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돈하의 우리 역사 바로알기, "고려개국 그 후 백년"

이순락기자 0 7101

(*편집자 註 : 류돈하 선생은 안동 출신 향토 청년 사학자입니다. 그는 우리 역사학계가 친일에 물든 오류를 바로 잡고,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기 위하여 피나는 노력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독자 여러분들의 사랑과 관심을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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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필자 류돈하 선생 ~

 

((제 1편 고려의 개국과 거란의 발흥)) 


서기 2000년도부터 약 2년간 방영한 kbs 대하드라마 태조왕건(太祖王建)은 많은 시청자들의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태조왕건은 2년간 200부작으로 방영되었다.

이는 역대사극 중 가장 오랜 기간이다.

등장인물 궁예와 견훤, 수달, 박술희, 유금필, 신숭겸, 최응, 최승우 등등의 캐릭터들 또한 열화와 같은 관심과 사랑을 받았다.


견훤의 '내 아우 수달이가 죽었어!' 궁예의' 누구인가? 누가 기침소리를 내었는가말이야?' 등등의 대사들은 유행어가 되어 방영 20년이 지난 지금까지 널리 회자되고 있다.

그리고 아직도 심심찮게 패러디물이 만들어지고 있다.

무엇보다 사극의 새로운 지평을 연 태조왕건 드라마가 큰 의의를 가지고 있는 것은

태조왕건드라마 이전의 조선시대 사극 일변도를 끝내고 고려를 다룬 최초의 사극이라는 점이다.

국왕에 대한 호칭 역시 전하에서 '황제폐하'로 바뀐 최초의 사극이면서 방영 이후 

좀더 다양한 시대와 주제들이 다루어지게 되었다.


그저 삼국시대와 조선시대의 중간에 끼여진 나라로만 인식되어 온 우리 고려사에 대한 관심이 일어난 것은 비로소 태조왕건드라마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고려사 자체가 국왕이 비록 복잡다단한 국제정세를 고려하여 외왕내제를 선택하였으나 개국과 동시에 내부적으로는 엄연한 해동천자를 칭하며 자주국가를 지향하였다.

혼란한 하대신라 말기, 정치가 어지러워지고 백성들이 도탄에 빠지자 곳곳에서 적고적 등 초적들의 반란이 일어났다.

이러한 혼란기에 각지의 호족들은 신라정부의 영향을 벗어나 반독립적인 군웅할거를 시작하였다.

이 중, 신라왕조 외에 궁예의 태봉국, 견훤의 후백제가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면서 한반도는 후삼국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먼저 국가를 형성한 세력은 견훤의 후백제였다.

서기 890년 5천명의 무리를 이끌고 무진주에서 신라 서면도통 지후 병마제치 지절 도독 전무공 등 주군사 행 전주자사 겸 어사중승 상주국 한남국 개국공 식읍 2천호(新羅西面都統指揮兵馬制置持節都督全武公等州軍事行全州刺史兼御史中丞上柱國漢南郡 開國公食邑二千戶)라는 긴 작위명으로 출발한 견훤은 892년 26살의 나이로 후백제를 세운다.


본디 상주 출신인 견훤은 이후 완산주(전주)에 도읍을 정하면서 국호를 백제라 하니 옛 백제의 영광을 재현하는 듯 하였다.

원래 승려출신으로 양길의 부하였던 궁예는 독립하여 명주, 철원을 장악하면서 성장하며 패서지역의 호족이자 실력자인 왕륭, 왕건부자가 귀부해 오자 더욱 강성해졌다.

옛 고구려의 땅을 기반으로 삼으며 세력을 떨치게 된 궁예는 관제를 정비하고 국호를 후고구려라 하였다.


이로써 한반도는 고구려, 백제, 신라에 이어 또다시 삼국이 정립하게 되었거니와 역사상 유일한 전국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후삼국 정립이후 904년 마진, 911년 태봉으로 나라이름을 고치며 성책,수덕만세 등의 연호를 사용한 궁예는 견훤과 통일을 향한 패권을 다투었고 910년, 왕건의 활약으로 해상교통의 요충지인 나주를 점령하게 되면서 해상력을 장악하였다.

나주를 점령한 이후, 궁예의 마진국 세력은 가히 압도적이었다.

이 무렵 궁예는 국호를 마진국에서 태봉국으로 고치며 맹위를 떨쳤으나 스스로를 미륵불로 자처하며 전제권력을 휘둘렀다.


이른바 관심법이라는 것으로 역모사건을 일으켜 함부로 사람들을 죽이며 호족들을 견제하게 되자 호족들의 반발을 사게 하였다.

궁예의 폭정과 전제독재에 견디다 못한 호족들은 드디어 918년 신숭겸, 배현경, 홍유, 복지겸 등이 대표로 왕건을 추대하여 정변을 일으켜 궁예를 축출하였다.

궁예는 옷을 갈아입은 후 도망치다 부양에서 배가 고파서 보리이삭을 훔쳐 먹다가 백성들에게 맞아죽었다 한다.

이는 삼국사기 열전에 실린 기록이다.


궁예를 몰아내는 데 성공한 호족세력은 왕건을 추대하였고 드디어 918년 7월 포정전에서 즉위했다.

국호는 고려라 하였으며 연호를 천수라 하였다.

이 무렵, 북방에서는 거란족이 신흥강호를 성장하였다.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라는 걸출한 지도자가 8부의 세력을 통일하고 요나라(거란)를 세워 926년에 고구려의 뒤를 이은 발해를 갑자기 멸망시켜 5경 15부 62주를 차지하였다.

발해의 수도 홀한성이 함락되고 세자 대광현(大光顯)은 장군 신덕, 예부경 대화균, 균료사정 대원균, 공부경 대복예, 좌우위장군 대심리, 소장 모두간, 검교 개국남 박어, 공부경 오흥 등의 요속들과 많은 백성들을 이끌고 고려에 귀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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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왕건은 발해사람들의 귀부를 흔쾌히 허락함은 물론이요, 후한 대접을 해주었다.

특히 세자 대광현은 왕계라는 성명을 내려주어 고려종실로 입적시킨 후, 선대의 제사를 지내도록 배려해주었다.


발해를 들이쳐 멸망시킨 야율아보기는 자신의 장자 야율배(耶律倍:야율돌욕.동단모화, 이찬화. 후에 의종으로 추존됨.)에게 발해 땅을 주어 동단국(東丹國)으로 이름을 고치게 한 후, 직접 통치케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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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율배는 동단국의 관제를 발해와 같이 하고 발해의 재상들을 그대로 기용하였다.

이 때 발해의 옛관리 배구는 929년에 왜에 동단국 사신으로 가게 되었는데 이때 왜왕 제호왕(醍醐王)이 조국 발해를 배신했다며 꾸짖었다는 일화도 있다.


배구는 이미 발해가 존재했을 당시인 919년 발해의 사신으로 왜국에 사신으로 간적이 있었다.

발해를 멸망시키고 발해땅에 동단국을 설치한 거란 태조 야율아보기는 수도 상경으로 돌아가자마자 5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아내 여걸 술률평(述律平)은 아보기의 장남 돌욕보다 차남인 덕광을 총애하여 덕광에게 아보기의 뒤를 잇게 하였다.

거란의 국왕이 된 야율덕광은 동단국의 수도가 거란국의 수도에서 멀어 발해유민들을 통치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동단국의 수도를 홀한성에서 요양으로 옮기게 하였다.

그 옛날 고구려를 멸망시킨 당나라는 고구려 땅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하였다가 효과적으로 고구려 유민들을 통치할 수 없어 요동의 요양으로 옮겼었다. 

이 것과 마찬가지로 동단국 역시 발해의 유민들을 다스릴 수가 없어 당나라처럼 그 통치기관을

요양으로 천도한 것이다.

또 동단국의 본거지를 천도한 다른 이유로는 거란국왕이 된 덕광이 형 동단국왕 돌욕을

의심하였기 때문이다.


왕위를 동복아우에게 양보한 돌욕은 아우가 자신을 의심하여 천도까지 시행하게 하자 

상심한 나머지 오태백(吳太伯: 주나라 태왕 고공단보의 장남으로 고공단보가 막내아들 계력에게 지위를 물려주자 아우 중옹과 함께 강남으로 도망가서 오나라의 시조가 됨.)이 되겠다 하였다.

돌욕에 대한 탄압이 후당의 명종 이사원에게까지 그 소식이 전해지자 이사원은 몰래 돌욕에게 사람을 보내어 후당으로 귀화를 이끌어낸다.


후당으로 온 돌욕은 융숭한 대접을 받으며 동단모화라는 이름까지 하사받게 된다.

이사원은 돌욕을 천자의 예로 예우했고, 후당의 선왕 장종 이존욱의 비 하씨를 아내로 삼게 하였다.

얼마 후 이사원은 다시 돌욕의 이름을 이찬화로 고쳐주었고 건주절도사의 벼슬을 임명하였다.

돌욕은 고국에 계신 어머니를 그리워하여 자주 사신을 왕래하게 하여 안부를 주고 받았다.

돌욕이 후당에 온지 3년 후, 명종 이사원이 67세로 죽고 명종의 양자 이종가가 이사원의 뒤를 이은 민왕 이종가를 시해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종가는 스스로 왕위에 오르게 된다.

이 때, 돌욕은 아우 태종 야율덕광에게 사람을 보내 이종가를 토벌할 것을 요청하였다.

자신의 아우에게 왕위를 사양했음에도 도리어 의심을 사자 스스로 오태백이 되겠다며 후당으로 망명와서 신임을 얻은 뒤 사신을 자주 보내어 중요한 후당의 기밀을 고국 거란에 전해 준 돌욕의 간첩활동은 가히 영민하다고 할 수 있다.


돌욕의 이러한 간첩활동과 유사한 사례는 우리의 고구려사, 백제사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바로 백제 근초고왕때의 간첩 사기와 고구려 장수태왕 떄의 간첩 도림이다.

사기, 도림, 돌욕의 간첩 행적은 그로 인해 모두 그나라의 왕을 죽였다는데서 그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돌욕의 최후는 비극적이었다.

거란 태종 야율덕광의 의해 후진을 세운 고조 석경당이 후진을 침략하여 낙양을 공격하자

후당국왕 이종가는 돌욕과 함께 불에 타죽으려 하였다.

돌욕이 이를 거부하자 이언신이란 사람을 보내 살해하였다.


돌욕의 나이 38세였다.

낙양을 점령한 석경당은 돌욕을 정중히 황제가 아닌 왕의 예로 장례식을 치루어 주었다.

후에 돌욕의 시신은 거란에 송환되어 태종 야율덕광이 의무려산에 개장하였다.

요사 열전 제2 종실 의종 야율배편에 의하면 돌욕은 살아생전 학문을 좋아하여 모은 서적이 1만권에 달했으며, 음양학, 의학, 언어학에 조예가 깊었다고 한다.

태조 야율아보기의 맏아들로 태어나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 간 야율돌욕은 그 아들 야율원이 거란의 제 3대 국왕 세종이 된다.


그로부터 거란의 왕통은 돌욕의 자손들이 차지하였다.

돌욕의 사망 후 거란은 돌욕을 문무원황왕으로 추존하였고 그의 아들 야율원에 의해 양국황제로 추존된 후 그의 조카 목종 야율경에 이르러서 의종이라는 묘호를 받게 되었다.



기사등록 : 이순락기자 / gbmnew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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