 달려갔던 김종무는 그렇게 상주 북천 전투에서 장렬히 싸우다 전사했다. </span></p><p><span style="font-size:14pt;">​</span></p><p><span style="font-size:14pt;">불행은 한꺼번에 온다고 했는가? 고향 선산에 남겨진 김종무의 가족들인 노모, 부인은 김종무의 전사 소식에 죽고, 아들과 동생은 전쟁으로 인한 여파로 죽는다. 임진왜란은 당시 어느 누구 할 것이 죽음과 고통이었지만 선산김씨와 김종무, 그리고 남겨진 가족에게는 더 없이 가혹한 전쟁이었다. </span></p><p><br /></p><p><span style="font-size:14pt;">김종무는 1548년(명종 3) 선산 들성(坪城)에서 조선 최고의 청백리라 할 만한 대사간·홍문관부제학을 역임한 구암 김취문의 첫째 아들로 태어난다. 김종무는 학식과 인품에 있어서 당시 널리 알려져 각계각층의 천거로 벼슬길에 나간다. 김종무는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년전 전라도 종6품의 외관직인 남원의 오수찰방(獒樹察訪)으로 부임했다가 함양의 사근도 찰방으로 자리를 옮겨 얼마 있지 않아 임진왜란이 일어난다. </span></p><p><span style="font-size:14pt;">​</span></p><p><span style="font-size:14pt;">상주 북천전투에서 눈앞에 두고 있던 김종무는 처음부터 순변사 이일에게 상주성 안에 진을 칠 것을 주장하였다. 그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은 이일을 원망하며, 항상 자기를 따라 다니던 노복(奴僕) 한룡에게 김종무가 항상 가지고 다니던 부채를 주면서 “나는 이제 여기서 죽는다. 너는 이 부채를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 가족들에게 내가 여기서 죽었다고 전하라.” 그러나 노복 한룡은 부채를 가지고 주인 혼자 남겨두고 떠나지를 못해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다 주인의 운명과 같이 한다.</span></p><p><br /></p><p><span style="font-size:14pt;">김종무는 갑옷을 고쳐 입고, 말에 올라 적진으로 뛰어들었지만, 왜적이 쏜 총탄에 죽는다. 슬프게도 김종무가 가족들에게 전하라고 했던 부채를 손에 꼭 쥐고 있었던 노복도 왜적의 총탄에 죽고 말았다. 그리고 김종무를 따라 참전했던 재종질인 김겸(金謙)도 김종무를 따라 장렬히 싸우다 전사한다.</span></p><p><br /></p><p><a href="http://xn--289ak2iu9buvke3bs7m0vf.kr/bbs/view_img.php?img=http%3A%2F%2Fwww.xn--289ak2iu9buvke3bs7m0vf.kr%2Fdata%2Feditor%2F2101%2F1953e773830408cbfe015f5c9392fb67_1609661633_4642.jpg" target="_blank" class="view_image"><img src="http://www.xn--289ak2iu9buvke3bs7m0vf.kr/data/editor/2101/1953e773830408cbfe015f5c9392fb67_1609661633_4642.jpg" alt="1953e773830408cbfe015f5c9392fb67_1609661633_4642.jpg" class="img-tag "/></a></p><p><span style="font-size:12pt;">&lt;안동시 서후면 성곡리에 있는 김종무와 류씨부인의 묘비&gt;</span></p><p><span style="font-size:12pt;">​</span> </p><p><span style="font-size:14pt;">김종무가 상주전투에서 전사한지 90년이 흐른 1675년(숙종 1년)에 그의 공이 인정되어 충신(忠臣)으로 인정되어 충신김종무정려비(忠臣金宗武旌閭碑)가 그가 태어난 고향 들성 마을 앞에 세워지고, 1721년 (경종1년)에 상주 북천 충렬사(忠烈祠)에 제향 되어 졌다. </span></p><p><br /></p><p><span style="font-size:14pt;">김종무는 안동 하회마을의 풍산류씨(豐山柳氏) 입암 류중영(立巖 柳仲郢)의 사위이다. 따라서 겸암 류운룡(謙庵 柳雲龍), 서애 류성룡(西厓 류成龍)과 처남매부지간이 된다. 따라서 김종무는 임진왜란을 진두지휘하고 있던 명재상이라고 일컬어지는 영의정 겸 도체찰사 류성룡의 처남이 된다.</span></p><p><br /></p><p><span style="font-size:14pt;">김종무의 가족들은 지금의 금오산 도선굴에 피해있었다. 상주북천 전투에서 김종무의 사망소식을 듣자, 어머니 광주이씨(廣州李氏)는 그 슬픔과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죽음을 맞이 하였다. 그리고 류씨 부인마저 슬픔과 고통으로 혼절하여 사경을 헤매던 중 친정인 안동 하회마을의 큰오빠인 겸암 류운룡이 하인들을 시켜 큰 대바구니에 여동생을 담아 오라고 명을 내린다.</span></p><p><br /></p><p><span style="font-size:14pt;">하인들은 급히 금오산의 류씨부인을 하회마을로 옮겨가던 도중 안동 입구인 일직(一直)에서 안타깝게 1592년 9월 26일에 세상을 떠났다. 김종무와 류씨부인의 묘소는 안동시 서후면 성곡리의 안동권씨 시조 권행(權幸) 묘소 근처에 있다. 류씨부인의 아버지 류중영의 묘소가 바로 </span><span style="font-size:14pt;">거기 있기 때문이다.  </span><span style="font-size:14pt;">﻿</span></p><p><br /></p><p> <a href="http://xn--289ak2iu9buvke3bs7m0vf.kr/bbs/view_img.php?img=http%3A%2F%2Fwww.xn--289ak2iu9buvke3bs7m0vf.kr%2Fdata%2Feditor%2F2101%2F1953e773830408cbfe015f5c9392fb67_1609661719_7381.jpg" target="_blank" class="view_image"><img src="http://www.xn--289ak2iu9buvke3bs7m0vf.kr/data/editor/2101/1953e773830408cbfe015f5c9392fb67_1609661719_7381.jpg" alt="1953e773830408cbfe015f5c9392fb67_1609661719_7381.jpg" class="img-tag "/></a></p><p><span style="font-size:12pt;">&lt;안동권씨 시조 권행과 풍산류씨 유중영의 묘소 근처의 김종무 묘소 위치&gt;</span></p><p><span style="font-size:12pt;">​</span> </p><p><span style="font-size:14pt;">류성룡은 동생의 죽음을 이렇게 표현했다. “슬프다. 여동생은 천성이 영리하고 순수하였으며, 타고난 기질이 남달리 유순하여 평생에 빠른 말과 급한 빛이 없었다. 하지만 그에 다른 복록의 보답을 얻지 못하여 평소에 곤궁이 심했고, 수명 또한 길지 못해 겨우 마흔한 살로 난리를 만나 떠돌아다니다 죽고 말았으니, 하늘이 어찌 사람에게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라고 묘지명을 쓴다.</span></p><p><br /></p><span style="font-size:14pt;"></span><p><span style="font-size:14pt;">김종무의 큰 아들인 김충(金翀)은 어린 나이에 경전과 사서에 모르는 것이 없었지만, 금오산 도선굴에서 피난 도중 안타깝게도 16세에 사망한다. 김종무의 남겨진 혈육은 오직 둘째 아들 김공(金羾)과 김종무의 딸만 남게 된다. 그들을 돌봐 줄 사람은 안동 하회의 외삼촌인 류운룡·류성룡 형제였다. </span></p><p><span style="font-size:14pt;">​</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span style="font-size:14pt;">가족 모두가 죽었음으로 김종무의 둘째 아들과 딸은 외가인 안동 하회마을로 가게 된다. 하회마을의 류운룡·류성룡은 생질인 김공을 친자식처럼 먹이고 입히며 교육을 시킨다. 이러한 외가에서 살던 김공은 외삼촌들로부터 높은 수준의 학문을 전수 받게 된다. </span></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span style="font-size:14pt;"><span style="font-size:14pt;">​</span></span></span></p><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span style="font-size:14pt;"><span style="font-size:14pt;">나중에 김종무의 딸은 외가에서 훌륭하게 성장하여 </span><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안동 내앞마을 의성김씨(義城金氏) 청계 김진</span><span lang="en-us" style="letter-spacing:0pt;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 xml:lang="en-us">(</span><span style="letter-spacing:0pt;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靑溪 金璡</span><span lang="en-us" style="letter-spacing:0pt;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 xml:lang="en-us">) → 약봉</span><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 김극일(<span class="u_word_dic u_active">藥</span><span class="u_word_dic">峯 <span class="word_txt"><span class="u_word_dic">金</span><span class="u_word_dic">克</span><span class="u_word_dic">一) → </span></span></span>김철</span><span lang="en-us" style="letter-spacing:0pt;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 xml:lang="en-us">(</span><span style="letter-spacing:0pt;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金澈</span><span lang="en-us" style="letter-spacing:0pt;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 xml:lang="en-us">)로 이어지는 내앞마을 의성김씨 대종택인 김철에게</span><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 시집을 가 의성김씨 종가를 훌륭하게 이끌어 간다. 비록 김종무는 죽었지만, 살아남은 아들과 딸은 훌륭하게 자라 명문가를 이루어 낸다.</span></span></span></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span><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span><p><br /></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span><p><span style="font-family:'굴림', Gulim;font-size:14pt;"><span style="font-size:14pt;">외가에서 살던 김공은 1594년(선조 27년) 피난 중이던 여헌 장현광(旅軒 張顯光)을 찾아가 제자로서 예를 올리고 사제지간이 된다. 여헌 장현광의 눈에 김공은 보통 아이가 아니었다. 그리고 장현광은 김공에게 본인의 생질인 노경필(盧景佖)의 딸과 혼인을 주선한다. 고향 선산으로 돌아 온 김공은 노경필의 딸과 혼인을 한다.</span></span></p><p><span style="font-size:14pt;">​</span></p><p><span style="font-size:14pt;">김공이 노경필의 사위가 되면서 이후부터 인동장씨(仁同張氏), 선산김씨(善山金氏), 안강노씨(安康盧氏), 풍산류씨(豐山柳氏)는 사제관계와 인척관계로 발전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 </span></p><p><br /></p><p><span style="font-size:14pt;">퇴계학(退溪學)을 전수받은 서애학파(西厓學派)의 김공은 안동시대를 마감하고 여헌학파(旅軒學派)로 방향을 전환한다. 김공의 큰 외삼촌인 류운룡이 인동현감(仁同縣監)으로 있었을 때 장현광의 높은 학문과 인품을 익히 알고 있었다. 그리고 류운룡이 인동현감으로 있을 때 길재선생 묘소 정비와 지주중류비(<span class="sub_tit">砥柱中流碑)를 세우면서 인동·선산에 인연이 많았다.</span></span></p><p><span style="font-size:14pt;">​</span></p><p><span style="font-size:14pt;">그리고 김공의 작은 외삼촌인 류성룡이 봉화 도심촌에 피신해 있을 때 장현광이 찾아 온다. 류성룡은 장현광을 보는 순간 대유학자가 될 것과 나라의 큰 스승이 될 것을 예언한다. 이러한 연유로 류성룡은 아들 수암 류진(修巖 柳袗)을 여헌 장현광에게 보내어 수학하게 했다. 장현광을 아마 높이 평가했기 때문에 이러한 파격적인 결정을 내릴 수 있었을 것이다. 이후 류진은 장현광의 제자 중 여헌십철(旅軒哲)로 성장하고 대학자로 나아간다.</span></p><p><br /></p><p><a href="http://xn--289ak2iu9buvke3bs7m0vf.kr/bbs/view_img.php?img=http%3A%2F%2Fwww.xn--289ak2iu9buvke3bs7m0vf.kr%2Fdata%2Feditor%2F2101%2F1953e773830408cbfe015f5c9392fb67_1609662068_6249.jpg" target="_blank" class="view_image"><img src="http://www.xn--289ak2iu9buvke3bs7m0vf.kr/data/editor/2101/1953e773830408cbfe015f5c9392fb67_1609662068_6249.jpg" alt="1953e773830408cbfe015f5c9392fb67_1609662068_6249.jpg" class="img-tag "/></a></p><p><span style="font-size:12pt;">&lt;17세기 조선의 성리학을 이끌었던 여헌 장현광&gt;</span></p><p><span style="font-size:12pt;">​</span> </p><p><span style="font-size:14pt;">김공의 결혼한 이후 외가살이를 청산하고, 고향 선산으로 돌아와 선산김씨 집안의 형제들인 김경(金澃) · 김양(金瀁) · 김하량(金厦樑) · 김하천(金廈梴)을 여헌 장현광 문하 입문의 길을 연다. 이들이 여헌문하에서 수학한 이후 선산김씨뿐만 아니라 지역을 대표하는 학자로 성장하는 발판을 마련한다. </span></p><p><span style="font-size:14pt;">​</span></p><p><span style="font-size:14pt;">그리고 이들은 스승 여헌 장현광을 평생토록 보필하면서 여헌학파의 중심적 인물들이 성장하게 되었고, 여헌학(旅軒學)을 지역사회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으로까지 외연(外延)을 확장시키는데 크게 기여한다. 아무리 좋은 학문이라 할지라도 반드시 그 학문과 스승을 지지하는 세력이 필요한 것이 동서고금을 진리인 것이다.</span></p><p><br /></p><p><span style="font-size:14pt;">김공이 외가인 안동 하회마을에서 있었을 때 외삼촌들인 겸암 류운룡과 서애 류성룡에 대해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의지할 곳 없는 외로운 몸이 되자, 겸암(謙庵) · 서애(西厓) 두선생이 친아들처럼 돌보며 바르게 교도하였다. 이 때문에 글을 읽고 뜻을 가다듬으며 몸을 근신하고, 행실을 닦는 방법을 알게 되었다.”라고 하는 것처럼 김공은 겸암(謙庵) · 서애(西厓) 두 분의 외삼촌에 대한 고마움과 깊은 존경심을 표현하고 있다.</span></p><p><br /></p><p><span style="font-size:14pt;">금오산을 많은 사람들이 찾으면, 반드시 대혜폭포 찾아 물이 떨어지는 것을 시원하게 구경한다. 폭포 밑에 폭포수가 모이는 작은 못이 바로 욕담(浴潭)이다. 대혜폭포 절벽에는 자세히 살펴보면 욕담 김선생 영귀대(浴潭金先生詠歸臺)라는 글자가 바위에 새겨져 있다. 이 욕담이 바로 전쟁으로 모든 것을 잃은 김공의 호(號)이다. </span></p><p><br /></p><p><a href="http://xn--289ak2iu9buvke3bs7m0vf.kr/bbs/view_img.php?img=http%3A%2F%2Fwww.xn--289ak2iu9buvke3bs7m0vf.kr%2Fdata%2Feditor%2F2101%2F1953e773830408cbfe015f5c9392fb67_1609662160_8113.jpg" target="_blank" class="view_image"><img src="http://www.xn--289ak2iu9buvke3bs7m0vf.kr/data/editor/2101/1953e773830408cbfe015f5c9392fb67_1609662160_8113.jpg" alt="1953e773830408cbfe015f5c9392fb67_1609662160_8113.jpg" class="img-tag "/></a></p><p>&lt;김종무의 가족들과 욕담 김공이 피난처였던 도선굴로 가기전의 대혜폭포와 연못이 바로 욕담(<span style="font-size:12pt;"><span style="font-size:12pt;">浴潭</span>)</span>이다&gt;</p><p><br style="clear:both;" /></p><p><span style="font-size:14pt;">욕담 김공(浴潭 金羾)은 금오산 도선굴과 대혜폭포에서 있는 동안 임진왜란은 김공의 모든 것을 빼앗아 갔고 그에게 있어 죽을만큼의 시련의 과정이었다. 누구도 겪어보지 못한 가족들의 죽음으로 처절한 아픔과 고통을 경험했다. 김공은 이 고통과 슬픔을 한시라도 잊지 않기 위해 어쩌면 스스로 욕담(浴潭)이라 하였는지도 모른다. </span></p><p><br /></p><p><span style="font-size:14pt;">선산김씨 가문의 김취문 </span><span style="font-size:14pt;">→ 김종무 </span><span style="font-size:14pt;">→ 김공으로 이어지는 절(節) </span><span style="font-size:14pt;">· 충(忠) </span><span style="font-size:14pt;">· 학(學)은 그 옛날 조선시대에서 빛났다고 평가 할 수 있다. 상주 북천전투에서 순절한 충신 김종무는 지금이나 그 때나 높은 </span><span style="font-size:14pt;">사회적 신분에서 요구하던 도덕적 의무인 "</span><span style="font-size:14pt;">노블리스 오블리제(</span><span class="sub_tit" style="font-size:14pt;">noblesse oblige)를 실천한 선비였다고 평가 할 수 있겠다. </span><span style="font-size:14pt;"> </span></p><p><br /></p><p><span style="font-size:14pt;">들성마을을 지나 갈 때가 있다면, 한번 쯤 충신김종무정려비를 확인하는 것도 잊혀져 가는 충성(忠誠)의 의미를 되새겨 보는 기회가 아닐까! 한다. </span><br /> </p><br /><br />]]></description>
	<dc:creator>이순락기자</dc:creator>
		<dc:date>Sun, 03 Jan 2021 17:26:03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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