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돈하 역사칼럼 ; 학봉의 역사토론

이순락기자 0 1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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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 재야사학자 도경당 류돈하 ~



많은 사람들은 대개 조선의 선비들이  그 학문과 사상 그리고 역사가  중국의 역사,문화를 뿌리로 여겼기에 이는 일반적인 것이며, 사대주의라고  볼수는 없다 여기고 있다.

물론 이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얘기가 아닐까 한다.

그러나 적어도 우리가 명의 속국이 아니라 중국과 대등한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자주적인 의식을 가진 선비들이 임진왜란 전에는 여럿 있었다.

마치 그러한 사고체계는 오늘날로 비유하자면 청바지를 입고 코카콜라를 마신다고 해서 스스로를 미국사람이라 생각하지 않은 것과 유사하다.

그 중에 퇴계의 학통을 이은 문충공 학봉 김성일도 있었다.

1587년 일본 전국을 통일하여 66주의 영토와 수많은 정병을 보유한 풍신수길이 대마도 사람 귤강광(다치바나 야스히로)을 조선에 사신으로 보내왔다.

수길이 귤강광을 조선에 사신으로 보낸 이유는 일본에 조선의 사신을 파견할 것을 요청하는 것이다.

귤강광은 이전의 일본 사신과는 달리 오만방자한 태도로 넌지시 전쟁을 암시하였다.

이에 조선조정은 고심 끝에 황윤길을 정사, 김성일을 부사, 허성을 서장관으로 삼아 일본에 조선 통신사를 파견하였다.

수길을 접견하여 국서를 전달하고 과연 수길이 전쟁을 일으킬 기미가 있는지 그 진위를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학봉 김성일은 통신사 부사로 일본에 다녀 온 후 일본견문록인 해사록(학봉전집 권6)을 

집필하였다.

이 해사록을 통해 당시 조선지식인 학봉이 일본에 대해 어떤 인식을 가졌으며 학봉으로 대표되는 퇴계학파 선비들이 어떤 세계관을 가졌는지를 살펴볼수가 있다.

해사록에 의하면 일본의 교토 대덕사 주지승려 종진(宗陳1561~1619)이 명나라의 지리서 [대명일통지大明一統地]에 실린 조선사 관련기사에 대해 총 아홉가지의 질문을 하였다.

종진이 질문한 아홉가지의 내용을 대략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가.대명일통지’에 따르면 조선은 주나라 기자가 세운 나라이다. 

나.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한 후에는 조선지역을 요동외요에 속하게 하여 지배하게 되었다.

다.위만은 조선 전 지역을 점거하였고 한나라 무제 유철은 이를 멸망시켜 한사군(漢四郡)을 설치하였다.

라.이후 공손도가 고구려영토를 점거함에 따라 위진(魏晉)시대를 거친 이후에야 비로소 고구려 땅이 되었다.

마.당(唐) 나라 고종은 좌복야 이적을 시켜  고구려를 치게하여 멸망케 하였다.

그 수도 평양(平壤)에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설치함에 따라 고구려인들은 압록강(鴨綠江)에서 동남쪽으로 수천 리를 옮겨 갔으나 역시 당이 쳐서 빼앗았다. )



왜승 종진이 열거한 아홉가지 질문에는 서기 2000년대에 중국이 진행한 동북공정의 핵심내용과 일치된 내용들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학봉은 이 아홉가지 질문에 대해 하나하나 상세히 언급해주며 대명일통지의 내용을 바로잡아주었다.

(가. 기자이전에 단군조선(檀君朝鮮)이 있었다.

단군은 중국 요(堯) 임금과 같은 시기에 나라를 세웠다.

나. 진시황 영정 시기에 우리는 결단코 그 나라의 신하가 된 사실이 없다.

다. 한나라가 조선을 평정했다는 것은 조선의 전지역이 아니라 단지 위만이 점거했던 지역일 뿐이다.

라. 공손도가 점거하였던 지역은 고구려의 요동(遼東) 땅일 따름이며, 고구려의 전 지역을 점거한 것은 아니다. 

마. 당나라가 차지한 것은 고구려 한나라 뿐이며, 신라가 매소성 전투 등을 통해 당나라에 승리함으로서 이마저 당이 차지하지 못했다.


학봉은 실로 자주적인 역사관에 의거하여 왜승 종진에게 상세하고도 친절히 일러준 것이다.

중국의 역사와 우리의 역사가 대등하다고 여긴 학봉의 자주의식은 이후 영남학파 후학들에게도 그 영향을 미쳤다.

구한말~일본강제침략기 시절에 이르러 퇴계와 학봉의 학통을 이은 직전제자 석주 이상룡 선생은 대동역사를 저술하여 신흥무관학교 생도들의 역사교과서로 쓰이게 하였다.

대동역사에서 석주는 위만을 일컫어 나라를 훔친 도적이라 하였다.

대동역사는 우리가 중국의 속국에서 출발한 것이 아닌 우리스스로 독자적인 역사와 문화를 일구었다는 자주의식에서 서술된 역사책이다.

대동역사를있게 한 민족정신은 신흥무관학교 교가를 잉태하였다.

교가의 가사내용에는 '여러만만 헌원자손 업어기르고 동해섬 중 어린것들 품에다 품어 젖먹여 기른 이 뉘뇨?' 라는 구절이 나온다. 

민족의 자존을 강조한 이 가사는 가히 그 기상을 잘 표현하였다 할 수 있다.



조선전기에 속하는 성종시대에 금남 최부(錦南 崔溥)라는 선비관료는 제주도에 종5품 경차관으로 파견되었다.

그러나 부친상을 당해 제주도에서 고향 나주로 돌아가다 그만 배가 풍랑을 만나 명나라의 절강성 영파부 해안에 표류하게 된다.

금남 최부는 자신을 따르는 관속들과 함께 명나라 남부 지방인 강남을 다니면서 해로(海路)·기후·산천·도로·관부(官府)·고적·풍속·민요,자신이 경험했던 일들 등을 기록하여 왕명으로 이를 저술하였다.

이 책이 바로 표해록이다.

표해록을 보면 최부의 언행을 살펴 볼 수 있는데 명나라의 관리들이나 지식인들을 대하는 것을 보면 전혀 어떠한 사대의식을 살펴볼수 없다.

오히려 당당하고 곧은 모습으로  자신의 의견과 의사를 쿨하게 표명하여 명나라 사람들이 되레 최부에게 존경의 예를 표하는 장면이 나온다.

예컨대 금남은 표류하자마자 명나라사람들로부터 왜구로 오인받아 여러차례 심문을 받았다.

오해가 풀리던 과정에서 명나라의 안찰어사 두사람이 금남에게  조선의 역사를 물어보며 

느닷없이 대체 조선(고구려)에는 무슨 비결이 있어서 수.당의 대군을 물리칠 수 있었는가에 대해 

질문하게 되었다.

금남은 스스럼없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모신과 맹장이 병사를 지휘하는 데 도리가 있었소.

병졸된 자들은 모두충성스러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소이다.

그 때문에 고구려는 작은 나라였으나, 충분히 중국의 백만대군을 두번이나 물리치게 되었소.

지금은 신라와 백제, 고구려가 삼한일통을 이루었으니 인물은 많고 국토는 광대해져 부국강병하오.

충직하고 슬기로운 인재는 수레에 싣거나 말로 헤아릴수 없을 정도로 많소."

그러자 안찰어사 두사람은 관원을 시켜 쌀 한 쟁반, 두부 한 쟁반, 국수 한 쟁반을 보내주어 

금남이 편안히 식사를 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 후 금남은 조선인에게는 금지구역이었던 강남을 눈에 담고는 북경으로 올라가 요동을 거쳐 

조선에 무사히 당도할 수 있게 되었다.

금남은 요동을 지나면서 마치 조선후기의 연암 박지원과 같이 옛날 우리 고구려의 도읍지이자 발해의 땅이었음을 회상하며 역사의 향수를 토로하였다.

이처럼 조선전기의 선비 최부나 중기의 선비 학봉 등을 살펴보면 명에 대해서 일정한 비판의식을 가진 당당한 기상을 엿볼 수 있다.

선비들의 그러한 사고체계는 오늘날로 비유하자면 마치 청바지를 입고 코카콜라를 마신다고 해서 스스로를 미국사람이라 여기지 않은 것과 유사하다.



임진왜란 이후에 주자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절을 하고 소중화사상으로서 사대주의의 극치를 달리며 일당전제화를 이룬 특정집권세력 서인(노론)이 있었다.

이들은 명나라와 청나라 사이에 등거리 외교를 하며 실리를 추구한 광해군 정권을 향해 재조지은을 저버리고 조선을 오랑캐와 금수의 나라로 만들었다고 규정하였다.  

이것을 포함해 대략 열가지 이유를 내세워 광해군을 폐위시켜 버렸다.

이것이 이른바 인조반정이다.

인조반정 이후 이들은 주자학으로  나라의 이념으로 삼아 자주와 독자성 그리고 다양성을 들먹였다간 바로 사문난적으로 몰아 멸문지화를 가했던 서슬퍼런 조선후기를 열었다.

그 가운데 주자일변도 체제로 나라를 소중화사상으로 바꾸며 그 기틀을 세워 굳히는데 공헌을 한 

인물은 조선왕조실록에 3천번씩이나 거론되는 노론영수 우암 송시열이다.

일당전제화의 권력독점으로 새롭고 강하게 정비된 소중화론은 민족의 의식을 세뇌시켜 왔으며 조선을 강제 점령한 일본은 이를 적극 이용하였다.

존중화사대주의의 바탕 위에 식민사관을 수립하여 패배의식을 심어 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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