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돈하 역사칼럼, '석주 이상룡의 망명-임청각에서의 마지막'
서기 1910년(경술년) 8월 대한제국은 일본에 의해 강제 병합되어 국권을 잃었다. 전국의 많은 선비들이 자정순국을 통해 죽음으로 항거하였다.
그로부터 몇달 후인 서기 1911년 1월 5일 안동 법흥동의 고성이씨 참판공파 종손 석주 이상룡은 새벽에 일찍 일어났다. 종손 석주의 하루는 종택 임청각의 사당에서 절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사당에서의 참배를 마치고 아우 덕초 이봉희, 그리고 2명의 당숙과 함께 집안일을 논하였다. 곧 종손이 요동으로 떠나기 때문이다.
요동은 단군조선과 고구려의 옛 땅이다. 석주는 만주에 대해 살고 있는 백성들이 비록 복제가 다르고 언어가 다르나 그 선조가 동일한 종족이다라고 하였다. 또 같은 강의 남북에 서로 거주하면서 아무 장애없이 지냈으니, 이역으로 여길 수 없는 땅이라 덧붙였다.
주나라 문왕의 조부 고공단보가 식솔을 이끌고 기산의 아래 옮긴 것과 전국말기 진나라의 제왕 전횡이 5백여명과 함께 해도로 이주한 것과 마찬가지로 석주는 망명을 실행하였다.
석주는 신민회에서 여러 동지들과의 논의를 거쳐 광복기지를 세울 것을 결의했다.
드디어 망명을 결심하였고 자금을 마련하는 등 망명준비를 마치고, 1911년 1월 4일에는 조촐한 잔치를 열며 거국음율시 1수를 지었다. 결코 국치를 당하여 구차히 삶을 도모하기 위해 떠나는 망명이 아니었다.
석주가 살던 집 임청각을 떠나기 전 법흥동 내 마을사람들이 모여 그를 전송하였고, 그는 증언지의(贈言之義)로서 당부하는 말을 남겼다.
1. 정신을 보전하라.
2. 말을 삼가하라.
3. 행동거지를 살펴라.
4. 교육을 부지런히 하라.
5. 내실있는 일에 힘쓰라.
총 다섯가지였다.
새벽에 일어난 석주는 긴 하루를 마치고 저녁무렵에 행장을 수습하여 마침내 집을 나섰다. 친척일가들이 모두 눈물로서 전송하였다. 그가 가르치던 도동서숙의 학생들도 울음을 머금으며 작별의 정을 나누었다. 여러 학생들은 무어라 말을 하지 못했다.
임청각을 나선 석주는 그날로부터 서거할때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나라를 되찾기 전에는 다시 돌아오지 않겠노라 한 것이다. 석주가 임청각에서 마지막 날을 보낸 것은 1911년 1월 5일이었다.
~도경당 류돈하 쓰다 ~
기사등록 : 이순락기자 / gbmnew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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