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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돈하 역사칼럼, ‘퇴계 이황 탄신절’

이순락기자 0 6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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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 재야청년사학자 언암 류돈하 ~


~18(음력 128)은 문순공 퇴계 이황 선생 520주년 탄신절! ~

 

천원권 지폐에 나오는 퇴계 이황은 지금의 안동 도산면(예안) 사람이었어요.

 

퇴계 이황의 어머니 춘천박씨 부인이 막내아들 퇴계를 잉태 했을 때 당시 거주하던 노송정 대문에 공자가 자신의 제자들을 이끌고 들어오는 꿈을 꾸었다고 합니다.

바로 태몽이지요.

 

그래서 훗날 퇴계의 제자 학봉 김성일은 이 노송정(현재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대문에 '성림문聖臨門'이라 이름 붙였다 합니다.

성인이 임하신 문이다라는 뜻입니다.

박씨 부인은 이 꿈을 꾸고 퇴계를 낳으셨어요.

 

그런데 퇴계의 아버지 이식 선생은 퇴계가 태어난지 일곱 달 만에 돌아가셨어요.

박씨부인은 혼자서 7남매를 도맡아 기르셨어야 했습니다.

 

아기퇴계는 총명하고 성품이 온순하며 늘 공손했다고 합니다.

아기퇴계가 8살이던 어느 날이었어요.

아기퇴계의 친형님이 칼을 다루다가 손가락을 베어서 피를 흘리고 있었어요.

그렇지만 친형님은 울지 않았답니다.

이것을 본 아기 퇴계가 매우 슬피 울었다 합니다.

그러자 박씨 부인께서 물으셨어요.

"야이야~왜 그쿠로 우노? 너 형이 칼에 비인는데 니가 어애 그쿠로 우노?"

퇴계는 울면서 박씨부인께 말씀드렸어요.

"형이 저쿠로 피를 마이 흘리는데 어애 안아프겐니껴"

성모 박씨부인은 막내아들의 이런저런 일들을 겪고 막내아들을 어여삐 여기면서도 한편으로는 걱정스러워 했어요.

그래서 너무 걱정이 되어 막내아들에게 이렇게 말했어요.

"야이야 너는 과거급제해서 벼슬을 해도 현감만 하는기 제일이따.

세상이 니 성품을 감당을 할동 모할동 모를따.."

 

그러나 어릴적부터 총명하고 박학한 퇴계는 늘 경()을 실천하며 학문의 이치를 찾았어요.

12살이 된 소년퇴계는 삼촌 송재 이우에게 논어를 배웠어요.

삼촌에게 처음으로 배우게 된 것은 7살 때부터였죠.

송재는 학문을 가르칠 때 칭찬해 주는 것이 적었고 엄하게 가르쳤어요.

그러나 송재도 퇴계를 가르칠 때에는 어린 조카의 학습력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답니다.

송재는 조카들인 온계 이해, 퇴계 이황을 가르치고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어요.

우리 형님은 죽어도 죽은 것이 아니다. 우리 집안을 지탱해 줄 아이는 이황이다.”

 

23세 청년이 된 청년퇴계는 성균관에 올라가 공부했어요.

그 당시는 기묘사화 직후라서 그런지 몰라도 태학생(성균관 유생)들이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모여서 서로 잡담만 주고받고 누가 조금이라도 나무라는 소릴 하면 꼰대라고 여기던 풍조가 있었어요.

하지만 청년 퇴계는 중국 남송의 학자 진덕수가 쓴 심경(心經)을 엄한 아버지처럼 여기며 차근차근 독실하게 공부했지요.

남이 비웃든 말든 아주 열심히 공부했어요.

 

청년 퇴계는 33살이 되어서도 다시 성균관에 올라가 공부를 했고 이 무렵에

호남지역의 명사 하서 김인후를 만났습니다.

둘은 서로서로 사이가 좋았어요.

나이가 9살 어린 하서는 퇴계를 매우 존경하였다고 합니다.

퇴계는 다음해인 153434세의 나이로 문과에 급제해 첫 벼슬길에 나가게 되었어요.

승문원 권지부정자가 퇴계의 첫 벼슬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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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퇴계 이황선생 ~


퇴계는 이로부터 70세에 죽는 순간까지 임금님으로부터 100번 가까이 관직생활을 하라는 부름을 받았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퇴계 선생은 79번의 사직상소를 올리면서 벼슬하기를 꺼려하였고 틈만 나면 고향으로 돌아와 공부에 매진했어요.

퇴계의 어머니 박씨부인은 퇴계에게 현감벼슬만 하라고 했으나

1품 판중추부사, 의정부 우찬성(정승이 되기 위해 거치는 준정승급 관직)까지 지냈습니다.

 

퇴계는 자신의 문하에 많은 제자들을 두었답니다.

임금님에서부터 대장장이까지 지위의 높고 낮음을 전혀 생각지 않고 모두 제자로 받아주어서 착하고 어진사람이 되도록 가르쳤답니다.

퇴계는 자신의 제자들에게 과거급제를 목표로 한 공부를 가르치지 않았어요.

그래서 퇴계에게 실망하여 과거급제를 전문적으로 가르치는 선생을 찾아 떠난 제자들도 있었어요.

 

그런데도 퇴계의 제자들 중에는 고관대작을 지낸 분들이 굉장히 많았습니다.

하지만 높은 벼슬자리에 오른다고 훌륭한 것이 아니라 나라와 사회 즉

공동체를 위해 어떻게 살았는지가 더 중요하겠죠?

 

퇴계의 제자들은 대부분 임진왜란이라는 전대미문의 큰 환란을 맞이하여

도망가지 않고 슬기롭게 안간힘을 다 하여 극복하는데 노력하였습니다.

이것은 임진왜란에만 그친 게 아니라 나라가 위기에 빠져 매우 힘들어할 때

퇴계의 후학들은 때맞춰 이를 구하는데 헌신하였어요.

 

퇴계선생은 입신양명만 중요시하는 공부를 싫어하셨어요.

사람으로 태어나 사람답고 바르게 살며 착하고 어진 사람이 되는 법을

학문의 목표로 정했어요.

그래서 퇴계선생과 같은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에서 지금에 이르기까지

퇴계선생을 대학자라 부르고 성인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퇴계선생이 태어나신지 520년이 지났어요.

공자, 예수, 석가는 세상에 다시없는 고귀한 성인들이지만 우리 땅에서 나고 자란 우리성인 퇴계 선생의 탄신절도 한번쯤 생각해보는 것은 어떨까요?

온 누리 누리에 퇴계 선생의 도와 가르침으로 착하고 어진 사람이 널리널리 생겼으면 좋겠어요~

사람을 사랑하는 인()의 정신이 온누리에 두루두루 가득해진다면 사람사는 세상이 멀리 있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 언암 류돈하 쓰다 ~ 



기사등록 : 김영숙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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