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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돈하 역사 칼럼, "나의 임진왜란 답사기"

이순락기자 0 9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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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 재야청년사학자 류돈하 ~

울산 학성공원을 다녀왔다.
울산학성공원은 원래 신라의 계변성이었다 한다.
본디 산의 이름은 신두성인데 통일신라때에 신선이 학을 타고 내려왔다 하여 그때부터 학성이라 이름한 것이었으나 정작 학성이란 이름이 정착된 것은 조선 후기부터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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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당시에는 왜장 가등청정(加藤淸正:가토 기요마사)이 왜성인 도산성을 쌓은 곳이다.

도산성은 정유재란 발발 후인 1597년 12월 23일 조선군과 명나라의 조명연합군과 왜군이 격전을 벌인 최대의 격전지이다.
이 격전이 제 1차 울산성 전투이다.
실제로 가서 맞은편 충의사에 올라가 전체를 보았다.
과연 징비록에 적힌 대로 울산군 동쪽 바닷가의 험준한 곳이었다.
충의사는 조명연합군 수뇌부들이 진영을 쳐서 도산성을 내려다보며 작전회의를 벌였던 곳이라 한다.
당시 이 전투에서 조선 지휘부에는 도원수 권율, 경상좌병사 고언백, 경상우병사 정기룡, 충청병사 이시언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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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 지휘부는 경리 양호, 제독, 마귀, 이방춘 오유충, 고책 등이 있었다.
조선군은 1만명을 거느렸고 명군은 3만 8천여명이었다.
죽을 힘을 다해 결사항전하던 도산성의 왜군은 모리 히데모토의 1만 6천여명을 가지고 있었다.
이 떄에 가토기요마사는 울주의 서생포 왜성에 있었고 모리 히데모토의 군대와는 번갈아 교대하며 수비하였다.

서생포 왜성과 울산성(도산성)과의 거리는 15km였다.
일본은 전쟁이 장기전으로 흐르자 조선의 경상도 남부 특히 울산과 부산을 중심으로
조선 현지주민들을 동원해 주둔지에 왜성을 쌓아 수비를 공고히 하고자 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 발발 후 일본이 충청도 직산까지 진격했으나 임진년, 계사년의 전황과 달리 조선군과 명나라의 원병의 저지로 인하여 계속 남쪽으로 후퇴하였고 울산은 왜군에게 있어
최후의 보루와도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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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성의 길이는 1300m, 높이는 10~15m에 달하였고 토제[土堤:흙으로 쌓아 만든둑]와 목책으로
2중, 3중의 방비로 철옹성을 이루게 하였다.
또한 태화강을 끼고 있어 성 밑에 배가 다녀 해로와도 직접 연결되었다.
울산성 본성터까지 올라가서 직접 살펴보니 성의 구조가 험준한 지형을 이용하여 매우 견고하게 쌓아 놓았다는 것을 확인 할 수 있었다.

도산성 본성 출입구가 이 성의 특징인 ㄱ자 마스가다 고구치(升形虎口:승형호구)로 이루어져 있었다.
안과 밖을 연결하며 안으로 꺾어져 외부에서는 내부를 보기가 어려운 구조였다.
훗날 가토기요마사는 일본으로 돌아가 구마모토 성을 축성했는데 도산성을 만든 방식 그대로 쌓았다 한다.
한가지 가슴 아픈 것은 이 도산성이나 구마모토 성 모두 왜군에 의해 징발된 조선울산 백성들이 축성에 참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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험준한 지형을 이용해 쌓아진 견고한 철옹성인 도산성을 두고 조명연합군은 5만여명의 군사를 동원하여 탈환하려 하였다.
왜군은 빼앗기지 않으려고 결사적인 항전을 하였다.

1597년 12월 23일~ 1598년 1월 4일까지 보름 남짓 벌어진 울산성 제 1차 전투애서 왜군은독안에 든 쥐 신세가 되었다.
조명연합군은 식수까지 단수하는 전략으로 왜군을 압박하는 상황에서 왜군은 식량과 식수가 모두 고갈되었다.
왜군 조총수들은 생쌀 한홉만이 하루의 식사량이었고 식량.식수난에 말까지 잡아야 했으며,
벽흙까지 끓여먹거나 말의 피까지 마셔야 했다.
심지어는 오줌까지 받아마시면서 굶주림에 죽을 시간만을 기다렸다.

처참한 굶주림에 이어 조선의 냉혹한 추위까지 더하여 얼어서 죽는 왜군도 많았다.
지금도 가등청정의 자취가 남은 구마모토 성 주위에 말고기를 파는 식당이 많은 것은 결코 이와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조명연합군은 맹렬한 공격을 퍼부으며 포위하였다.
독안에 든 쥐 신세가 된 왜군은 결코 만만하지 않았다.
쥐가 궁지에 몰리면 무는 법이니 조명연합군의 피해도 상당하였다.
왜군은 결사항전을 벌이면서 구원병을 기다렸고 명나라 측의 회담에 응하는 척 시간을 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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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양산성의 흑전장정, 소서행장, 우희다가수 등 2만의 왜군 원병이 태화강에 도착해 조명연합군을 역포위하였다.
성밑에 조선군의 시체가 산을 이룰 정도로 조선군 1만 중에 살아남아 경주로 집결한 병사는 겨우 800명에 불과하였다.
명국군의 전사자는 천여명 정도 되었다.
결사적인 방어에 성공한 왜군도 움직일 수 있는 자가 겨우 수백명 뿐이었다.
최대의 혈전을 벌인 제1차 울산성전투는 조명연합군의 퇴각으로 왜군이 승리하였다 하여도 그것은 상처입은 승리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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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일본에서는 이 전투를 벽제관전투, 칠천량해전, 사천전투 등과 더불어
중요하게 다루고 있으며 승리한 전투라 생각한다.
특히 '청정고려진 비망록' 이란 일본 사료에는 가등청정의 담대함을 찬양하며 미화하고 있다.

제 2차 울산성 전투는 1598년 9월 22일~26일까지 이 곳에서 다시 이루어진 격전이었다.
이 전투에서 조선군 부원수 선거이(宣居怡) 장군이 향년 49세로 전사하였다.
선거이 장군은 조선군 부원수로 행주산성과 한산도대첩에 모두 참전하여 유일하게 공을 세운
조선의 명장이자 영웅이다.
바다에는 이순신, 육지에는 선거이란 당대의 평가가 있을 정도이며, 충무공 이순신이 전우로 생각하며 각별히 여겼던 장군이었음에도 임진왜란을 다룬 영화, 드라마에는 아직 한번도 등장하지 않은 인물이다.
학성공원 입구에는 조선군 대표 장수와 명나라 대표 장수의 동상이 서 있었다.
2017년 울산 중구청에서 각 나라를 대표한다는 취지에서 가토기요마사의 동상을 건립하려 한 논란을 일으킨 적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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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요마사의 동상건립은 끝내 주민들과 국민들의 반대에 의해 무산되었다.
[조선장수의 동상은 권율, 명나라장수의 동상은 양호(楊鎬)]

학성공원을 둘러본 후 맞은 편 조선군의 진영이 있었던 자리에 세워진 충의사로 향하여
향을 사르고 참배하였다.
충의사는 왜적과 맞서 싸운 울산의 의사들을 기리기 위해 1997년 세워졌으며 울산의 사 242위의 위패를 봉인하였다.
또 이름없이 싸우다 전사한 무명용사들의 신위인 무명제공신위도 함께 봉안하여 울산시민들의 제향이 오늘날 이어지고 있다.


(조명연합군이 더불어 왜적과 싸운 곳이어서 그런지 학성공원 건너편에 '중국식품 소채 의산품 초시'라는 점포가 자리하고 있음이 특별하게 느껴진다.
충의사에서 한가지 특이한 것은 신위 중에 영양천씨 시조 천만리도 있었다.
영양천씨 족보와 고종실록에는 명나라의 수위사 겸 총독장(守衛使兼總督將)이라 하였으나 여기서는 왠일인지 그 직함을 찾아 볼 수 없었다. )

#기록되지않은분들도기억하겠습니다!!!
 



기사등록 : 이순락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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