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 > 사설칼럼 > 류돈하칼럼
류돈하칼럼

류돈하 역사칼럼 : 농암 이현보 선생의 효성과 절의

이순락기자 0 8955

0041c491b127a435050502ee4b7afdd2_1589162415_2615.jpg
~ 필자 류돈하 선생 ~


농암 이현보(聾巖 李賢輔:1467~1555) 선생은 효성과 절의가 뛰어난 옛 선비이다. 무오사화, 갑자사화, 을사사화 등의 사화들을 거치면서 지조와 절개가 으뜸간다는 찬사를 받았으며, 재야의 정승으로 존경받기도 하였다.

농암의 기백을 엿볼 수 있는 일화는 연산군일기에도 전해진다. 15021028, 당시 36세의 농암은 춘추관 기사관으로 재직중이었다.기사관은 곧 사관인데 국왕과 대신간의 오고가는 말들을 주로 받아 적어 역사에 남기는 것이 주업무였다. 당시 사관은 국왕이 앉는 어좌에 비해 상당히 먼 자리에 배석되었기 때문에 말소리를 분명히 알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농암은 국왕인 연산군 이융(훗날의 양노왕)씨에게 건의를 하게 된다. "전하요. 신이 사관일씨더만 전하하고 거리가 멀어가주고 말 받아 쓰기가 낭패씨더.자리를 쪼매 가찹게 하믄 안되니껴?"그러자 이융씨는 이 대담하고 당당한 사관의 청을 다음과 같은 말로 거절한다. "予語音不分明 , 雖詳言之, 果未及聽之矣. (여어음불분명. 수상언지. 과미급청지의)나의 말소리가 불분명하니 누구에게 상세히 말해도 과연 다 듣지 못할것이다."2년후 갑자사화가 발생하자 농암은 세자 이성에게 시비를 걸었다는 이유로 안기역에 유배되어 노역을 하며 살아야 했다.농암은 중종반정 후 다시 서용되었다.관직은 호조참판, 지중추부사에 이르렀고 종1품 숭정대부의 품계에 올랐다.

0041c491b127a435050502ee4b7afdd2_1589162932_2473.jpg 

                                   ~ 농암 이현보 선생 ~

문순공 퇴계 이황은 55세에 이르도록 농암을 종유하며 스승으로 예우하였다.퇴계의 숙부 송재 이우와 농암은 친구 사이로 두집안의 인연은 인척관계로도 맺어져있다.퇴계는 농암을 "강호의 진락(眞樂)을 얻어 그 아름다움이 신선과 같다."라고 평하였다.농암은 물욕없이 청렴하게 관직을 지내 청백리로 선정되기도하였다.1542년 관직에서 은퇴를 한 후 고향 도산 분천에 귀향하여 농사에 종사하였다.여가시간에는 강에 일엽편주를 띄워놓아 술을 마시고 낚시를 즐겼다.이 때 나온 농암의 작품이 어부가로서 강호문학의 새 지평을 열었다.


효성이 지극한 농암은 경로사상 역시 투철하였다.안동부사 재직 시인 1519년에 화산양로연(花山養老宴)을 개최하여 자신의 어버이와 80세 이상의 노인들을 초대해 경로잔치를 베풀었다.관품과 지위의 고하, 성별을 따지지 않고 오직 연령을 고려하였으며, 천민 신분의 노인까지 초대하였다.

1533년 지금의 안동 도산면 애일당에서 아홉분의 노인을 모시고 잔치를 베풀었다.애일당의 애일이란 뜻은 부모님이 살아계신 하루하루를 아끼며 사랑한다는 뜻이다.아홉분의 노인 중에는 94세의 농암의 부친 이흠과 모친, 92세의 숙부, 82세의 외숙부도 있었다.이것이 애일당 구로회(愛日堂九老會)이다. 농암은 구로회 잔치에서 자신이 백발이 성성한 67세의 나이임에도 아우들과 함께 색동저고리(때때옷)를 입고 춤을 추어 아홉분의 노인들을 즐겁고 기쁘게 하였다.이는 중국 춘추전국시대 노나라 래자의 고사에서 기인된다.


농암이 만든 이 애일당구로회는 1979년까지 4백여년간 이어져 전통이 되었다.농암 자신을 포함해 자손대대로 회원으로 구로회를 이어온 것이다.퇴계도 그의 형 이징과 함께 회원으로 1569년에 이 모임에 참가하였다.

한편 한가지 눈여겨볼만 한것은 농암의 집안이 대표적 장수가문이란 점이다.농암의 조부 이효손은 84.부친 이흠은 98.숙부 이균은 99.농암본인은 89.아우 이현우(간재 이덕홍의 친조부)91.아들 이문량은 84.재종손자 이명희는 96.이명희의 아들 이경선은 80.이경선의 아들 이명발은 98.이명발의 아들 이문일은 89.농암의 16대 종손 이용구 91.이외에도 영천이씨 족보를 살펴보면 장수를 누린 이들이 부지기수이다.


농암이선생이 세상을 떠날 즈음, 전라도 강진과 진도가 왜구들에게 유린당하는 을묘왜변이 발발하였다.당시 농암은 퇴계이선생의 손을 맞잡고 눈물로 나라일을 염려하였다.훗날 그의 아들들 중 매암 이숙량(대구 연경서원 제향)74세의 나이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의 창의를 촉구하는 격문을 작성하였다.

농암의 생애를 살펴보면 효와 절의로서 지역공동체에 큰 족적을 남겼다.그가 주도한 화산양로회와 애일당 구로회에서 가정의 달 5월의 의미를 다시 되새겨 봄직하다.하루하루를 부모님을 사랑하고 자녀를 사랑하는 날들로 채워져서 나아가 이웃과 공동체로 향한다면 진실로 이것이 애일정신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기사등록 : 이순락기자
# [경북미디어뉴스]의 모든 기사와 사진은 저작권법에 따라 무단전재시 저작권료를 청구할 수 있습니다.
0 Comments

Facebook Twitter GooglePlus KakaoStory KakaoTalk NaverB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