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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돈하 역사칼럼 "우당 육형제"

이순락기자 0 14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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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 재야 청년사학자 도경당 류돈하 ~


생각건대 왕산 허위, 석주 이상룡, 우당 이회영의 세 집안은 대한민국 독립운동 3대 명문가라 할 수 있다. 대개 사람은 누구나 부귀와 공명을 귀하게 여기고 가난은 싫어한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바라고 원하는 것들을 이 세 집안의 사람들은 거부하였다. 세 집안의 구성원들을 비롯하여 우리 독립운동가의 삶이 그리하겠지만 특히 이 세집안 사람들은 풍찬노숙과 가난을 마다하지 않았다. 광복의 길이 형극과 죽음의 길이라 하여도 그들은 오직 헌신하며 굳세게 걸어갔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 위대한 여정이 도달한 점이 바로 조국의 광복이었다. 세 집안 가운데 하나인 우당 이회영은 경술국치를 당하자 육형제가 모두 서간도로 이주하였다. 1945년 해방이 되자 형제 중 환국한 사람은 오직 다섯째 성재 이시영 선생뿐이다.

 

우리나라 항일광복운동의 요람이라 할 수 있는 신흥무관학교의 설립자 우당 이회영(李會榮1867~1932)은 아나키스트 계열의 항일광복지사로 백사 이항복의 10대손이다. 우당은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 성재 이시영(李始榮:1868~1953)의 친형이기도 하다. 우당 형제들의 아버지는 이조판서 이유승(李裕承:1835~1906) 공이다. 시호가 효정공인 이유승은 이건영,이석영,이철영,이회영,이시영,이호영 등 아들을 여섯명 두었다.

 

경주이씨 상서공파 백사공세가인 우당의 집안은 삼한갑족이면서 백사 이항복이래 대대로 고관대작을 지낸 최고의 명문가였다. 그리고 나라에서 몇안되는 대부호였다. 귀족중에 귀족, 양반 중에 양반이면서 부호중에 부호라 할만 하다. 그러함에도 우당과 그의 형제들은 경술년 나라가 병탄당하자 현재 싯가 2,3조억이나 되는 모든 재산을 급처분하였다. 안동 임청각의 석주 이상룡 선생처럼 60여명의 식솔들과 함께 서간도(길림성 류하현 삼원포)로 망명하였다. 우당일가는 배를 타고 두만강을 건너 서간도로 향할때 뱃사공에게 원래의 요금 두배를 주면서 "왜경, 헌병들에게 쫓기는 광복투사가 헤엄쳐서 강을 건너려거든 나를 생각하고 배에 태워 건너게 해주시오"라고 당부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이후 안동에서 올라온 고성이씨 임청각 종손 석주 이상룡 선생과 함께 경학사를 설립하고 부설교육기간으로 신흥강습소를 세우는데 이 신흥강습소가 바로 항일광복운동의 요람지 신흥무관학교의 전신이다.

 

이들이 왜인들의 식민통치에 조금이라도 모른척하거나 묵인했다면 1등귀족의 위치를 유지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당선생의 집안은 대대로 국은을 받은 집안이라 여기며 터럭만큼도 왜적들의 병탄을 용납하지 않았다. 삼한갑족의 영예를 누린만큼 국은에 보답하겠다는 양심을 지켜 서간도로 이주하여 구국광복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는 사회지도층으로서의 책무와 의무를 다한 것이다. 머나먼 고향땅을 떠나 항일광복운동 전선에 나선 우당과 그의 형제들은 빼앗긴 나라를 되찾고자 모든 것을 바쳤다. 우당 육형제의 활동상은 대략 다음과 같다.

 

6형제 중 장자 이건영(李健榮1853~1940)88세의 노령으로 결국 중국 땅에서 별세하였다. 둘째 이석영(李石榮 1855~1934)13촌 아재인 영의정 귤산 이유원의 양자가 되어 막대한 재산을 상속받았다. 이 상속받은 재산들이 신흥학교무관 설립에 사용되었다. 하지만 정작 나라의 광복을 위해 기꺼이 재산을 헌납한 이석영은 80세의 노령으로 빈민가를 떠돌다 먹을 것이 없어 굶어 죽어야만 했다.

 

셋째 이철영(李哲榮 1863~1925)은 훗날 신흥무관학교의 교장을 역임했던 인물로 중국 땅에서 병사하였다.

 

넷째 이회영은 6형제가 서간도로 망명하는 계획을 모두 주도하였다.그는 일찍이 1896년에 경기도 개성부 풍덕일대에서 인삼을 재배하는 삼포농장蔘圃農場을 경영하면서 그 수익금을 항일의병들의 자금으로 사용하였다. 한때 고종에게 탁지부 판임을 제수받았으나 우당은 거절하고 벼슬에 취임하지 않았다. 우당은 을사늑약 이후 국권이 상실될 것을 예견하였다. 그리하여 해외에 군사와 교육을 담당할 광복기지를 건설하기 위한 계획을 세워 헤이그밀사로 유명한 이상설,시당 여준,석오 이동녕과 함께 1906년 북간도의 용정촌에 서전서숙을 설립하였다.

 

을사늑약으로 마침내 일본에게 외교권이 박탈되고 국권병탄이 사실화되자 우당은 해외에 광복기지를 건설하는 것 외에도 여러모로 분주히 활동하였다. 특히 고종황제 퇴위의 발단이 된 헤이그밀사사건은 우당이 기획한 것으로 을사늑약의 무효와 일본의 강압적이고 교활한 만행들을 전세계에 폭로하고자 한데서 비롯되었다. 비밀결사조직인 신민회를 결성하기도 하였던 우당은 경술국치를 당한 후 결국 가족들을 이끌고 서간도로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를 세워 독립군들을 양성하였다.

 

우당은 경술국치 이전부터 유독 교육진흥에 관심이 많았다. 자라나는 민족의 젊은이들을 새로운 시대의 주역으로 이끌려고 했던 그의 노력은 전국 각지의 신식학교 설립에도 영향을 주었으며 그 결실은 신흥무관학교의 설립으로 이어졌다. 신흥무관학교에서 먹고 자며 공부한 생도들은 청산리대첩, 의열단 등 항일무장투쟁의 주역들이 되었다. 그 후 우당은 일본의 악랄한 탄압이 계속되자 고종황제의 서간도 망명을 계획하여 주도하였다. 그러나 고종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실패하고 만다. 19194월 중국 상해에서 임시정부가 세워질때 우당은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그러면서도 동생 이시영과 함께 참여하여 하나의 정부를 건설하려 했지만 임시정부 안에서 벌어지는 내분으로 인해 그는 북경으로 건너가 무정부주의자(아나키스트)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우당은 다물단, 항일구국연맹,흑색공포단 등의 조직을 결성하여 항일무장투쟁을 벌여나갔다. 백정기, 이강훈, 원심창, 정화암 등과 함께 한 흑색공포단 활동은 일본의 관공서를 폭파, 파괴하고 친일매국노들을 암살하여 숙청시키면서 왜적들의 간담을 서늘케 하였다. 또 중국국민당과의 교섭을 통해 중국 정부의 지원을 받아내는 약속을 하는 등 외교적인 노력도 아끼지 않았다.

 

그러던 중 일본은 만주로 진출하여 만주사변을 일으키고 청나라의 마지막 왕 애신각라 부의를 내세워 괴뢰정권 만주국을 수립하였다. 이로써 만주는 광복운동지사들에게 있어 굉장히 위험한 땅이 되어버렸다. 상황이 이러한데도 우당은 이에 굴하지 않고 만주행을 택해 광복활동의 폭을 넓히려 하였다. 주변사람들과 동지들이 극구 우당을 만류했으나 우당은 66세의 노구를 이끌고 상해에서 대련(大連)으로 향했다. 193211월의 일이었다.

 

그가 대련으로 온다는 첩보를 받은 일본경찰은 대련항구에서 기어이 그를 체포하였고 그를 일본 영사관 감옥에 수감시켜 혹독한 고문을 가했다. 우당은 끝내 옥사하고 말았다. 우당선생은 나라가 무너지고 인심이 흩어지던 혼란한 시기 속에서도 인의로써 일어나 외롭게 구국의 길을 걸으며 민족의 희망을 열었던 선비였다.

 

다섯째 성재 이시영은 조선의 마지막 영의정 도원 김홍집(金弘集:1842~1896.경주김씨로 임진왜란 당시 도원수를 지낸 좌의정 김명원의 9대손.대종교 2대교주 김교헌의 재종조부)의 사위이기도 하다. 성재 이시영은 17세의 어린 나이로 사마시에 합격하여 이듬해인 1886년 가주서로 관직에 출사하였다. 20세에는 세자익위사 익위가 되고 23세 되던 해에는 증광문과 병과로 급제하여 26살때에는 부승지에 오른 수재였다. 이어서 우승지, 참의내무부사, 궁내부 수석참의, 외부 교섭국장 등을 지내고 1906년 평안남도 관찰사를 거쳐 한성 재판소장, 법부 민사국장, 고등법원 판사에 이르렀다. 경술국치 이후 조선총독부에서 그를 불렀으나 응하지 않았고 형 우당과 함께 서간도로 망명하 여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는데 참여하였다.

 

이후, 성재는 상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참여하여 법무총장, 재무총장 등을 지내고 이후부터 해방때까지 백범과 더불어 임시정부를 사수하는 몇안되는 인물이 되었다. 1945년 해방 후 6형제 중 유일하게 살아남아 귀국하여 대한독립촉성회의 위원장이 되어 민족.민주진영을 영도하였고 초대 정.부통령 선거에서 부통령에 당선된 후 1948년 정부 수립 후 초대 부통령에 취임하였다. 그러나 그는 6.25 발발 후 전쟁의 와중에 국민방위군사태, 거창양민학살 사건 등을 지켜보면서 대통령 이승만의 비민주적인 독재통치에 반대하게 되었고 결국 195159일 사퇴하게 된다.

 

나이 90을 바라보는 노령에도 불구하고 반독재운동을 벌이다가 1953419"조국의 완전통일을 보지 못하고 눈을 감게 되니 통한스럽다" 는 유언을 남기고 별세하고 만다. 그는 해방이 되고 귀국을 한 후에 신흥무관학교의 정신을 이어 19472월 성재학원을 설립하게 되는데 이 성재학원이 신흥전문학관으로 개칭하게 되고 훗날에 경희대학교로 발전하였다.

 

여섯째 이호영(李護榮 1875~1933)은 북경에서 광복운동을 하던 중 1933년 이후로 소식이 끊겼는데 아마 왜적들에 의해 몰살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전술한 바대로 6형제 중 해방 후 유일하게 살아서 귀국한 사람은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 성재 이시영 뿐이었다. 우당과 그 형제들은 삼한갑족의 명문가 자제들로 국권이 병탄당하자 나라의 광복을 위해 모든 기득권을 포기하였다. ‘모든 기득권을 버리고 모든 것을 바쳐 죽음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는 사회 지도자의 의무와 책무를 논할 때 우당 육형제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이다. 이건영,이석영,이철영,이회영,이시영,이호영 이들 6형제의 행적은 위대한 역사이다. 세계 어디에서 그 유래를 찾을 수 있겠는가?


[참고문헌]

조선왕조실록

사마방목

석주유고

김삼웅 저 이회영평전

김희곤 저 안동사람들의 항일투쟁

서중석 저 신흥무관학교와 망명자들

이덕일 저 이회영과 젊은 그들


~ 도경당 류돈하 쓰다 ~

기사등록 : 이순락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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