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돈하 역사칼럼, ‘단재 신채호를 생각하다’
2월 21일은 단재 신채호(丹齋 申采浩)선생의 순국일이다.
그는 경술국치 이전 이미 당대 최고의 천재이자 선비였다.
그러나 시대는 그를 가만 두지 않았다.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기자 단재 신선생은 순암 안정복의 동사강목 하나 들고 중국 청도로 건너가 신민회 회원들과 접촉하여 본격적인 광복운동에 참여하였다.
단재는 광복운동에 참여하면서도 우리역사 연구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열악하고 비참한 상황에서도 우리역사의 진면목을 복원하는데 온 힘을 다하였다.
그 결실이 선생의 순국으로 미완성된 조선상고사였다.
"역사란 무엇인가?"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 시간적으로 발전하고 공간적으로 확대되는 심적 활동의 상태에 관한 기록이다." 라는 구절로 시작되는 조선상고사의 총론은 그가 한국사를 어떠한 관점에서 보고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조선상고사에서 선생이 이르길 역사는 역사를 위하여 역사를 쓰는 것이고 어떤 목적을 위하여 쓰는 것이 아니라 하였다.
또 사회의 흐름과 그 사실을 객관적으로 기술한 것이 이른바 역사라 하였다. 이렇듯 선생의 역사기술관이 물론 현대사학에 맞지않는 부분도 있겠지만 여러 역사적 정황과 상황에 들어맞는 고증성은 역사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심혈을 기울인 선생의 진심에서 찾을 수 있다.
선생은 민족과 함께한 역사학자이면서도 명철한 사상가였다.
약산 김원봉이 설립한 의열단이 그 목적을 찾지못할 때에 선생은 천하의 명문'조선혁명선언'을 작성하여
그 존재이유와 정당성을 확립토록 하였다.
선생은 민족을 사랑한 아나키스트였다. 지주중류의 위대한 혁명가이기도 하다.
일본제국주의에 억압받는 민중을 혁명의 본영이라 일컫으며
그 고통을 분명히 인식하였다.
선생은1928년 일본경찰에게 체포되어
대련감옥에 수감되었다. 그 후 여순감옥으로 옮겨져 그 곳에서
조선상고사, 조선상고문화사를 집필하였다.
당시 선생은 조선일보에 조선상고사를 연재하였다. 그리고 미처 완성되지 못한 채 1936년 2월 21일 오후 4시 20분경 차디찬 여순감옥에서 순국하였다.
향년 57세였다.
단재는 석주 이상룡 선생과 더불어 백년간 국적을 회복하지 못하였었다.
평생을 조국광복에 헌신하며 민족의 역사를 규명하고 정립한 그 정신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기사등록 : 김영숙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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