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훈 박사 칼럼]구미시민은 왕산 허위 가문을 기억하고 되새기자!
경북대평화문제연구소 연구위원, 구미회 부회장
구미가 지금 홍역을 치루고 있다. 구미시와 수자원공사는 산동면 국가4산업단지 내에 56억 원을 들여 공원을 조성하면서 주민공청회를 거쳐 2016년 8월 애초에 “왕산광장”으로 이름 짓기로 결정하고, 전통누각 또한 “왕산루”라고 했었다. 이렇게 결정된 계기는 왕산 허위 선생의 가문이 독립운동가 14명을 배출하여 한국의 5대 항일 독립운동가 가문에 들어간다는 것을 대내외에 알리고 기념하기 위하여 전통적 개념에 기초한 광장을 만들기로 결정한 것에 따른 것이다.
그러나 지난 2018년 지방선거로 당선된 구미시 장세용 시장이 “인물 기념사업은 태생지 중심으로 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히고, 구미시 산동면 주민들의 왕산광장 명칭 변경 요구가 있다는 이유를 들어 애초의 왕산광장과 왕산루를 산동광장, 산동루로 바꾸었다. 주민공청회를 거쳐서 결정했던 일은 간곳없이 말이다.
다시 더듬어 보면 이렇다. 올해 2019년 7월 왕산광장과 왕산루를 산동광장과 산동루로 변경하기 위해 올해 새로이 주민공청회를 열어 산동광장과 산동루로 변경, 결정하였다. 따라서 구미시 시민단체와 왕산 후손들은 강한 불만과 반대를 주장하고 있다. 구미시장이 바뀌고 나자 왕산 가문을 기리기 위해 만든 광장과 누각이 하루아침에 명칭이 바뀌면서 구미시의 역사인식에 대한 문제가 많다는 지적이 일어나고 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수자원공사 측은 애초에 왕산광장에 왕산가문 14분에 대한의 동상들과 잘 어울리게 누각이 전통적인 방식으로 설계·건축을 진행하였다. 당초 왕산광장으로 설계·건축하지 않았다면 56억 원의 예산도 아끼고, 절감할 수 있었는데 이제 와서 광장 명칭을 변경한다는 것은 첫째 예산 낭비, 둘째 명칭 변경으로 인한 지역갈등을 유발한 셈이 되는 것이다. 아마 구미시의 왕산광장 명칭 변경에 대해 공사를 책임지고 있는 수자원공사 측도 일대 혼란과 멘탈 붕괴가 왔을 것이라 추측된다.
필자는 왕산가문에 대해 조금 공부한 적이 있다. 당시 왕산 허위는 평리원 서리재판장인데 오늘날의 대법원장과 같다. 그리고 의정부참찬 지금으로 말하면 대통령비서실장 정도의 관직과 벼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왕산 허위는 나라를 팔아먹는 당시 벼슬아치들과 달리 일제의 식민지화가 노골화되자 모든 부귀영화를 버리고 형제들과 함께 의병활동에 뛰어든다.
왕산 허위는 한국 의병들이 일본에 비해 무기와 군사 면에서 열악했지만,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한 13년간 의병운동을 하였고, 조선 전체 의병을 규합하여 13도창의군 총대장을 맡아 서울진공작전을 펼쳤으나 실패한다. 일제가 독립운동을 하는 사람들을 전문적으로 잡아들이기 위해 만든 서대문형무소 제1호 사형수가 되었고, 1908년 10월 21일 순국한다. 이후 그의 모든 형제들은 엄청난 재산을 정리하여 항일 독립운동에 투신한다.
나라가 망해가는 것을 되찾기 위해 독립운동에 운명과 미래를 걸었던 집안으로는 서울의 백사 이항복의 후손들이며 당시 조선 최고의 갑부 경주이씨 우당 이회영(友堂, 李會榮)의 6형제들, 안중근(安重根)과 그의 형제들, 안동의 내 앞 마을 백하 김대락(白下, 金大洛)·일송 김동삼(一松, 金東三)을 중심으로 하는 의성 김씨 집안, 안동 퇴계 이황의 후손들인 진성이씨 집안, 안동 임청각의 석주 이상룡(石洲 李相龍)을 중심으로 3대가 독립운동을 한 고성이씨 집안, 안동 무실마을의 전주 류씨 집안, 안동 풍산면 가일마을 안동 권씨 집안 들이 한국에서 대표적인 독립운동가 명문가로 손꼽힌다. 이들은 대한민국 독립운동사의 씨를 뿌리고 성장시킨 혁신유림(革新儒林)이었다.
왕산 가문은 석주 이상룡 선생과 사돈관계를 맺을 정도였고, 이들보다 먼저 의병운동과 독립운동에 전 재산과 부귀영화를 버리고 투신하고 헌신했다. 나라를 되찾겠다는 각오로 왕산가문은 춥고 배고픔이 기다리는 만주와 연해주로 이주하여 항일 독립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래서 아직도 왕산 가문의 후예들은 조국이 아닌 만리타향에서 살고 있는 실정이다.
지금의 구미시 임은동에 소재하고 있는 왕산초등학교 뒤편 왕산기념관은 왕산 허위선생 가문과 인연이 많은 땅으로 타인에게 매매되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왕산 허위의 장손 허경성 옹 3형제가 6억 원의 빚으로 구입하여 2007년경 구미시가 왕산에 대한 기념사업을 할 수 있도록 기부채납을 하였다.
위대한 항일의병장 왕산 허위선생은 1855년 4월 2일 구미시 임은동에서 태어나셨다. 그래서 2019년 4월 2일 태어나신 날에 맞추어서, 왕산기념관 왕산묘소 옆 사당에서 "왕산선생 위패봉안 및 낙성고유제"를 지냈다. 구미시장과 왕산 기념사업회 회원 등 고급승용차를 타고 온 20여명이 참석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행사를 추진한다면 구미시는 대구 산격동에 살고 계시는 93세의 왕산 허위의 長손자 허경성 옹에게 사전에 정중히 연락을 하고, 구미시 측에서 차량을 준비하여 모시러 가는 것이 행사를 준비하는 구미시 측의 도리고 예의일 것이다. 그러나 93세의 늙은 노인이 직접 열차를 타고 왔다.
할아버지 태어나신 날에 왕산선생 위패봉안 및 낙성고유제를 한다는 소식에 93세의 노인이 밤잠을 못 이루고 기쁜 마음으로 구미시 왕산 기념관에 찾아오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구미시장과 구미시 공무원들 그리고 왕산기념사업회 관계자들은 허경성 옹에게 연세가 많은데 교통편 어떻게 오셨습니까? 묻는 사람 하나 없었고, 어떠한 교통편으로 가십니까? 그리고 건강과 삶은 어떻습니까? 구미시 관계자와 왕산기념사업회 관계자 중 묻는 사람 하나 없었다고 한다. 평소에 왕산가문에 대해 연구하고 관심을 가지고 있던 몇몇 사람이 직접 대구 자택까지 모셔다 드렸다고 한다.
구미시장은 관복을 입고 낙성고유제에서 제일 먼저 제례를 올리는 초헌관으로 예를 올리는 모습이 신문 기사에 나왔었다. 낙성고유제에 참석한 구미시장은 제례를 올리는 관복을 입고, 왕산 기념사업회관계자들은 도포와 두루마기를 입었다. 적어도 행사를 진행하는 구미시와 관계자들이 사전에 생각이 있었다면 허경성 옹의 관복이나 도포를 마련하는 것이 상식이 아닐까 한다. 이렇게 하는 것이 진정한 왕산 허위선생과 왕산가문에 대한 예의일 것이다. 더구나 제일 먼저 제례를 올리는 초헌관은 당연히 허경성 옹이 했어야 모양새가 맞을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초헌관은 구미시장이 하였다고 한다. 조금만 생각이 있었다면 왕산의 장손자이시니 초헌관을 하시는 게 도리 아니겠습니까? 라고 했을 것이다. 왕산 가문의 후손들은 부귀영화를 버리고, 나라를 구하기 위해 독립운동 했다는 자부심과 명예심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가난한 왕산 허위의 장손자는 제대로 된 옷 하나 없이, 그저 행사에서 참석자의 일원으로 와 있는 사람에 불과했다. 타인에게 적어도 베풀어 보고, 배려해 보았던 사람들이라면 이렇게 생각 없는 행사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93세의 노인의 머리와 가슴은 과연 어떠했겠는가? 왕산 가문 전 가족은 당대 선산·구미 최고의 부를 보유한 만석꾼의 재산을 모두 털어 배고픔과 굶주림을 참아가면서 만주와 연해주에서 의병운동과 독립운동에 투신한 선조들을 생각하면서 허경성 옹은 과연 어떠한 생각이 들었을까?
허경성 옹은 구미시가 기념하는 3·1절 행사에도 매년 참석했어도 이러한 행태는 마찬가지였다고 심정을 토로했다. 구미시 어느 공무원 하나 허경성 옹을 정중히 챙기고 대접하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구미시에서는 참석하는지 참석하지 않는지 여기에 대한 전화만 온다고 한다. 그리고 93세의 노인이 대접받고 예우 받으려고 하는 것은 아니지만, 구미시가 허경성 옹에게 보인 태도는 왕산가문 전체에 대한 태도로 보고 섭섭함을 숨기지 않는다.
4월 2일 이 거룩한 행사를 보면 구미시의 역사인식이 결여된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했다. 이제까지 이러한 사고방식으로 구미시는 진정성이 결여된 행사를 해왔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구미시민들은 구미시가 하는 행사를 이구동성으로 진정성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말을 오래전부터 해왔다. 이 왕산 허위선생 위패봉안과 낙성고유제 또한 진정성이 없는 스쳐지나가는 행사였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옛 선비들의 가장 큰 덕목은 접빈객을 잘 맞이하는 것이다. 구미시가 주인이었다면 할아버지 고유제에 찾아 온 손님 허경성 옹에게 미리 묻고, 허위선생의 손자이니 제례를 올리는 초헌관을 하셔야 한다고 했어야 한다. 이러한 것을 볼 때 연장선상에서 구미시가 구미시민을 대하는 모습이 이런 모습이 아닐지 필자는 허탈감과 박탈감이 든다.
93세의 허경성 옹이 죽음을 무릅쓰고 구미시가 왕산 광장과 왕산루 명칭 변경에 대한 불만과 명칭변경 철회를 요구하는 1인 시위를 지금 구미시청 앞에서 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현수막을 제작 중이라고 한다. 만약 93세의 독립운동가 손자가 구미시청 앞에서 1인 시위를 한다고 하면 전국의 방송과 신문들이 구미시청으로 몰려들어 취재하고 방송할 것이다. 지금이라도 구미시는 허경성 옹을 찾아 진정성 있는 사과와 설득을 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구미시가 대한민국 매스컴의 중심에 서게 되며 국민과 시민들로부터 지탄과 분노를 받을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 옛날 왕산 가문의 사람들이 그 누가 알아주기 위해서 항일 독립운동을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오늘날을 살고 있는 우리들은 나라를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리고 싸웠던 그들을 기억해야 할 의무와 책임이 있다. 이러한 것들이 역사를 움직이는 원동력이기 때문에 현재의 우리는 역사를 공부하는 것이다.
구미시가 왕산 가문에게 보인 태도와 정반대로 서울시는 위대한 왕산 허위선생을 기리기 위해 왕산선생의 13도 창의군 선발대가 일제의 조선통감부를 공격하기 위해 진군한 청량리에서 동대문 사이의 도로명을 “왕산로”로 명명하고 있다. 역사인식에서 서울시와 구미시가 얼마나 대조적인가를 보여주고 있다.
우리가 잘 아는 안중근 의사가 왕산 허위선생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고 한다. “우리 이천만 동포에게 허위와 같은 진충갈력(盡忠竭力) 용맹의 기상이 있었던들 오늘과 같은 국욕(國辱)을 받지 않았을 것이다. 본시 고관이란 제 몸만 알고 나라는 모르는 법이지만, 허위는 그렇지 않았다. 따라서 허위는 관계(官界) 제일의 충신이라 할 것이다.”
구미뿐만 아니라 한국사회에서 고위층들에게 요구되는 수준 높은 도덕적 의무라는 노블리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를 구미의 왕산가문은 역사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우리 구미시와 시민들은 위대한 왕산가문을 지금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한번쯤 고개를 숙이고 반성해 보야 한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기사등록 : 이순락기자 / gbmnew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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