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돈하 역사 칼럼 "임청각, 그리고 석주 이상룡 선생을 다시 보다"
생각컨대 석주 이상룡 선생을 떠올리자면 매양 목이 매인다.
우리 석주 이선생을 논하자면 선생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이요, 혁신으로 광복운동을 펼쳐 대통합으로서 항일운동의 의지를 한 곳으로 집결한 국가의 시귀(蓍龜)라 할 수 있다.
석주 이선생은 고성이씨 참판공파 종손으로 1910년 경술국치 후
1911년 1월, 임청각을 떠나 서간도로 망명하여 우당 이회영 선생 등과 더불어 경학사와 신흥무관학교를 세웠으니 이는 곧 1575년 을해년으로부터 촉발된 조선붕당 삼백년사를 결론짓는 일이라 할 수 있다.
석주는 퇴계학파의 적통을 이어받은 서산 김흥락 선생의 제자이자 우당은 율곡의 학통을 이은 백사 이항복의 10대손으로 소론에 속하는 연유에서 말미암기 때문이다.
오늘 단기 4353년 12월 17일은 석주 선생의 집 임청각 마당에 놓여진 철길을 80 년 만에 걷게 된 뜻 깊은 날이다. 이 철길은 일본이 설치 해 놓은 것이다.
아! 임청각 종손 석주 이선생은 신해년(1911년)이래 임청각을 떠난 이래 서거 때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임청각은 떠나간 종손 석주 이선생을 얼마나 기다렸겠으며
석주 이선생은 고향동산을 몇번이나 그리워 했었겠는가?
~ 그림은 석주 이상룡 선생의 6대조 허주 이종악선생의 동해해람에 실린 임청각 본래의 모습 ~
석주 이선생은 40여명의 식솔들을 거느리고 오직 서간도에 정착하여 한인촌을 일구어 작은 나라를 만들어 독립군의 기지를 개척하였다. 그 개척에 손부(손자며느리) 허은 선생의 공로 역시 빼놓을 수 없음이다.
그러나 선생의 활동과 그 족적과는 별개로 광복 후 오랫동안 단재 신채호선생과 함께 국적을 회복치 못하였다.
그러다가 2009년에 비로소 겨우 국적을 회복하게 되었으며, 오늘에서야 비로소 임청각 마당을 지나가던 기차가 멈추고 방음벽이 뜯겨졌으니 이는 실로 대한만세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흐르는 눈물을 멈출 수가 없다.
(류돈하 쓰다)
기사등록 : 김영숙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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