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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경당 류돈하 칼럼, "왕산의 어제와 오늘을 생각하다"

이순락기자 0 84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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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 도경당 류돈하(재야 청년사학자) ~


선양[宣揚]과 진작[振作]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역사공부의 목적이기도 하다.

나라를 위해 공을 세운 이들의 공적을 선양함으로서 세상에 드러내어 그 정신과 기상을 후세의 사람들이 본받는다는 것은 진실로 아름다운 일이다. 나라가 위태로울때 분연히 일어나 그 비극의 현장에서 위급을 구하는데 모든 것을 헌신한 이들의 선양사업을 통해 다시는 비극을 되풀하지 말자는 징비의 정신도 일깨울 수 있다.


최근의 경북 구미시에서는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나고 있다.
구미시장이 바뀌면서 '왕산광장'과 누각 '왕산루'의 명칭이 해당 지역의 이름을 따서
'산동광장', '산동루'로 변경되었다 한다.

왕산은 대한제국(구한말)에 왜국의 을사늑약 등 국권침탈에 맞서 국권의 회복을 위해
의병을 일으켜 '13도 창의군'으로 서울진공작전을 펼친 허위 선생의 호이다.
허위 선생의 구국활동과 그 애국심을 기념하기 위해 광장과 누각에 이름을 붙인 것이다.

안동에는 석주로, 육사로가 있다.
또 서울에는 충무로, 을지로가 있으며, 대구에는 망우당 공원이 있다.
공통점이 무엇인가?
모두 나라를 위해 살다간 역사인물들의 호나 시호,성씨를 붙인 것이다.

왕산광장과 왕산루에 대해 장세용 구미시장은 '인물기념사업을 태생지 중심으로 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그런데 문제는 장세용 시장이 이러한 입장을 가지게 된 것은 장시장의 본관이 인동장씨임에 따라
인동장씨 문중의 의견을 따랐다고 하는 것에 있다.

인동장씨가 배출한 독립운동가 장진홍 의사의 선양사업을 위해 장시장이 왕산 허위 선생의 인동장씨 문중의 반대를 수렴했다는 여론이 있다.

왕산광장과 왕산루의 이름이 바뀌었는데도 구미시는 이 사실을 왕산의 친손자 허경성 선생에게
일언반구 의견도 묻지 않았다고 한다.


얼마전 김기훈 박사의 칼럼에 따르면 지난 2019년 4월 2일 왕산선생의 탄생일에 왕산기념관 왕산 왕산묘소 옆 사당에서 '왕산선생 위패봉안 및 낙성고유제'를 모셨다고 한다.

김기훈 박사의 글을 인용하자면 다음과 같다.
"구미시장과 왕산 기념사업회 회원 등 고급승용차를 타고 온 20여명이 참석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행사를 추진한다면 구미시는 대구 산격동에 살고 계시는 93세의 왕산 허위의 長손자 허경성 옹에게 사전에 정중히 연락을 하고, 구미시 측에서 차량을 준비하여 모시러 가는 것이 행사를 준비하는 구미시 측의 도리고 예의일 것이다. 그러나 93세의 늙은 노인이 직접 열차를 타고 왔다.

할아버지 태어나신 날에 왕산선생 위패봉안 및 낙성고유제를 한다는 소식에 93세의 노인이 밤잠을 못 이루고 기쁜 마음으로 구미시 왕산 기념관에 찾아오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구미시장과 구미시 공무원들 그리고 왕산기념사업회 관계자들은 허경성 옹에게 연세가 많은데 교통편 어떻게 오셨습니까? 묻는 사람 하나 없었고, 어떠한 교통편으로 가십니까? 그리고 건강과 삶은 어떻습니까? 구미시 관계자와 왕산기념사업회 관계자 중 묻는 사람 하나 없었다고 한다. 평소에 왕산가문에 대해 연구하고 관심을 가지고 있던 몇몇 사람이 직접 대구 자택까지 모셔다 드렸다고 한다.

구미시장은 관복을 입고 낙성고유제에서 제일 먼저 제례를 올리는 초헌관으로 예를 올리는 모습이 신문 기사에 나왔었다. 낙성고유제에 참석한 구미시장은 제례를 올리는 관복을 입고, 왕산 기념사업회관계자들은 도포와 두루마기를 입었다. 적어도 행사를 진행하는 구미시와 관계자들이 사전에 생각이 있었다면 허경성 옹의 관복이나 도포를 마련하는 것이 상식이 아닐까 한다. 이렇게 하는 것이 진정한 왕산 허위선생과 왕산가문에 대한 예의일 것이다. 더구나 제일 먼저 제례를 올리는 초헌관은 당연히 허경성 옹이 했어야 모양새가 맞을 것이다."


왕산 허위 선생은 과연 누구인가.
대한제국 당시만 하더라도 종2품 가선대부 의정부 참찬 등 재상의 반열에 오른 분이 바로
왕산이다.
을사늑약에 이어 고종황제 강제퇴위, 정미7조약, 대한제국 군대 해산 등 일본에게 국권을 강탈당하는 국란이 연이어 일어나자 꼴깍꼴깍 숨어넘어가는 나라를 구하기 위해 지체높은 지위를 버리고 '13도 창의군' 군사장, 총대장으로 전국의 의병을 지휘하였던 분이 바로 왕산이다.

왕산의 창의에 이완용 같은 매국노는 매우 당황하여 1907년 10월 15일, 순종황제에게 왕산의 삭탈관작과 체포 및 처벌을 요구하였다.
이미 일본과 매국노의 수중에 장악된 제국 정부는 아무런 방책이 없어 그대로 허락하여 체포명령을 내리고 만다.

왕산은 활발한 의병활동을 벌이다 1908년 6월 11일 일본헌병에 의해 체포를 당해 여러 심문을 받은 끝에 9월 18일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리고 10월 21일 형이 집행되어 향년 54세로 순국하였다.

왕산을 심문하였던 일본 주차군헌병사령관 아까시 겐지로(明石元二郞)는 그의 인품과 식견에 탄복을 금치 못했고, 이등박문을 척살한 의사 안중근은 왕산을 일컫어 고관 중의 충신이라 평하였다.

한 때 나라의 고관을 지낸 선비를 이렇게 서둘러 그 목숨을 빼앗은 것은 그만큼 일본이 왕산 등 선비 유림들의 의병활동이 대한제국 사회에 미치는 막강한 파급력을 두려워 하고 있다는 반증이라고 할 수 있다.

왕산의 순국 후 왕산의 가족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졌다.
한마디로 풍비박산이 된 것이다.
왕산의 장남 허형은 연해주로 피신하였고 그곳에서 광복운동을 계속 벌였다.
그러다 1937년 이후 소련 스탈린 정권의 강제이주로 머나먼 카자흐스탄으로 옮겨져 감옥에서 순국하였다.

왕산의 집에는 총 14분의 독립유공자가 배출되었다.
왕산의 아들들이 뿔뿔이 흩어져 산 까닭에 그 아들들의 자녀들은 서로 사촌의 얼굴도 오랫동안 모르며 각자 삶을 이어 나갔다.


친일 매국을 하면 3대가 떵떵거리며, 광복 구국을 하면 3대가 망한다고 했던가.

왕산 허위의 집안은 물론이요, 석주 이상룡 선생, 향산 이만도 선생, 백하 김대락 선생, 우당 이회영 선생 집안의 사정도 전혀 다르지 않다.
(대한민국의 국부 석주 이상룡 선생을 언급해서 하나 생각이 떠오른다.
석주의 손부 허은 부인은 육사 이원록 선생의 어머니 허길 부인의 질녀이고
허길은 왕산의 종질녀이자 허은은 왕산의 재종손녀가 되는데 모두 김해허씨 허조 선생의 자손들이다.)

학문이 끊이지 않고 벼슬이 끊이지 않았으며 부귀를 가졌음에도 이 분들은 그야말로
나라와 민족을 위해 모든 것을 다 바쳤다.

무엇보다 당시의 기득권층으로서 생명과 재산을 모두 저버린 채 오직 구국일념을 다하여 광복운동의 행로에 뛰어든 노블리스 오블리제 정신은 고금에 매우 드문 일이다.


더욱이 왕산의 손자 허경성 선생과 그 가족들은 할아버지의 영원불멸한 정신을 기리기 위해
평생 짜장면 판 돈과 빚을 내어 마련한 8억원을 아무 조건없이 구미시에 기부하였다.

그동안 구미시는 왜왕에게 충성맹세를 하며 혈서까지 쓴 일본장교 출신 대통령 다까끼 마사오의 고향이란 이유로 다까끼 마사오(박정희)의 고장이란 불명예를 얻었다.

다행히 하늘이 무심치 않아 박정희와 반대되는 정당 더불어민주당 소속 장세용 시장이 시장으로
취임하였다.

시대의 소명을 잇기 위해 장세용 시장은 구미를 박정희의 고장이 아닌 왕산 허위의 고장으로
역사인식을 새롭게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왕산광장, 왕산루의 이름을 변경해 문중정치를 한다는 오해를 불러 일으키고 있다.

급기야 왕산의 친손자 허경성 선생께서 93세의 노구를 이끌고 1인 시위를 해야 하는 처참한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대구 조선은행 폭파사건을 일으킨 장진홍 선생 역시 민족이 자랑할 만한 위대한 의사이다.
의사의 의거에 연루되어 왕산의 외재종손자 육사 이원록 선생 역시 옥살이를 하였다.
서로 얽히고 설켜 있는 광복지사들의 인연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
그것을 잘 연계한다면 여러 기념사업은 물론이요, 역사교육을 통해 더 넓은 인식과 의식을 고취시킬 수 있는 것이다.

백세에 가까운 노인이 거리에 나서서 1인 시위를 한다는 것이 과연 상식적인가?
그것도 나라를 위해 목숨바친 독립유공자의 유족이 거리에 나서서 억울함을 호소하게 하는 것이
과연 도리에 온당한 일인가?

장세용 시장은 제발 무엇이 나라와 미래를 위한 것인지를 깊게 생각하여야 한다.
오히려 박정희를 따랐던 전 시장보다 못하다면 그 비난을 어찌 감당 할 것이며,
그 부끄럼은 대저 누구의 몫이겠는가.

 "국가의 부끄러움과 백성의 치욕이 이에 이르렀으니 죽지 않고 어이 하리오, 아버지 장례도 치르지 못하고 나라의 주권도 회복하지 못했으니, 불충불효한 몸이 죽은들 어찌 눈을 감으리오” 라는
왕산의 마지막 유시가 오늘에 이르러 더욱 슬프다.


민국 101년 양력 9월 20일
인동장씨 연복군 해주목사 장말손 후손의 증손자
류돈하가 쓰다.




기사등록 : 이순락기자 / gbmnew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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