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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돈하 역사 칼럼 "임청각, 그리고 석주 이상룡 선생을 다시 보다"

이순락기자 0 55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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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 재야 청년사학자 류돈하 ~


생각컨대 석주 이상룡 선생을 떠올리자면 매양 목이 매인다.

우리 석주 이선생을 논하자면 선생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이요, 혁신으로 광복운동을 펼쳐 대통합으로서 항일운동의 의지를 한 곳으로 집결한 국가의 시귀(蓍龜)라 할 수 있다.

 

석주 이선생은 고성이씨 참판공파 종손으로 1910년 경술국치 후

19111, 임청각을 떠나 서간도로 망명하여 우당 이회영 선생 등과 더불어 경학사와 신흥무관학교를 세웠으니 이는 곧 1575년 을해년으로부터 촉발된 조선붕당 삼백년사를 결론짓는 일이라 할 수 있다.

 

석주는 퇴계학파의 적통을 이어받은 서산 김흥락 선생의 제자이자 우당은 율곡의 학통을 이은 백사 이항복의 10대손으로 소론에 속하는 연유에서 말미암기 때문이다.

 

오늘 단기 43531217일은 석주 선생의 집 임청각 마당에 놓여진 철길을 80 년 만에 걷게 된 뜻 깊은 날이다. 이 철길은 일본이 설치 해 놓은 것이다.

 

! 임청각 종손 석주 이선생은 신해년(1911)이래 임청각을 떠난 이래 서거 때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임청각은 떠나간 종손 석주 이선생을 얼마나 기다렸겠으며

석주 이선생은 고향동산을 몇번이나 그리워 했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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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림은 석주 이상룡 선생의 6대조 허주 이종악선생의 동해해람에 실린 임청각 본래의 모습 ~

 

석주 이선생은 40여명의 식솔들을 거느리고 오직 서간도에 정착하여 한인촌을 일구어 작은 나라를 만들어 독립군의 기지를 개척하였다. 그 개척에 손부(손자며느리) 허은 선생의 공로 역시 빼놓을 수 없음이다.

 

그러나 선생의 활동과 그 족적과는 별개로 광복 후 오랫동안 단재 신채호선생과 함께 국적을 회복치 못하였다.

 

그러다가 2009년에 비로소 겨우 국적을 회복하게 되었으며, 오늘에서야 비로소 임청각 마당을 지나가던 기차가 멈추고 방음벽이 뜯겨졌으니 이는 실로 대한만세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흐르는 눈물을 멈출 수가 없다.


(류돈하 쓰다)

 



기사등록 : 김영숙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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