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돈하 역사칼럼, "고려충신 오윤부伍允孚 (생년미상~1304") 2부
-인물평-
고려사절요 : 첨의찬성사로 치사한 오윤부(伍允孚)가 졸하였다. 윤부는 대대로 태사국(太史局)의 관원을 지냈다. 천문을 보고 점치기를 잘하여 밤새도록 잠자지 않았으며, 비록 몹시 춥고 혹독한 더위에도 앓지 않는 한 보지 않는 적이 없었다. 하룻저녁에는 별이 천준원(天樽垣)을 침범하는 것을 보고 말하기를,“반드시 술 잘 먹는 사람이 사신으로 올 것이다.”하고, 어떤 날에는 별이 여림원(女林垣)을 침범하는 것을 보고, “반드시 사신이 와서 처녀를 선발할 것이다.”하였는데, 모두 적중하였다.
또 점을 잘 쳤는데, 원 나라 세조(홀필렬:쿠빌라이)가 불러서 시험한 후에 더욱 이름이 났다. 세조가 직접 내안(乃顔)을 정벌할 적에 왕이 군사를 인솔하고 정벌을 도우려 하여 행군하여 평양에 이르러 먼저 류비(柳庇)를 보냈다. 보내고 나서 이내 윤부에게 이를 점치게 하니, 대답하기를,“아무 날에는 류비가 반드시 돌아올 것이며, 전하께서도 여기서 되돌아 가시겠습니다.”하였다. 그 시기에 이르러 왕이 성용전(聖容殿) 뒷산에 올라 북쪽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윤부에게 농담으로 이르기를,“네 점이 잘못되지 않았느냐?”하고, 좌우로 하여금 결박지으라 하니, 윤부가 나와서 아뢰기를,“오늘 해가 아직 저물지 않았으니 조금만 더 기다리소서.”하였다. 조금 있더니 역말이 먼지를 날리며 오는데, 과연 류비였다. 류비가 와서 왕을 뵙고,“황제께서 환군하라는 조서를 내렸습니다.”하니, 왕이 더욱 그를 믿었다.
윤부는 성품이 매우 정직하였고, 나랏일을 자기의 걱정처럼 생각하여 재변이 있을 적마다 들어가 고하였는데, 말이 매우 간절하고 지극하였다. 시국 문제에 대해서도 할 말이 있으면 곧 들어가 간하고, 듣지 않으면 눈물을 흘리면서까지 굳세게 간하여 반드시 관철되기를 꾀하였다.
일찍이 봉은사(奉恩寺)에 있는 태조 진전(太組眞殿)에 초하루를 보고하는 제사를 지냈는데, 잔을 올리고 절한 후 울며 고하기를, “태조이시어, 태조이시어, 군지국사(君之國事 : 임금의 나랏일)가 그릇되고 있습니다.”하고, 이내 흐느껴 울며 스스로를 억제하지 못하였으니, 그의 정성이 이와 같았다.
사람됨이 얼굴이 못생기고 말과 웃음이 적었다. 안평공주가 일찍이 왕에게 말하기를, “어째서 이 사람을 자주 불러들입니까?”하니, 왕이 이르기를 “오윤부는 나의 최호(崔浩)요, 얼굴은 비록 못생겼으나 버릴 수 없는 사람이요.”하였다. 뒤에는 공주가 자못 태도를 고쳐 예우하였다. 일찍이 스스로 천문(天文)을 그려 바쳤는데, 천문학을 하는 사람들이 모두 이것으로 공부하였다.
개인적 견해를 덧붙인다면 오윤부 그는 고려의 충신이다. 고려가 속국으로 전락해 나라가 가장 어려울 때 그는 오직 천문학의 업무를 성실히 수행하면서 그 정성이 지극하였다. 사서에 등장한 오윤부의 모습은 자못 겸손하면서도 당당하였다 할 수 있다. 강대국의 공주의 행패에 맞서 준엄히 꾸짖던 유일한 사람이 바로 오윤부였다.
요컨대 나라가 원나라의 속국이 되어 제후국으로 격하된 당시 태조 왕건의 진전(어진을 모셔둔 곳)에 엎드려 기도한 것처럼 그는 누구보다 간절히 나라를 걱정한 사람이었다. 면면히 계승되어 온 고려의 자주성과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제국대장공주에게 항거한 이는 오윤부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사서에서 기술된 것처럼 하늘을 살피고 별을 하나하나 점칠 때도 원에 복속된 나라의 완전한 독립과 안녕을 위하였을 것이다. 우리는 원의 간섭을 받았던 고려후기를 비롯해 구한말의 암흑기를 경험하였다. 백년의 암흑기를 거친 오늘날까지 흐른 이 땅의 근현대사에는 나라의 그릇되어 감을 부여잡았던 수많은 인물들이 있었다. 그보다 앞서 나라의 그릇되어 감을 절규했던 오윤부는 우리에게 많은 생각들을 던져주는 인물이었다.
도경당 류돈하 쓰다
기사등록 : 김영숙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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