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중보 칼럼, "윤석열은 왜 이재명을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가?"
~ 국립금오공과대학교 연구원 박중보 박사 ~
인조에게는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그리고 29세 연하의 자의대비가 있었다. 장남 소현세자가 먼저 죽는 바람에 둘째인 봉림대군이 효종이 되었다. 그 당시 여당은 서인이고 야당은 남인이었다. 1659년 효종이 죽자 소위 예송논쟁이 시작되었다. 서인은 효종이 둘째이기 때문에 주자가례에 의해서 자의대비의 상복을 1년만 입어야 한다. 야당인 남인은 왕이기 때문에 국조오례의에 의해서 3년을 입어야 한다. 나이 어린 현종은 서인의 손을 들어주었다. 이를 기해예송이라 하고 서인이 계속 집권을 하였다. 1674년 효종의 비가 죽었다. 이번에도 서인은 둘째이기 때문에 사대부의 예에 준하는 9개월 복상을, 남인은 왕이기 때문에 1년 복상을 주장하였다. 머리가 굵어진 현종은 남인의 손을 들어 주었다. 이를 갑인예송이라고 하고 남인이 여당이 되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서인과 남인은 서로 존재를 인정하고 상호 비판적인 공존 체제를 구축하였다. 서로가 공도(公道)의 실현에 노력하는 정파(政派)라는 것을 인정하는 토대 위에 정국을 운영하였다.
1680년 남인의 영의정 허적이 조부 시호 축하 잔치에 임금이 사용하던 유막(야외천막)을 허락 없이 사용했다가 숙종으로부터 숙청을 당하였다. 이를 경신환국으로 하고 서인이 정권을 잡았다. 1689년 숙종이 후궁 장희빈으로부터 아들을 얻자 원자로 책봉하려고 하니까 서인의 당대표 송시열이 인현왕후가 젊은 데 시기상조라고 했다가 사약을 받았다. 이를 기사환국으로 하고 다시 남인이 여당이 되었다. 1694년 첫사랑이 그리운 숙종이 인현왕후를 복위시키려고 하니 남인이 반대하자 남인을 숙청하였다. 이를 갑술환국이라 하고 서인이 정권을 잡았다. 환국정치는 니 죽고 나 살자 식이였다. 이 폐해가 워낙 심각하여 영조와 정조가 대를 이어 탕평책을 내놓을 정도였다.
이런 환국정치가 시기와 상황이 다르지만 지금 윤석렬이 정국운영과 닮은 점이 있다. 대화와 타협은 없고 맘에 들지 않으면 적 일 뿐이다. 윤석렬은 이재명을 국정운영의 파트너가 아니라 정적 제거의 대상일 뿐이다. 검찰은 300회가 넘는 압수 수색과 수 차례의 소환 그리고 별건 별건으로 조사하였다. 과거의 예로 보면 심리적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한강물이나 절벽에서 투신을 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이재명은 단식을 하면서 더욱 단단하고 굵어졌다. 윤석렬과 한동훈이가 사람을 잘못 본 것이다.
윤석렬은 왜 이재명을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가?
아마 태생적인 환경에서 기인하지 않았나 싶다. 윤석렬은 넉넉한 가정에서 서울법대를 나와서 사법고시에 검사에 검찰총장까지 지냈다. 하늘 아래 눈에 보이는 게 없고 정치 사회적으로 아무리 높고 굵은 인사라도 그 앞에서 눈을 깔고 머리를 조아려야 한다. 그런데 대선 상대 후보자는 변호사 출신이지만 학교도 제대로 나오지 못한 공돌이 출신에 불과하였다. 이런 하찮은 녀석과 경쟁한다는 것이 여간 불쾌하고 자존심 상하지 않았다. 대통령이 되면 확 밟아 버려야 할 미물에 불과하였다. 그 역할을 한동훈이 맡았다.
윤석렬과 한동훈은 한 가지 몰랐던 점이 있다. 민주당은 군사독재 정권 시절부터 빨갱이 간첩으로 매도되면서 수많은 탄압과 시련으로 단련되어 온 사람들이다. 검찰이 심리적 고문을 가한다고 해서 꼬리를 내릴 위인들이 아니다. 이재명이가 죽으면 뒤를 이을 사람들이 줄을 서 있다. 핵폐기물 방류 지지로 신판 조선총독으로, 독립투사를 빨갱이로, 정의 구현하는 수사단장을 항명 수괴죄로, 죄지은 놈을 조기 사면시켜 출마를 시키지 않나, 예쁘고 참한 짓은 골라서 다하고 있다. 윤석렬은 이쯤 해서 이재명을 국정운영의 파트너로 인정하고 대우해 주는 것이 임기라도 채우는 데 도움이 될 성싶다.
2023.10.9 한글날에 쓰다
기사등록 : 이순락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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