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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돈하칼럼, "조선태종VS당태종"

이순락기자 0 6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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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 재야청년사학자 언암 류돈하 ~ 



조선태종으로 말하자면 성은 이씨요, 휘는 방원이며 자는 유덕이다.

본관은 전주이씨로서 시조 이한의 23대손이다.

5대조는 목조 이안사, 고조는 익조 이행리, 증조는 도조 이춘, 조부는 이자춘, 부친은 태조 이성계이다.

태종은 태조의 다섯번째 아들이며 원천석에게 학문을 배웠다.

17세의 어린 나이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전형적인 무인집안에서 어린 이방원이 문과에 급제하자 그의 부친 태조는 매우 기뻐했다고 한다.

태종은 부친이 조선을 개국하는데에 지대한 공헌을 세웠다.

자신의 친형 정종공정대왕 이방과와 공모하여 조영무,조영규와 함께 포은 정몽주를 죽임으로써 역성혁명은 현실화 되었다.

태종은 개국 후 왕자의 난을 일으켜 태조의 향처 신덕왕후 강씨 소생들인 이복동생 방번,방석 그리고 세자 방석을 둘러싼 측근인 정도전,심효생,류만수,남은 등을 일거에 숙청하였다.

태조실록에 의하면 이방원은 방번, 방석형제를 살려 주려 하였으나

청주이씨 청허자 이거이가 기어이 살해하였다고 한다.

무인년에 벌어진 제1차 왕자의 난 성공 이후 이방원은 격구매니아 친형 이방과를 바지세자,바지국왕으로 만들었다.

그러다 바로 위의 형 회안공작 이방간이 박포와 더불어

아우 이방원에게 대항하였고 이는 제2차 왕자의 난으로 이어진다.

태조는 이방간의 거병소식을 듣고 소같은 놈이라며 동부동모 형제간의 비극을 몹시도 참담해 하였다.

그런 태조의 지극함 때문인지 태종은 방간을 제압하고 죽이라는 주위의 청들을 물리치고 황해도 토산으로 귀양보냈다.

이방간은 그 곳에서 잘 먹고 잘 살았다.

가끔 심심하면 한달에 한번씩 서울로 와서 부모형제와 서로 얼굴도 보고 놀게 해 주었다.

(이는 정종 이방과의 배려이기도 하다.)

또 10살많은 형 이방과의 양자가 되어 아들대우를 받으면서 세자에 오르고 곧 왕이 된다.

태종이방원은 즉위후 조선개국의 주체 해동육룡의 점정을 찍으면서 왕실의 걸림돌이 되는 사람들은 모조리 손을 보았다.

예전부터 경계해 오던 서원부원군 이거이,매부인 이애부자를 정치현장에서 배제시켰다.

또 자신을 왕으로 만들어준 처남들인 민무구, 무질, 무휼, 후회 형제들을 죽였으며, 오른팔 안성부원군 이숙번은 귀양보냈다.

(훗날 이숙번은 세종 치세 말엽에 오랜 귀양생활 끝에 개국초의 일을 많이 안다는 이유로 석방되어 용비어천가 편찬에 참여하게 된다.)

그 뿐만 아니라 세종의 장인어른이자 사돈인 청천부원군 심온역시 역모죄로 몰아 명나라에 사신으로 돌아오던 중에 체포하여 죽음을 내렸다.

그랬다.

침좀 뱉는다는 외척들과 권세있는 공신들은 모조리 숙청하였다.

다음세대인 자신의 넷째아들 세종의 막힘없는 치세를 자신의 손으로 열어준 것이다.

조선태종과 묘호가 같은 중국 당나라 태종 이세민은 당나라를 세운 고조 이천의 둘째아들이다.

조선태종처럼 당나라를 세우는데 지대한 공헌을 세웠다.

수나라2대황제 양광은 고구려 원정실패 후 정치에 손을 놓고 강도에서 방탕한 일상에 탐닉하자 당나라 전국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이 때 이세민은 부친을 거의 협박하다시피 설득하여 반란에 가담하여 당을 건국하였다.

이세민의 부친 고조는 양광의 이종사촌형이다.

이세민은 당 건국후 천책상장이 되어 아직 평정되지 않은 반란세력들을 진압하며 자신의 권력과 영향력을 더욱더 확장시켜 나갔다.

그러던 중 626년 현무문에서 동복형제 건성,원길을 현무문에서 때려죽였다.

이세민은 말을 타고 달리며 활을 쏘아 친형 건성의 가슴에 명중시켰다고 한다.

이는 조선태종 측의 이거이 등이 방석형제를 죽인것과는 달리 자기 손으로 직접 존속살해를 한 것이다.

그리고 죽인 동복아우 원길의 처 양씨를 제수씨가 아닌 부인으로 삼았다.

현무문의 변 후 이세민은 부친 이천을 강제 퇴위시켜 상왕으로 만들어 유폐시키고 이른 바 정관의 치세를 열었다.

군주가 된 이세민은 각종 정치쇼를 벌이며 성군 코스프레를 하였다.

일설에는 세민이 부친을 죽였다고 하는데 부친을 안죽였다는 일설을 가진 수나라 양광과 대조해보면 그 나물에 그 밥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단 세민은 성공한 패륜아요, 양광은 실패한 패륜아일 따름이다.

양광의 사위면서 오촌조카인 세민은 양광과 마찬가지로 인생말년의 순간까지 고구려에 대한 야욕과 집착은 흡사한 면을 가지고 있다.

조선태종과 당태종을 비슷한 군주로 보는 시각이 있다.

그러나 세민의 패륜성에 비하면 조선태종은 차마 성군이라 할 수

없을지언정 가히 명군중의 명군이라 할만 하다.

태종실록에 의하면 자신을 닮은 장자 양념대군에 대한 부정어린 눈물을 흘렸다는 기사가 있다.

이 기록에서 공사구분의 갈등에서 고뇌하는 그를 엿볼 수 있다.

또 오늘내일하며 숨 헐떡이는 덕안공작 이방의를 자리에 일으켜 함께 눈물흘리고 춤추는 뜨거운 형제애를 보인 태종이방원은 실로 인간적인 군주라고 할수 있다.

이복동생들, 외척과 공신을 숙청하였다 하여 잔혹한 일면을 가진 군주라고 조선태종을 평가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문제의 소지를 가진 강자들에게 강한 태도를 취한 것이다.

그의 손자 수양대군 이수지가 자신의 동복형제들, 어린조카, 7촌 숙부를 죽이고 왕좌를 차지한 것에 비하면 비교적 온화하다 할 수 있겠다.

다음 세대를 위하여 스스로 악역을 맡았다거나 18년동안 호랑이 등을 탔었다며 자평한 태종의 공적이 어찌 가볍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의녀제도시행, 신문고 실시, 신분에 구애받지 않는 인재등용 등등 태종의 업적에는 당태종의 정치적 퍼포먼스보다는 '사람'을 중시하는 측면이 있었다.

 



기사등록 : 김영숙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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