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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암 류돈하 역사칼럼, "오호통재라, 경술국치"

이순락기자 0 63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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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 재야 청년사학자 언암 류돈하 ~


1910년 경술년 대한제국 순종 융희 4

822일 일본에 의해 강제로 한국병합늑약이 조인되었다.

829일 대한제국의 황제 순종은 일본왕 명치에게

대한제국의 통치권을 양도하는 것을 온 나라에 발표하였다.

이로써 오백년간 이어져 온 대한제국은 망했다.

 

경술년의 국치는 많은 것을 앗아갔다.

국권과 국토가 왜적의 손아귀에 떨어졌으며, 국민들은 노예가 되어 그 생명권마저 저들의 뜻대로 할 수 있게 되었다.

 

절망스러운 국치의 상황에서 자정순국을 택하여 목숨으로 저항한 선비들이 있었다.

그 중에 전라도 구례의 매천 황현 역시 나라의 선비가 되어 망국의 현실을 외면하지 않았다.

절명시를 짓고 독약을 입에 머금었다.

"내가 죽어야 할 의무는 없지만 나라가 선비를 기른 지 5백년에

망국한 날에 한 사람도 죽는 이 없다면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

라는 매천의 비장한 결연함은 오백년간 길러진 선비의 성성한 기상을 그대로 나타내는 것이었다.

 

죽음으로서 항거하는 이들이 있는 반면, 살아서 나라를 다시 되찾으려 한 이들도 있었다.

그 중에 안동의 석주 이상룡은 처남 등 40여명의 가족을 이끌고 강도 일본이 강제 점령한 땅을 떠나 서간도로 이주하여 한인촌을 개척하였다.

 

우당 이회영과 조우하여 신흥무관학교를 세워 독립군을 양성하였으며, 새 시대의 일꾼이 되게 하였다.

신흥무관학교의 졸업생들은 봉오동전투, 청산리대첩 등의 주역이 되었으니 신흥무관학교는 곧 광복운동의 요람지이자 우리 국군의 뿌리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석주는 한반도 국내는 물론 해외 각지에 흩어진 임시정부와 독립단체들을 하나의 조직된 힘으로 통합하는 것을 적극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상해의 임시정부를 단일정부로 인정하였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으로 취임하게 된 것이다.

 

죽음과 헌신으로 위국진충한 이들과 달리 국치를 개인의 사사로운 복으로 생각하여 자발적이고도 적극적인 매국노의 길을 향한 이들 중에 대한제국 총리대신 일당 이완용은 가히 대표적이었다.

 

일본은 병합늑약을 은밀히 추진하는 한편 오히려 느긋하게 실행하였다.

·일 양국 간에 병합을 두고 서로 눈치가 오고갈 때 마치 그물을 치기도 전에 물고기가 뛰어드는 격으로 먼저 병합을 제의한 사람이 바로 일당 이완용이었다.

 

이완용은 191084일 자신의 비서 이인직을 통감부 외사국장 소송록(小松綠)에게 보내 병합을 함께 의논하였다.

소송록은 과거 일본도쿄정치대학 교수로서 이인직을 가르친 스승이었다.

병합에 대한 공작작업을 벌인 이완용은 동양평화를 유지하고 인민을 구제한다는 그럴싸한 명분으로 은사금 15만원에 나라를 팔아먹었다.

그리고 조선귀족령이 반포됨에 따라 이완용은 백작이 되었다.

후에 후작으로 승급되는 이완용은 자신의 장손자를 일본내각 총리대신으로 만드는 '장대한 꿈'을 꾸기도 한다.

나라와 민족을 15만원에 팔아먹고 호의호식하며 망상을 꿈꾸다 와석종신하였다.

 

더욱이 고종황제를 독살한 혐의도 있다.

악인이 제 명을 다하고 편안하게 죽은 것이다.

해방 후인 1979년 그의 묘는 증손자 이석형에 의해 파묘되고 만다.

 

친러, 친미를 오고가다 친일을 택해 매국노의 대명사가 된 이완용은 만고의 다시없을 국적(國賊)이다.

그러나 이완용이란 이름 뒤에 숨어서 그 악행이 잘 알려지지 않고 드러나지 않은 진짜베기 매국노 또한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민국 102829일에 류언암 쓰다.




기사등록 : 김영숙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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