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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돈하 역사칼럼, "연개소문을 위한 변명"

이순락기자 0 9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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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 재야청년 사학자 류돈하 ~​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온통 연개소문(淵蓋蘇文)에 대해 부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삼국사기는 열전 제 9에 창조리와 연개소문을 함께 묶어 역신으로 분류하였고, 그가 속한 가문의 전설마저 사람들을 현혹케 한다고 지적하였다. 게다가 성씨가 연씨임에도 당을 창업한 고조 이연의 이름과 같다는 이유로 성씨마저 천()이라 바꾸었다. 그 놈의 사대모화 사상 때문에 연개소문은 사서에서 천개소문으로 표기되고 있는 것이다. 삼국사기 열전 제 9 개소문전에서는 그를 일컫어 잔인하고 흉포하다 하면서도 글의 말미에 조씨가 다스린 송나라 신종과 왕개보(王介甫:왕안석)가 나눈 대화를 인용해 딱 한구절만 긍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송 신종 조욱은 영종 조서의 뒤를 이어 19세의 나이로 황위에 올라 송나라 제 6대 황제가 되었다. 조욱은 즉위 직후, 왕안석을 등용하여 참지정사로 삼고 신법의 개혁정치를 실시하였다. 왕안석은 균수법, 청묘법 등의 개혁을 통해 국가 재정 지출을 줄이면서 대지주와 고리대금업으로 막대한 이익을 취하는 고리대금업자들, 대상인들의 폭리를 억제하고 영세농민들을 보호하며 사회를 안정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왕안석 등의 신법파에 반대한 구법파의 인물들은 특히 청묘법에 완강히 반대하였다. 그 대표적인 인물로 자치통감의 저자 사마광도 있었으며, 대문호 구양수도 있었다. 왕안석은 국운의 쇠퇴를 타개하기 위해 부국강병을 도모하며 신법을 실시하였다. 그 출발점이 제치삼사조례사라는 관청의 설치였다.


왕안석은 신종과 더불어 국사를 논하다가 어느날 신종이 불쑥 질문을 하였다. "당태종은 고구려를 쳤을 때 어찌 이기지 못했어요?"그러자 왕안석이 대답하였다. "개소문이 비상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삼국사기 열전 제9 개소문전: 宋神宗與王介甫論事曰 太宗伐高句麗 何以不克 介甫曰 蓋蘇文非常人也 [송신종여왕개보론사왈 태종벌고구려 하이불극. 개보왈 개소문비상인야] )


신종 조욱과 왕안석이 이러한 문답을 주고 받던 시기가 11세기 후반으로 접어드는 시기였으니 당태종이 고구려를 친지 4백년이 흐른 후였다. 당태종은 645년 직접 친정하여 고구려를 침략하였고 사학자들은 이를 제 1차 고당대전이라 명명한다.

그러나 을사년에 일어난 이 전쟁은 명분이 빈약하였고 태종 이세민의 팽창욕으로 말미암아 일어났으니 을사당란이란 용어도 적합한 것 같다. 을사당란 초기부터 당은 이전 수나라 군대의 전략과는 달리 고구려의 백암성, 요동성 등 주요 성들을 쉽사리 함락시켰다. 그러다가 안시성이라는 작은 성에서 발이 묶여 안시성 성주의 뛰어난 지휘력이 발휘되어 결국 퇴각한 것이 널리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보장왕 편에서는 이 안시성을 구원하기 위해 고구려 정부에서 15만의 대군을 파견했다는 기록이 있다. 안시성은 비록 작은 성이지만 전략적인 요충지임에 따라 연개소문 등의 지휘부는 이 곳을 싸움을 결판 낼 수 있는 결전지로 선택한 것 같다. 작은 안시성을 둘러싸고 15만의 고구려군이 원병으로 오자 태종 이세민은 이를 보고 크게 두려워하였다고 삼국사기는 전한다.

구당서, 신당서, 자치통감 등 중국측의 사서에서는 당에게 불리한 사실들은 숨기거나 간략히 기록하여 안시성 전투의 실상을 감추었다. 그저 안시성 성주가 유교적인 충신에 가까운 인물로 성을 잘 지켜 싸움의 결판이 나지 않아 세민이가 퇴각하면서 비단 100필을 성주에게 선물했다고 기록은 전할 뿐이다. 더욱이 이 안시성주는 점차 부각되어 연개소문을 제치고 을사당란의 주역이 되어갔다.

조선 중기에 대신 윤근수가 명나라 관원 오종도에게서 안시성주의 이름이 양만춘이라는 것을 알아내었다 한다. 하지만 양만춘이란 이름은 명나라 웅대목의 당서연의(1553년작)라는 소설에서 비로소 처음 등장한다. 명나라 국초에서부터 삼국연의.수호지 등의 소설이 크게 유행했다는 사실을 주지 할 필요가 있다. 송신종과 왕안석의 대화에서는 을사당란의 주역은 양만춘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연개소문이었다.


'개소문비상인야'로 매듭지어지는 송 신종과 왕안석의 대화에는 많은 것이 함축되어 있다. 4백년이란 긴 시간이 흐른 후, 국사를 논하는 석상에서도 언급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조선과 명나라가 공존하던 시기까지 널리 회자됨은 645년 일어난 을사당란이란 대사건이 가지는 의미가 상당히 큰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왕안석이 연개소문을 일러 비상하다고 한 것 역시 자못 의미심장하다.

약설하자면 연개소문은 상당히 국제적 감각이 뛰어난 인물이다.규염객, 갓쉰동전 등의 소설의 주인공이 바로 연개소문이라 한다. 연개소문이 정권을 잡기 전에 이미 당나라에 잠입하여 그 내부의 사정을 알아내고 부여(고구려)로 돌아와 권력을 잡았다는 내용이다. 이것이 사실이든 사실이 아니든 전쟁의 와중에 끊임없이 적진에 대한 고구려의 첩보활동이 이어졌고 전쟁 직전에는 분주한 외교활동으로 철륵계통의 설연타 등의 협공을 유도해 내었다.

조선상고사에 의하면 "오족루를 돌궐족의 여러 나라로 보내어 고구려가 당과 싸울 때에 그들로 하여금 당의 배후를 치게 하려고 운동하였다."라고 하였다. 이는 사마르칸트(현재의 우즈베키스탄) 아프라시압 궁전 벽화에서도 그 사실이 잘 드러난다. 덧붙이자면 조선상고사는 이어서 설연타의 당 하주공격으로 인해 당태종은 급히 회군하였다 한다. 이때 연개소문이 군사를 이끌고 회군하는 당나라군사들을 추격하여 북경의 상곡지방까지 공격하였다고 한다 .이것이 진실로 사실이라면 일시에 동서로 타격을 받은 당나라로서는 매우 급박한 처지에 이르게 된 것이다.

이세민이 연개소문에게 쫓겨 달아나는 이야기는 후대에 중국 경극 '독목관' '살사문'으로도 만들어졌거니와 실제로 북경 근처에 고려영이라는 지명까지 전해지는 것을 본다면 조선상고사가 전하는 내용이 어찌 허구이겠는가. 불과 10여년전까지만 해도 중국 소재 고구려의 옛 유적지에는 그 당시 사용했던 기왓장이나 성벽 따위의 유물들이 널부러져 있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단재가 생존하던 시절은 또 어떠했겠는가?

또 한가지의 사례를 들어 논하자면 연개소문은 집권하자마자 6433, 당나라에게 도교의 수입을 요청하였다. 당나라는 이에 도사 숙달 등 8명을 고구려로 보내고 도덕경까지 보내 주었다. 이 당시 당나라의 국교는 도교인데 도교의 비조 노자는 당황실의 조상으로 받들어지고 있음에 따라 도교가 당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불교, 유교 보다 더 위에 있게 되었다. 연개소문이 주도한 도교의 수입에 이어 643년 윤6월 당태종은 보장왕을 '상주국 요동군공 고구려왕'으로 삼아 보장왕의 즉위와 연개소문의 집권을 대외적으로 공인해주는 제스처를 취한다.

삼국사기에도 도교수입 기사에 연달아 등장하는 당태종 이세민의 보장왕 책봉기사를 살펴보건대 연개소문으로 대표되는 고구려의 외교능력이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다. 연개소문은 뛰어난 국제감각으로 국제정세를 관찰하며 정보들을 취합하면서 기민한 대응책을 구사하였다. 이는 삼국사기 등의 기록이 그것을 반증한다.


삼국사기, 삼국유사, 당서, 자치통감 등 국내외 사서들이 전하는대로 연개소문이 단순히 잔인무도하고 흉포한 독재자이자 역적이라는 것은 지나친 폄훼의 소산이다. 사대모화 사상의 가장 큰 피해자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단재 신채호가 지적한 것처럼 덕이 적은 인물이라 하였듯이 연개소문에 대한 평가가 미화되어서도 안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을사당란을 고구려의 승리로 이끈 인물은 이름을 알 수 없는 안시성주가 아니라 바로 연개소문이라는 것에 있다. 중국인들의 굳어진 관념에 따라 당태종은 불세출의 영웅으로 설정되어 있다. 천하의 패륜아 이세민이 영웅이라면 어찌 연개소문 또한 영웅이라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단재 신채호의 조선상고사에서는 연개소문을 위대한 혁명가로 평가하고 있다. 백암 박은식의 천개소문전에서는 독립자주의 정신과 대외경쟁의 담략을 지닌 우리 역사상 제 1인자로 표현한다.


기해년 12월 류언암 쓰다.




기사등록 : 이순락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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