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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돈하 칼럼, "1909년 10월 26일"

이순락기자 0 8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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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 재야청년사학자 도경당 류돈하 ~


1909년 대한의군참모중장 안중근 의사는 하얼빈에서 동양평화의 원흉 이등박문을 브라우닝 M-1900로 쏘아 사살하였다.

이등박문은 일본 죠슈번 출신으로 명치유신을 주도하여 일본의 왕정복고를 이루는데 공을 세웠다.
무엇보다 박문은 일본 제실제도자료를 책임편찬하여 일본 왕가의 위치를 굳건히 정립하였다....
일본 명치유신의 주역이자 총리대신으로서의 박문은 명치헌법의 기초를 마련하였고 청일전쟁, 러일전쟁의 승리 이후 일본의 국제적 위상을 더욱 확대해 나갔다.


오늘의 일본이 있게 된 것은 실로 박문의 공이 없지 않다.
그러나 응칠 안중근 의사가 그를 처단한 것은 그가 청일전쟁, 러일전쟁 이후 정한론을 현실화시키며 대한제국의 주권을 강탈하여
 동양의 평화를 파괴하였기 때문이다.


대한제국을 정복하는 것은 물론 나아가 대한제국을 발판삼아 무력으로서 대륙으로 진출하여 동양 전체를 집어삼키려 한 박문의 죄는 심히 큰 것이다.
을사늑약 당시 고종황제와 그 대신들을 무력으로 협박하여 강요한 끝에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탈한 이가 누구인가.

바로 박문이다.
총독부의 전신 통감부의 초대 통감이 누구이던가.
바로 박문이다.

안중근 의사의 의거는 오직 나라의 원한을 풀기 위해서였다.
의거 직후, 조선의 식자들과 중국 등의 식자들은 안의사의 의거 결행을 형가와 가섭에 비유하였고 그 의기는 남송의 충신 문산 문천상에 비유하였다.

백암 박은식 선생은 안의사가 문천상보다 더 위대하고 수감기간 중에도 이익을 구하지 않아 인(仁)을 이룬 세계위인이라 평하였다.


근대중국의 철학자 양계초는 박문을 안자에 견주며 높이 평가하면서도 자신은 안의사와 같이 무덤을 나란히 하고 싶다 하였다.
형가는 연나라의 종사를 위해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진시황 영정을 죽이기 위하여 차가운 역수를 건넜다.
그러나 성공치 못했다.


20세기의 대한인 안중근은 한국인들과 중국인들의 평가대로 성공한 형가가 되었다.
백암박선생은 안중근을 형가에 비유하는 것은 진실로 억울한 일이라 하였다.
비록 나라는 예정된대로 수순을 밟아 결국 병탄당했지만 안의사는 의거는 분명 만국만민을 감동시키고 천지를 진동케 하였다.


1909년 10월 26일
1979년 10월 26일
 공교롭게도 70년 간격을 두고 같은 날짜에 일본 왜왕에게 충성한 자와 충성을 맹세했던 자가 역사의 이름으로 처단되었다.
세인들은 이 날을 두고 탕탕절이라 이름붙여 기념한다.
어찌 만국과 만민을 해치고 평화를 파괴한 자들이 성공 할 수 있겠는가.


(안중근 의사가 논한 이등박문의 15가지 죄)

1. 명성황후를 시해한 죄
2. 1905년 11월 한국을 일본의 보호국으로 만든 죄
3. 1907년 정미7조약을 강제로 맺게 한 죄
4. 고종황제를 폐위시킨 죄
5. 군대를 해산시킨 죄
6. 무고한 한국인들을 학살한 죄
7. 한국인의 권리를 박탈한 죄
8. 한국의 교과서를 불태운 죄
9. 한국인들의 유학을 금지시킨 죄
10. 제일은행지폐를 강제로 사용한 죄
11. 한국이 300만파운드의 빚을 지게 한 죄
12. 동양의 평화를 파괴한 죄
13. 한국에 대한 일본의 보호정책을 호도한 죄
14. 일본 메이지왕의 아버지인 고메이 왕을 죽인죄
15. 일본과 세계를 속인 죄 등이다.


~ 도경당 류돈하 쓰다 ~


 



기사등록 : 이순락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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