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돈하 역사칼럼, '징비록 서문(序文)'
-징비록 서문 중-
백성들이 떠돌고 정치가 어지러워진 때에 나(류성룡) 같은 못난 사람이 나라의 중책을 맡아 위태로움을 바로잡지 못하고 나라가 무너지는 것을 떠받치지 못하였으니 그 죄는 죽어도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오히려 시골(고향)에 눈 뜨고 살아서 구차하게 삶을 이어가고 있으니 어찌 나라의 관대한 은혜가 아니겠는가.
근심과 두려움이 조금 진정되어 지난 날을 생각 할 때마다 황송하고 부끄러워 얼굴을 들 수가 없다.
(중략)
~ 징비록 사진 (네이브 캡쳐) ~
시경에 이르기를, '나는 지난 일을 경계하여 앞으로 후환이 생기지 않도록 대비한다'고 하였으니, 이것이 내가《징비록》을 지은 까닭이다.중략.....
시골에 살면서도 간절히 충성을 바라는 마음이 있음을 드러내고, 어리석은 신하가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려 하였지만 공을 세우지 못한 죄를 드러내고자 하였음이랴.
서애 류성룡의 회고와 그 심경이 고스란히 담긴 징비록 서문이다.징비록을 왜 써야 하는지의 이유를 서문에 담았다.서애연보에 따르면 당시의 서애는 1598년 정계은퇴 후 고향에서 말년을 보냈다.
충무공 이순신의 전사에서부터 형 겸암 류운룡과 어머니 선안동김씨의 별세, 큰아들, 제자이자 조카사위의 죽음 등 많은 이별의 아픔이 있었다. 고향에 은거한 이후 서애는 외부사람들과 접촉을 꺼린 채 징비록집필에 몰두하였다.
서애를 토사구팽한 선조가 후회하고 관작을 복구시켜 주었으며 청백리(염근)로 선정케 하며 공신의 호와 다시 부원군의 봉군을 내려주었다.서애는 정계은퇴 후, 여러차례 선조가 다시 불렀으나 거절하였다.
징비록 집필 3년후, 풍산현 서미동 농환재에서 향년 66세로 세상을 떠났다.
~ 류돈하 쓰다 ~
기사등록 : 조은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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