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돈하 역사칼럼, ‘10.1 민중항쟁의 배경과 전개’
미군정은 초기 미곡에 대한 자유시장정책을 채택하였다.
그 결과 시장에서 쌀이 사라지고 미곡가가 크게 폭등하였다.
미군정의 식량정책이 실패함에 따라 미군정은 추곡, 하곡에 대해 강제공출과 배급을 시행하였다.
그리하여 도시에 식량부족상태가 일어났고, 높은 물가에 식량난과 생활난이 더욱 가중되었다.
심지어 경북 청송지역에는 200여명의 아사자가 발생하기도 하였다.
경제혼란의 가중은 애초 해방과 동시에 떠나가게 된 일본에게도 그 원인이 있었다.
조선을 떠나는 퇴각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조선총독부는 대량으로 140억 규모의 화폐를 만들고 무작정 살포한다.
이것으로 인해 살인적인 물가인상으로 올라가 조선은 막대한 경제손실을 안게 되었다.
일본은 떠나는 마지막 순간까지 조선에 악행을 저지른 것이다.
아울러 1946년 5월~6월부터 호열자(콜레라)가 창궐하여 경북만 해도 5,348명이 발병하였고 4,332명이 사망하였다.
(호열자는 1821년[순조20년 신사년]에도 크게 유행했다.
당시 바람처럼 일어나 조수처럼 퍼져 항우의 군대가 휩쓸고 지나가는 것 보다
더 빨랐다는 효전 심노숭(孝全 沈魯崇)의 표현에 보이듯 당시 수십만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이러한 혼란에 혼란을 더하는 총체적인 문제들이 노동자들에 의해
1946년 9월 총파업으로 폭발하게 된다.
철도국 경성공장으로부터 촉발된 9월 총파업은 4만 철도노동자들의 파업으로 전철도가 마비되었다.
대구에서도 9월 23일 오후 3시경 대구철도기관구 노조원 1천2백 명이 파업에 돌입하여 ‘대구철도쟁의단‘을 구성하였다.
노동자들은 일급제 반대, 가족수당 등 임금인상, 식량배급 증대, 해고 절대반대 등을 요구하였다.
이 9월 총파업은 점차 확대되어, 민중들의 대거참여로 ‘10월 인민항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우편국, 섬유공장, 조선중공업, 전기, 출판노조, 신문사 등 30여 업체의 5,035 명이 파업에 동참한 대구의 총파업은 조직적이고 구체적이었다.
한편 9월 30일 철도파업단 본부가 위치한 서울 용산기관구에는 기관총으로 무장한 3천명의 경찰과 깡패 김두한이 이끄는 대한민주청년동맹이 공격하였다.
그 결과 파업단 간부 16명, 조합원 1200명이 검거되었으며, 2명이 사망했다.
대구는 서울에 비하여 대구공동위원회를 통해 좌우의 정치노선이 어느 정도 합작을 이루었고, 노동조합대구지역평의회(노평) 등 노동운동 조직이 그 역량을 다함에 따라 10월 민중항쟁으로 이어지게 된다.
남한 전역에서 오직 대구만이 파업의 온전한 전개양상을 보인 것이다.
요컨대 10월 민중항쟁 직전 당시의 사회상황은 귀환 이재민의 규모가 늘어나게 되면서 치안범죄가 증가하였고, 호열자의 창궐과 더불어 생활난과 식량난이 겹치면서 실업자는 더욱 증대해 갔다.
친일파는 지위를 보장받으며 화려하게 부활하며, 좌우의 대립은 날로 심화되었다.
1946년 10월 1일 오전 10시 반경, 9월 총파업으로부터 촉발된 민중항쟁이 드디어 대구에서 일어났다.
“배고파 못살겠다. 쌀을 달라!“
1천여 명의 대구시민들은 대구부청(대구시청) 앞에서 여성과 어린이들을 중심으로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하였다.
경찰이 시위대에 공포를 세 번 발사하자, 시민들은 분노하여 그를 잡아 구타하였고, 10여분 거리에 있는 경북도청 광장으로 이동하여 계속 시위를 진행하였다.
이 날 오후 5시경 대구역 광장에서는 대구시 투쟁위원회 주최로 ‘전매국 노조 쟁의 지원 시민궐기대회’가 열렸다.
이 집회에서는 군중 5~6천명이 운집하였으며, 손기채, 최문식, 이선장, 황태성, 윤장혁 등이 연설을 했다.
“쌀 배급 반대”
“일급제 반대”
“박헌영 선생 체포 취소하라”
등의 구호들이 울려 퍼지고 모두 해방의 노래, 혁명가를 합창하기도 했다.
오후 7시경이 되자 경찰은 이 집회를 무허가 집회라 하며 강제해산 조치하였고 지금의 태평로(금정)일대 부근에서 충돌이 생겨 경찰대가 공포탄을 쏘며 위협했다.
그러자 유탄에 어떤 사람이 맞아 도립병원으로 이송되기도 하였다.
대구역 광장에서 열린 시민대회는 노동자의 파업이 시민과의 연대로 확산되었고 이로써 민중항쟁의 본격적인 서막이 열리게 된다.
이 대구역 광장 시위에서 경찰의 발포로 2명의 시민이 총격을 당해 사망하고 말았다.
10월 1일 그날 밤, 노동자들을 포함한 수천의 시민들은 철야농성을 하며 자리를 지켰고, 시위를 막는 경찰들은 특경대장 이강학의 명령으로 시민들을 향해 사격을 하게 된다.
10월 2일 아침이 되자 대륜중학교 학생 배일천은 학생들과 스크럼을 짜고 나와서 거리 시위를 하였다.
그러는 중에 경찰의 발포를 목격한다.
이 날에도 경찰의 발포로 시민 18명, 경찰 4명의 사망자가 발생하였다.
미국 국립문서기록 관리청에서 공개한 현장사진들을 보면 촬영된 시신에 24라는 숫자가 표기되어 있어 적어도 24명이 사망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정확한 사망자는 현재로선 묘연하다.
(이에 대해선 이종하 교수와 유병화 선생의 증언이 있다.)
한편 이 날 오전 9시쯤 대구의대 학생과 교원 150여명으로 구성된 시위대가 철도노동자 김용태님의 시신을 앞세우고 대구의대에서 출발하여 대구사대로 행진하여 대구경찰서로 도착하게 된다.
이종하 교수의 증언에 따르면 11시~12시 경 대구 경찰서 앞에 수천 명의 남녀학생들이 집결했고, 전매국 노동자를 포함한 노동자들, 시민들까지 합세하여 1만 5천의 인파를 이루었다.
시위대는 김용태님의 시신을 향해 묵념하고 “경찰 발포 중지, 살인경찰 무장해제, 애국자 석방 등의 구호를 외쳤다.
특기할 만 한 것은 이 시위에 신재석 경위 등 일부 경찰들도 동조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남녀노소 연령불문, 직업불문의 많은 시민들이 경찰의 무장해제를 이루게 된다.
또 일부의 시민들은 경찰서를 점거하고 유치장에 갇혀 있던 구속자 100여명을 석방했다.
항쟁의 대책위나 시위대 대표단이 통제 할 여유 없이 청년과 학생들이 경찰서를 점거한 것이다.
이후 오후 1시에 이르러서는 대구 시내 곳곳에 빈민 등 기층 민중들이 봉기를 일으켜 경찰과 관리를 응징하거나 친일 우익인사의 사택을 공격하였다.
경찰서 앞에서는 여전히 학생들이 연좌시위를 벌이고 있었다.
오후 3시 경 미군이 장갑차를 앞세워 진압하자 시위대는 해산을 하게 된다.
미군의 무력 진압에 대구 항쟁이 진압되어 가자 다시 이 민중항쟁은 경북 22개 군으로 뻗어나가게 된다.
특히 대구와 가까운 달성군, 영천, 칠곡, 성주에서는 격렬한 항쟁이 있었고 영천에서는 군수 이태수가 구타를 당한 후 숨만 붙어 있다가 민중들에 의해 그대로 생화장에 처해지기도 하였다.
미군정은 군인과 경찰을 동원하여 민중들을 사살하였다.
대구로부터 시작된 10월 민중항쟁은 12월까지 전국으로 번져나가 각지에서 일어났다.
미군정은 우익세력과 함께 끝까지 시위 참가자들을 추적하여 많은 학살을 자행했다.
그리고 6.25를 전후로 하여 이때까지 국민보도연맹과 엮어 20~30만 명으로까지 추정되는 많은 국민들을 학살하였다.
학살된 국민들의 수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친일 전향 단체 ‘대화숙’을 모방하여 대국민 사상통제 목적으로 만들어진 이 국민보도연맹은 공무원들이 실적을 올리기 위해 사람가리지 않고 가입을 받았다.
결국 6.25 발발 후 국민보도연맹에 가입된 사람들이 북한군에 협조할 것이라는 이승만 정권의 판단아래 전국 각지에서 무차별 학살을 하게 된 것이다.
-3편 계속-
(사진은 당시 미군정의 쌀공출, 10.1민중항쟁 거리시위, 신간회 단체사진.)
-참고사료 및 서적-
10.1 민중항쟁 참여하신 들별 강창덕 선생 시 10월 항쟁의 조약돌
10월항쟁 추모식 추도사
조선왕조 순조실록
10월 인민항쟁 연구 = 정해구
10월항쟁 = 김상숙
한국근현대사를 읽는다 = 박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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