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돈하 역사칼럼, "세민이가 왜 거기에?"
얼마 전, 벗과 더불어 대구 근대로골목 주변을 걸었다.그러다 중국화교소학교를 발견하게 되었다.소학교로 진입로에 당나라 제 2대 국왕 당태종 이세민이 그려진 벽화를 보게 된 것이다. 태종 이세민의 전신 초상화를 본 순간 하마터면 "세민이 니가 여기서 왜 나와?" 라고 할뻔 한 것은 진실로 실화였다. 그 옆에는 명나라 태조 홍무왕 주원장씨의 앉은 모습이 있었고 그 맞은편에는 노나라사람이자 유교의 비조인 공중니와 성씨가 이씨라는 도교의 비조 노자가 나란히 그려져 있었다. 또 그 옆으로 맹자, 진나라 조영정, 촉한의 조자룡도 마주 그려져 있었다.
한국땅에 사는 화교 어린이들을 위한 학교임에도 벽화에 이처럼 그려진 인물들은 우리들에게도 매우 친숙함은 물론이거니와 존경받고 있는 인물들이다.
특히 늠름하게 황룡포를 입고 있는 세민이를 보니 자연스레 우리민족의 영웅 연개소문이 떠올랐다.
sbs대하사극 연개소문, kbs대하사극 대조영에서도 연개소문과 세민이를 라이벌로 묘사하였다.
드라마 연개소문에서는 극 초반에 연개소문이 중원으로 건너가서 이세민과 친구가 되는 이야기를 전개했는데 이는 민간에 전해져 오는 소설 갓쉰동전, 규염객전을 차용한 것이다.
연개소문과 국운을 걸고 격전을 벌인 당태종 이세민은 당나라 건국과 번영을 이끌며 중국역사상 가장 위대한 성군으로 추앙받고 있는 군주이기도 하다.
이는 정관의 치로 설명된다.
고구려 정벌에 국력을 기울이던 포악한 폭군 수 2대 임금 양광은 618년 그 이종사촌 이연, 이세민 부자에 의해 수나라 사직을 뺴앗겼다.
이연은 차남 이세민의 공훈에 힘입어 당나라를 세우게 되었다.
예컨대 수와 당을 '수당시대'로 묶어 말하듯이 당나라는 수의 뒤를 이어 통일된 중원을 지배하였고 지배층 구성원과 문화가 동일하였다.
수 초대국왕 양견은 북주 우문연의 외조부로서 국권을 장악한 후 외손자의 왕위를 찬탈하여 수를 세웠듯 이연은 이종사촌의 나라를 무너뜨리고 당을 세운 것이다.
수나라가 이룩한 통일왕조를 계승한 당나라는 계속 주변국들을 정벌하며 팽창정책을 펼쳐나갔다.
돌궐은 물론이거니와 고창국까지 멸망시킨 당나라 군주 이세민은 수양제처럼 오직 동북아의 패자 고구려를 정벌하지 못해 일세의 사업으로 지정하였다.
이세민의 아버지 이연의 시절때는 고구려와 당과의 사이가 그런대로 비교적 평화로웠다 할수 있다.
그러나 이세민이 626년 현무문의 난을 일으킨 후 아버지를 겁박해 황위에 오르고서는 사정이 달라졌다.
당의 고구려 침략은 이미 예정되어 있었고 기정사실화된 것이었다.
이러한 정세 가운데 고구려에서는 당에 굴욕적인 자세를 취하며 그저 정권유지에만 힘썼던 영류왕이 동부대인(혹은 서부대인) 연개소문에 축출되는 정변이 일어났다.
삼국사기 등에 따르면 이 때 연개소문은 왕과 더불어 그를 따르는 100여명의 대신들을 죽였다고 한다.
삼국사기의 편찬 총책임자 김부식은 당서와 같은 중국측 사서들을 그대로 인용하여 연개소문을 임금을 죽인 역신으로 분류하여 매우 부정적으로 서술하였다. 삼국유사의 저자 일연스님도 김부식과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이와는 달리 단재 신채호는 다음과 같이 연개소문에 대해 평가하였다.
'연개소문은 고구려 전통의 호족공화(豪族共和)라는 구제도를 타파하고 정권을 통일했으며, 장수왕 이래 철석같이 굳어온 서수남진(西守南進) 정책을 변경해
남수서진(南守西進) 정책을 세웠고 이를 위해 국왕 이하 대신 호족 수백 명을 살해해 자신의 독무대를 만들고 당 태종을 격파해 중국 대륙을 공격했으니,
그 선악 여부는 별개로 하더라도 당시 고구려뿐 아니라 동아시아 전쟁사 속에 유일한 중심인물이었다.'
또 단재 신채호는 조선상고사, 독사신론을 통해 연개소문을 일컫어 4천년 역사상 최고의 영웅이라 평가하였다.
우리 사서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이 중국측 사서를 그대로 인용하여 중국사서와 더불어 온통 연개소문을 흉악하고 잔인한 역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연개소문은 흉포무도하여 늘 몸에 칼 다섯자루를 패용하고 말에 오를때 사람을 엎드리게 하여 그 등을 밟고 말을 탔으며, 사람들이 감히 그를 못볼 정도로 두려워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연개소문이 그저 지독한 악인에 불과한가?
저주에 가까울 정도로 연개소문을 부정적으로 기술하는 반면, 그 적수 이세민은 적재적소에 인재들을 등용하고 정관의 치로 당나라의 태평성대를 구가한 위대한 성군으로 추켜세워졌다.
연개소문에 비해 도덕적으로 완벽할 것 같은 이세민이 고구려를 침략할 당시 내세운 명분은 대략 세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1. 연개소문은 신하로서 왕을 죽이고 친당적인 100여명이나 되는 대신, 귀족들을 잔인무도하게 죽였다.
2. 당나라의 뜻을 위반하며 복속하지 않고 당나라의 속방 신라를 괴롭혔다.
3. 고구려를 침략하다 원귀가 된 수나라 장병들의 복수를 위해서이다.
`
결론부터 논하자면 구당서, 신당서, 정관정요에 기술된 것처럼 당태종 이세민은 그렇게 도덕적으로 완벽한 군주는 아니었다.
조선태종 이방원과 달리 현무문에서 친형 이원성과 친아우 이원길을 직접 격살하였고 이원길의 처 양씨 즉 제수씨를 취하여 아내로 삼아 자식을 보기까지 했다.
또 아버지 이천을 겁박하여 왕위를 찬탈하다시피 하여 황위에 올랐다.
이로써 본다면 이세민은 5촌아재이자 장인어른인 미치광이 군주 양광과 다를 바 없다.
당대의 명신 위징이 그토록 고구려정벌을 만류했음에도 고구려에 유독 집착하여 고구려 정벌에 매진한 것까지 말이다.
다만 휘하의 부하들을 잘 관리하여 그들의 부귀영화를 보장해준 것이 성군이라면 성군일 수 있겠다.
무리한 전쟁을 일으켜 생민들을 사지로 내몰며 괴롭힌 군주가
메뚜기떼 창궐에 백성들이 고통당한다고 하자 메뚜기를 입에 삼켜 먹었다는 자치통감의 이세민 관련기사는 왜 그리 가식적인지 모르겠다.
畿內有蝗。辛卯,上入苑中,見蝗,掇數枚,祝之曰:「民以谷為命,而汝食之,寧食吾之肺腸。」 舉手欲吞之,左右諫曰:「惡物或成疾。」上曰:「朕為民受災,何疾之避!」遂吞之。是歲,蝗不為災。
(수도부근에 메뚜기 떼가 나타났다.
이달 신묘일 황상 태종이 금원으로 들어갔다가 메뚜기를 보고는 몇 마리 잡아 저주하였다.태종은 “백성은 곡식을 목숨으로 여기지만 네 놈들이 그걸 먹어치우는구나. 차라리 내 폐장을 먹을지어다” 라고 하며 한 손을 들어 그것을 삼키려 하니 좌우 신하들이 간했다. "더러운 요물이라 몸에 탈이 날까 두렵습니다”. 태종이 말하기를 “짐은 백성을 위해서는 재앙도 마다 않으리니 어찌 질병을 피하겠는가?” 라고 하면서 마침내 그것을 삼켰다. 이해에 메뚜기가 재앙을 만들지 않았다.)
<[자치통감(資治通鑑] 권 제192 당기(唐紀)8 고조신요대성광효황제지하(高祖神堯大聖光孝皇帝下之下) 정관(貞觀) 2년 무자(戊子·628) 여름 4월>
당태종 세민의 벽화를 보며 빙그레 웃음 짓다가 다시 미도다방에 들려 쌍화차를 한잔 마주하였다.
~ 도경당 류돈하 쓰다 ~
기사등록 : 이순락기자
# [경북미디어뉴스]의 모든 기사와 사진은 저작권법에 따라 무단전재시 저작권료를 청구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