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훈박사칼럼]일본은 지금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과 이익선(利益線)을 확대하려 한다.
김기훈 경북대 평화문제연구소 연구위원, 구미회 부회장
“일본과 조선을 놓고 본다면, 일본은 강대하고 조선은 약소하다. 일본은 이미 문명이 발달했고 조선은 아직 미개하다. 우리 일본이 무력과 권위를 앞세워 조선인의 마음을 압도하고, 일본의 국력으로 이웃나라가 문명을 향해 나아갈 수 있도록 돕는 것은 흡사 우리 일본의 책임이라 할 수 있다.”- 후쿠자와 유키치
21세기 현재 아시아의 중국과 한국은 19세기 서구세력과 일본의 침략을 받던 상황과는 판이하게 눈부신 경제성장을 기반으로 현대화된 군사력을 키우고 배양하여 왔다. 그러나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전범국가로서 군사력을 합법적으로 키우지는 못했지만, 그들은 GDP에서 엄청난 재정을 군사력으로 투입하였기에 자세히 보면 엄청난 군사대국이다. 그러나 일본은 평화헌법으로 증강된 군사력을 대외적으로 표출하지 못하고 있다.
한국에 대한 수출규제 조치의 배경에는 많은 원인과 다양한 견해가 있겠지만, 필자는 첫 번째, 남·북한과 미국만이 북핵문제를 논의하는 일종의 불쾌감과 일본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다는 것에 대한 일본 내에서 불만이 경제적 제재조치로 작동하였다고 볼 수 있다.
또 하나는 개혁·개방정책으로 경제발전을 이룩한 중국은 군사력에서나 경제력에서 미국을 제외한 모든 나라를 압도하는 G2국가가 되었고, 북한은 핵무기를 개발하여 동북아에서 북한의 힘을 과시하고 있는 상황에서 일본은 “평화헌법”에 발목이 잡혀 합법적인 군사력을 사용하지 못하고 동북아 문제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못하고 있다는데 정치적 자괴감이 일본 정치인들과 일본 내의 극우세력에게는 항상 불만으로 자리 잡고 있었던 것으로 보여 진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의 보수정권은 근본적으로 북한과의 관계개선을 한미일 동맹인 미국과 일본에 의지하고 해결하려는 반면, 문재인 정부는 일본을 배제하면서 한반도 평화정착과 북한과의 관계개선을 진일보시키는 결과를 만들었다. 북핵문제가 아직도 진행형으로 논의되고 있는 상황에서 일본만이 소외되고 외면당하는 일본 패싱(Japan Passing)은 아베총리를 비롯한 일본 내의 혐한파와 극우세력이 한국정부, 즉 문재인 정권을 상대로 경제적 제재를 가하여 한국 내의 문재인 정권에 반대적인 입장을 보여 주고 싶은 것이다.
그리고 일본의 한국에 대한 수출규제조치를 통하여 한국의 경제 위기가 일어나면 한국내의 보수 세력을 단결·규합하여 현 정부를 견제하고, 다가오는 대선에서 보수정권을 만들어 남북관계가 급속도로 진전되는 것을 막아야만 일본이 한반도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철저하게 계산된 정치적 계산이라고 필자는 보고 있다. 한국이 미국과 일본 같은 해양세력인가? 아니면 중국과 러시아 같은 대륙세력인가를 결정하라는 것이다. 일본의 한국수출규제 조치는 경제적 문제를 넘어 국제 정치학적인 문제가 숨어 있는 것이다.
일본 화폐 만 엔 권에 나오는 “후쿠자와 유키치(福沢諭吉)”는 자연과학과 국민계몽의 중요성을 강조하여 일본 근대화의 아버지로 불린다. 그리고 일본에서 정한론(征韓論)을 주장하고 메이지 유신을 성공시키는 제자들을 길러 낸 “요시다 쇼인(吉田松陰)”과 서로 대립 관계에 있던 사쓰마번(薩摩藩)과 조슈번(長州藩)의 동맹으로 막부와 번(藩)이 통일하여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을 성공하게 만들고, 일본을 근대화의 길로 이끈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등은 일본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3명의 인물들이다.
일본의 한반도에 대한 사고와 생각들은 역사적·정치적으로 후쿠자와 유키치에서 엿 볼 수 있다고 하겠다. “일본과 조선을 놓고 본다면, 일본은 강대하고 조선은 약소하다. 일본은 이미 문명이 발달했고 조선은 아직 미개하다. 우리 일본이 무력과 권위를 앞세워 조선인의 마음을 압도하고, 일본의 국력으로 이웃나라가 문명을 향해 나아갈 수 있도록 돕는 것은 흡사 우리 일본의 책임이라 할 수 있다.”
후쿠자와 유키치의 이러한 아시아 주의는 일본이 아시아의 맹주(盟主)가 되어 아시아 국가들이 문명국가로 갈 수 있도록 돕는다는 것으로 “아시아연대론”으로 발전하여 1884년 조선의 급진개화파의 김옥균이 중심이 되어 성급하게 일본만 믿고 벌이는 갑신정변(甲申政變)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조선의 갑신정변이 중국 청나라의 개입으로 실패하면서 후쿠자와 유키치는 “아시아를 벗어나 유럽으로 들어간다”는 탈아입구(脱亜入欧) 즉 탈아론(脫亞論)을 주장하게 된다. 이것은 일본이 서구 열강과 같이 아시아를 정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탈아론을 주장하면서 조선을 비롯한 아시아인들은 근대화될 수도 없기 때문에 강제로 서구열강처럼 침략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후쿠자와 유키치의 아시아 연대론적 사고는 탈아론으로 바뀌었음에도 개화파와 조선의 지식인층에 깊숙이 자리 잡게 되었으며, 결국 대동합방론(大東合邦論)으로 발전하여 일본이 한국을 합병하는 논리로 뒷받침되어 1910년 대한제국이 일본의 식민지화가 되었다.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는 사쓰마번(薩摩藩)과 조슈번(長州藩)의 동맹으로 일본에 675년 동안 내려오던 막부정치를 붕괴시키고, 메이지 유신을 통해 일본이 중앙집권적인 근대국가로 나아갈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고 33세에 죽었지만 일본에서는 지금도 한국의 이순신 장군만큼 국민적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다. 사카모토 료마는 메이지 유신 이후의 일본의 안전한 이익(利益)과 주권(主權)을 지키는 개념으로 이익선(利益線)과 주권선(主權線)을 만들어야 한다는 전략을 내놓았다. 사카모토 료마는 바다는 무역과 경제 그리고 국가의 안보를 위한 일본의 강한 해군력을 주장한다. 사카모토 료마의 이익선과 주권선은 일본 군국주의자들에게 깊은 영향을 끼치게 된다.
그러나 요시다 쇼인의 제자로 메이지 유신에 참여하여 초대 총리가 된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県有朋) 일본 육군의 아버지라고 평가 받는 인물이다. 1890년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주권선과 이익선을 해양, 즉 바다를 넘어 대륙인 한반도와 만주, 중국까지 확대하면서 1937년경에는 한국과 만주가 일본의 주권선에 포함되며 중국 대륙은 이익선에 포함되었다.
이후 아시아주의인 아시아 연대론이 대동아공영권으로 확대되면서 1943년까지 일본의 대전략은 주권선과 이익선의 범위와 한계를 놓고 일본 군부 안에서 많은 논의가 이루어진다.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 참여한 것은 미국 하와이 진주만을 폭격으로 일본의 이익선이 태평양으로 확대되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메이지 유신을 만들어 낸 조슈번과 사쓰마번의 출신들은 일본 육군은 이토 히로부미, 야마가타 아리토모, 이노우에 가오루, 가쓰라 다로, 데라우치 마사타케, 하세가와 요시미치, 미우라 고로 등 조슈번 출신들이 장악하게 되고, 반면에 1894년 청일전쟁에서 활약하고 1904년 러일전쟁에서 해군 사령관이면서 일본 해군의 아버지로 평가받는 도고 헤이하치로(東郷平八郎)는 사쓰마번 출신이다. 조슈번의 이토 히로부미와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그들의 이익선과 주권선을 대륙으로 옮겨 갔고, 사쓰마번의 출신들은 그들의 이익선과 주권선을 바다로 넓혀갔다고 하겠다.
일본은 청일전쟁으로 대륙으로의 이익선과 주권선을 넓힐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그리고 러일전쟁의 승리로 바다, 즉 해양으로 그들의 이익선과 주권선을 넓힐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결과를 얻었다고 하겠다. 두 전쟁의 승리는 바다에 있는 해양국가 일본이 대륙국가 중국과 러시아를 상대로 싸워 승리함으로서 일본 내의 제국주의자들에게 상당한 자긍심과 용기를 주게 되면서 그들은 아시아 전체를 정복하려는 야심을 갖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1905년 러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에게 미국 대통령 시어도어 루즈벨트(Theodore Roosevelt) 대통령은 가쓰라·태프트 밀약(TheKatsura-TaftAgreement)을 맺어 “러일전쟁의 원인이 된 한국을 일본이 지배함을 승인 한다”고 규정한다. 이로써 미국은 일본의 조선 지배를 인정해주고 대신 일본은 미국의 필리핀 지배를 인정하게 되면서 1905년 을사조약(乙巳條約)을 통해 대한제국의 주권은 완전히 빼앗기면서 1910년 일본에 완전한 식민지가 되었다.
메이지 유신의 주도적 인물들이 조슈번과 사쓰마번 출신들이다. 특히 조슈번의 이토 히로부미, 야마가타 아리토모, 이노우에 가오루, 가쓰라 다로, 데라우치 마사타케, 하세가와 요시미치, 미우라 고로 등은 조선을 침략하고 식민지화에 앞장섰던 인물들이다. 이들은 규슈지방의 야마구치현 출신들로 메이지 유신에 참여하여 일본을 부국강병의 길로 이끌면서 일본제국주의를 외치던 인물들이었다.
아베신조 총리 역시 야마구치현 출신이다. 그의 고조부는 1894년 청일전쟁 때 일본군대를 이끌고 경복궁을 무력으로 침략한 오시마 요시마사(大島義昌)이다. 아베의 고조부가 일본의 이익선과 주권선을 대륙에 확대하려 한 것처럼 아베 또한 21세기 일본의 이익선을 한반도 전체로 확대하려 하고 있다. 그는 어떻게든 일본헌법을 개헌하여 일본 자위대가 자국 방위만의 목적이 아닌 언제든지 주변국가에 무력을 행사할 수 있는 군대를 만드는 것이 자기 본인 아베에게 주어진 사명(使命)이자 운명이라고 믿고 있을 것이다.
후쿠자와 유키치가 일본은 조선을 지켜 줄 책임이 있다는 것처럼 아베 총리 또한 한반도를 일본이 지켜 줄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는지, 또한 실질적으로 메이지 유신을 성공시킨 사카모토 료마가 주장한 전략인 이익선과 주권선을 한반도에까지 확대한 이토 히로부미와 야마가타 아리토모를 꿈꾸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징비록(懲毖錄)은 서애 류성룡(柳成龍)이 조선 선조 1592년에 임진왜란이 발발했을 때부터 1598년까지 7년간의 전란의 원인, 전황 등을 기록한 책으로 다시 이 같은 참혹한 전란이 조선에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기록한 것으로 “내가 징계해서 후환을 경계 한다”는 의미가 담아 책을 기록하였지만 조선의 세도가와 정권을 잡은 서인(西人)들은 눈여겨보지 않았다.
조선은 특정 가문이 좌지우지 하는 세도정치와 사색당쟁으로 반대적 입장에 선 인물들이 있으면 가차 없이 제거하는 악순환을 거듭하면서 국가의 제도와 법률은 유명무실한 상태로 전락한다. 한마디로 회복할 수 없는 정도의 부패한 상태로 왕조체제를 유지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결국 쇄국정치로 일관하다가 메이지 유신을 통하여 제도를 정비하고 힘을 키운 일본에게 임진왜란 310년 만에 결국 잡아먹히는 식민지가 되었다.
일본의 식민지화로 가는데 서구열강과 일본의 외부적 무력이 가장 큰 것이었지만, 우리 역사의 내부적 문제는 더 큰 것이었다. 정치적으로 분열하고 외부세력에게 대항할 힘을 키우지 않고 주자학의 가치를 우선시 하고 학문적 싸움과 요직을 차지하려는 싸움으로 역사는 피의 역사가 되었다. 백성들은 매관매직을 일삼는 탐관오리에게 수탈과 착취를 당하면서도 동학으로, 의병으로, 무장투쟁으로, 독립운동으로 외세에 맞섰지만 나라의 고관대작들은 거꾸로 나라를 팔아먹는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일본 메이지 유신의 주축 인물들은 후쿠자와 유키치의 아시아 연대론을 발전시켜 대동아 합방론을 만들고, 요시다 쇼인의 정한론을 실행에 옮기고 대동아공영권으로 확대하며, 사카모토 료마는 일본의 주권선과 이익선을 설파하고 주장할 때, 조선의 벼슬아치들은 310년 전의 서애 유성룡이 쓴 징비록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지금 일본 아베총리를 비롯한 일본의 보수 세력은 한국의 남북한의 문제와 통일문제에 깊숙이 관여하기 위한 지렛대로 수출규제조치를 취하고 있는 것이다.
기사등록 : 이순락기자 / gbmnew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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