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 > 열린광장 > 여행
여행

【김기훈박사의 구미역사문화】구미시 해평면의 전주최씨(全州崔氏) 가문의 역사를 만나보다 - 2편

조은자기자 0 31560

1646c578582fff1ceaa33bce4c11631c_1576339141_2278.jpg

필자: 경북대 정치학박사, 경북대 평화문제연구소 연구위원, 구미회 부회장, 구미새로넷방송 시청자위원

해평 전주최씨가 유명한 만석꾼으로 알려지게 되면서 당시 경주의 경주최씨 최부자가 해평의 최씨에게 누가 더 돈이 많느냐? 하는 내기를 제의하자 해평 전주최씨 또한 내기에 응했는데, 내기는 서울까지 돈을 누가 더 많이 가져 가느냐였다고 한다. 경주의 최부자는 당나귀와 말, 머슴들에게 돈을 자루 가득 담아 말과 당나귀에 실을 수 있대로 실어 한양에 가는 것이었고, 해평의 전주최씨는 당나귀 한 마리에 머슴 2~3명이 고작이었다. 그래서 경주 최부자가 처음 시작할 때는 해평 전주최씨를 비웃었다.

 

하지만 상주 낙동 문경새재 수안보 충주 경기도 여주와 이천에 가서는 경주 최부자가 해평 전주 최씨들에게 내가 내기에서 졌네했다고 한다. 해평 전주최씨들의 내기에서 이긴 방법은 각 지역에 당도할 때마다 그 지역의 소작농들에게 내가 언제쯤 거기 갈 것이니 돈을 가져 오느라하였다는 것이다. 그 정도로 해평 전주최씨들은 전국에 막대한 부를 소유하고 있었고, 이러한 막대한 부를 소유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5형제가 분업이라는 경영관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5형제 중 첫째 아들은 집안의 대소사를 관리하고, 셋째 아들은 대과에 급제함으로서 벼슬길로 나가고, 둘째 아들과 넷째아들, 다섯째 아들은 낙동강의 수로를 이용한 소금과 곡식을 판매하는 상업을 하였고, 당시 경영관리가 없던 시절에 각자 분업화된 경영으로 경제적 효율을 극대화할 수 있었다.

지금도 소가 비싸지만 당시에는 지금보다도 훨씬 더 비쌌을 것이다. 그리고 그 당시에는 소가 없으면 농사를 지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 귀한 소를 해평 전주최씨 가문에서는 항상 소고기와 소다리를 부엌에 걸어 놓고 전국에서 찾아 오는 손님들에게 극진히 대접했다고 한다. 상상만으로도 얼마나 부자였겠는가? 이 가문만의 특별한 국수가 있었다고 한다. 국수를 만드는 시간이 3시간이 걸린다고 하니 이 국수의 맛은 대단히 특별 했을 것이다. 지금은 아쉽게도 먹을 수가 없다.

  

그러나 조선말 일제 강점기를 거치며 나라가 쇠락하고 망하듯이 해평 최씨 가문도 쇠락의 길을 걷게 된다. 일본의 침략은 군사적·정치적 침략분만 아니라 경제적 침략 또한 노골적으로 이루어졌다. 일본은 한국의 식량과 토지를 수탈하기 위해 동양척식주식회사를 세우고, 식량을 일본으로 가져가기 위해 조선의 대부호뿐만 아니라 소작농의 토지와 식량도 수탈했다. 이러한 구미지역 최대의 피해자가 해평 전주최씨 가문이었다.

 

이러한 시대에 중심에 있었던 사람이 바로 인재 최현 선생의 종손인 운파 최관호(雲坡 崔觀浩)선생이였다. 최관호 선생은 1905년에 태어나 1925년 선산지역에서 청년운동을 전개하면서 좌우합작운동인 신간회(新幹會)를 만들었다. 그러나 최관호는 일제의 강압과 감시가 노골화되면서 중국으로 망명하여 북경대학에서 공부를 하였고, 독학으로 5개 국어를 할 줄 아는 대단한 엘리트였다.

 

그리고 1930년 만주에서 만몽일보(滿蒙日報)를 창간하여 민족이여 각성하라라는 사설을 게재하다가 일본 경찰에 붙잡혀 국내로 강제 송환되었다. 1934년 동아일보 선산지국 기자로 활동하면서 민족시인 이육사등과 함께 활동하다가 경찰에 체포되어 가택 연금되었다가 1944년 몽양 여운형(夢陽 呂運亨)과 심산 김창숙(心山 金昌淑)이 주도한 건국동맹(建國同盟)에 활동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고, 1945815일 해방되면서 816일 석방된다.

 

그러나 1945년 해방정국에서 3년간의 미군정이 들어서면서 친일파들을 대거 미군정에 바로 기용하면서 발생되는 1946101일 대구의 10월 사태가 발생하면서 당시 구미·선산 지역에도 소요가 발생했다. 지역에서도 친일활동을 한 인물들에 대한 분노가 극에 달하여 폭력적 사태로 치달아 가는 것을 최관호 선생이 앞장서서 군중들을 설득하여 평화적으로 해결하였다.

 

그러나 19461017일 최관호 선생에 대한 강한 불만이 있었던 자가 최관호 선생을 공산주의자라고 밀고를 함으로서 서울에서 경찰들이 내려와 최관호 선생을 해평지서로 강제 연행하게 된다. 이러한 소식을 전해들은 가족과 지인들은 최관호 구명을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였지만 끝내 해평지서 앞에서 재판도 없이 총살되었다최관호 선생을 구명하기 위해 당시 수도경찰청장이던 창랑 장택상(滄浪 張澤相)에게 연락을 하여 장택상이 당장 운파 최관호를 석방해라라고 해평지서에 연락했지만, 이 연락이 닿기도 전에 운파 최관호 선생은 이미 총살되었던 것이다.

 

당시 민족주의자들이나 조국의 미래를 걱정하던 엘리트들이 나라를 빼앗긴 조국에서 불행한 삶을 살았던 것이 대부분이었던 것처럼 운파 최관호 역시 그러한 삶의 궤적을 피할 수는 없었다. 이 비극은 운파 최관호로 끝나지 않고 남은 가족들에게 좌익이라는 꼬리표를 붙여 가족들과 후손들은 좋은 학교를 나와도 공직으로 나갈 수가 없는 연좌제의 굴레를 쓰고 살아 왔을 것이라고 필자는 추측한다.

 

이러한 비극적인 삶은 고스란히 가족과 후손들에게 남겨줬을 것이다. 특히 인재 최현선생의 종손이며 최관호선생의 손자인 최세훈(崔世薰)종손은 필자의 물음에 많은 것을 대답하지만 한탄스러운 역사를 원망하고 평생을 살아왔을 것이다.

 

최세훈(76) 종손은 당시 대한민국 최고 명문 고등학교인 경북고등학교를 나와 서울대학교를 3년 다니다가 집안형편이 어려워 중퇴를 했다. 최세훈 종손은 지금 인재 최현선생의 행적을 알리고, 운파 최관호 할아버지의 억울한 삶을 재조명하기 위해 종손으로서 갖은 노력을 다하고 있다.


  1646c578582fff1ceaa33bce4c11631c_1576339346_2486.jpg

<인재 최현선생의 종손이자 운파 최관호의 손자 최세훈씨>
 

당시 1945년 해방정국에서 정부수립 1948까지 3년간 미군정이 해방된 한국을 지배했는데 미국의 이익과 배치되는 인물들은 모두 암살되거나 제거되었다. 건국동맹을 주도하고 건국준비위원회를 이끌던 몽양 여운형선생 역시 암살되었다. 독립운동을 하고 해방정국에서의 몽양 여운형의 정치적 스펙트럼은 중도좌파 정도로 분류되어지는 것이 최근 학계의 결론이다.

 

그리고 한국의 손꼽히는 독립운동가 심산 김창숙 선생은 해방되기 전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감옥에서 수감생활과 일본경찰들의 고문으로 두 다리를 제대로 쓰지 못하자 운파 최관호 선생이 심산 김창숙 선생을 업고 다니면서 각종 일을 도왔다는 것을 볼 때 운파 최관호 선생은 분명히 좌익 활동을 깊게 관여하지는 않았다고 필자는 판단한다

중도 우파로 분류되는 심산 김창숙은 우리나라 좌우를 막론하고 독립운동의 선구자였으며, 어떠한 진영에서도 그를 존경했으며 당시 사회에서 누구도 무시하지 못하는 존재였다당시 심산 김창숙은 영남 유학의 계보를 잇는 대학자이기도 했기 때문에 서울에서 전국 유림들의 지지와 지원을 받아 성균관대학을 설립하고 초대 총장이 된 분이다. 

 

그러나 심산 김창숙은 김구와 함께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였으며 이승만 정권의 독재정치를 끝까지 반대하는 활동을 하다가 강제로 구금되었다. 이러한 심산 김창숙을 업고 다니며 생활했던 최관호 선생이 과연 그렇게 공산주의자였을까? 하는 생각이 필자의 머리속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또 하나의 예는 1927년 신간회 활동이다. 신간회는 좌우익 세력이 합작하여 결성된 대표적인 항일단체로 민족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이 협력하여 창립한 민족운동단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신간회 선산지회를 창립하는데 참여한 것으로 볼 때 최관호 선생을 좌익으로 몰아가는 것은 크게 잘 못되었다고 하겠다.

 

마지막으로 최관호 선생이 해평지서에 체포되어 총살되는 것을 막기 위해 수도경찰청장 장택상에게 연락이 닿았다는 것이고, 장택상은 최관호를 총살시키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다는 것이다. 당시 미군정은 일본에 협력한 경찰을 숙청하지 않고 그대로 채용하였고, 이러한 형태는 이승만 정부에서도 여전하였다. 당시 경찰들은 본인들이 살기 위해 본인들에게 불평불만이 있는 사람들을 마음대로 처리했다. 

 

따라서 친일경찰들은 자기들의 지위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수많은 민족주의자들을 좌익과 공산주의자로 매도하여 체포구금과 혼란한 정국을 이용하여 암살하거나 제거하였다. 아마 최관호 선생도 이러한 시대의 희생양이 아니었을까 하는 필자의 생각이다최관호 선생을 재조명하고, 당시 억울한 죽음에 대해 지금까지 제대로 말하지 못하다가 201748일에 지역의 뜻있는 사람들과  손자 최세훈씨그리고 추모사업회 최열회장이 운파 최관호 선생에 대한 한 많은 추모제를 하였다.


기사등록 : 조은자기자
# [경북미디어뉴스]의 모든 기사와 사진은 저작권법에 따라 무단전재시 저작권료를 청구할 수 있습니다.
0 Comments

Facebook Twitter GooglePlus KakaoStory KakaoTalk NaverB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