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돈하 역사칼럼, "고려 개국 그 후 백년"

이순락기자 0 4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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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 재야 청년사학자 도경당 류돈하 ~


3편 고려 태조이후의 고려내부 상황


거란과 외교관계를 끊은 고려는 이후 태조왕건과 혜종왕무를 거치면서 945년 태조의 차남 정종 왕요가 즉위하였다. 23세의 나이로 황위에 오른 왕요는 그 과정에서 외가인 충주유씨세력을 등에 입고 많은 이들을 살상해서인지 무언가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던 황제였다.10리나 되는 개국사에 걸어가면서 사리를 받들어 모셨고 광학보(廣學寶)를 설치하는 등 불법에 귀의하며, 불교진흥책을 장려하였다.그러면서 국방정책으로는 광군사를 설치하여 군사 30만명을 양성해 국가유사시에 대비토록 하였다.이 군사들을 광군(光軍)이라 하였다.


정종이 광군을 양성한 이유는 신라삼최 중 한명인 최언위(崔彦撝: 868~944)의 아들 최광윤((崔光胤)이 후진에 유학 차 들어가다가 거란에게 잡혀 관리로 임용하게 된다.그 후 거란의 사신으로 고려의 귀성에 들어와 장차 거란이 고려를 침략할 것을 알려주자 광군을 양성한 것이다.23세에 즉위하여 4년간 재위에 있던 정종은 27세의 나이로 붕어하고, 그의 동복아우 광종 왕소가 즉위하였다.광종은 즉위와 동시에 광덕(光德)이라는 연호를 사용하였다.칭제와 건원이 이전에 없다가 고려에 들어와서 태조에 의해 새로 제정된 것은 아니다.이는 고려 이전 시대인 고구려에서부터 형성된 자의식의 발로가 전통으로 이어져 온 것이다. 한편 광종 왕소, 경종 왕주 재위시에는 거란과의 외교접촉과 군사충돌은 없었다.이 때의 거란은 송나라와 연운십육주를 둘러싸고 패권을 다투느라 고려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고려는 아직 국초였기에 체제를 재정비하고 내치에 힘을 기울이며 국가의 기틀을 다져나갔다.


특히 956년 노비안검법(奴婢按檢法)을 실시해 호족.공신들의 경제적, 군사적 기반인 노비들을 혁파하였다.원래 양인이었던 사람들을 노비에서 해방시켜주면서 호족들의 기득권에 타격을 가한 것이다.호족들은 노비안검법에 대해 거세게 반발하였다.심지어 광종의 아내 대목황후 황보씨(태조왕건의 딸로 광종과는 이복남매)까지 자신의 외가 황보씨 가문의 입장에 서서 이를 반대할 정도였다.결국 경종 대에 이르러 다시 노비환천이 이루어지고 말았다.2년 후에는 후주에서 귀화해 온 한림학사 쌍기의 건의에 따라 그를 지공거(과거를 관장하는 시험관)로 삼아 한반도 최초의 과거를 실시하였다.과거를 통하여 관리들을 선발함으로서 신진사류들이 대거 중앙조정에 진출하게 되었다.반면 관직을 독점하여 권세를 누리던 공신세력에게는 타격적이었다.


쌍기는 본디 후주 사람으로 절도순관 대리평사를 지내다가 956년 고려에 사신으로 왔다가 광종의 뜻이 통하여 그대로 고려에 머물며 이후에 귀화까지 하게 되었다.광종은 쌍기를 총애하였고 쌍기 외에도 중국인들을 우대하여 등용하여 그들에게 신하들의 집을 주고 그 딸들을 주어 결혼을 시켜 정착토록 하였다.이에 대해 강직한 성품으로 임금에게 직언을 자주 올린 재상 서필(徐弼)이 스스로 자신의 집을 들어바치기를 자청하며, 귀화인들의 우대를 비판하여 광종의 중국인 우대정책을 그치게 하였다.또 광종은 공복을 제정하여 관품의 위계에 따라 옷색깔을 달리하였다.비록 관품이 낮아도 집안의 부유한 관료들은 관품이 높은 사람보다 그 의복이 화려하여 위세를 자랑했으니 공복의 제정은 곧 관료사회의 질서를 바로 잡기 위함이다.광종이 파격적인 개혁정치로 제도를 정비해 나가자 호족.공신세력의 반발이 거세어졌다.이들의 불만과 반발은 곧 호족숙청으로 이어졌고 광종은 이들을 숙청하며 공포정치로서 왕권을 강화하였다.


고려사에 따르면 호족.공신 숙청이 이루어진 공포정치로 인해 고려 6대황제 성종 왕치의 치세초에 이르러서 개국에 참여한 공신들이 40명밖에 남지 않았다고 한다.시정전시과를(始定田柴科)를 처음 시행한 고려 제5대 황제 경종 치세를 거쳐 경종의 사촌아우이자 매부인 성종 왕치는 통치이념을 유교로 정하였고 시무육조로 유명한 최승로(崔承老)를 등용하여 신라계 유학자들을 우대하였다.통치체제는 당나라의 36부제를 참고하여 26부제로 개편하였으며, 한언공의 건의로 당.송의 정치기구인 추밀원(樞密院)을 처음으로 고려에 설치하였다.성종 시기의 귀족, 정치인들의 동향을 보면 이 시기에 신라계 유학자들 특히 최씨들이 대거 중용된 것을 살펴 볼 수 있다. (훈요십조의 문제가 이 신라계 최씨들과 연관이 있으며, 최승로의 손자 최제안이 그 중심에 있었다.)특히 성종 즉위 후 최지몽은 크게 우대를 받아 좌집정 수내사령 상주국으로 홍문 숭화 치리공신에 책록되어 그 부모까지 작위를 추증받게 된다.


최지몽(崔知夢)이 누구이던가.그는 전라도 영암 사람으로 총명하고 민첩하여 학문을 좋아하여 경서와 사서를 널리 섭렵하였다 한다.천문과 복서에 정통하여 그의 나이 18세에 태조왕건에게 중용되어 공봉의 벼슬을 받게 된다.그는 꿈을 잘 해몽했다.태조가 그에게 해몽을 부탁했더니 최지몽이 이르길 "길조를 얻었으니 반드시 삼한을 통일하여 다스릴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태조는 매우 기뻐하여 이름을 총진에서 지몽으로 고쳐주었다.

최지몽은 이후 책사로서 태조의 곁을 떠나지 않았고 성종까지 여섯임금을 모시며 사천대를 관장하여 국가와 황실의 일을 자문해 주기도 하였다.한편 그는 기록에 의거해서 본다면 고려 최초로 공작, 후작, 백작 등 오등작 중의 하나인 후작에 봉작된 인물로 서기 980년에 동래군후(東萊郡侯)로 봉해졌다.최지몽 외에도 성종의 스승 최량은 내사시랑 겸 민관어서 동내사문하평장사 감수국사(內史侍郎兼民官御事同內史門下平章事監修國史)를 지냈으니 신라계 출신들인 최씨들이 대거 기용된 시기가 이 때였다.고려는 국초에 혜종 왕무의 석연찮은 죽음 등을 비롯해 잦은 황위의 교체와 내란을 경험하면서도 내치를 다져 성종 대에 이르러 국가의 기틀을 확립하였다.


도경당 류돈하 쓰다



기사등록 : 이순락기자 / gbmnew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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