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돈하 역사칼럼, "측천무후"
서기 705년 12월 성씨가 무武씨인 측천무후 무조가 죽었다.
중국역사상 최초의 여황제이다. 그녀는 당태종 이세민의 후궁으로 입궁하여 그의 아들 고종 이치의 마음을 사로잡아 황후가 된 것도 모자라 무소불위의 권력을 움켜 쥔 여황제가 되었다.
천하의 권력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딸도 죽이고 아들도 죽이는 것을 서슴치 않았다. 자신이 고생하여 낳은 자녀들도 그렇게 잔혹하게 죽이는데 하물며 타인의 목숨이겠는가. 백제출신 명장 흑치상지도 무씨가 죽였음을 상기하자면 그와 같이 억울한 죽음도 비일비재하였다. 무씨의 사람됨을 논하자면 대단히 비상하고 영악한 구석이 있었다. 개인적 견해로는 굳이 총명이라는 단어가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라 여긴다.
동북아의 패자 고구려와 해상강국 백제가 10년 사이에 허무하게 사라졌다. 토번과 돌궐 역시 당나라의 오랜 골칫거리였으나 당고종과 무씨의 통치기간에 평정되었다. 이로 인해 당나라의 팽창력은 막강하였다. 명실상부한 세계 대제국이 된 것이다. 그 중심에 바로 측천무후가 있었다.
문득 당태종과 당고종은 모두 눈에 관계된 부자지간이란 것이 돋보인다. 당태종은 645년 고구려를 침략한 을사당란 당시 안시성에서 싸우다가 눈에 화살을 맞아 한쪽 눈을 잃었다는 설이 있다. 이 이야기의 사실여부를 따지는 것보다 목은 이색의 시에서도 목격되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당태종의 아들 당고종 이치는 56세에 유명을 달리하였는데 그 말년에는 병이 들어 눈이 멀었다고 한다. 병든 남편을 대신해 나랏일을 마음대로 처리하다가 급기야는 황제의 위에 오른 무씨의 행적은 소스라칠 정도로 무섭다고 할 수 있겠다.
황위에 오른 측천무후는 무씨왕조를 지향하며 당나라의 왕족인 이씨들을 탄압하였다. 나라이름도 주(周)로 바꾸었다. 아들들인 중종 이현과 예종 이단(이융기의 부친)이 말을 듣지 않는다는 이유로 폐립케 한 전력을 가진 측천무후는 친정인 무씨일가들을 깊이 중용하였다. 이씨성을 가진 자신의 아들들 대신 친정조카 무삼사를 태자로 책봉하려 한 일도 있었기에 측천무후의 '무씨사랑'은 대단하였다.
그러한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측천무후도 결국 영원하지는 못했다. 이름이 간지나는 장간지 등의 대신과 장수들이 무측천의 총신이자 애인인 장역지, 장창종 등을 죽이고 폐립된 중종을 다시 복위시켜 양위의 형식으로 권력을 이양하게 된다. 이로 인해 팔순이 넘은 측천무후는 16년간의 황제생활을 마감하고 상양궁이라는 궁궐에 유폐되어 10개월 후 사망한다.
측천무후가 죽은 후 측천무후가 되고 싶었던 여성들이 많았다. 그녀의 딸 태평공주 그리고 며느리 위황후(중종의 부인) 심지어 손녀 안락공주(중종의 딸)까지 권력다툼에 뛰어들어 포스트 측천무후를 꿈꾸었다. 그러나 현종 이융기에 의해서 모두 평정되어 개원의 치가 열리게 되는 밑거름이 되었다.
측천무후, 위황후, 태평공주, 안락공주를 보면 불현듯 최순실이 연상된다. 최순실의 정체가 온천하에 드러나고 몰락하여 감옥에 들어간 후 그녀가 되고 싶은 이가 과연 없는건희?
도경당 류돈하 쓰다
기사등록 : 김영숙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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