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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돈하 역사칼럼, '10.1 민중항쟁의 성격 및 의의(意義)'

이순락기자 0 7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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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 재야청년사학자 언암 류돈하 ~


<성격 및 의의(意義)>


10.1 대구 민중항쟁은 대구경북 77, 전국 230만 인원이 참가한

대규모 항쟁이었다.

이는 기미년 3.1 만세운동 이후 최고 규모의 항쟁이다.

10.1 민중항쟁은 미완의 혁명이자 수많은 사람들이 학살로 희생된

슬픈 역사이다.

아직 진상규명이 이루어지지 않아 피해자들의 명예 역시 회복되지 못했다.

그 유족들의 아픔과 상처는 더 말할 나위 없다.

혹자는 10.1 민중항쟁을 폭동 내지 소요라 평가한다.

소요와 폭동의 사전적 의미는 다음과 같다.

소요(騷擾) : 많은 이들이 떠들썩하게 들고 일어나 술렁거림.

폭동(暴動) : 집단적 폭력행위로 사회의 질서와 안녕을 문란케 하는 것.

 

그러나 10월 민중항쟁의 성격을 분석해보면 일제 때부터 친일세력의 폭압에 억눌려 신음해 왔던 민중들이 해방이후에도 그 폭압이 계속되자

민족·민중의 손에 의한 진정한 해방을 이루기 위하여 맞서 싸워 저항했던 하나의 민족해방운동이다.

즉 독립운동의 연장선상에 있다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이는 갑오년의 동학농민운동과 삼일만세혁명의 맥을 계승한 것이기도 하다.

 

또한 민중항쟁 당시 지도부에서 활동했던 사람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일제시대에 신간회 활동, 6.10만세운동을 주도한 농민운동(이준태, 안상길),

학생운동(한일청, 임종업), 적색노조, 적색비밀결사, 건국동맹 등

심지어 3.1만세운동에도 참여했던 분들이 있다.

 

예컨대 신간회는 19272, 이상재, 홍명희, 안재홍, 허헌, 김병로 등

사회주의자들, 비타협 민족주의자들이 이념에 상관없이 창립한 단체이다.

기회주의와 다를 바 없는 자치론자들을 제외하고 장차 나라의 독립을

위한 민족협동전선이 현실화된 것이다.

대구경북에서 활동한 윤장혁, 한일청, 임종업, 정시명, 임장훈, 박상희,

류연술, 이준태, 안상길 등의 인물들도 신간회 출신이다.

 

 

이를 통해 민족해방투쟁 즉 독립운동을 했던 사람들이 8.15 해방 직후

10월 민중항쟁에 참가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항쟁이 농촌지역에서는 다소 그 방법이 폭력을 동반한 봉기의 형태로

발생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살피자면 진보세력의 지휘와 지도가 무색하게

수많은 학생, 노동자들, 지식인들 나이와 계층을 불문하고 온 민중이 참가한

민족해방운동이었다.

 

이 항쟁의 여파는 여·순 항쟁, 제주 4.3항쟁에도 큰 파급을 주기도 하였다.

친일파 제거와 우리 스스로 자치할 것을 요구하고 미군정의 사상적,

정치적 탄압에 저항한 이 10월 민중항쟁은 오늘 날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많은 의미들을 부여해 준다.

 

그 의미들을 두 가지로 축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일본에게서 해방된 후 우리는 우리 스스로 자주국가를

수립하지 못했고 민족이 남과 북으로 분단되는 상황을 맞이하게 된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이 조선에 쳐들어와 전황이 불리하자 명나라의 원병이

들어왔다.

조선은 이순신, 권율, 곽재우 등의 걸출한 명장과 의병, 승병 등

백성들의 노력으로 일본군을 궁지로 내몰았다.

그러나 명나라는 자국의 이익을 위해 일본과 강화를 진행하게 되면서

전쟁의 당사자인 조선은 제외하고 명과 일본만이 전쟁의 주체로

둔갑되었다.

 

우리 스스로 우리의 운명을 결정할 수 없는 약소국으로 전락한 것이다.

이러한 구도는 구한말 우리를 병탄하는 과정에서부터 미군정기까지

다시 한 번 재현된다.

물론 아직까지 강대국들에게 둘러싸여 분단국가에 머물러 있는 우리는

과연 광복을 이룬 진정한 자주국가인가라는 질문 앞에 자유롭지 못하다.

 

둘째 대구경북은 한국이 일본에게 병탄 당하자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항일독립운동에 참여하여 위국진충을 다하였다.

바로 항일독립운동의 성지라 할 수 있다.

항일독립운동의 성지이면서 그 연장선상에 있는 민중항쟁이 일어난 곳이다.

 

그 맥은 이후에도 이어져 2.28민주화운동, 민청학련, 인혁당사건등

민주주의 운동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연유로 대구에서 촉발된 10.1민중항쟁은 한국 현대사의 뿌리라고도 할 수 있다.

10.1 민중항쟁의 진상을 정확히 규명하는 것은 앞으로도 계속되어야 한다.

또 많은 연구 또한 필요하다.

그러함으로써 희생자들의 원통함을 풀어주는 것과 동시에 한국 현대사의 첫머리를 있는 그대로 복원하는 것이다.

 

~ 언암 류돈하 쓰다 ~

 




기사등록 : 김영숙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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