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야 청년 사학자 류돈하 칼럼 : 약포 선생을 찾아서

이순락기자 0 66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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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야 청년 사학자 도경당 류돈하, 본지 고정 칼럼리스트 ~


1년만의 재회였다.

약포 정탁(藥圃 鄭琢:1526~1605) 선생, 서애 류성룡 선생, 창암 이윤수(滄庵 李潤壽1545~1594) 선생 등 후손들의 만남이 1년만에 다시 이루어졌다.나는 이승희 선생님의 초대로 예천에 들렸다.상주 우복 정경세 선생 종택에서 오던 차였던 바, 생각컨대 이 여행이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었다.

용궁은 예천에 속해 있음에도 문경버스터미널에서 제법 가까운지라 선생은 또 작년과 마찬가지로 친히 마중을 나오셨다.어릴 적 나는 문경 흥덕동에서 호서남 초등학교를 다니며 잠시 거주한 경험때문에 낯선 풍경은 아니었다. 예천, 문경 일대에도 풍산류씨 일가들이 많이 거주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이들은 대부분 서애 선생의 4남인 유천 류초, 5남 겸근재 류첨 선생의 후손들이다.안동을 비롯하여 경북 북부 일대, 대구에서는 풍산류씨 일가들을 종종 만나지만 대구.경북을 벗어나 만나보기는 쉽지 않다.

이선생님의 차에 탑승하여 식당으로 가면서 유천 할배, 겸근재 할배에 관한 이야기를 가볍게 나누었다.이승희 선생님은 2018년 9월 26일자 글에서 전술했듯, 본관이 여주이씨 교위공파로 창암 이윤수 선생의 14대손이 되신다.창암은 서애의 매부이자 약포의 3남 청풍자 정윤목(鄭允穆)의 처부(장인어른)이 된다.청풍자는 서애의 제자이자 서애의 여동생 사위가 되니 곧 서애의 생질서이다.이처럼 약포와 서애, 창암은 퇴계학파라는 학연과 혈연, 지연으로 얼키고 설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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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관광으로 찾아 온 벨기에인 부부, 필자(오른쪽 두번째, 도경당 류돈하) ~

                                                 
이러한 삼연이 안동 유림사회의 특징이겠으나 부정부패, 축재 같은 범죄와는 전혀 거리가 멀다고 할수 있다.그 축적된 인연들이 무서운 규모가 되어 구한말 석주 이상룡 선생 등 혁신유림을 중심으로 항일구국광복의 항로에 폭발하였으니 이는 천하에 유례가 없는 일이다.

이선생님과 함께 고깃집에 앉아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다가 드디어 약포선생의 15대손이신 정선생님께서 들어오셨다.모두 반갑게 맞아주셔서 몸둘 바를 몰랐다.든든한 점심을 먹고 예천군 호명면 황지리에 위치한 도정서원(道正書院)을 방문하였다.


도정서원은 1700년도에 건립되었는데 약포상공의 충절과 학덕을 기리기 위하여 설립된 서원으로 1786년에 이르러 약포의 3남 청풍자선생을 추가배향하였다.18세기의 약포 문중에서는 약포의 5대손이자 청풍자의 4대손인 우천(牛川) 정옥 선생이 황해도 관찰사를 역임하였던 때였다.우천선생은 영주시 부석면 소천리가 고향이다.이는 선생의 증조부 정시영이 백부 정윤저의 양자가 되어 백모를 따라 영주 부석면 소천리로 입향한 까닭이다.내가 살았던 하회동에는 소천에서 시집온 소천아지매가 계셨다.소천아지매의 고향 소천에서는 황해도관찰사를 지낸 우천선생을 자랑으로 여긴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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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읍호정 현판 ~ 

                                                  
우리 일행이 도정서원에 들어서니 비교적 깔끔히 관리가 잘 이루어지고 있었다.관리하시는 분 역시 약포선생의 후손으로 2016년도부터 관리를 했다고 한다.도정서원 입구에는 입덕루라는 누각이 있었다.도정서원은 누각같은 강당을 위시하여 좌우로 기숙사가 배치되어 있었다.


도정서원 오른편에는 내성천이 굽이치며 서원을 감싼 채 흐르고 있었고 내성천으로 향하는 작은 절벽에 읍호정(挹湖亭)이란 작은 정자가 있었다. 정자의 형상이 마치 호수위에 떠 있다고 하여 그 이름이 읍호정이라 한다.마침 관리인분이 계셨기에 읍호루 내부를 볼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작은 정자안에는 읍호루기를 비롯하여 여러 선생들의 현판이 걸려 있었다.

읍호정은 작은 정자이지만 매우 의미가 깊은 장소이다.왜냐하면 약포가 1601년 연로한 까닭으로 좌의정에서 해직되어 바로 이곳에서 말년을 보냈기 때문이다.선생은 낙향후 나라에서 제공하는 여러 은전들을 모두 사양하였다 한다.또 고향인 예천군 고평리 일대를 개간하여 이 땅을 바탕으로 하여서 고향사람들의 먹고 살 기반을 마련해 주었다고 한다.선조실록 192권, 선조 38년 10월 2일 계묘 1번째기사에서는 약포의 성품을 유순하고 온후하다고 하였다.

도정서원을 둘러본 뒤, 드디어 선생의 재실과 묘소를 둘러보았다.일국의 정승을 지낸 분의 묘소치고 검소하다는 느낌도 있었지만 평생을 청렴하게 살았던 약포의 생애를 살펴보자면 이해가 되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선생의 묘소를 참배하다 보니 무언가 숙연해졌다.누란의 위기 속에서 서애와 더불어 나라의 정승으로서 국난을 슬기롭게 헤쳐 나간 분이 바로 약포 상공이다.또 1597년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이 모함에 걸려 죽을 뻔한 그 일촉즉발의 순간에 신구차 상소문을 올려 이순신의 목숨을 구해 다시금 이순신이 조선수군을 지휘 할 기회를 열어준 장본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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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정서원 입덕루 앞에서 필자(가운데) ~

                                                 
올해 기해년에 이르러 이웃한 나라 일본은 무리하게 경제침략을 감행하고 있다.틈만 나면 역사왜곡을 일으키고 우리의 영토를 넘보며 경제침략까지 벌이고 있는 일본이다.근대기 일본은 일왕에게 권력을 돌려주는 명치유신을 일으켰다.일왕중심의 일본제국주의는 임나일본부설을 조작하여 정한론의 기반으로 삼았고 서양열강을 흉내내어 마침내 조선을 강제로 병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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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읍호정 전경, 내성천을 끼고 있는 풍경, 정취가 깊게 느껴진다 ~

 

그것은 1592년 임진왜란을 일으킨 풍신수길의 실패한 꿈을 실현시키는 과정이었다.일본과의 싸움은 이미 4백년전에서부터 시작되었다.4백년전 풍전등화의 위기속에서 나라를 지키며 민본주의를 실천한 인물이 바로  약포 정탁과 우복 정경세 같은 분이다.4백년전의 일이 되풀이 되고 실패한 망령이 아직까지 서성이고 있는 이때에  약포상공의 묘소에서 징비의 정신을 한번 떠올려 보았다.


약포선생 묘소 참배후 #이승희 선생님, 정선생님과 함께 삼강주막에서 뒷풀이를 하였다.삼강주막에서 한국을 여섯번째 방문중이라는 벨기에인 부부를 만났다.도토리묵에 시원한 맥주 한잔을 맛나게 마셨다.생각컨대 나는 약포상공에 대한 공부가 깊지 않았다.그러나 앞으로 퇴계학 공부를 병행하면서 약포상공에 대해서도 면밀히 살펴야 하겠다.이 작은 모임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기사등록 : 이순락기자 / gbmnew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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