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야사학자 류돈하 칼럼, '안동내앞마을과 협동학교'

이순락기자 0 53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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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필자 류돈하 선생 ~ 


안동은 선비문화의 본향이자 한국독립운동사의 성지이다.
그중에서도 안동시 임하면 천전리는 안동이 왜 선비문화와 독립운동의 성지인지를 알 수 있게 하는 성지의 중심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마을 앞에 흐르는 반변천으로 인해 마을 이름이 정해졌다.
천전(川前) 즉 내앞마을은 의성김씨 청계공파의 집성촌이다.
청화산인 이중환의 택리지에서는 도산,하회마을,닭실마을 등과 함께 영남4대길지로 지정하였다.
택리지: "안동의 동남에 있는 임하천(臨河川)은 청송읍 시냇물과 하류가 황강(潢江)물과 합류하는 곳이다. 임천(臨川)에는 학봉(鶴峰) 김성일(金城一)이 살던 옛 터가 있다. 지금도 문족(門族)이 번성하여 유명한 마을이 되었고, 그 옆에는 몽선각(夢仙閣)과 도연선찰(陶淵仙刹)의 경치 좋은 곳이 있다."


풍수지리학적으로도 명당으로 손꼽히는 이 마을에 의성김씨 청계공파가 입향한 배경은 청계김진선생의 조부 김만근선생으로부터 말미암는다.
김만근선생은 처가 해주오씨를 따라  내앞마을로 입향하게 된 것이다.
본격적으로 마을을 마을을 개창하여 뿌리내린 이는 김만근선생의 손자 청계 김진이었다.
청계는 슬하에 약봉(藥峯) 극일(克一), 귀봉(龜峯) 수일(守一), 운암(雲巖) 명일(明一), 학봉(鶴峯) 성일(誠一), 남악(南嶽) 복일(復一) 등 다섯아들을 두었다.


이 다섯아들이 모두 과거에 급제하여 대한민국 보물 제 450호 안동의성김씨종택을 
 오자등과댁(五子登科宅) 혹은  육부자등과지처(六父子登科之處)라 부른다.
청계 김진은 대과에 응시하지 않고 생원에 머물렀지만 훗날 4남 학봉 김성일이 고관에 오르자 이조판서의 증직을 받게 된다.


청계가 다섯아들에게 남긴 가르침 중에 "사람이 차라리 곧은 도를 지키다 죽을지언정 무도하게 사는 것은 옳지 않다.
너희들이 군자가 되어 죽는다면 나는 그 것을 살아있는 것으로 여길 것이고 만약 소인으로 산다면 그것을 죽은 것으로 볼 것이다."
라고 한 것은 곧 청계공파의 굳건한 정신이 되었다.


4남 학봉 김성일은 서애 류성룡과 더불어 퇴계 이황의 수제자이다.
퇴계학파는 안동에서 크게 두갈래로 나누어진다.
병산서원을 중심으로 서애의 학통을 이은 병파,
호계서원을 중심으로 하여 학봉의 학문을 계승한 호파가 그것이다. 
학봉은 임진왜란당시 경상우도관찰사로 전라도로 가는 길목인 진주성을 사수하다가 끝내 순국하였다.


 청계의 외손자이자 학봉의 생질인 류복기.류복립 형제 역시 충절을 다하였다.
임하면 옆 임동과 예안의 전주류씨 사람들은 모두 류복기 선생의 후손이다.
내앞마을을 기반으로 한 청계의 자손들은 조선중기 이후에도 꾸준히 대과합격자를 배출하였고 곧고 강직한 선비들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조선이 망하던 순간에도 청계공파 자손들은 임금에게 바른 말을 아끼지 않았다. 
청계공파 자손들의 이러한 선비정신은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에도 사그라들지 않았다.
특히 청계의 12대손인 서산 김흥락은 안동사회의 정신적 지주로 1894년 7월 23일 일본군이 갑오왜란을 일으켜  경복궁을 함락하자 갑오의병을 이끌며 안동사람들의 항일투쟁을 시작하였다.
의병의 봉기에  진성이씨,의성김씨,풍산류씨,전주류씨,고성이씨,안동권씨 등 여러가문에서 의연금을 내어 군자금으로 사용되었다.


안동의 의병항쟁은 1894년 갑오년으로부터 국권피탈직전인 1909년까지 지속되었다.
이 과정에서 도산 상계리의 퇴계종택이 일본군의 방화에 의해 두차례나 불에 타는 수모를 당하였다.


퇴계는 안동의 정신적 상징이자 그 구심점이다.
안동의 항일운동은 1894년 갑오의병의로부터 시작하여 1945년 을유년에 걸쳐 51년간 지속된다.
한편 내앞마을에서는 백하 김대락 선생이 매부 석주이상룡과 의병항쟁에 매진하였다.
이후 내앞마을의 독립운동 방향은 구국계몽운동으로 전환된다.
 1906년 고종광무황제의 흥학조칙에 힘입어 각지에 학교가 설립되자  내앞마을도 
안동최초의 근대화식 중등학교인 협동학교(協東學交)를 설립한다.
협동학교는 예안 삼산 출신 동산 류인식과 내앞마을의 김후병 그리고 하중환이 호계서원의 재원으로 설립하였다. 


이 외에도 석주 이상룡 선생이 참여하였으니 이들의 행보가 바로 혁신 그 자체였다.
교명 협동의 의미는 협동학교 설립취지문에서 드러난다.
취지문에서는 나라의 지향은 동국(東國)이요, 향토의 지향은 안동(安東)이며 면의 지향은 임동(臨東)이므로 동(東)을 택하였다고 한다.


안동동쪽의 7개면이 협력하여 학교를 설립하게 된 까닭에 협동이라 한 것이다.
구국계몽운동의 산실 역할을 했던 협동학교는 임하 내앞마을의 청계자손들이 주축이 되어 운영하였고 특히 백하 김대락은 자신의 집 백하구려를 학교 기숙사로 제공 해 주기도 하였다.
학교의 교사들도 내앞마을 의성김씨 청계공파 자손이 압도적이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일송 김동삼, 월송 김형식, 김병식, 김규식 등이 있었다.
협동학교는 이회영.이동녕.안창호의 신민회와 긴밀히 협조하였고 신민회에서는 교사를 보내주기도 하였다.


학생들은 모두 머리를 짧게 깎았으며  수신.국어.역사.지지.외국지지.한문.작문.미술.지리.화학.박물 등 17개 과목의 교과과정을 이수하였다.
특히 강조된 교육방향은 신학문을 배우면서도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고 국권을 회복하는데 있었다.
역사교과서로는 동산 류인식의 대동사 내용을 골자로 하였다.
대동사는 석주 이상룡의 대동역사와 비슷한 내용이며 단군조선에서부터 1910년까지 편년체로 기술하였다.


또 고구려와 발해를  우리역사의 국통으로 인정하여 민족의 자주정신을 확립케 하였다.
비록 대동사가 학교의 페교로 인하여 교과서로 쓰이지는 못했지만 그 내용을 가지고 교육했으니 대동사는 엄연히 협동학교의 역사교과서이다.


이토록 민족교육과 신학문으로 다져진 학교의 졸업생들은 대부분 항일운동에 투신하였다.
졸업생들은  정의부,서로군정서,신흥무관학교 교관,임시정부 국무위원 등 다양한 활동지에서 항일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한편 경술국치 직전인 1910년 7월 18일 협동학교는 당시 신식교육을 반대하는 안동내 보수적인 척사파 의병으로 인하여 교직원3명이 피살되는 비극을 당하기도 하였다.
협동학교를 기습한 의병부대는 예천.봉화등지에서 활동하였다.


지휘자는 최성천으로 충청도 충주 출신이다.
최성천부대는 소규모 게릴라부대로 왜인 관리와 민족반역자를 처단하기도 하였으나 과격한 위정척사파계열에 속해 같은 지사들로부터 많은 비판을 들어야 했다.
결국 최성천은 협동학교 피습사건 발생 후 열흘만에 잡혀 그 해 11월 대구에서 교수형을 당한다.


이 협동학교 피습사건은 진실로 우리 역사에서 같은 목적을 지향함에도 그 길이 달라 빚어지게 된 비극중의 비극이라 할 수 있다.
협동학교피습사건이 발생하고 1개월 후 일본에게 강제로 국권을 강탈당했다.
국권피탈 후 동산 류인식, 일송 김동삼 등 그 핵심인물들은 석주이상룡, 백하김대락을 따라 서간도에 가서 신흥무관학교 설립에 동참하였다.


이후 1913년  임동 수곡리 한들의 전주류씨 정재 류치명 종택으로 옮겨졌다.
동산 류인식은 이때 서간도로부터 귀국하게 된다.
 3.1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협동학교 학생들이 사실상 운동의 주역으로 안동에서 가장 격렬한 시위를 결행하였다.


일본은 이에 협동학교를 강제로 폐교하고 만다.
혁신유림이 설립하고 신민회가 지원한 협동학교는 시대의 정신에 맞게 학생들을 학습하게 하였고 시대의 비극에 분연히 일어나게 하였다.
무엇보다 학교의 교사들과 졸업생들이 신흥무관학교에도 크게 기여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우리 항일광복사의 요람지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기사등록 : 이순락기자 / gbmnew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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