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돈하 역사 칼럼 : 자주독립국 2
~ 필자, 재야 사학자 도경당 류돈하 ~~ 필자, 재야 사학자 도경당 류돈하 ~
3. 병자호란 이후의 조선
1636년 12월 청나라 황제 애신각라 황태극은 대군을 동원하여 조선으로 쳐들어왔다.이것이 병자호란이다.
숙부 광해군을 쫓아내고 왕위를 차지한 능양군 이종은 남한산성에서 46일간의 항전 끝에 청나라에게 항복하였다. 조선의 항복을 받은 황태극은 조선의 소현세자와 왕자인 봉림대군 및 여러 대신들을 인질로 삼아 데리고 갔다. 또 수많은 조선의 백성들을 포로로 끌고 가서 노예로 부렸다.
그 중에 30여 년 만에 탈출한 안추원이란 사람이 있었다.그는 1663년 탈출하여 고국의 품안으로 돌아왔다.병자호란 직후 조선은 청나라에서 조선인 포로가 도망하여 돌아오면 이를 청나라에 보고하도록 협정을 맺었지만 조선의 임금 현종은 안추원을 측은히 여겨 숨겨주었다.
그러나 40살의 나이로 되돌아온 안추원은 이미 그 부모가 모두 별세한 상황이었고, 먹고 살만한 형편역시 되지 않았다.
30여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왔으나 살아갈 방도가 없었던 안추원은 1666년 1월 결국 다시 청나라로 올라갔으나 만주 봉황성의 수장에게 그만 잡히고 만다. 안추원의 귀환을 숨긴 조선정부는 청나라에 의해 추궁 당하였다.
청황제 강희제(애신각라 현엽)는 제독 이일선과 뇌호 등을 조선에 칙사로 보내 조선에서 대체 누가 숨겨주었는지 진상을 조사하도록 명하였다.
이일선 일행은 1666년 6월, 안추원을 체포하여 조선으로 들어왔다. 조선정부는 없는 살림에 1만 6천금이라는 막대한 뇌물을 바쳐 안추원의 귀국 사건을 해결하려 했다.
그러나 청나라는 이 사건을 기화로 조선정부를 길들이려 하였다. 당시 청나라 내부에서는 명나라가 망한지 20년이 흘렀으나 아직까지 반청복명 운동이 계속되고 있었다.
남명이 무너진 후에도 정성공은 본거지를 지금의 대만으로 옮겨 정씨왕국을 수립하였다. 정씨왕국 수립 후 1년 만에 정성공이 세상을 떠나자 청나라 정부는 그의 아들 정경에게 항복하고 변발할 것을 촉구하였다.
그러자 정경은 청나라정부에게 항복하더라도 조공을 바치는 선에서 조선과 같이 고유의 풍속은 유지시켜 달라고 요청했으나 청나라는 이를 거절하였다.
이러한 까닭으로 청은 혹시 조선이 정씨왕국과 결탁하지 않을까 염려하여 조선을 압박해 조선의 저항의식을 누그뜨리려 하였다.
그리하여 청나라는 정태화, 홍명하, 허적 등의 대신들을 사율(死律)로 다스리려 하였다. 이에 조선국왕 현종은 청 칙사 이일선, 뇌호 등을 만난 자리에서 강희제 현엽이 위치한 북쪽을 향해 무릎을 꿇고 "이것은 나의 죄이니, 황제께 죄를 청하지 않을 수 있겠소."라고 하였다.
현종이 이 사건을 스스로 책임지려 하였다. 청나라 사신은 이러한 현종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현종에게 "조선국왕은 어떤 법률을 적용해야 할지 분명히 분부해 주십시오."라며 독촉하였고 현종은 칙사의 처분에 맡기겠다고 하였다.
그러자 청 사신은 현종의 처벌형량을 정배(定配:귀양)로 정해 주었다. 이 사건의 결론은 현종이 고려 충선왕처럼 유배당하는 일로는 커지지 않았다. 그러나 현종은 이 일로 인해 청나라 황제 현엽에게 벌금을 물리게 되었다.
'현종실록'에 현종의 벌금 액수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어찌 되었든 조선은 이 사건으로 청나라에게 또 한 번의 굴욕을 당한 것이다.
사론(私論) : 나라의 힘이 약하면 강대국의 속국이 됨은 물론이거니와, 나라의 가엾은 백성마저 지켜 줄 수 없다는 것을 안추원 귀국 사건을 통해 알 수 있다.
우리나라는 병자호란 직후 청나라의 속국이 되었다가 서세동점의 시기에는 서구열강들의 도전을 받아왔었다. 그러다 1905년 러일전쟁 직후 일본제국주의에 굴복당해 외교권을 강탈당했고 통감부가 설치되는 상황을 맞이하여야 했다.
1910년에는 마지막 남은 국권마저 빼앗겨야 했다. 1945년 8월 세계 제 2차 대전에서 일본이 패망함에 따라 간신히 해방되었다.
그러나 해방된 민족은 둘로 갈라져 분단이 되어버렸다. 대저 무엇이 자주독립국의 조건이 되는 것이겠는가. 그것은 우리민족이 강대국에 대하여 때때로 베짱 한번 부리며 스스로 우리의 운명을 판단하고 결정짓는 것에서부터 자주독립국으로 출발하는 것이라 여긴다.
열거한 세 가지 사례들이 우리에게 어떠한 길을 지향해야 할지 시사해주는 점이 분명 있을 것이다.
도경당 류돈하 쓰다
기사등록 : 이순락기자 / gbmnews@naver.com
# [경북미디어뉴스]의 모든 기사와 사진은 저작권법에 따라 무단전재시 저작권료를 청구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