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훈박사칼럼]위기의 구미, 과연 무엇이 필요한가?

이순락기자 0 28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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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훈 경북대 평화문제연구소 연구위원, 구미회 부회장 

구미에 어른이 없다. 중재자의 역할을 할 어른이 필요하다. 


위기의 구미에서 가장 가슴 아프고 안타까운 것 중 하나는 지역사회에 어른이 없다는 것이다.필자는 이전 칼럼에서 구미에서 중심을 잡는 어른도 없기 때문에 정치인들이 제대로 노력하는 모습도 없고, 이전투구와 같은 무질서의 정치가 성행하는 하나의 요소라고 보았다. 지역사회에서 존경을 받으며 제도권에 들어가지 않으면서 구심점 역할을 할 수 있는 인물이 우리 구미지역에는 찾기가 힘들다. 

사실 지역의 어른은 바뀌는 정치인보다 지역에서 더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


어른의 역할은 중차대한 문제가 생겼을 때는 여러 사람들의 의견인 중론(衆論)을 신속하게 모을 수가 있는 장점이 있다. 그리고 어른이라고 할 수 있는 오피니언 리더(opinion leader)들은 제도권에 들어가지 않는다면 오히려 정치인보다 오피니언 리더의 행동과 말을 더 신뢰하게 된다. 

지역문제가 생겼을 때는 무조건 정치적으로 풀어 나가는 것은 지역의 분열과 대립을 상존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 이럴 때 지역의 어른과 오피니언 리더들이 중심을 잡는 “전통적인”방식이 조금이라도 살아 있었다면 구미가 이렇게 질서 없는 도시는 되지 않았을 것이다. 


미국의 다양한 민족이 섞여 살고 있는 멜팅 팟(melting pot)처럼 구미 사람들은 비빔밥처럼 구미라는 그릇 속에 섞여 버렸다. 

1970년도부터 전국에서 몰려들다 보니 빠른 시간에 무작정 구미로 모여들었다. 

출신지는 달라도 구미로 와서 짧은 시간에 구미시민으로 탈바꿈되면서 구미는 그야말로 경쟁의 도가니가 되었다. 구미의 역사적 상황이 이러다 보니 어른이라고 할 수 있는 오피니언 리더가 성장하고 나올 환경이 매우 열악했다.


구미에 지역 정치를 책임지고 있는 정치인들에게 “쓴 소리” 하는 어른이 있었나? 

필자가 보기에는 없었다. 자기를 찾아 주지 않으면 비난하고, 자기를 찾아 주면 점잖은 척하면서도 자기의 이익을 챙겼다. 

누군가가 당선되면 자기를 알아 달라는 식의 반복적 습관들뿐이었다. 

그래서 구미에서 정치인들은 시민들을 무서워하는 것을 찾아 볼 수 없었다.


구미에 어른이 아예 없지는 않았다. 있기는 있었다. 

하지만, 어른들과 오피니언 리더들이 특정 정치인들의 홍보대사처럼 측근으로 변모하여 신뢰성과 지역 문제에 대한 중재(仲裁)하는 영역이 미약했고, 편파적 정치색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 역할을 못했다고 할 수 있다. 

지금 구미는 바른 소리와 쓴 소리를 할 수 있는 어른이 필요하다.


지역의 온정주의를 버리자! 구미시는 “운영”이 아니라 “경영”을 하자!


미국사회는 프래그머티즘(Pragmatism), 즉 실용주의적 사고방식의 사회이다.  

미국 정치에도 실용주의가 녹아 있다. 그래서 소모적이고 불필요한 정쟁을 하지 않는다. 

자국의 이익이 침해당하면 여여가 정쟁을 피하고 머리를 맞대고 논의를 한다. 

실용주의적 사고방식으로 철저하게 무장된 미국의 정치인과 관료들은 무엇이 미국의 이익인가를 먼저 고려한다. 미국의 정치와 우리의 정치는 너무나 대조적이다. 


그러나 한국사회의 정치인과 관료들은 이러한 실용주의적 사고방식을 잘 훈련받지 못했다. 특히 지방의 정치인과 지방 공무원들은 더군다나 실용주의적 사고방식이 부족하다. 실용주의적 사고방식보다는 우리 대구·경북지역에서는 대체적으로 온정주의(paternalism)에 호소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고 결과 역시 좋았다. 


온정주의의 폐해는 “우리가 남이가”라는 식으로 정치인들이 선거 때만 되면 우리 지역에 호소했다. 대부분 먹혀 들었다. 그러면서 구미는 지역분할구도를 이용한 특정정당이 손쉽게 당선되는 곳이었다. 온정주의 휴머니즘(humanism)이 아니다. 

구미는 이러한 온정주의를 버려야 살 수 있다. 

그래야 정치·경제적 관점에서 구미가 매력적인 곳이 될 수 있다. 

어중간한 색깔보다는 아예 색깔이 없는 것이 더 좋을 수 있다. 


아무리 좋은 정책과 기획·아이디어가 관료들의 손을 거치면 본래 기획된 것보다 훨씬 못 미치는 결과와 성과를 거두는 경우가 많다. 

상대적으로 글로벌 기업과 민간 기업들은 얼마나 눈부신 발전 했는가? 

관료조직은 “경영(經營)”이 없고, “운영(運營)”만이 있을 뿐이다. 


특히 고시출신자 행정관료들은 경영을 배워보지 못했다. 

관료적 사고는 어떠한 새로운 개념의 사회가 다가오는지를 파악하지를 못한다. 

기업에서 치열하게 경쟁하는 풍토와는 전혀 다른 경쟁이 그렇게 치열하지 않는 관료생활을 하다 보니 새로운 것에 대한 도전과 대비를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지금의 구미가 된 원인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이제부터라도 구미시는 운영이 아니라 경영을 할 수 있는 사고의 전환을 시도해야 한다.  


1980년도 중반까지 대한민국의 성장은 관료가 중심적 역할을 한 사회였다. 

그러다보니 관료적 권위주의가 사회·정치·경제 분야를 생겨났다. 

그러나 이러한 관료적 권위주의는 만만찮은 모순과 부작용을 생산하여 장애물로 한국사회에 전반에 남겼다. 나라는 망해도 정치인과 공무원은 망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어서 그런지 대학생들의 대부분의 꿈은 공무원이다.


한번 공무원은 영원한 공무원이라는 불면의 공식이 되다 보니 대학생들과 취업을 준비하는 사람들에게 꿈의 직장이 된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엄청난 발전 가능성이 있는 젊은이들이 모두들 공무원이 되기 위해 그들의 젊음을 도서관과 고시원에서 불태우고 있다.


사회·경제 각 분야에서 엄청난 속도로 발전했음에도 관료조직 특히 지방 공무원들은 지금 어떠한가? 관료들에게 경쟁력이라는 것을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에 아무리 좋은 계획과 발상이 있어도 현실적으로 구현되고 재현되는 것은 매우 어렵다고 할 수 있겠다. 

21세기 새로운 창조적 패러다임을 요구하는 글로벌 시대에 경쟁력이 취약한 관료들이 사회를 이끄는 시대는 막을 내렸다.


공무원은 처음부터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는 훈련을 받지 않았다. 

창조적 사고를 하는 것을 기대하기가 어렵다. 요즘 공무원이 되려면 도서관과 고시원에서 몇 년 교과서 같은 책을 수도 없이 보아야 합격한다. 그들에게 창조적 발상을 하라는 것 자체가 무리이고 잘못 되었다. 


그런데 지방선거에서 선출된 단체장들은 공무원들에게 좋은 기획과 프로젝트, 아이디어를 내놓으라고 요구한다. 공무원들이 내놓는 것은 기존의 사고방식이 아니면 벤치마킹이 대부분일 것이다. 

이 벤치마킹을 한다고 국내는 몰론 해외 선진지 견학이라는 명목으로 교통항공비와 식대비만 날리고 돌아온다. 대체로 예산낭비와 신통찮은 정도의 성과만을 내는 것이 다반사였다. 


관료조직은 어떠한 일을 할 때 마지막으로 투명한 과정과 투명한 결과만을 지켜본다. 

왜냐하면 대한민국의 최고의 공무원들이 창조적 사고보다는 법과 규정 틀에 박히다 보니 융통성이 사라지는 것은 당연하다. 어떠한 과제를 성공시키는 것보다 열정과 노력보다는 실수나 실패하여 질책과 징계조치를 받지 않는 것을 더 원한다. 

그래서 능력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무기력하게 관행적 해오던 방식으로 모든 일을 접근하게 되는 것이다.


지금 9급 공무원 되기가 얼마나 어려운가? 옛말에 “봉황(鳳凰)을 여러 마리 키우다 보면 나중에는 닭(鷄)밖에는 없다”는 말이 있다. 훌륭한 엘리트라고 할 수 있는 봉황이 닭이 되는 사회가 되어서는 되겠는가? 그만큼 봉황들의 능력을 키워주지 못하는 구조를 개선하려고 지방자치 단체장은 길을 열어줘야 한다. 구미시장 역시 엘리트 공무원이 나올 수 있도록 그들을 도와주고 운영이 아니라 경영을 해야 한다.


구미시민들은 지역 정치인들에게 직언(直言)과 충고(忠告)의 말을 해야 한다.


구미 시민들은 지역 청치를 책임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직언과 함께 충고어린 말을 해야 한다. 그러나 실상은 정치인들 앞에서는 한마디도 못하면서 그들이 없는 곳에서는 직언과 충고가 아니라 욕설과 비난을 하는 경우가 훨씬 많다. 


지역 정치인들에게 욕설과 비난을 해서는 지역의 발전 가능성은 더욱 희박해진다. 

각종 모임과 술자리에서 욕하고 싶은 정치인이 있다고 해서 마구잡이로 비난하는 것은 모두에게 도움이 되지 않고 혼란한 상황만 계속적으로 연출하게 된다. 그러지 말고 시민들은 정치인들이 일하도록 자극과 충고를 던져야 한다. 충고하는 것을 걱정하지 말고, 겁내지 말자!


조선시대 사대부라면 왕에게 상소(上疏)를 올릴 수 있었다. 말과 글을 하는 선비들의 입을 막는다는 것은 곧 왕조가 망(亡)한다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과거에도 선비들의 여론이 국가 운영에 반영되었던 것이다. 


문(文)을 숭상하다보니 조선왕조는 외적의 침입에 약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렇게 약한 나라가 600년을 유지했던 나라는 세계사에서 찾아 볼 수가 없다. 

이유는 지배 중심 계급인 “말과 글”을 하는 사대부들 즉 선비들에게 말과 글을 할 수 있도록 만들고 열어줬기 때문이다. 조선중기 이후 부정부패와 당쟁으로 나라가 기울어져 가도 선비들의 말과 글을 하는 시·공간은 어떠한 경우에도 막지 않고 열어 놓았기 때문에 위기에서도 조선이 600년이라는 왕조의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과거의 선비들도 할 말을 했다. 지금의 구미시민들은 왜 말을 못하는가? 

숨지 말고 과감하게 비판하자! 시민이라고 소리 높여 외치는 그대들의 당연한 권리이다. 권리위에 잠자는 자(者)를 법도 보호해 주지 않는데 누가 그대들을 보호해 주겠는가? 구미는 과거 선비들처럼 “말과 글”을 당당하게 정치인들에게 하는 사람들이 필요하다.


소통하지 않는 정치인은 구미시민을 바보로 보는 것이다. 


구미지역의 정치인들은 자기의 의견과 이념이 달라도 일단 들어줘야 한다. 

구미가 왜 이렇게 되었나? 정치를 담당하고 있는 사람들이 미래를 예측하지 못했고, 정부에 대한 설득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구미를 이렇게 만든 “수도권 규제 완화” 이명박 정부에서 2009년에 완전하게 풀었고, 박근혜 정부는 구미에 대해 아무 생각이 없었다. 당시 구미의 정치인과 관료들의 구미경제에 대한 몰지각성과 이해부족이 구미를 더욱더 참담하고 암울하게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과거 구미가 위기일 때 소통과 대화 없이 일방적으로 이끌어 갔다. 구미의 지도자들은 시민들과 소통하겠다는 의지와 태도가 필요하다.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지금 현재의 구미의 지도자들 역시 이러한 의지와 태도가 실종된 상태 같아 보이는 것은 매우 안타까울 따름이다.


지역 정가에서 시민들과 소통하려는 정치인도 없고, 발품을 파는 정치인도 없다. 

구미 시민들에게 너무 건방지고 오만한 태도를 보인다. 이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구미의 가장 큰 문제이다. 지역의 책임있는 지도자들이 위기일 때 시민들의 의지와 행동을 한곳으로 모아야 하는데  진정한 할 일인데 행사장에 나타나 사진이나 찍고, SNS나 밤낮없이 하는 꼴이란 봐주기가 역겹다. 그들은 오래전 리더십이 땅에 떨어졌는지를 모르는 모양인 것 같다. 


사람에게 평생 붙어 다니는데 필요 없는 두 마리의 개(犬)가 있다고 한다. 그것이 “편견(偏見)과 선입견(先入見)”이다. 편견과 선입견은 누구든지 오만을 낳게 된다. 그리고 그 오만은 누구든지 파멸의 길로 이끈다. 구미에 출마한 정치인들은 지역을 발전시킨다고 출마하지 않았나? 필자가 보기에는 지역정가를 책임지고 있는 정치인들이 편견과 선입견을 극복하지 못하는 것 같다.


2017년 박근혜대통령이 탄핵된 법적 문제에 앞서 근본 원인은 “인(人)의 장막”에 갇혀 어느 누구와도 소통하지 않았기 때문에 탄핵된 것이다. 정치에서 가장 무서운 것이 인의 장막이다. 인의 장막은 깊은 산속의 숲과 같다. 그래서 숲에 들어간 사람은 눈앞에 어떠한 상황이 닥쳐온다는 것을 예측도 파악도 하지 못한다. 


인의 장막이 생기는 원인은 그들이 소통하는 채널과 창구가 다양하게 없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현재 구미시장은 소통하는 창구(counter)와 채널(channel)이 없다고 본다. 빨리 소통할 수 있는 창구와 채널을 만들었으면 한다.


직언과 충고를 듣지 않으면 동서고금의 지도자가 그랬던 것처럼 독선(獨善)에 빠져 결국은 본인이 망하는 것은 당연하고 나라도 함께 망하는 것을 숱하게 보아왔다. 정치인 스스로 눈이 어두워지고 귀가 막히면 어떻게 되겠는가? 구미의 정치 지도자들이 독선 그리고 편견과 선입견에 빠진 것이 아닌가? 소통과 대화는 정치인 본인뿐만 아니라 정치적 운명공동체의 중요한 문제를 해결하는 첫 번째 열쇠이다. 


구미를 제대로 미래를 설계하는 정치인을 앞으로 찾자!


우리 구미는 좋은 날은 어디 가고 없고, 앞이 보이지 않는 절망의 터널을 가고 있는 기분이라고 해야 할까! 이러한 때에 뭘 어떻게 하자고 지역의 정치인들이 시민을 설득하는 것도 없고, 지역에서 활동하는 모든 정치인이 한자리에 모여 지역문제 해결하기 위해 머리를 맞대고 밤새도록 토론하는 것도 없다. 그래서 구미시민들은 지역 정치인들에 따갑고 무서운 비판을 해야 한다. 


미숙아적 정치는 정치 시스템과 메카니즘을 마비시킬 수 있기 때문에 안하는 것이 오히려 시민들 입장에서는 좋을 것이다. 그래서 정치를 잘 하기 위해서는 정치적 숙련된 기술(skill)이 있어야 하고 배워야 한다. 정치는 기본적으로 주고받는(give and take) 것이다. 싸우면서도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거래(deal)를 할 줄 알아야 하는 것이다. 


2018년 지방선거가 끝나고 지역의 지도자들이 머리를 맞대고 대화를 하며 협력하는 모습을 현재까지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모두가 정치력 부재이다. 한마디로 한심하기 짝이 없다. 


구미시민들은 지금 절규와 고통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러나 책임 있는 정치인들이 “죄송합니다. 미안합니다.” 시민들에게 사과 한마디 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시민들의 말과 소리를 듣지 않고 염치가 없는데 그들에게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국회의원, 시장, 시도의원들이 행사장과 SNS에 자주 출몰한다. 

이유는 단순하다. 다음에 다가오는 선거 때문이다. 

이러한 행태들을 소통이라고 생각한다면 구미시민들은 바보인 것이다. 


요즘 오히려 웃으며 다가오는 내공(內攻) 있는 정치인을 찾아보기 힘들다. 정치적 미숙아(未熟兒)들이다. 웃으며 손을 잡아주고 무엇이 잘 못되었습니까? 잘 하겠습니다! 행동하는 정치인이 몇이나 되는가? 지금 구미시민들은 쫌생이 정치와 미숙아 정치를 보고 있다. 정치할 줄도 모르면 집에나 가지 왜 욕먹어 가며 그리 힘든 것을 한다고 하는지 지역 정치인들의 마음을 모르겠다. 출세욕인가?


지금은 정치에서 진보진영과 보수진영의 이념대결이 치열하기 때문에 이념적으로 다른 쪽 말과 글을 아예 들어주지 않는다. 그렇지만 보수적·진보적 정치인에게 시민들은 끝임 없는 자극을 줘야 한다. 자극은 때로는 정치를 하는 사람들에게 동기부여와 생각의 전환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나쁜 정치보다 더 나쁜 것은 무능한 정치이다. 정치가 무능하게 되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역사에서 국민과 국가는 사라지고 말았다. 이것은 역사의 절대적 진리였다.


지역 상황이 말 못하게 어렵다. 누가 보아도 위기를 타개하는 길은 멀고 험난하다. 하지만 노력하고 길을 찾는 설계를 한다면 가능할 수도 있다. 그러나 무능하고 무기력한 정치인을 가지고 길을 찾겠다는 것은 오히려 죽는 것이 낫을 것이다. 무능한 정치수준을 바꾸고, 구미를 새롭게 설계하고, 길을 찾을 수 있는 지도자를 찾는 것은 우리 구미시민들의 당면한 과제이며 책임이다. 




기사등록 : 이순락기자 / gbmnew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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