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훈 박사 칼럼]구미시민들! 초나라 장왕과 세종대왕의 용서하는 마음으로 바라보자.
경북대평화문제연구소 연구위원, 구미회 부회장
우리 역사에서 가장 뛰어난 지도자가 누구인가? 물으면 대다수가 세종대왕을 꼽는다. 아무리 지도자의 능력이 뛰어나도 지도자 옆에 훌륭하고 유능한 참모와 신하가 없으면 그 지도자는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다. 세종 때까지만 하더라도 조선의 정치체제는 제대로 갖추어 있지 않았고, 고려왕조에 충성한 선비들이 조선 왕조에 들어가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조선왕조 초기에 개혁과 정치제도를 갖추기 위해서는 유능하며 리더십 있는 인재가 많이 필요하였지만 한계가 있었다.
세종이 조선의 기틀을 잡고 제도를 만들어 나가는 과정에는 정승 황희(黃喜)와 맹사성(孟思誠)이 그 중심에 있었다. 그 중 황희 정승은 정책에서 자기의견을 정확하게 말하고 결단력 있게 행동하는 보수적 입장이었고, 맹사성은 신중하면서 과감하게 자기의견을 제시하는 진보적 입장이었다고 역사학자들은 평가한다. 황희는 세종의 아버지 태종으로부터 매우 두터운 신뢰를 받았다고 한다. 황희는 고려시대 신하였지만, 조선을 건국하고 태종이 나라를 이끌어 가려하니 정작 등용할만한 신하가 없었던 탓으로 황희를 등용하고 요직에 발탁한다.
“황희를 하루라도 보지 못하면, 일이 손에 잡히지가 않는다. 나라에 공을 세운 신하들이 많지만 정작 쓰려고 하면 마땅한 인물이 없으며, 어디에도 황희 같은 인물을 찾기 어렵구나!” 태종이 이렇게 말 했을 정도이니 황희에 대한 신임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이 갈 것이다. 황희는 태종 앞에서 좀처럼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한 주장을 굽히지 않았던 스타일이었고, 태종이 그러한 태도를 보고 더 좋아했다고 한다.
태종은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 줄 때 세종에게 “내가 쓰던 사람들은 다 버리고 새로운 인재들을 등요하고 뽑아서 쓰라.”라고 하면서도 태종은 황희처럼 현명하고 상황 판단이 빠른 신하가 없으니, 세종에게 황희를 쓸 것을 제안하였다고 한다. 이렇게 황희는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 세종 때까지 최장수 관직생활을 하였으며, 24년간 최장수 정승을 하였고 90세까지 살았다.
황희가 국가의 일을 처리하는데 있어서 현명하고, 상황판단이 빠르고 관료들을 관리하는데 유능했지만, 그 시대 역사적 자료를 분석하면 황희 정승은 결코 청렴과는 거리가 멀었던 것으로 보인다. 황희 정승은 뇌물, 매관매직, 부정부패에 연루되어 동료 관료로부터 많은 탄핵을 받았음에도, 세종의 용서와 선처로 살아남아 황희가 정승자리를 그만 두겠다고 많은 사직서를 올려도 세종은 받아 주지 않을 정도로 황희에 대한 세종의 신임은 각별했다.
황희 정승의 사위 서달이 지방관아의 아전을 죽였던 사건이 있었다. 그 사위를 구명하기 위해 맹사성에게 부탁하여 가해자와 피해자가 합의를 보게 하여 살인사건 조사를 사위에게 유리하도록 조사하게 하여 사위 서달이 살아난다. 그러나 세종이 재조사를 지시하여 사건이 조작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로 인해 황희와 맹사성은 관료들로부터 탄핵을 받아 감옥에 갔지만, 하루 만에 세종은 황희와 맹사성을 풀어준다. 세종은 황희와 맹사성이 없으면 조선 초기의 어수선한 정치상황을 이끌고 가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황희 정승은 얼마 지나지 않아 대규모 개간 작업을 진행하여 개간한 상당한 땅을 몰래 차지하다가 발각되었고, 뇌물을 받고 벼슬을 파는 매관매직이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사위 구하기”이후 황희는 다시 최대의 위기를 맞는다. 그러나 이러한 상당한 죄에도 불구하고, 세종은 또 한번 황희의 허물과 죄를 눈감고 덮는 결정을 내린다.
황희 정승은 태종과 세종을 도와 조선의 제도를 정비하고, 정승 자리에 있으면서 많은 훌륭한 업적과 일도 하였다는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지만, 그 이면에는 개인의 일탈행위도 많았다는 것을 역사의 기록은 보여 주고 있다.
얼마 전 구미시의 모 사무관이 본인의 자동차에서 애정행각을 하다가 경찰에 긴급체포 되었다고 한다. 이 일이 있고 필자는 며칠 뒤에 알았지만, 그 공무원은 필자가 잘 아는 사람이었다. 필자가 그를 알게 된 것은 2004년 때에 당시 정부에서 세법을 개정하여 국세와 지방세가 인상되는 법률을 제정하면서 국민과 시민들에게 어디나 할 것 없이 일대 혼란이 일어났다.
농촌에서 나이가 많은 어르신들과 지역 주민들은 모두들 납세 통지서를 가지고 담당 공무원에게 항의와 민원을 제기하였지만, 얼굴하나 찌푸리지 않고 웃으면서 화난 주민들을 달래면서 일일이 납세통지서에 착오가 없는가를 살펴봐 주고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많은 주민들이 그의 친절함에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필자 역시 화난 주민의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가 시민을 대하는 태도가 당시 공무원으로 근무하던 사람들과는 사뭇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2004년 당시만하더라도 찾아오는 민원이 많으면 담당자나 책임자는 어디 출장 중이니 다음에 오라는 말만 할 때이다. 그러나 그 계장은 화난 민원인 앞에서 웃음을 지으며 일일이 설명하고 친절하게 대하는 모습이 많은 민원인들로부터 인정받기 시작했다. 그래서 동료 공무원들과 주민들로부터 실력과 친절을 인정받은 공무원이었다. 그의 노력으로 다수의 사람들이 세금을 환급받거나 내지 않아도 될 세금은 내지 않았던 것이다. 그 공무원이 애석하게도 이번에 물의를 빚은 장본인이었으니...
구미시의 그 공무원이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잘 했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공무원으로서 분명 그의 행동이 지탄받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지 않아도 구미시민들이 구미시 공무원들을 신뢰하지 않는 분위기가 팽배해 있는데, 이런 일이 발생하여 불만의 목소리는 여전히 높은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 이전에 그도 시민의 한 사람이며, 법률의 보호를 받는 개인이다. 엄격하게 법률적 잣대를 들이대면 그는 개인의 자동차 안에서 애정행각을 벌였고, 누구도 피해를 보지 않았기 때문에 범죄의 구성 요건을 갖추었다고 할 수 없다. 따라서 경찰의 과도한 법 집행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범죄행위도 아닌 그의 행동이 언론에 공표됨으로서 당사자와 그의 가족들이 받는 압박감과 충격은 상당하리라고 판단되고 예상된다.
사실 이 사건의 당사자보다는 구미시에서 마구잡이 예산을 집행하여 혈세를 낭비하고, 시민들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공사를 발주하는 공무원이나, 저녁에 직무와 관련된 업자들을 만나 먹고 마시는 공무원과, 시장 주변에서 아부와 아첨을 일삼아 시장의 눈과 귀를 가리는 공무원이 필자가 봤을 때 더 나쁘고 지탄받아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필자는 구미시가 사건의 당사자를 잃어서 얻는 이익보다, 본인이 가진 유능함을 직무에서 발휘할 때 얻는 이익이 구미시민들로 봐서 더 크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서, 공무원으로서 품위 유지를 하지 못한 것은 당연히 처벌을 받아야 하겠지만, 공무원으로서 그의 유능함과 친절이 몸에 밴 인격은 보호해 주어야지만, 우리 구미시민들이 더 많은 혜택과 이익을 보리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중국 춘추전국시대 초나라 장왕(莊王) 때에 장왕은 많은 신하들을 불러 모아 “오늘 밤은 무례함도 용서하마! 마음껏 마셔라”라고 하면서 장왕이 신하들과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런데 어디에서 바람이 불어 방안의 촛불이 모두 꺼져버렸다. 이 틈을 타 장왕의 애첩 총희에게 희롱을 건 장수가 있었고, 애첩은 그 남자의 갓끈을 잡아 뜯은 후 장왕에게 고했다. “갓에 끈이 없는 사람이 범인입니다. 빨리 등불을 켜서 잡아 주십시오.” 그러자 장왕은 그 애첩을 제지하고 소리 높여 고함을 질렀다. “내가 술을 권해 일어난 일이니, 여자의 정조를 위해 부하를 욕보일 순 없다. 오늘밤은 무례를 범해도 상관없다. 모두 갓끈을 떼어내라.” 불이 켜지자 신하 중 그 누구도 갓끈을 달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 후 3년 뒤 장왕은 진(晉)나라와 전쟁을 하는데 항상 선봉에 서서 용감무쌍하게 싸우는 장수가 있었다. 초나라는 그의 활약으로 결국 진의 군대를 물리칠 수 있었다. 싸움이 끝난 후 장왕은 그를 불렀다. “자네 같은 용사가 있다는 걸 몰랐다니 내 부덕의 소치네! 목숨을 내놓고 싸우다니 무슨 연유라도 있는 건가?” “저는 한 번 죽은 몸입니다. 술에 취해 무례를 저질렀을 때, 폐하의 덕으로 목숨을 연명하였기에 이 목숨을 바쳐 그 은덕에 보은하려 노력했습니다. 그날 밤에 갓끈이 떨어진 것은 바로 접니다.” 장왕은 부하의 잘못을 너그럽게 감싸 덮어준 덕분에 목숨을 건지고 전쟁에 승리했다.
작은 일에 일일이 화를 내며 결과를 따진다면 사람들로부터 감명과 존경을 받을 수가 없다. 타인의 잘못과 허물을 덮어줄 줄 아는 넓은 도량이 있으면 반드시 성공한다. 여기에서 절영지연(絶纓之宴)이란 고사가 생기는데 “관(冠)의 끈이 끊어질 정도로 취한 연회”라는 뜻으로 “잘못을 관대하게 용서하면 사람의 마음을 얻을 수 있음”을 비유하는 것이다.
구미시민들도 황희 정승을 용서해 준 세종대왕과 연회에서 애첩을 희롱한 장수를 용서 해 준 초나라 장왕처럼 아량과 선처로 물의를 일으킨 그를 용서한다면, 그 당사자도 구미시민을 위해 더욱 더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타인의 실수나 잘못을 능히 덮어주거나 넉넉히 감싸 줄 수 있어야 세상도 아름답고 사람도 아름다운 법이다.
기사등록 : 이순락기자 / gbmnew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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