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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암 류돈하 역사칼럼, "해방정국"

이순락기자 0 5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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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 재야 청년사학자 언암 류돈하 ~ 



제 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은 패배했습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왕 히로히또(裕仁)는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게 됩니다.


이로써 조선(대한민국)은 일본 제국주의 36년의 긴 식민지배 끝에 드디어 해방을 맞이하게 됩니다.

조선의 독립은 1943년 말부터 카이로회담을 통해 연합국 측에서 지지한 까닭에 국제적인 합의 속에서 현실로 굳어졌으나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은 신탁통치를 들고 나왔습니다.

해방이 되면서 한국인들은 새로운 희망을 얻게 되었고 몽양 여운형은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설립하게 되었습니다.

조선건국준비위원회의 전신은 건국동맹인데 좌우연합 전선을 지향한 것입니다.

여기에는 건국동맹 계열과 신간회 계열이 중심을 이루었습니다.

초계급적이고 초정파적인 좌우의 연합전선이 세워진 후, 좌익이 우세하단 이유로 우익 인물들이 불만을 품고 이탈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민족주의 사학자 민세 안재홍 선생도 같은 이유에서 사임하고 이탈하였습니다.

좌익이 주도하게 된 건준은 1945년 9월 6일에 조선인민공화국을 수립하게 되었습니다.


미군이 남조선에 진주한다는 소문에 서둘러 인공을 수립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틀 후 9월 8일, 미군은 하지중장의 통솔로 인천에 상륙해 그 다음날 서울로 들어와 조선총독부로부터 모든 권한을 인수받게 됩니다.

총독 아부신행(아베 노부유끼)과 하지는 조선총독부 청사에서 항복 조인식을 체결하게 됩니다.

체결 후 조선총독부의 일장기가 내려가고 미국의 성조기가 올라갔습니다.

미국 태평양방면군 최고사령관 맥아더는 ‘점령군에 반항하는 자를 엄벌에 처할 것’이라는 포고문을 발표하게 됩니다.

이렇게 하여 군정통치가 열리게 되었고 아놀드 소장의 군정장관의 취임과 함께 미군 장교들이 국장이 되어 미군정은 조직을 갖추게 됩니다.

이런 와중에 조선인민공화국은 9월 14일 인민공화국의 선언과 강령, 시정방침을 발표하였습니다.

  

인공은 내부에서 좌익이 압도적인 우위를 유지하였지만 우익과 연합하려는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러나 이승만을 필두로 하는 우익은 이를 거절하였고 인공 내부는 좌익이 장악하게 되었습니다.

9월 14일 발표된 인공의 선언문은 다음과 같이 천명하였습니다.

“일본 제국주의의 잔존세력을 완전히 구축하는 동시에 우리의 자주독립을 방해하는 외래세력과 모든 반민주주의적, 반동적 세력에 대한 철저한 투쟁을 통해서 완전한 독립국가를 건설하여 진정한 민주주의 사회의 실현을 기한다.”

이로부터 5일 후 일본을 몰아내고 남한을 점령한 미군은 9월 19일 재조선 미육군사령부 군정청이라는 이름으로 정식 수립하였습니다.


미군정은 한국 내 어떤 정치세력과도 권력을 나누려 하지 않았습니다.

인공은 수립후, 건준지부를 인민위원회로 개칭하여 치안과 행정을 시행하고자 하였으나 미군정은 인공 자체를 부정하며 38도선 이남의 모든 행정, 치안 등을 직접 장악하였습니다.

또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관철시키기 위해 친일관료, 친일경찰 등 매국노 세력들의 기득권을 그대로 보장해주며 기용하였습니다.

미군정은 일본이 남기고 간 공.사유 귀속재산을 모두 접수하고 조선총독부 시절의 통치기구 역시 존속케 합니다.


이에 따라 우리민족의 자발적인 민중 중심의 정권이 새롭게 세워지는 것이 좌절당하는 순간을 맞이하게 됩니다.

일본의 지배는 지주, 체제동화된 민족자본가, 관료, 경찰 중심의 친일세력을 남겼습니다.

또 엄청난 똥을 싸놓기만 하고 도망갔는데 이는 잠시후 다시 살펴보겠습니다.


일본에 의해 이 친일세력들과 우리 소작인, 노동자, 민족해방세력, 피착취 민중사이에 잠재적 균열구조가 형성되었습니다. 일본은 양자간의 갈등과 대립의 구도를 의도적으로 획책하였습니다.

이러한 구조 속에 등장한 미군정은 2차 세계대전 당시 식량공출, 징용, 징병, 정신대 동원 등을 담당했던 악질적 친일매국노 세력을 기용해 다시 득세토록 한 것입니다.

다른 의미로 논하자면 1945년 일본에게 해방이 되었으나, 지배자가 미국으로 바뀌었을 뿐, 달라진 것은 없었습니다.

  

대구경북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해방직후 미군정은 경북에 전술부대 제40사단을 진주케 합니다.

또 자치기구인 건국준비 경상북 치안유지회를 해산시키고 친일관료들을 그대로 기용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중립적입장을 견지해 오던 영남일보는 다음과 같이 혹평했습니다.

“민의를 채택하지 않고 총독정치하 인사행정의 술법을 그대로 답습하였다.“

미군정은 경북에 행정고문회를 설치한 후 친일.친미인사들을 배치하고 좌익들은 배제토록 하였습니다.

또 건준 산하의 국군준비대 역시 해산시키고 국방경비대를 창설하였습니다.

해방공간에서도 친일매국노 세력들은 여전히 민중들을 착취하고  좌익 즉 진보세력과 민중을 탄압하였습니다.

인공을 부정하고 인위를 제어하며, 해체해 갔던 미군정은 미국의 뜻대로 움직일 수 있는 우익세력을 적극 지원하였습니다. 

미국이 원했던 것은 한민족의 자발.자주적인 정부수립을 저지하고 

미국의 이익에 따른 자본주의 체제의 분단국가였습니다.

이러한 연유로 미국은 국제적인 합의 시도 역시 거부하였고, 후에 

미소공위의 결렬로 나타나게 됩니다.

  

10월 민중항쟁의 배경

  

미군정은 초기 미곡에 대한 자유시장정책을 채택하였습니다.

그결과 시장에서 쌀이 사라지고 미곡가가 크게 폭등하였습니다.

미군정의 식량정책이 실패함에 따라 미군정은 추곡, 하곡에 대해 강제공출과 배급을 시행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도시에 식량부족상태가 일어났고, 높은 물가에 식량난과 생활난이 더욱 가중되었습니다.

심지어 경북 청송지역에는 아사자가 발생하기도 하였습니다.

경제혼란의 가중은 애초 해방과 동시에 떠나가게 된 일본에게도 그 원인이 있습니다.

조선을 떠나는 퇴각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조선총독부는 대량으로 140억 규모의 화폐를 만들고 무작정 살포하게 됩니다.

이것으로 인해 살인적인 물가인상으로 올라가 조선은 막대한 경제손실을

안게 되었습니다.

일본은 떠나는 마지막 순간까지 조선에 악행을 저지른 것입니다.

  

  

아울러 1946년 5월~6월부터 호열자(콜레라)가 창궐하여 경북만 해도 5,348명이 발병하였고 4,332명이 사망하였습니다.

(호열자는 1821 신사년에도 크게 유행했습니다.)

  

당시 바람처럼 일어나 조수처럼 퍼져 항우의 군대가 휩쓸고 지나가는 것 보다 

더 빨랐다는 심노승의 표현에 보이듯 수십만 명의 목숨을 앗아갔습니다.

  

이러한 혼란에 혼란을 더하는 총체적인 문제들이 노동자들에 의해 

1946년 9월 총파업으로 폭발하게 됩니다.

철도국 경성공장으로부터 촉발된 9월 총파업은 4만 철도노동자들의 파업으로

전철도가 마비되었습니다.

대구에서도 9월 23일 오후 3시경 대구철도기관구 노조원 1천2백명이 파업에 돌입하여 ‘대구철도쟁의단‘을 구성하였습니다.

노동자들은 일급제 반대, 가족수당 등임금인상, 식량배급 증대, 해고 절대반대 등을 요구하였습니다.

이 9월총파업은 점차 확대되어, 민중들의 대거참여로 10월인민항쟁의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우편국, 섬유공장, 조선중공업, 전기, 출판노조, 신문사 등 30여 업체의 5,035 명이 파업에 동참한 대구의 총파업은 조직적이고 구체적이었습니다.


한편 9월 30일 철도파업단 본부가 위치한 서울 용산기관구에는 기관총으로 무장한 3천명의 경찰과 깡패 김두한이 이끄는 대한민주청년동맹이 공격하였습니다.

그 결과 파업단 간부 16명, 조합원 1200명이 검거되었으며, 2명이 사망했습니다.

  

대구는 서울에 비하여 대구공동위원회를 통해 좌우의 정치노선이 어느정도 합작을 이루었고 노동조합대구지역평의회(노평) 등 노동운동 조직이 그 역량을 다함에 따라 10월민중항쟁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남한 전역에서 오직 대구만이 파업의 온전한 전개양상을 보였습니다.

  

10월 민중항쟁의 전개

  

요컨대 10월 민중항쟁 직전 당시의 사회상황은 귀환 이재민의 규모가 늘어났고 호열자의 창궐과 더불어 생활난과 식량난이 겹치면서 실업자는 더욱 증대해 갔습니다.

친일파는 지위를 보장받으며 화려하게 부활하였고, 좌우의 대립은 날로 심화되었습니다.

1946년 10월 1일 오전 10시 반경, 9월 총파업으로부터 촉발된 민중항쟁이 드디어 대구에서 일어났습니다.

“배고파 못살겠다. 쌀을 달라!“

1천여명의 대구시민들은 대구부청(대구시청) 앞에서 여성과 어린이들을 중심으로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하였습니다.

경찰이 시위대에 공포를 세 번 발사하자, 시민들은 분노하여 그를 잡아 구타하였고 10여분 거리에 있는 경북도청 광장으로 이동하여 계속 시위를 진행하였습니다.

이 날 오후 5시경 대구역 광장에서는 대구시 투쟁위원회 주최로 ‘전매국 노조 쟁의 지원 시민궐기대회’가 열렸습니다.

이 집회에서는 군중 5~6천명이 운집하였으며, 손기채, 최문식, 이선장, 황태성, 윤장혁 등이 연설을 했습니다.

“쌀 배급 반대”

“일급제 반대”

“박헌영 선생 체포 취소하라”

등의 구호들이 울러퍼지고 모두 해방의 노래, 혁명가를 합창하기도 하였습니다.

  

오후 7시경이 되자 경찰은 이 집회를 무허가 집회라 하며 강제해산 조치하였고 지금의 태평로(금정)일대 부근에서 충돌이 생겨 경찰대가 공포탄을 쏘며 위협했습니다.

그러자 유탄에 어떤 사람이 맞아 도립병원으로 이송되기도 하였습니다.

대구역 광장에서 열린 시민대회는 노동자의 파업이 시민과의 연대로 확산되었고 이로써 민중항쟁의 본격적인 서막이 열리게 됩니다.


이 대구역 광장 시위에서 경찰의 발포로 2명의 시민이 총격을 당해 사망하고 맙니다.

10월 1일 그날 밤, 노동자들을 포함한 수천의 시민들은 철야농성을 하며 자리를 지켰고 시위를 막는 경찰들은 특경대장 이강학의 명령으로 시민들을 향해 사격을 하게 됩니다.

10월 2일 아침이 되자 대륜중학교 학생 배일천은 학생들과 스크럼을 짜고 나와서 거리 시위를 하였습니다.

그러는 중에 경찰의 발포를 목격합니다.

이 날에도 경찰의 발포로 시민 18명, 경찰 4명의 사망자가 발생하였습니다.

미국 국립문서기록 관리청에서 공개한 현장사진들을 보면 촬영된 시신에 24라는 숫자가 표기되어 있어 적어도 24명이 사망했음을 알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확한 사망자는 현재로선 묘연합니다.

이에 대해선 이종하 교수와 유병화 선생의 증언이 있습니다.

  

한편 이 날 오전 9시쯤 대구의대 학생과 교원 150여명으로 구성된 시위대가 철도노동자 김용태님의 시신을 앞세우고 대구의대에서 출발하여 대구사대로 행진하여 대구경찰서로 도착하게 됩니다.

이종하 교수의 증언에 따르면 11시~12시 경 대구 경찰서 앞에 수천명의 남녀학생들이 집결했고 전매국 노동자를 포함한 노종자들, 시민들ᄁᆞ지 합세하여 1만 5천의 인파를 이루었다 합니다.

시위대는 김용태님의 시신을 향해 묵념하고 “경찰 발포 중지, 살인경찰 무장해제, 애국자 석방 등의 구호를 외쳤습니다.

특기할 만 한 것은 이 시위에 신재석 경위 등 일부 경찰들도 동조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남녀노소 연령불문, 직업불문의 많은 시민들이 경찰의 무장해제를 

이루게 됩니다.

  

또 일부의 시민들은 경찰서를 점거하고 유치장에 갇혀 있던 구속자 100여명을

석방했습니다. 

항쟁의 대책위나 시위대 대표단이 통제 할 여유 없이 청년과 학생들이 경찰서를 점거한 것입니다.

이후 오후 1시에 이르러서는 대구 시내 곳곳에 빈민 등 기층 민중들이 봉기를 일으켜 경찰과 관리를 살해하거나 친일 우익인사의 사택을 공격하게 됩니다.

경찰서 앞에서는 여전히 학생들이 연좌시위를 벌이고 있었습니다.

오후 3시 경 미군이 장갑차를 앞세워 진압하자 시위대는 해산을 하게 됩니다.

미군의 무력 진압에 대구 항쟁이 진압되어 가자 다시 이 민중항쟁은 경북의 22개군으로 뻗어나가게 됩니다.

특히 대구와 가까운 달성군, 영천, 칠곡, 성주에서는 격렬한 항쟁이 있었고 영천에서는 군수 이태수가 구타를 당한 후 숨만 붙어 있다가 민중들에 의해 그대로 생화장에 처해지기도 하였습니다.


미군정은 군인과 경찰을 동원하여 민중들을 사살하였습니다.

10월 민중항쟁은 12월까지 전국으로 번져나가 각지에서 일어났습니다.

미군정은 우익세력과 함께 끝까지 시위 참가자들을 추적하여 많은 학살을

자행했습니다.

6.25를 전후로 하여 국민보도연맹과 엮어 2,30만명으로까지 추정되는 많은 국민들이 학살을 당했습니다.

학살된 국민들의 수는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친일 전향 단체 대화숙을 모방하여 대국민 사상통제 목적으로 만들어진 이 국민보도연맹은 공무원들이 실적을 올리기 위해 사람가리지 않고 가입을 받았습니다.

결국 6.25 발발후 국민보도연맹에 가입된 사람들이 북한군에 협조할 것이라는

이승만 정권의 판단아래 전국 각지에서 무차별 학살을 하게 된 것입니다.

  

성격 및 의의

  

10월 민중항쟁은 미완의 혁명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 어떤 이는 폭동내지 소요라 하며 10월 민중항쟁을 평가합니다.

소요(騷擾) : 많은 이들이 떠들썩하게 들고 일어나 술렁거림.

폭동(暴動) : 집단적 폭력행위로 사회의 질서와 안녕을 문란케 하는 것.

  

그러나 10월 민중항쟁의 성격을 분석해보면 일제때부터 친일세력의 폭압에 억눌려 신음해 왔던 민중들이 민족.민중의 손에 의한 진정한 해방을 이루기 위하여 맞서 싸워 저항했던 하나의 민족해방운동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는 갑오년의 동학농민운동과 삼일만세혁명의 맥을 계승한 것이기도 합니다.

또한 민중항쟁의 지도부에서 활동했던 사람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일제시대에 신간회 활동, 6.10만세운동을 주도한 학생운동(한일청, 임종업), 적색노조, 적색비밀결사, 건국동맹 등 심지어 3.1만세운동에도 참여했던 분들이 있습니다.

신간회는 1927년 2월, 이상재, 홍명희, 안재홍, 허헌, 김병로 등 사회주의자들, 민족주의자들이 이념에 상관없이 창립한 단체입니다.

장차 나라의 독립을 위한 민족협동전선이 현실화된 것입니다.

윤장혁, 한일청, 임종업, 정시명, 임장훈, 박상희, 류연술, 이준태, 안상길 등이 신간회 출신입니다.

이를 통해 민족해방투쟁 즉 독립운동을 했던 사람들이 8.15 해방 직후 좌익의 

핵심적 간부로 활동했다는 것과 10월 민중항쟁에 참가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0월 민중항쟁은 농촌지역에서는 다소 그 방법이 폭력을 동반한 과격한 형태로 발생하기도 하였지만 좌익조직의 지휘와 지도가 무색하게 수많은 학생,노동자들, 지식인들 나이와 계층을 불문하고 온 민중이 참가한 민족해방운동이었습니다.

친일파 제거와 우리 스스로 자치할 것을 요구하고 미군정의 사상적, 정치적 탄압에 저항한 이 10월 민중항쟁은 오늘 날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많은 의미들을 부여해 줍니다.

오늘 날 우리는 과연 광복을 이룬 진정한 자주국가입니까?

  

빛 - 류돈하

  

어둠이 내려져 암흑이던 그날

봉황은 어디에 숨어 울었으랴.

하늘 오르던 이무기 떨어지고

무너진 산은 강을 메웠네.

  

성현과 영웅은 오간데 없고 금수도 흔적없어

신선과 귀신도 떠난 곳

처량한 땅은 오랑캐 세상이 되었구나.

  

오직 한사람 있어

무서운 규모에서 자라나 붓과 칼로 홀로 이 터전 지켰네.

변하지 않는 마음 굳건하니 충신의사 기상 살아나 

지주(砥柱)되었어라.

  

하늘은 감복하여 다시 일월을 빛나게 하네. 

오랑캐의 더러운 덕 다시 찾은 일월의 빛남에 굴복하고 

길 잃은 기린 다시 나타나 땅위 달리니 

지주 된 그 한사람의 이름 바로 육사 이원록이라네.

  

~ 언암 류돈하 ~





기사등록 : 김영숙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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