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훈박사의 구미역사문화】구미시 해평면의 전주최씨(全州崔氏) 가문의 역사를 만나보다 - 1편
필자: 경북대 정치학박사, 경북대 평화문제연구소 연구위원, 구미회 부회장, 구미새로넷방송 시청자위원
필자는 항상 지역에 살면서 조상들에 대한 빚과 그들의 행적을 밝혀 줄 의무가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 올해부터 시간이 허락하는 한 구미지역에 훌륭한 가문과 인물들을 찾아 알리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구미 역사·문화기행문을 한번 써보고자 하는 간절함이 있는 것이 필자의 솔직한 마음이다.
그리고 생활이 바쁘다는 핑계로 잘 모르고, 지나치는 곳의 역사와 문화를 찾아 구미시민들에게 알리는 것이 필자의 몫이라고 생각하여 그 첫 번째로 구미 해평면 전주최씨 가문을 선택했다. 낙동강의 북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숭선대교를 넘어 해평으로 가는 동안 눈앞에 넓게 펼쳐지는 들판이 바다와 같았다. 그래서 해평(海平)이라고 이름지어졌을 것이라 추측한다.
한국에서 해평을 본관으로 성씨(姓氏)가 해평김씨(海平金氏), 해평윤씨(海平尹氏), 해평길씨(海平吉氏)가 있는 것을 볼 때 아마도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는 분명히 전략요충지이면서 당시 구미지역을 호령했을 것으로 추측되어진다. 그리고 비옥하면서도 광활한 농경지에서 나오는 식량과 곡식은 당시 경제의 중심이었다.
자동차를 몰아 해평 입구에 내리면 좌측으로 웅장하면서도 옛날의 영화를 보여 주는 고래등 같은 옛날 고가(古家) 두 채가 자리 잡고 있는데 여기가 바로 해평의 전주 최씨(全州崔氏)들의 집성촌이다. 필자에게 겨울 삭풍과 함께 스쳐지나가는 것이 왜 전주최씨가 전주가 아닌 선산 해평 땅에 자리 잡았을까 하는 궁금증이 머리를 스쳐지나간다.
필자는 최씨 가문을 방문하기 전에 나름대로 과거 향토사에 대한 고증과 자료를 조금 알아보고 갔다. 왜 전주최씨가 전국에 그 많은 지역을 놓아두고 해평 땅에 정착하였을까? 여기에 대한 답부터 찾아야 최씨 가문에 대한 조금의 실마리가 풀리지 않겠나 하는 생각들었다. 전주 최씨 가문이 해평에 정착하게 된 것은 500여 년 전 조선 세조 때 해평에 정착한 입향조 검재 최수지(儉齋 崔水智) 때문이다.
그런데 왜 검재 최수지는 해평 전주최씨의 입향조가 되었는가? 해평면과 가까운 곳이 의성군 비안면이고, 해평에 있는 배틀산만 넘으면 비안면이 있다. 당시 세조 때 비안현(比安縣)현감은 검재 최수지였다. 그래서 해평 최씨 가문에서는 입향조 검재 최수지를 비안공(比安公)으로 부른다.
검재 최수지가 비안현감을 마치고, 고향 경남 고성으로 돌아가기 위해 해평 베틀산 넘어 선산 연향역(延香驛)으로 가는 도중 베틀산 정상에서 해평 갈마산(渴馬山)을 바라보니, 목마른 말이 낙동강의 물을 먹으러 가는 형상인 대 길지인, “갈마음수혈(渴馬飮水穴)”이라 판단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보다 해평 갈마산 아래 터를 잡고 사는 것이 훨씬 좋다고 판단하고 해평에 정착하게 되었다.
그리고 검재 최수지는 당시 해평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해평김씨 가문과 혼인을 하게 되면서 선산과 해평에서 최씨 가문의 영향력도 확대해 갔다. 검재 최수지 이후 손자 송정 최응룡(松亭 崔應龍)이 과거시험에 대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도승지, 전주부윤, 관찰사를 역임하면서 해평 전주 최씨들은 선산에 명실상부한 유력 가문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이후 인재 최현(訒齋 崔晛)선생이 최씨가문에 등장하면서 그야말로 해평 전주최씨는 승승장구하기 시작한다. 인재 최현은 선산의 두곡 고응척(杜谷 高應陟)을 스승으로 학문을 하다가 성주의 한강 정구(寒岡 鄭逑)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그리고 결혼을 안동의 의성김씨 학봉 김성일의 동생인 남악 김복일(南嶽 金復一)집의 딸과 혼인을 하게 되면서 퇴계이황의 학문을 학봉 김성일에게서 이어받는 영광을 받는다. 당시 조선사회의 선비라면 최고의 영광스러운 일이며 최고의 스승을 만났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인재 최현은 당대 최고의 스승으로부터 학문을 하였으며, 선조 때 대과에 급제하여 중앙정치 무대에서 활약하면서 해평의 전주최씨 가문은 전국에서 알아주는 명문가가 되었다. 그리고 최현은 광해군을 몰아내는 인조반정이후 사대부 선비들의 최고 관직인 홍문관 부제학하였으며 강원도 관찰사를 하게 된다.
그러나 강원도 횡성에서 이인거의 역모사건이 일어났다는 원주목사의 고변이 있자 강원도를 책임지고 있던 강원도관찰사로 투옥되게 된다. 당시 인조반정은 왕만 바뀌는 것이 아니라 정계에 진출해 있던 서인과 남인 세력 다툼이 치열하였기 때문에 서인에서는 역모사건을 계기로 남인세력을 축출하려는 정치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따라서 역모사건의 속을 들여다 보면 서인과 동인으로 분류되는 남인들의 전쟁이었다. 역모를 가장한 인재 최현을 제거하기 위한 정치였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인재 최현은 역모사건으로 가장한 각 당파간의 힘겨루기 속에서 아들과 동료들의 구명운동으로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그리고 신하들과 임금이 논하는 경연에서 최현 선생은 임금을 괴롭힐 정도로 정사를 논했음으로 무능한 인조조차도 최현의 인간됨과 신하됨을 알아보고, 서인들이 주장하는 역모에 연루되었다는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한다.
인재 최현 선생은 불행하게도 선조 때의 임진왜란과 인조의 병자호란을 눈으로 보고, 몸으로 겪었다. 인재 최현은 관료로서 선비로서 조선에서 가장 큰 전란인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속에서 얼마나 참혹한 삶을 살았겠는가? 아마 비참함의 연속이었을 것이다.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못하는 상황이었을 것이다. 그 비참함의 한가운데 인재 최현선생이 있었다.
해평의 전주최씨 집성촌에 들어가면 고래등 같은 쌍암고택(雙庵古宅)과 북애고택(北厓古宅)이 있다. 쌍암고택은 집안에 바위가 두 개 있다고 해서 쌍암이라 이름지어졌다고 한다.
<해평리 전주최씨 쌍암고택 >
<해평리의 북애고택 전경>
그리고 북애고택은 북쪽 언덕에 있다고 해서 북애고택으로 이름지어졌다. 이 고택들은 전주최씨가 가장 번성하고 영화로울 때 인재 최현의 6세 손인 농수재 최광익(聾睡齋 崔光翊)이 1755년 영조 3년에 지은 집들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눈 여겨 볼 것이 있는데 쌍암고택 같은 경우는 지방민속문화재가 아닌 국가민속문화재로 지정되었다는 것이다.
<국가민속문화지정서>
필자는 이유가 무엇일까! 궁금하여 여기저기 물어 본 결과 전형적인 ㄷ자형에 사랑채에 마루에서 지하로 내려가는 지하실이 있다는 것이었다. 이 지하실은 위급할 때 사람을 숨기고, 전란 등을 대비해서 곡식을 저장하거나 숨겨두는 장소였다는 설이 있다. 그래서 국가민속문화재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마루에서 지하실로 가는 입구>
그리고 쌍암고택과 북애고택 같은 기와집이 9채가 있었지만, 조선말기로 내려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7채가 허물지고 2채만 남았다고 한다. 최씨들의 옛 영화는 이야기로만 전하는 것이 한편으로는 안타까웠다.
<쌍암고택을 지키고 있는 최열씨와 아들 최재성씨>
최씨 가문의 재미난 이야기가 있는데 그것은 농수재 최광익의 5형제중 한명은 대과에 급제를 하고 나머지 4형제는 진사를 하였고 분업화 된 경영관리를 통하여 5형제 때에 와서 해평 전주최씨 가문은 경상도에서 뿐만아니라 조선 팔도에서 알아 줄 정도의 막대한 부와 명예를 소유하게 되었다.
낙동강을 이용하여 부산에서 소금을 내륙으로 운반하여 내륙의 각 지역으로 판매함으로서 당시로서 천문학적인 농토와 화폐를 소유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농수재 5형제의 할머니는 입던 치마를 천번이나 꿰매어 입었다고 하니 얼마나 검소하였겠는가? 할머니의 이러한 검소함을 자연히 집안의 자손들에게 귀감이 되어 검소하면서 열심히 노력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만석꾼의 재산을 모으는데도 검소, 절약, 경영 이라한 것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을 것이라고 필자의 생각한다. - 2편 계속
기사등록 : 조은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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