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훈박사칼럼]우리의 한국, 과거의 역사를 직시하면서 미래를 열어 가자!
김기훈 경북대 평화문제연구소 연구위원, 구미회 부회장
1904년 고종황제는 1895년 청일전쟁 직후 러시아가 삼국간섭으로 일본이 차지한 요동반도를 되돌려주는 것을 보고 러시아의 외교적 힘과 러시아의 200만 대군을 믿고 전쟁에서 러시아가 승리하리라는 것을 굳게 믿고 있었다.
대한제국 고종은 1904년 1월 국외중립국을 선언하고 각국에 중립국임을 인정받으려는 노력을 하게 된다. 이것은 고종은 외교적 수완으로 왕권을 계속 유지할 수 있다는 굳은 신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같은 시기 각국의 외교관을 보호하기 위해 보호병들이 서울에 들어오고 전쟁이 일어난다는 소식에 곡식 값이 천정부지로 뛰기 시작하였고, 한국은 러일전쟁의 승전국의 전리품이 된다는 소문이 국제사회에 퍼지기 시작했다.
1904년 2월 8일 2500명의 일본 해군은 요동반도 여순 항을 기습공격 하여 러일전쟁이 시작된다. 그리고 일본 해군은 인천 앞바다에 있는 러시아 함대 순양함 바랴크 함과 코리예츠 함을 격침시키고, 서울에 들어온다. 서울에 입성한 일본군은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 체결을 고종에게 강요한다. 한일의정서에서 문제는 제4조인데 "대일본제국 정부는 군사전략상 필요한 지점을 정황에 따라 차지하고 이용할 수 있다"는 내용으로 전국토를 징발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고종이 러시아의 우세를 믿었던 것은 러시아 군의 총병력은 200만 명이고, 러시아 해군의 전함 배수량이 51만 톤인데 비하여 일본군은 20만 명으로 해군전함의 배수량은 26만 톤 밖에는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객관적인 전력으로는 러시아가 훨씬 우위에 서 있었다. 그러나 일본은 러일전쟁에 108만 명을 동원하고 징발하게 되면서 총력전을 펼친다. 일본은 러시아와 단기간에 전쟁을 끝내지 않으면 불리하다는 계획으로 외교전에서도 치밀한 계획을 세운다.
당시 일본의 한해 예산 2억3000만 엔의 7배인 15억 엔 정도를 전쟁비용으로 사용한다. 이토 히로부미는 미국의 시어도어 루즈벨트에게 특사를 파견하였고, 아카시 모토지로(明石元二郎)가 일본군의 첩보작전을 실행에 옮긴다. 아카시 모토지로는 러시아 공사관으로 러시아 내부를 분열시키는 것이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할 수 있다고 믿고 일본 참모국에 100만 엔을 요구한다.
이 돈을 요즘 화폐가치로 계산하면 400억 엔 우리 돈으로 5,400억 원 정도이다. 당시 일본의 군부의 실세는 요시다 쇼인의 제자이며 메이지 유신을 성공시킨 일본 육군의 아버지로 평가 받는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県有朋)의 결단으로 아카시 모토지로에게 100만 엔이 지급된다. 그리고 아카시 모토지로는 러시아 내부를 분열시키기 위해 러시아 로마노프 왕조 황제 니콜라이 2세의 차르(tsar) 정권에 반대하는 세력들에게 자금을 지원하기 시작하여 러시아의 국내 분열을 책동한다.
그리고 아카시 모토지로는 당시 러시아 차르 정권의 반체제 인사인 러시아 사회당의 레닌(Lenin)에게 접근하고 설득한다. 따라서 레닌은 러시아 노동자 파업을 일으키면서 1905년 1월 9일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피의 일요일 사건"이 일어난다. 이 사건은 무장 군인들이 행진하는 노동자들에게 무차별 발포를 하게 되어, 러시아 내부는 그야말로 혼란과 분열의 도가니가 되어 러일전쟁에 힘을 집중할 수 없는 상황으로 번져 갔다. 결국 러일전쟁에 패하고 레닌의 혁명으로 러시아의 니콜라이 2세가 지배하던 짜르 정권은 막을 내리게 된다. 이 얼마나 일본군의 치밀한 계획과 야비한 작전이라고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지만, 국가의 이익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이다.
1905년 1월 일본군은 러시아가 지배하던 여순(旅順)항을 함락시키며 승기를 잡았을 때 일본해군의 아버지라고 평가 받는 일본연합함대 도고 헤이하치로(東郷平八郎)가 1905년 5월 26일 조선의 이순신 장군에게 승전을 비는 제사를 올리는데, "황국의 부흥과 몰락이 이 한 번의 전투에 있다"는 말과 글을 조선의 이순신 장군에게 올린다.
도고 헤이하치로가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 임진왜란의 이순신 장군이었다고 한다.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은 최상의 상태로 대기하던 일본의 연합함대는 러시아를 맞아 전쟁 준비를 철저하게 하였고, 반면에 3만 7000km 해상을 9개월에 걸쳐 항해로 피로가 누적된 러시아 발틱함대는 최악의 상태로 대한해협과 동해에 나타난다.
러시아 발틱 함대는 비록 최고의 제독이라는 마카로프(Markarov) 제독이 이끌었지만, 최상의 상태에서 전략,전술을 구사하는 일본 연합함대를 맞아 최악의 상황에 있는 러시아 발틱함대는 완전히 궤멸되다시피 한다.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의 수제자였던 야마모토 이소로쿠(山本五十六) 제독은 약 40년 뒤인 1941년 12월 6척의 항공모함 전단을 이끌고 하와이진주만 기습을 감행한다.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끈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에게 신문기자가 영국의 넬슨(Nell son) 제독과 헤이하치로 제독을 비교한다면 어떠냐고 묻자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은 "넬슨은 프랑스의 나폴레옹 함대와 비슷한 수준의 함대를 가지고 싸워서 이겼다. 그러나 나의 함대는 러시아 발틱 함대의 1/3수준의 규모로 승리했다"라고 말하며 영국의 넬슨제독과 비교할 수 없다는 것을 강조했다.
그러나 기자가 다시 임진왜란의 명장 조선의 이순신 제독과 비교하면 어떠냐고 묻자 "이순신 제독에 비하면 나는 일개 그의 하사관정도 밖에는 되지 않는다. 만일 이순신 제독이 나의 일본 함대를 가지고 있었다면 세계의 바다를 제패했을 것이다"라고 이순신 장군의 위대함을 말했다고 한다.
이후 러일전쟁에 승리한 일본은 한국을 식민지화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사항을 결정하는데 "한국의 대외관계는 모두 일본에서 전담한다.", "일본은 한국에 주차관을 두고 한국의 시정을 감독한다."는 식민지를 실시 할 것을 결정한다. 일본은 이미 러일전쟁이 일어나기 전인 1902년 1월 영국과 영일동맹을 맺고, 한국에 대한 일본의 정치·경제적 이익을 영국으로부터 승인을 받아 놓은 상태였다. 이 영일동맹의 요점은 영국과 일본이 러시아를 공동의 적으로 하여 러시아의 동진(東進)을 방어하고, 동시에 동아시아의 이권을 함께 분할하려는 목적이 있었다.
일본은 영국과 제2차 영일동맹을 1905년 8월에 맺으면서 일본의 한국 지배를 외교적으로 영국에 보장받았다. 영국은 일본이 한국에서 가지는 정치적·경제적·군사적 이익을 보장하며, 일본은 영국의 인도(India)의 식민지 지배 및 영국의 이익을 인정한다는 것이었다. 결국 제2차 영일동맹은 제국주의 열강들의 약소국을 침략하는 것을 정당화하였다.
그리고 1905년 7월 미국의 육군장관 윌리엄 태프트(William Howard Taft)와 일본 외무상 가쓰라 다로(桂太郞) 간에 '가쓰라-태프트(The Katsura-Taft Agreement) 밀약’을 맺었다. 내용을 보면, 일본은 한국을 지배하는 것을 미국이 승인하고, 미국은 필리핀을 지배하는 것을 일본이 승인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가쓰라- 태프트는 그 이전에 예고되어 있었다.
1904년 2월 일본의 가네코 겐타로가 미국 시어도어 루즈벨트를 만나 어느 정도 비밀협상을 진행한 결과물이 가쓰라-태프트 밀약인 것이다. 가네코 겐타로는 미국 시어도어 루즈벨트 대통령의 하바드 대학 동창생이었고, 미국 내에 많은 거물급 정치인을 알고 있었다고 한다.
미국 시오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이 일본의 가네코 겐타로 남작에게 1905년 7월 8일 편지를 보내는데, 그 내용은 "일본은 서양 문명의 원칙과 방법을 이해하는 아시아 유일의 국가이다. 일본은 일본 고유의 전통을 손상시키지 않으면서 서양의 문화를 받아들일 수 있음을 증명했다. 모든 아시아 국가들은 지금 현시대에 맞게 적응을 해야 한다는 시급한 필요성에 봉착해있다. 그 과정에서 일본은 아시아 국가들의 자연스러운 선도자가 되고, 보호자가 되어야 한다. 미국이 여러 해 전에 아메리카 대륙에서 통솔력을 발휘하여 먼로주의에 입각해서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을 유럽의 간섭으로부터 지켜냈듯이 말이다."
여기에서 먼로주의(Monroe Doctrine)는 1823년 12월 미국의 제5대 대통령 먼로(J. Monroe)가 의회에 제출한 연두교서에서 밝힌 외교방침으로 러시아의 태평양 진출과 라틴 아메리카에 대한 유럽으로부터의 간섭에 대처하고 배제하기 위하여 ① 미국의 유럽에 대한 불간섭의 원칙, ② 유럽의 미국 대륙에 대한 불간섭의 원칙, ③ 유럽 제국에 의한 식민지건설을 배격한다는 원칙 등 3개 원칙이다.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이러한 먼로주의 외교방침에 머물러 있지 않고 미국의 힘을 밖으로 확산시키고 공고히 한 미국 대통령이다. 미국이 대서양과 태평양에서 자국의 군대가 힘을 행사하는 것을 정당화하였고, 미국이외의 나라가 영토를 확장하는 것을 배척·경계하며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미국의 제 32대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은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의 조카딸인 애너 엘리노어 루스벨트(Anna Eleanor Roosevelt)와 결혼을 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 역시 시어도어 루즈벨트의 미국의 외교정책을 기조로 삼고 미국의 국력을 강력하게 성장시킨다. 먼로주의는 미국이 조지 워싱턴 대통령이래 채택했던 외교노선인 고립주의와 불간섭주의였다. 그러나 시어도어 루즈벨트를 통하여 미국의 외교정책은 개입주의와 간섭주의 외교노선으로 바뀌게 된다.
그러면서 러일전쟁으로 전후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1905년 9월 미국 해군 기지인 포츠머스(Portsmouth)에서 루즈벨트 대통령은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숨기고, 러시아와 일본 간의 중재자로 나서서 강화회담을 성사시킨다. 러일전쟁은 러시아와 일본에 막대한 피해를 냈는데 러시아군 사상자 27만 명 중 사망자 5만 명 이상, 일본군 사상자 27만 명 중 사망자 8만 6000명을 내었다. 러일전쟁에 승리한 일본도 후유증은 말할 수 없이 심각했다.
그리고 이러한 포츠머스 회담을 주선했다는 공로로 루즈벨트는 1906년 노벨평화상을 받는다. 그리고 또 하나는 가쓰라 - 태프트 밀약의 미국 측 육군장관 윌리엄 태프트는 루즈벨트 대통령을 이어 미국 제27대 대통령이 된다. 우리 한국인들로 봐서는 조선에 대한 일본 지배를 승인한 시어도어 루즈벨트와 윌리엄 태프트에게 대해 별로 좋은 감정이 없다고 하겠다. 하지만, 힘에 따라 좌우되는 국제질서는 그 국가의 힘이 정의이다.
그러나 시어도어 루즈벨트는 그전까지 미국이 취하던 불간섭주의와 고립주의를 탈피하여 간섭주의와 개입주의로 외교군사정책을 바꾸고, 미국을 국제사회에 강력한 국가로 등장시킴으로 미국에서는 굉장한 존경을 받는 대통령 중 한 사람이다. 시어도어 루즈벨트는 미국의 사우스다코타(South Dakota) 주의 거대한 바위에 미국의 위대한 대통령 4명의 큰 바위 얼굴이 있는데 그 중 한사람이다. 그는 조지 워싱턴, 토마스 제퍼슨, 링컨과 함께 미국에서는 지금도 위대한 대통령으로 평가 받는 인물이다.
미국과 일본의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모른 채 한국의 고종은 미국인 선교사 헐버트(Hulbert)를 통해 미국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친서를 전달하는 외교전을 펼쳤다. 그리고 패전한 러시아에게도 도움을 요청하는 무의미한 외교를 펼쳤다. 전세계에서 한국을 도와 줄 나라는 세계 어디에도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1910년 8월 16일 경술국치인 한일병탄조약(韓日倂合條約)을 체결한다. 조선은 강제로 이웃나라 일본에게 병합되면서 완전하게 식민지가 된다.
그러나 이 체결의 당사자는 고종이 아니라 총리대신 이완용(李完用)과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사이에 합병조약이 조인되면서 한국은 일본의 36년간의 식민지를 겪게 된다. 즉 인적·물적 수탈과 착취를 더욱 확실히 하기 위해 '조선과 일본은 하나다.’ 라는 내선일체(內鮮一體)를 주장하였고, 일본민족과 한국민족의 조상이 인류학적으로 같다는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을 내세워 한국 사람들의 정신마저 일본인으로 만들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이후 국제사회에서 러일전쟁으로 미국과 일본은 동맹국이상의 아주 각별한 사이가 된다. 미국은 러일전쟁이전까지 그동안 세계문제에 불간섭과 고립주의를 표방했다. 미국은 그동안 서구 유럽이 세계 식민지를 만드는 것에 중점을 두었다면, 미국은 자국의 북 아메리카의 넓은 영토를 확보하는데 전력을 쏟았다. 그리고 미국 자국의 산업을 육성을 유럽 국가들만큼 시키지 못했기 때문에 그 동안 전세계 문제에 관여 할 수 없었다.
그런데 미국이 해양국가로 나가는데 잠재적 적인 중국을 청일전쟁으로, 러시아를 러일전쟁으로 일본이 승리해 줌으로서 일본이 더없이 고맙고 감사했다. 그러나 미국의 시어도어 루즈벨트는 강력한 미국의 슬로건 아래 군사력과 외교력을 극대화하는 먼로주의를 앞세워 국제사회에 힘을 과시하기 시작한다. 한동안 미국과 일본은 더없는 우방국가였지만 두 나라는 태평양 전쟁을 맞이하게 된다.
일본의 대동아공영권으로 즉 일본의 이익선(利益線)이 태평양으로까지 확대되면서 1941년 일본이 하와이 진주만을 폭격함으로서 미국과 일본의 군사적·외교적 관계는 완전히 두 동강나게 되었다. 이때쯤에는 미국의 국력이 세계 어디에도 미칠 수 있을 만큼 국력이 키워졌고 배양되었다.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기전 미국에서는 일본의 모든 통신을 도청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미국은 일본이 먼저 진주만을 폭격하는 것을 사전에 알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진주만에는 오래되거나 수리하는데 비용이 많이 들어가는 전함과 비행기를 놓아두었다고 한다. 그리고 프랭클린 루즈벨트(Franklin Roosevelt)는 진주만의 해군들에게 휴가 보낼 것을 권고했다. 실제로 일본의 진주만 폭격은 미국에게 실질적인 피해라기 보다는 전쟁할 명분을 제공한 셈이 된 것이다.
일본의 진주만 폭격으로 계속 팽창하는 일본을 그대로 두면 미국의 국익에 상당한 침해가 있을 것으로 보았기 때문에 일본과 전쟁할 완전한 명분을 만들었고, 국제사회를 모두 미국편으로 만들기 위한 계획이 숨어 있었던 것이다.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은 시어도어 프랭클린 대통령의 외교노선인 먼로주의 즉 개입주의와 간섭주의의 외교적·군사적 노선을 더욱 확장하고 견고하게 추진하면서 일본을 태평양 진주만으로 끌어 들였던 것이다.
1943년 2차 세계대전 중 이집트에서 영국의 수상 처칠(Churchill), 중국의 총통 장제스(蔣介石), 미국의 대통령 루즈벨트(Roosevelt)가 카이로 회담(Cairo Conference)을 개최하는데, 가장 중요한 핵심 사안으로는 노르망디 상륙작전과 일본과의 전쟁에서 서로 협력할 것을 협의하였고, 일본이 패전했을 경우를 일본의 영토 처리에 대하여 연합국의 기본방침을 결정하는 "카이로선언"을 발표한다. 카이로 선언 다섯째 사항의 특별조항으로 "한국의 미래에 대하여 언급하고 독립을 보장하는 국제적 합의를 한다. "현재 한국민이 노예상태 아래 놓여 있음을 유의하여 앞으로 적절한 절차에 따라 한국의 자유와 독립을 줄 것이다."라고 선언한다.
카이로회담에서 한국독립에 관한 문구 변경 과정을 보면 1943년 11월 24일 해리 홉킨스 미국 대통령 특별보좌관의 초안은 "우리는 일본에 의한 한국 국민에 대한 기만적인 노예상태에 유념해 일본몰락 이후 가능한 한 가장 이른 시기(at the earliest possible moment)에 한국이 자유롭고 독립적인 국가가 될 것임을 결의한다." 였다.
그러나 한국독립 문제를 논의하는 것 자체를 반대했던 영국의 처칠 때문에 루즈벨트는 11월 24일 "적절한 시기에(at the proper moment)"로 수정한다. 그러나 11월 25일 영국의 처칠 총리는 "3대 강국은 한국 국민의 노예상태에 유념해 적절한 절차를"으로 수정하면서 "적절한 절차"가 들어가게 되었던 것이다. 이 "적절한 절차"는 한국 독립은 강대국들의 통제와 지도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기 때문에 한반도의 남북한이 분단될 가능성을 만들었던 것이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수많은 피식민지 국가 중에 유독 한국만 독립을 보장한 것은 매우 놀라운 사실이다. 카이로 회담에서 중국의 장제스는 미국의 루즈벨트에게 한국의 독립을 요청했고, 루즈벨트가 이를 수용한다. 영국의 처칠은 한국독립을 반대했다고 한다. 이유는 한국의 독립을 보장하면 영국의 식민지들에게 영향이 미칠 것을 우려하여 한국 독립문제가 카이로 선언에 들어가는 것 자체를 반대했다고 한다.
1905년에 제2차 영일동맹과 가쓰라-태프트 밀약에서는 조선의 일본 지배를 영국과 미국이 승인해 놓고, 일본이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면서 영국과 미국의 적대국가로 돌아서면서 미국과 영국이 일본의 항복을 받아내고 힘을 빼기 위해 일본이 식민지화 한 국가들에게 독립과 자유를 줄 것처럼 외교적인 천명을 한 것이다.
이것의 의미는 일본의 식민지에서 독립운동이 더욱 확산되고 가열되도록 하는 계기를 만들어 식민지에서 분열이 일어나도록 한 정치적 계산도 깔려 있었다고 하겠다. 이러한 카이로 회담을 보면 국제사회는 첫 번째도 자국의 이익, 둘째도 자국의 이익이라는 것을 재확인 할 수 있다. 한국은 이때까지만 해도 강대국들의 마음먹기에 따라 좌지우지 되는 나라였다.
1941년 12월 미국이 일본의 공격으로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되자 미국은 비밀리에 물리학자 오펜하이머(Robert Oppenheimer)를 연구 책임자로서 비밀 프로젝트인 암호명 맨해튼 프로젝트(Manhattan Project)를 미국 로스앨러모스에서 진행한다. 미국의 과학자들은 물론 나치를 피해 미국에 와있던 유럽의 과학자들과 동맹국인 영국과 캐나다를 대표하는 과학자들도 이 프로젝트에 참가한다.
당대 최고의 물리학자, 화학자, 수학자, 공학자들이 다 모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들은 맨해튼 프로젝트 이후 대다수가 노벨상을 수상한다. 이 프로젝트의 연구비는 20억 달러, 고용인원이 13만 명으로 막대한 돈과 두뇌 그리고 미국 정부의 대폭적이고 무조건적인 지원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맨해튼 프로젝트는 원자폭탄을 2가지 방식으로 만드는데 맨해튼 프로젝트는 우라늄235 핵폭탄과 플루토늄 핵폭탄을 동시에 만들었다.
연구자들은 본인들이 만든 핵폭탄이 너무도 강력하여 인류 파멸을 불러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미국 대통령에게 핵폭탄을 이용하지 말 것을 당부하는 청원서를 제출했다. 그 내용은 일본에게 공개적으로 항복을 요구하고, 일본이 그 요구를 받아들이면 원자폭탄을 사용하지 말 것을 요구하는 청원서를 제출할 정도로 과학자들이 볼 때 역사상 그 어디에도 없는 강력한 무기였다.
1945년 8월 6일 미국은 우라늄235로 만들어진 "꼬맹이"이라는 리틀 보이(little boy) 우라늄 핵폭탄을 히로시마에 투하하고, 3일 후에는 "뚱뚱이"이라는 팻맨(fat man) 플루토늄 핵폭탄을 나가사키에 투하 하였고, 8월 10일 일본천황은 연합군에 무조건 항복의사를 밝히면서 8월 15일 항복하게 됨으로서 태평양 전쟁은 5년 만에 끝난다. 여기에서 미국은 일본에 투하한 우라늄235 핵폭탄과 플루토늄 핵폭탄을 각각 서로 다르게 사용하면서 그 위력을 비교 평가하는 연구도 하였다.
그런데 미국이 일본의 가장 중요한 도시 도쿄(Tokyo)와 교토(Kyoto), 오사카(Osaka)에 원자탄을 떨어뜨리지 않고, 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만약 원자탄을 도쿄, 교토, 오사카에 투하했다면 일본은 다시 재건 될 수 없다고 미국은 보았다. 미국은 전쟁이후 일본을 재건하여 태평양에서 절대적 우방으로 만들기 위함이라고 분석할 수 있다. 당시 중국과 소련은 제2차 세계대전의 연합국이지만, 전쟁이후 끝임 없이 미국의 영향권 하에 있는 태평양으로 진출하는 것을 일본과 함께 막으려는 정치적 계산이 숨겨져 있다고 하겠다.
이탈리아가 항복하고 독일이 패망할 것 같은 분위기를 보이자, 1945년 2월 소련 흑해 연안 크림반도 얄타에서 얄타회담(Yalta Conference)을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과 영국의 처칠, 소련의 스탈린이 모여 독일이 전쟁에서 패배이후 독일분할 점령 문제를 논의하는 자리에서 극동아시아 문제에 있어서는 비밀의정서를 채택하였고, 소련은 독일이 항복하고 나면 2~3개월 이내에 일본과의 전쟁에 참전해야 하며, 그 대가로 연합국은 소련에게 러일전쟁에서 잃은 영토를 반환해준다는 것이었다. 얄타회담은 만주에서 일본을 패배시키는 데 소련의 지원과 전쟁참여가 절실히 필요하다는데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고 1945년 7월 미국 포츠담에서 영국의 처칠, 미국의 루즈벨트 다음으로 선출된 투르먼, 소련의 스탈린이 만나 포츠담협정(Potsdam Agreement)을 맺는다. 중요사안은 독일의 전후처리 문제에 관한 협정이면서 일본 군대의 무조건 항복과 연합국은 일본영토를 규정하고 한국을 독립시킬 것을 일본에 권고하고 규정한다. 그러나 일본은 이 포츠담 선언을 거부하면서 미국은 일본에 원자폭탄을 투하하는 것을 결정한 것이다.
그러나 소련의 스탈린은 일본과 맺은 상호 불가침 조약인 "소련-일본 중립 조약"으로 일본과의 전쟁에서 소극적으로 지연한다. 대일 참전의 실리를 저울질하며 일본 홋카이도 분할 통치를 대일 참전의 요구 조건으로 내세우는 등 전쟁이후 동북아시아에서의 영향력 확보를 위해 최대한 몸값을 높이는 전술을 구사한다. 미국이 일본에 원자폭탄이 투하된 후 소련은 1945년 8월 8일 일본에게 선전포고를 함과 동시에 만주에서 일본이 세운 괴뢰정부 만주국을 괴멸시키고, 러일전쟁 패전으로 빼앗긴 사할린 섬도 소련이 되찾게 되었다.
그러나 만주국을 괴멸시킨 소련은 멈추지 않고 남진하여 한반도로 들어와 1945년 8월 13일에는 함경도 청진까지 점령하게 된다. 아쉬운 것은 소련이 남진하고 있는 상태에서 일본이 8월 15일 무조건 항복한다. 이로써 한반도 북쪽에는 소련의 점령이 확실시 되면서 한반도는 아쉽게도 분단으로 가는 운명이 되었다.
1945년 12월 모스크바 삼상회의(The Moscow Conferenceof Foreign Ministers)가 소련 모스크바에서 미국대표 번스(James F. Byrnes) 국무장관, 소련대표 몰로토프(Vyacheslav Molotov) 외무장관, 영국대표 베빈(Ernest Bevin) 외무장관 등 3개국의 외상(外相)들이 한반도의 신탁통치 문제를 포함한 7개 분야의 의제를 다룬 회의가 열린다.
여기에서 한국은 미·소공동위원회를 설치 할 것과 한국에 대한 일정기간의 신탁통치에 관한 협의를 함으로서 카이로 선언에서 영국 처칠이 주장한 "적절한 절차"가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미국과 소련의 "신탁통치"로 구체화되어져, 한국은 남북으로 분단되며 북쪽은 소련 신탁통치를 실시하고, 남쪽은 미국이 신탁통치를 실시하면서 한국전쟁인 6.25 전쟁의 씨앗이 뿌려졌다고 하겠다.
그런데 1950년 1월 미국 국무장관 애치슨(Acheson)은 미국의 극동 방위선인 에치슨 라인(Acheson line)을 발표한다. 소련의 스탈린(Joseph Stalin)과 중공의 마오쩌둥(毛澤東)의 공산주의를 저지하기 위해 태평양에서 미국의 방위선인 알류산열도-일본-오키나와-필리핀으로 연결되는 미국 방위선을 발표하면서 소련의 스탈린과 북한의 김일성의 계산은 복잡하기 시작한다. 에치슨라인에서 남북으로 분단된 한국과 타이완, 인도차이나 반도가 제외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미국의 에치슨 라인 발표로 한반도의 남한이 제외됨으로서 소련의 스탈린과 북한 김일성은 미국이 남한에 대한 지정학적인 중요성을 그렇게 높게 평가하지 않는다는 판단을 하게 되는 것이다. 미국의 에치슨 라인은 6.25 전쟁의 원인 중 가장 큰 것이었다. 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은 한반도의 지정학적 측면에서 남한이 공산화 되었을 경우 일본이 방어해야 하는데 일본은 제2차세계대전의 핵폭탄을 맞은 패전국으로 아직까지는 그러한 힘이 없었다. 소련과 중국이 바다 태평양으로 나오기 전에 방어하는 것이 미국의 전략상 유리하다는 판단 하에 6.25전쟁에 참전을 서둘렀고, UN회원국들에게 한국전쟁에 연합국으로 동참할 것을 독려하게 된다.
한국분단의 책임은 분명 한반도를 둘러싼 주변국 중국, 러시아, 일본, 미국에게 있다. 그러나 우리 한국은 과거엔 그들을 상대할 내부적 힘과 기량인 인적, 물적 자원이 전혀 없었다. 그동안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를 겪고, 6.25전쟁을 겪으면서도 오늘날 세계 무역국 10위의 상당한 능력을 축적하였다.
그러나 요즘 일본의 "한국수출규제 조치와 일본의 화이트리스트"에서 배제됨으로서 정부와 국민은 충격적인 상황을 맞고 있다. 우리나라와 민족이 과거에 겪은 고통과 슬픔은 이야기를 다 못할 정도이다. 국가의 힘이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국제사회에서는 마찬가지이다. 그렇지만 우리나라와 우리민족은 멈추지 않고 좌절하지 않으면서 발전하고 성장했다. 지금 일본의 경제보복으로 모두가 흥분하고 있다. 모두 역사를 기억하고 어떻게 하면 일본을 이길 것인가를 생각해 보는 것이 오늘날의 한국인일 것이다.
기사등록 : 이순락기자 / gbmnew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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