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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돈하 역사칼럼, 안사의 난과 인천이씨

이순락기자 0 102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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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 재야 청년사학자 도경당 류돈하 ~ 


서기 755년 11월, 중국 당나라에서는 삼진절도사(범양,하동,평로) 안록산(安祿山)이 범양에서 난을 일으켰다.


권신 양국충을 토벌한다는 명분에서였다.

양국충은 당시 이융기가 총애하던 귀비 양옥환의 6촌 오빠이다. 

양옥환은 원래 이융기의 아들 수왕 이모의 처였으나 미모가 아름답고 출중하여 이융기가 아들에게서 빼앗아 취한 여인이다. 

이는 이융기의 조부 고종 이치가 아버지 태종 이세민의 후궁 측천무후 무조를 취한 것과 대비된다. 

서기 740년 22세의 양옥환은 57세인 시아버지 이융기와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고 이융기는 양옥환에게 빠져 측근에서 자신을 모시던 환관 고력사에게 국정을 맡기고는 아예 돌보지 않았다. 


이때부터 개원의 치로 불리는 전성시절은 사라지게 된다.

안록산은 본디 이란계 소그드 사람으로 이민족출신이었다. 

안록산은 이융기와 그 애첩 양귀비의 총애를 받아 동평군왕에 봉해지고 평로.범양.하동 등 삼진절도사에 제수되었다. 


중국 동북부를 지배하는 절도사가 되면서 이미 747년부터 하서절도사 왕충사로부터 꾸준히 역모혐의를 받아왔다.

그러다 양귀비의 6촌 오빠 우상右相 양국충과 갈등을 빚었으며, 양국충 타도를 표면적으로 내걸어 휘하 15만의 군사로 반란을 일으켰다. 


군사들의 구성 중에 해족, 거란족도 포함되었다.

처음에는 안록산의 난을 믿지 않았던 당나라 국왕 현종 이융기는 기어이 난이 일어나자 한족출신인 봉상청을 범양절도사로 삼아 난을 진압케 하였다. 


그러나 봉상청이 범수전투에서 패배하자 당나라의 최고명장이자 고구려 유민 출신 고선지(高仙芝)를 밀운군공에 봉하고 토적부원수로 삼아 안록산의 난을 진압케 하였다.


당시 고선지는 751년 탈라스 전투의 패배로 장안성에 우우림 대장군 겸 어사대부로 머물러 있었다.

실질적으로 난을 평정하는 총사령관의 임무를 부여받은 고선지는 섬주를 방어하였다. 

이 때 패퇴한 봉상청이 10여기의 기병을 이끌고 섬주로 도망와서 고선지에게 의탁하였다. 

봉상청은 이전부터 오랫동안 고선지의 부하로 활동해온 장수로서 충성심이 강하였다. 

고선지의 군대에 합류한 봉상청은 고선지와 의논하여 당나라의 수도 장안성의 동쪽에 있는 동관으로 퇴각하였다. 


고선지는 동관을 요새화하여 수도 장안을 지키고자 하였다.

장안과 가까운 동관이 전략적 요충지였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고선지는 동관으로 퇴각하기 직전 반란군에게 많은 재물들이 넘어 갈까 염려하여 

태원창이라는 군수물품 창고의 관물들을 병사들에게 나누어 주었으며 태원창을 소각하였다. 

안록산의 반란군은 파죽지세의 기세로 755년 12월 드디어 낙양성을 함락시켰으나 고선지의 일사불란하고 안정적인 수비로 동관은 굳게 지켜질 수 있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수도 장안성은 동관의 효과적인 방어로 안전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감문장군으로 고선지의 군대를 감찰했던 환관 변령성은 고선지를 모함하여 이융기에게 조작된 보고를 하였다.

섬주에서 동관으로 퇴각한 일과 고선지가 병사들에게 태원창의 관물을 나눠준 일을 빌미삼아 이융기에게 모함한 것이다. 

고선지가 태원창의 관물을 휘하 병사들에게 나누어 주고 불태운 것은 적에게 재물이 넘어 갈 것을 염려하여 실행한 것인 만큼 이는 고구려의 청야전술과 비슷한 맥락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변령성은 이를 재물을 훔친 것으로 조작하여 이융기에게 상주하였다. 


변령성은 본래 고선지가 토번을 정벌할 당시만 하더라도 안서절도사 부몽영찰(夫蒙??)에게 미움을 받던 고선지를 위기에서 구해준 적도 있었다.

하지만 고선지가 변령성의 사사로운 부탁을 응해 주지 않아 고선지에게 앙심을 품고 적대적으로 

대했다고 '구당서 고선지 열전'은 전한다. 


변령성의 조작된 보고를 접한 이융기는 분노하였다.

740년 이후 양귀비에게 푹 빠진데다 고령으로 인해 판단력이 흐려진 이융기였다. 

분노한 이융기는 군중에서 고선지와 봉상청을 처형 할 것을 명하였다. 


이융기의 명을 받은 변령성은 백명의 칼잡이를 대동하고 먼저 봉상청을 죽인 후 고선지를 처형했다.


고선지는 처형직전 몰려든 자신의 군사들에게 "내게 죄가 있다면 너희들은 그렇다고 하여라.

그러나 죄가 없다면 원통하다고 함성을 발사하라" 고 하였다. 

그러자 군사들의 함성이 동관을 진동케 하였다. 


"원통하다(枉)!"


고선지의 죽음은 실로 원통한 것이었다.

고구려의 유민으로 태어나 당나라의 장군으로 활약하며 당나라 조정에 충성을 다 바친 한 사나이의 최후는 이토록 원통하고 허망하게 끝났다. 

마치 영화의 한장면 같은 이 이야기는 모두 '구당서 고선지 열전'에 나온다. 

토적부원수 고선지에 대한 신뢰가 굳건했던 군사들이 고선지의 명 한마디에 이융기의 처형명령을 거부하고 저항했다면 당나라 역사는 또 어떤 방향으로 흘러갔을지 모른다. 

그러나 고선지는 그러지 않았다. 

자신의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그렇게 최후를 맞이했다. 


고선지의 허망한 죽음 이후 가서한이 그 뒤를 이어 토적부원수가 되었다.

전황은 점점 당나라 조정에 불리한 국면으로 전개되었다. 

한편 낙양을 점령한 안록산은 756년 정월에 국호를 대연이라 하고 연호를 성무라 하여 스스로 황위에 올랐다. 


황제가 된 안록산의 군대는 기세를 몰아 동관을 함락시켰으며 두려움에 떨던 당나라 조정과 당나라 황제 이융기는 결국 서촉으로 피난을 떠나게 된다.


때는 756년 6월 13일..

현종 이융기가 피난 갈때 따로 떨어진 태자 이형(훗날의 당숙종)은 삭방진, 안서사진, 하서진 등 서북쪽 일대의 번진들을 중심으로 주축으로 삼아 군을 재건하는데 힘을 기울였다. 


이형은 곧 추대를 받아 756년 7월, 영무(靈武:현재의 영하자치구)에서 즉위를 한다.

이융기가 피난을 가고 보름이 지난 후에 안록산은 당나라의 수도 장안마저 함락시킨다. 

장안이 함락될 때 고선지를 죽인 환관 변령성이 황궁의 열쇠를 들고 안록산 군에게 항복을 하였다. 

험하디 험한 사천성 성도(중국 삼국시절 한나라의 왕족 유비가 촉을 세워 수도로 삼은 곳)로 향하던 이융기는 마외역(馬嵬驛)에 이르자 호위하던 병사들이 굶주림에 분노하여 양국충과 양귀비를 안록산의 난이 일어나게 한 원흉으로 삼아 이들을 죽일 것을 거세게 요구하였다. 


병사들은 먼저 양국충을 죽인 후 그 목을 역문 밖에 내걸었으며 이번에는 양귀비의 죽음을 요구하였다.


망설이던 이융기는 마침내 자신의 애첩 양귀비를 목을 매달아 자살토록 한다.

이처럼 당나라의 존망이 위급할때에 반란을 평정하기 위해 출현했던 인물이 삭방절도사 곽자의와 그 휘하 이광필이었으며 하북의 평로치청에서는 고선지와 같은 고구려유민출신 이정기가 있었다.


안록산의 난은 757년 안록산이 자신의 차남 안경서에게 살해당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아버지를 죽이고 황위에 오른 안경서는 2년 뒤 아버지의 부하 사사명에게 살해 당하게 된다.

안록산의 반란군을 장악한 사사명이 다시 반란의 전면에 나서게 됨에 따라 이를 묶어 안사의 난이라 한다. 


그러나 사사명 역시 761년 자신의 아들 사조의에게 살해당하고 만다.

당나라 군대는 삭방절도사 곽자의의 맹활약과 위구르(회홀回紇)세력의 지원에 힘입어 사조의 군에게 반격을 가하였고 757년 9월 장안성을 탈환하게 된다. 


이때 회홀은 장안성 탈환 후 약탈을 조건으로 출병을 허락했고 당나라는 굴욕적으로 이를 약속해버렸다.


탈환 후 이융기의 적황손이자 숙종 이형의 큰 아들 대종 이예(代宗 李豫726~779)가 회홀 칸의 아들 섭호의 말 앞에 엎드려 눈물로서 약탈을 중지해 줄 것을 간청했으나 회홀은 대규모 약탈 후에도 비단과 명주 1만필을 받고서야 군대를 철수하였다.


회홀이 군대를 물린 후에도 당의 황제 숙종 이형은 해마다 회홀에게 명주 2만필을 조공으로 바치기로 하였다.


이들은 낙양탈환때까지 갖은 횡포를 부리며 1만에 달하는 백성들을 살륙하였다.

이렇듯 극심한 내란에 뜻하지 않은 외세 이민족까지 끌여들인 당은 안록산 군 내부의 분열로 

숙종이 죽고 대종 이예가 즉위하고서야 겨우 난을 평정할 수 있었다. 


당은 이예의 즉위 후인 763년 사조의의 근거지 낙양을 함락시키게 된다.

사조의는 낙양함락 후 도망을 다니던 중 부하 전승사(田承嗣), 이회선(李懷仙)에게 배신 당해 자살을 하였고 이로서 8년간에 걸친 안사의 난은 간신히 평정되었다. 

그러나 당나라의 피해는 막심했다. 

이 기이하고 괴상한 안사의 난으로 인해 7백 여 만명의 사람들이 죽었고 건국이래 줄기차게 전성시절을 구가하였던 당나라의 국운을 완전히 쇠하게 하였다. 


물론 안사의 난 이후 당나라가 144년을 더 유지하지만 안사의 난은 당나라 멸망의 단초가 된다 할수 있을 것이다.

당나라의 근간을 이루는 균전제, 부병제, 조용조 등의 율령제가 안사의 난 이후 파괴되었고 

중앙에서는 이보국, 정원진, 어조은 등 환관들이 득세하여 국정을 농단하여 횡포를 부렸다. 

각 지방에서는 번진세력들이 난립하였고 특히 고구려출신 이정기의 평로치청은 그 기세가 맹렬하여 아예 산동성을 중심으로 제(齊)라는 나라를 형성하기도 했다. 


이정기는 당에 의해 평로치청절도관찰사 해운압신라발해양번사가 되었는데 특히 발해와 신라의 해상교통로와 무역로를 장악하였다

특히 치주, 청주, 제주, 해주, 등주, 내주, 기주, 밀주, 덕주, 체주, 조주, 복주, 서주, 연주, 운주 등의 영토를 차지하였다. 


그가 차지한 영토에서는 막대한 염전이 있었고 이 곳에서 생산되는 소금량은 당나라 전체 소금 생산량의 절반에 해당되는 것이었다.


또한 발해와의 무역을 통해 많은 명마를 사고 팔았다.

이정기 세력은 소금뿐만 아니라 비단, 철, 곡물 등 풍부한 자원과 600만여명에 달하는 인구를 바탕으로 사실상 독립왕국 제나라를 이루는데 이르렀다. 

이 제나라 때문에 당나라 황제 덕종 이괄이 수도 장안을 버리고 봉천(奉天:장안의 서북쪽 80㎞)까지 도망가는 사태가 일어나기도 했다. 


아무튼 이 안사의 난은 당나라의 국력을 대내외적으로 크게 쇠락하는 영향을 끼쳤다.

당나라 서남의 토번은 안사의 난 와중에 당의 하서와 농우 지역을 점령하였고 763년 10월에는 토번원수 달락궁(達樂宮)이 20만 군대로 장안을 함락시켜 약탈을 자행하였다. 


또 당나라 고종 이치의 증손자 광무왕(廣武王) 이승굉(李承宏: 이승굉의 가계:당고종-장회태자 이현-빈왕 이수례-이승굉)을 추대하여 많은 당나라 기술자들과 보물들을 본국으로 실어 보냈다.


이 때 당황제 대종 이예는 섬주로 피난하였고 곽자의를 장안에 보내어 곽자의가 의병지계로 겨우 간신히 물리칠 수 있었다.


한편 이 시기 당의 동북에서는 고구려인들이 다시 세운 나라 발해가 그 국운이 융성하여 전성시절을 맞이하였다.

당에서는 안사의 난이 진행될 때 일본은 이틈을 타서 발해와 동맹을 맺어 신라를 칠 구상을 하기도 하였다. 

안사의 난 이후 국정운영능력이 파괴된 당나라 내부는 이처럼 국제사회에서도 그 주도권을 잃게 되었다. 


한편 험하고 척박한 서촉으로 피난을 가서 사랑하던 며느리이자 애첩 양귀비마저 저승으로 떠나보낸 이융기에게 매우 반가운 손님이 찾아온다.

바로 당나라의 동쪽 반도 한귀퉁이에 있는 신라국의 사신이었다. 

양자강을 건너 거슬러 올라가 성도에 도달하기까지 그 여정은 매우 급박한 것이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경덕왕조 기사에도 전하듯 위급하고 어려울때 자신을 찾아온 이 고마운 신라국 사신에게 친히 5언 10운시를 지어 주면서 신라왕이 예악과 대의명분을 잃지 않았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을 찾아준 고마운 신라 사신 아찬 허기에게 자신의 성씨인 이씨 성을 하사해 주었으니 이 이허기가 바로 인천이씨(경원이씨) 시조이다.

원래 허씨는 김해김씨 시조 김수로왕과 허황옥의 후손들인데 김수로왕이 자신의 아들들 중 한명에게 외부에서 온 허황옥의 성씨를 따르게 하여 허씨가 분적하게 된 것이다. 

김해김씨에서 분적된 이 허씨가 인천이씨의 본래 뿌리이다. 


인천이씨의 태동은 이렇게 안사의 난 와중에 비롯된다.

한 가문의 새로운 태동과 더불어 안사의 난 이후 신라는 고구려와 제나라와는 다른 양상으로 국가적 이익을 보게 된다. 

당이 어려울때 사신을 보내 위로해준 신라에게 당은 신라에 대한 예우를 최상위급으로 해주었다. 

이에 따라 신라의 많은 유학생들이 당나라에서 자유롭게 공부를 할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 

귀족의 자제들 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 차별받던 6두품 출신들도 대거 당으로 유학하였다. 


신라삼최 최치원.최승우.최언위 모두 당유학파 출신이다.

이렇듯 안사의 난 이후 당나라 국내는 물론 주변국 및 동아시아 정세에 커다란 변화를 불러 일으켰다. 


<참고문헌>

삼국사기 신라본기.열전 

고려사 절요 

신당서 열전 

발해국지장편 

장군과 제왕 

고선지 평전 

고구려 유민의 나라 제와 당, 그리고 신라.발해.일본 교류사 

고구려.백제 유민 이야기 

중국 속 고구려왕국 제 

중국역대황제 

오천이문화 평전 

인천이씨 공도공파 문중 자료 




기사등록 : 이순락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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