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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돈하 역사칼럼, "국궁진췌 사이후이2"

이순락기자 0 17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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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 재야청년사학자 도경당 류돈하 ~


왕산의 순국은 실로 급하였다. 이완용 등 매국노의 주도에 의해서이다. 한때 나라의 고관을 지낸 선비를 서둘러 그 목숨을 빼앗은 것은 그만큼 일본이 왕산 등 선비 유림들의 의병활동이 대한제국 사회에 미치는 막강한 파급력을 두려워하고 있다는 반증이라고 할 수 있겠다. 왕산 허위의 순국 후 수제자 고헌 박상진이 그 시신을 수습하여 반장하였다. 이에 종로의 상인들이 자발적으로 장례용품을 마련하였다. 그리고 임시로 지천 방암산에서 왕산의 장례가 치루어졌다.


왕산의 수제자 고헌(固軒) 박상진(朴尚鎮: 1884~1921.울산출신)이 왕산의 문하로 들어온 것은 1898년이었다. 석주에게 수제자 추산 권기일이 있었다면 왕산에게는 고헌이 있었다. 고헌은 스승에게 배운 바대로 스승의 순국후에도 광복운동에 매진하여 조선국권회복단, 대한광복회를 조직하고 무장항쟁을 펼쳐 나갔다. 또 일본에 협력하는 친일파 부호들을 처단하기도 하였다. 그러한 연유로 1918년 체포되어 대구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고헌의 나이 겨우 38세였다.


왕산의 순국은 온 나라사람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등박문을 척살한 의사 안중근은 왕산을 일컫어 고관 중 충신이라 하며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허위와 같이 진충갈력과 용맹의 기상을 동포 이천만이 가졌다면 오늘의 굴욕을 받지않았을 것이다.“ 의사 안중근의 평대로 고관대작 중에 나라를 생각하는 우국지사가 과연 드물었다. 그 중에 고관 왕산 허위(旺山 許蔿)은 양심을 지켜 충심을 다하였다. 국궁진췌 사이후이하여 위국진충을 다 한 것이다.


생각컨대 구한말 고위관료이자 항일의병장인 왕산 허위 (旺山 許蔿)선생은 그야말로 시대의 선비였다. 그의 집안은 3대에 걸쳐 14명의 독립운동유공자를 배출한 '구국명문가'이다. 석주 이상룡 선생의 집안과 더불어 4세에 걸쳐 5공의 재상을 배출했다는 중국한나라의 원소의 가문에 비길 바가 아니며 숱한 대신들과 권세가들을 낳은 후안동 김씨 가문 역시 비기지 못한다. 왕산과 석주의 집안의 역사를 논하자면 숙연한 마음이 아니 들 수 없다.


왕산 허선생은 고조가 허박(許璞), 증조가 허돈인데 이 허돈(許暾:1753~1815)이 바로 구미 임은동 김해허씨 입향조이다. 허돈의 후손들을 임은허씨라고 한다. 허돈은 허운, 허임, 허좌 등의 아들을 두었다. 허운은 허조를 낳고 허조는 허훈, 허신, 허겸, 허위 네 아들을 두었으니 방산 허훈(許薰 舫山)은 왕산 허위에게 있어 큰형 즉 백씨이다. 그는 성재 허전(許傳:1797~1886. 양천허씨로 숭록대부 병조참의 역임)과 계당 류주목(서애 류성룡의 9대손이자 낙파 류후조의 아들.)의 문인이다. 그 학통을 따지자면 한강 정구에서부터 시작하여 미수 허목을 거쳐 실학의 중조 성호 이익으로 대표되는 근기남인과 아울러 서애 류성룡의 학통에 속했으며 그 장인이 바로 성산이씨 한주 이진상 선생이다. 근기남인과 영남학파의 학맥을 동시에 이어받은 방산은 영남유림의 거목으로 갑오왜란 이후 석주 이상룡의 외삼촌 권세연의 편지를 받고 1896년 4월 청송에서 창의하여 진보의진을 결성하였다.


한 가지 특기할 만한 것은 방산허선생은 두 아우 성산 허겸, 왕산 허위에게 전답 3천여 두락을 전달하여 의병구국활동의 군자금으로 쓰게 하였다. 그리하여 왕산은 김산의진을 창의할 수 있었다. 방산은 아우들과 더불어 의병활동을 전개한 후에 도산서원과 병산서원의 원장으로 추대되기도 하였다. 방산의 장손자 중산 허종(重山 許鍾:1883~1949)은 숙조부인 성산 허겸(방산의 아우)과 함께 신민회 활동을 하였으며 서로군정서의 군자금을 모금하는데에 참여하기도 했다. 허종의 아들이 대구시장을 지낸 허흡이며 허흡의 손자가 청와대 행정관을 역임한 허소이다.


왕산 집안 즉 임은허씨의 광복운동은 방산, 성산, 왕산 삼산형제의 가족뿐 아니라 삼산형제의 사촌인 범산 허형의 가족들을 포함한다. 그래서 온 집안이 광복운동에 헌신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특히 임청각 종손 석주 이상룡의 집안과 임은허씨는 겹사돈 집안이었다. 석주의 외아들 동구 이준형은 막내딸 이후석을 왕산의 막내아들 허국과 혼인시켜 사위로 맞아들였다. 게다가 범산 허형의 손녀이자 일창 허발의 따님 허은은 석주의 하나밖에 없는 손자 이병화와 혼인을 하여 임청각 19대 종부가 되었다. 허은 종부의 고모가 바로 육사 이원록 선생의 어머니 허길 선생이다. 이 밖에도 방산 삼형제의 어머니와 동구 이준형의 부인은 진성이씨 퇴계의 후손이며, 범산의 부인역시 퇴계의 후손이다.


왕산의 집안 즉 임은허씨는 전술한 바대로 우당 이회영, 석주 이상룡, 향산 이만도의 집안과 마찬가지로 온 가족이 광복운동에 헌신한 집안이다. 왕산의 순국 후 왕산의 가족들은 일본의 탄압을 피해 서간도.연해주 등지로 이주하여 독립운동의 전초기지를 건설하였다. 왕산은 허학, 허영, 허준, 허국 네아들을 두었다. 그 장남 박경 허학(博卿 許壆)은 21세부터 부친 왕산과 함께 의병활동을 펼쳤으며 부친의 순국 후 만주로 올라갔다. 그 곳에서도 서로군정서에서 활동하며 독립군으로 광복운동을 지속하였다. 서간도, 북만주, 연해주 지역은 서로 거리가 광활한데도 이 곳에서 활동하다가 1937년 이후 소련 스탈린 정권의 강제이주로 머나먼 카자흐스탄으로 옮겨졌다. 그리고 1940년 감옥에서 순국하였다.


왕산의 막내아들이자 박경의 막내동생 허국도 연해주에서 활동하다가 우즈베키스탄으로 강제이주 당했다.(허국은 5남 4녀를 두었다.) 왕산의 직계가족은 그 드넓은 지역에서 광복운동에 헌신하느라 서로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다. 또 강제이주로 인하여 원치않는 디아스포라 역시 겪어야만 했다. 그러한 까닭에 왕산의 네아들의 자녀들은 서로 사촌의 얼굴은커녕 그 존재조차 모르며 각자의 삶을 이어 나갔다. 그러면서도 일본의 끈질긴 탄압과 추적은 계속되었다. 2021년 12월 26일에 별세한 허로자 선생은 박경 허학의 따님이고 아직 정정한 허경성 선생은 왕산의 차남 허영의 아드님이다.


국궁진췌 사이후이를 실천한 임은 허씨 왕산의 집안은 풍비박산이 났다. 그야말로 온집안이 광복운동에 헌신였다. 그러한 까닭에 풍비박산이 났고 가족의 일부는 원치 않는 디아스포라까지 겪어야만 했다. 왕산이 순국한 1908년에서 1945년까지 일본의 끈질긴 탄압과 핍박은 그칠줄 몰랐다. 1945년 8월 15일 조국이 해방을 맞이한 후에도 이승만 등 남한 지배층과 정치이념이 다르다 하여 국내의 후손들은 감시를 당해야 했으며, 해외의 후손들은 외면과 냉대를 받았었다. 온 집안의 구성원들이 위국진충을 한 그 댓가는 실로 비참하다. 누구보다도 존경을 받아야 하며 그 누구보다도 합당한 예우를 받아야 함이 마땅한 것 아니겠는가. 친일의 적폐들이 그대로 남아 기득권을 누리며 그 기반을 굳게 다질 때 그들은 가난과 냉대 속에 고난스러운 삶을 이어받아 지속해야만 했다. 이 굴절된 역사를 어찌 잊겠는가.


4355년 1월 6일 갈와 류돈하 記하다.

(참고문헌)

석주유고동구선생문집/서애류성룡문집/고종실록/순종실록/한말전기의병아직도 내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이육사의 독립운동목숨바쳐 나라를 사랑한 선비 허위/코리안디아스포라/대구 항일독립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안동사람들의 항일투쟁



기사등록 : 김영숙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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