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대 단상(斷想) - 신성리 갈대밭에서
~ 필자 김진철 목사, 충남 서천군 화양면 오순교회 담임 ~
“갈대밭에 달을 보러 가자는데...”
나는 그 말을 들었을 때까지 달이 뜨는 밤에 갈대밭에 간다는 것은 생각지도 못했다. 가을날씨가 너무 좋다며 바람 쐬러 가자는 어느 목사님을 따라 나섰다가 저녁을 먹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그는 걸려 온 전화를 받더니 ‘갈대밭에 달 보러 가잔다’고 하면서 어이가 없다는 듯 막 웃었다. 나도 덩달아 웃었다.
웃다가 나는 “달이 뜰 때 갈대밭을 갈 수도 있구나.” 마치 새삼스러운 발견을 한 것처럼 되물었다. 금강하구둑 주차장에서 만나 뜬금없는 그 제안을 화제 삼아 웃고 떠들면서 신성리 갈대밭으로 갔다.
캄캄하고 고요한 갈대밭에 아직 달은 뜨지 않았다. 달이 뜨기를 기다리며 갈대밭 근처가 고향인 그들은 옛 이야기들을 하기 시작했다. 갈꽃이 핀 갈대의 아름다움과 갈꽃으로 만든 빗자루, 금강하구둑이 만들어진 후 거의 사라져 버린 참게와 우어(웅어, 위어)이야기들을 이어가면서 즐거운 추억 보따리를 풀어놓았다.
갈대밭에 나갔다가 물어 들어오는 줄도 모르고 있다가 죽은 사람의 이야기, 누군가 죽을 뻔 했던 이야기, 홍수가 나 강이 범람했던 이야기와 배를 타고 군산을 다녔던 이야기들, 듬성듬성 보이는 별보다 더 많은 비행기들의 반짝이는 불빛을 세면서 이야기꽃을 피우고 노래를 불렀다.
그날 밤 달은 뜨지 않았다. 달이 뜨지 않는 이유가 낮에 화창했던 날씨가 저녁에 흐려져서 그렇다거나 아직 시간이 일러서라며 옥신각신하다가 <누군가 달을 잡아먹었다>고 결론을 내리고 돌아왔다.
영화와 드라마의 촬영지로 유명세를 타고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영화와 드라마 이야기를 하며 인증사진을 찍는 신성리 갈대밭. 금강과 갈대밭이 삶의 터전이고 놀이의 터전이었던 사람들, 진짜 주인공들의 이야기와 노래는 어리로 가버린 것일까? 그래서인지 밤의 갈대밭은 서럽고 애잔하다.
“신성리 갈대밭에서 아침을 기다렸다.”
아침 해가 떠오르는 것처럼 새 역사도 시원하게 오면 좋으련만, 산모의 고통보다 더한 진통이라니...진리의 깃발이 찢기고, 밟히고 침묵을 강요당하던 시절의 어둠을 걷어내고 아침을 가져오려던 안병무교수님의 글을 되새겨보았다.
아침은 그냥 오지 않았다. 연약한 갈대가 위대한 갈대가 되는 것은 생각하는 갈대가 되고, 그 생각하는 갈대가 말하고 행동하는 갈대가 될 때 비로소 아침은 시작된다는 것을 일깨워주신다. 새 역사의 아침을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황금빛 눈부신 아침이 밝아오기를, 아침을 시샘해서 잠간 부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기를.....
“사람은 생각하는 갈대라고 한 파스칼의 말을 사람들은 왜 오래 기억할까. 이 말에는 정직한 인간고백이 포함돼 있기 때문이리라. 그는 갈대를 심미(審美)의 대상으로 말한 것이 아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질 무상(無常)의 상징으로 본 것이다.
그러나 상황에 따라서는 존재론적인 무상성보다 그 나약성을 더 강조한 것으로 말할 수도 있다. 바람이 불면 부는대로 어쩔 수 없이 이리 휘고 저리 휘어야만 하는 그 나약성 말이다. 인류, 세계, 조직, 국가, 민족, 이데올로기 또는 대중이라는 이름을 가진 집단 또는 전체주의적 바람에 개인은 한갓 갈대에 불과하다.
그러나 인간은 갈대처럼 힘 앞에 무능하면서도 생각한다는 데서 자기 동일성을 찾는다. ‘생각한다. 그런 고로 나는 존재한다’이다.
생각하는 것은 누가 줄 수도 뺏을 수도 없는 권리다. 옳은 말이다. 그러나 이것도 상황에 따라서는 전혀 다른 뜻으로 들린다.
그것은 두 가지 측면에서 문제된다. 첫째는 정말 인간은 생각할 권리를 가졌느냐 하는 것이다. 이 질문은 두 가지 측면에서 하는 말이다. 하나는 오늘날과 같은 매스컴의 횡포시대에 누가 자기 생각을 주체적으로 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사상적 범죄라는 것이 불온사상 또는 반동사상이라는 명목으로 엄연히 재판석 공소문에서 낭독되고 있지 않느냐 하는 것이다.
둘째는, 그것은 원래 존재론적 인간정의이지만 오늘에 와서는 비겁한 은둔자의 자기 변명으로 들릴 수 있다는 것이다. 생각하는 것까지는 아무도 제재할 수 없다. 그러나 그 생각하는 바를 글로나 행동으로 표시할 자유가 없는 상황에서는 이 말처럼 아편과 같은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이 없을 수도있다.
그러므로 존재론적 사유(思惟)는 역사과학적 사고에 의해 맹렬한 비판을 받고 있으며 역사과학적 사고는 사회 경제적 사고에로 구체화한 것을 강요받고 있으며 나아가서는 사고는 행동에 그 우선권의 이양 또는 폐위를 강요받고 있다.”(안병무 사람으로 살기 위하여서 중에서)
기사등록 : 이순락기자 / gbmnew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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