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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돈하 역사칼럼, 태종우(太宗雨)

이순락기자 0 4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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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 재야청년사학자 도경당 류돈하 ~


태종 이방원하면 많은 키워드가 연상된다. '헌영의 치'로써 조선왕조 5백년의 기틀을 다진 군주인데다 파란만장한 생애를 가진 매력적인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떤 키워드가 연상될까? 태종이방원은 알려진 바대로 이성계의 아들들 중 최초의 문과급제자이다.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인 그는 선죽교에서 포은 정몽주를 격살하여 조선왕조 개국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연이어 제2차 왕자의 난에서 승리하여 둘째형 이방과의 양자가 되어 세자로 책봉되었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조선의 세번째 임금이 되었다.


왕이 되어서는 재상중심의 운영체제인 의정부서사제를 국왕중심의 운영체제인 육조직계제로 이끌었다. 또 사병혁파, 호패법 실시, 신문고 설치, 노비변정도감의 지속적 시행, 혼일역대강리국도지도의 제작, 신분을 가리지 않은 인재등용, 대마도정벌은 태종 이방원에게 있어 중요한 키워드이다. 권력을 쟁취하는 과정과 권신.외척의 숙청에서 태종의 냉혹한 면모가 그를 인간백정으로 규정하는 것으로 이야기되곤 하지만 태종의 통치가 없었다면 세종의 시대는 열리지 않았을 것이다.

 

태종하면 연상되는 것중에 태종우(太宗雨)가 있다. 연려실기술에 의하면 태종이 승하할 무렵 극심한 가뭄이 계속되자 죽어서 하늘로 올라가면 반드시 비를 내리게 하겠다고 하였다. 태종이 생을 마친 1422년 음력 510일에 마침 비가 내렸다. 이후에도 매년 태종의 기일에 맞추어 비가 내렸는데 이 비가 바로 태종우이다. 태종우에 관한 기록은 연려실기술보다 더 앞선 기록에도 목격된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 정유년(1597) 510일 자에 목격되고 문장공 우복 정경세 선생의 문집 우복집에도 목격된다.

 

난중일기가 자고로 비가 내렸다며 간단히 언급하는 반면 우복집에는 비교적 상세히 언급된다. 우복선생은 1614년 갑인년은 봄부터 비가 오지 않아 가뭄이 심했다고 밝히며 510 일에 하루종일 비가 내렸다고 했다. 이어서 가뭄을 해소케 하는 이 단비를 태종우라 부르며 태종의 덕을 칭송하는 시를 지었다. "하늘에서는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 잊지 않아 비를 내려 마른 풀들 소생케 하네"[天心未忘愛 雨意欲蘇枯] 우복선생은 이 시의 마무리를 "(가뭄에 지친) 만백성들의 탄식을 위로하소서."[滿慰四郊吁]로 매듭지었다. 민본을 바탕으로 둔 선생의 애민정신이 이 시에 깃들었다고 할 것이다. 태종우가 과학적으로 증명될수 있는가 없는가보다 태종우 일화에 담긴 애민정신은 세종의 치세가 바로 증명하는 것이라 여긴다.


도경당 류돈하 쓰다

 




기사등록 : 김영숙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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