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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돈하 역사 칼럼 : 고려 개국 그 후 백년

이순락기자 0 7136

2편 고려의 후삼국통일과 중원의 정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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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 재야 청년 사학자 도경당 류돈하 ~ 


서기 92512, 거란이 발해를 멸망시켰다.한반도의 고려로서는 발해라는 완충지대를 잃게 되었고 이제 직접적으로 거란과 마주하는 형세를 맞이하였다.


한편 거란의 야율아보기가 거란 8부를 통일하고 크게 세력을 떨칠 수 있게 된 것은 중원대륙 정세의 변화가 크게 작용하였다.대제국 당나라가 3백 년 만에 무너지고 510국 시대라는 가장 혼란한 시기가 전개되면서 왕조와 천자가 자주 바뀌었다.


훗날 조선 중기의 선비 백호 임제(林悌)는 이를 일컫어 바퀴가 돌듯 갈마드는 천자라는 뜻에서 윤체천자(輪遞天子)라 하였다.즉 너도 한번 해먹고 나도 해먹는 돌림천자란 것이다.


이렇듯 당시의 중원대륙은 안정되지 않은 채 주전충(朱全忠)이 세운 후량, 이존욱의 후당, 석경당의 후진, 유지원의 후한, 곽위의 후주 등 5대를 거치며 50여년간 긴 암흑기에 빠져있었다.


특히 후당, 후진, 후한을 세운 이들은 정통 한족이 아닌 돌궐계열의 사타족(沙陀)출신들이다.그 중에 후진 고조 석경당(後晉 高祖 石敬瑭)은 후당2대 황제 명종 이사원의 사위로 명종사후 후당내부의 혼란을 틈타 책사 상유한(桑維翰)의 건의에 따라 거란의 군사를 빌려 후당을 멸망케 하고 자신은 후진을 세웠다.


이 때 석경당은 요나라 2대 황제 태종 야율덕광을 아버지로 섬기며 중원대륙의 알짜배기 땅 연운십육주를 바치게 되었다. 석경당은 서기 892년생이고 야율덕광은 902년생이다. 10살이나 어린 친구를 아버지로 모신 것이다.

이에 대해 석경당의 부하 하동절도사 유지원(劉知遠)마저 "10살이나 어린 친구에게 아버지라 하는 것은 심하지 않습니까? 또 어찌 연운십육주 땅까지 떼어주시려고 합니까?" 라고 항의했으나 황제자리에 눈이 먼 석경당은 그대로 단행하고 그것도 모자라 해마다 거란에게 30만필의 비단을 조공으로 바치게 되었다.


하동절도사 유지원은 훗날 후한을 세운 후한 고조에 오른 인물이다.석경당이 이렇게 거란에게 연운십육주를 갖다 바침으로서 몇 백 년 동안 거란과 여진족의 수중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는 내내 중국내부에서 커다란 병폐의 시초로 남았다. 이 때문에 석경당은 남송의 간신 진회와 더불어 오랜 세월 매국노로 지탄을 받고 있다.


석경당이 연운십육주를 고스란히 후진에 바친 후, 조광윤이 세운 송나라에서는 이 땅을 수복하기 위해 40년동안 싸웠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한반도에서 고려가 세워져 망명해오는 발해 유민들을 흡수 한 뒤 자주적으로 후삼국을 통일하고 힘을 하나로 모을 때 중원대륙에서는 이런 숨 가쁘고 어지러운 정세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한편 호족연합국가 형태로 출발한 고려는 외세의 개입 없이 자주통일대업을 이루어 명실상부한 민족국가를 형성하였다. 전쟁 한번 벌이지 않고 93512, 신라 최후 국왕 경순왕의 항복을 받아들였으며, 태조 왕건은 그를 관광순화위국공신 상주국 낙랑왕 정승(觀光順化衛國功臣 上柱國 樂浪王 政丞)에 봉하였다. 8,000호의 식읍을 내려 지위를 태자 왕무의 위에 두게 하였다.


신라의 천년사직이 막을 내릴 때, 후백제의 견훤은 장남 신검의 반란으로 금산사에 유폐된 후, 탈출하여 스스로 고려에 귀부해왔다. 자신이 세운 나라를 스스로 문 닫을 결심을 한 견훤은 거듭 태조에게 신검을 정벌할 것을 청원하였고, 일리천에서 후삼국 최후의 통일전쟁을 치르게 된다.


일리천 전투에서 고려는 신라인, 발해유민, 흑수, 달고, 철륵의 사람들까지 동원하여 전쟁을 수행하였다. 스스로 고려에 귀부한 견훤은 아들 신검, 용검, 양검 등과 대적하는 입장이 되었고 견훤을 목격한 후백제군사들 중 전투의지를 상실하고 항복해온 자들이 많았다.


이로써 신검은 드디어 전투를 포기하였다. 후백제왕 신검이 왕건에게 항복함에 따라 왕건의 고려는 삼한일통을 이루는 통일대업을 이루는 순간을 맞이하였다. 때는 936년이었다.

 

 

발해 멸망 후 완충지대가 없어진 고려는 삼한통일의 대업을 이루었으나 이제는 직접적으로 거란을 마주하게 되었다.


후진고조 석경당 사후 거란과 후진 사이에 틈이 벌어지자 고려에 온 후진의 승려 말라에게 군사를 요청하면서 발해를 '서로 혼인한 나라', '발해는 친척나라' 라 일컫었다. 또 발해의 마지막왕 대인선이 사로잡힌 것으로 보고 군사를 내어 그를 구출하자고까지 하였다.


그러나 머지않아 태조 왕건이 승하하고 거란이 후진을 멸망시켜 마지막 왕 석중귀를 포로로 잡게 되면서 고려와 후진의 공조는 이루어지지는 못했다.


앞서, 태조 왕건이 승하하기 전인 94210, 거란이 사신 30명과 낙타 50마리를 보내 우호를 다지고자 청했으나, 태조는 거란을 무도한 나라라고 하여 교빙을 끊었다. 낙타를 데리고 온 사신들은 귀양 보내고 낙타는 만부교 다리 밑에 메어놓아 굶어 죽게 하였다.


고구려의 뒤를 이어 후계자임을 내세우며 북진정책을 시행해 온 태조 왕건으로서는 거란에 대해 깊은 적개심을 가지고 있었다.


아울러 후대의 왕이 될 자손들에게 남긴 훈요십조 제 4조에도 '거란은 짐승과 같은 나라이니 풍속이 같지 않고 언어 역시 다르니 부디 의관제도를 본받지 말라'라고 적시하였다.


도경당 류돈하 쓰다




기사등록 : 이순락기자 / gbmnew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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