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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훈의 금오산답사기】 겨울 산의 또 다른 매력을 금오산에서 느끼다.

조은자기자 0 214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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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 경북대 정치학박사, 경북대 평화문제연구소 연구위원, 새로넷방송 시청자 위원>


2020년도 새해도 밝았고, 설날도 다가오기 때문에 새로운 각오를 다질 겸 금오산 산행을 시작했다. 3년전 해돋이를 본다고 올라 간 이후 정상까지의 산행은 처음이었다. 숨이 목까지 차올라 한걸음 한걸음이 천만근은 되는 듯 느껴졌다. 오르는 도중 평소 알고 지내는 사람도 만나고, 한동안 보지 못하다가오랜만에 보는 사람들도 꽤 많이 있었다. 그 순간 나보다는 모두 열심히 살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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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오산 할딱고개에서 내려다 본 구미시 전경>


정상까지 올라가고 내려가는 사람들에게 민망할 정도로 본인의 체력은 고갈되고 방전되어 있었다. 힘들어도 나의 체력이 이정도로 고갈되었구나! 운동을 해야지! 생각하며 쉬엄쉬엄 올라서 약사암(藥寺庵) 입구에 다 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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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오산 약사봉 아래에 있는 약사암 입구의 동국제일문>


입구에는 동국제일문(東國第一門)이라는 일주문의 현판을 보고, 통과하는 순간 비경이 펼쳐졌다. 그전에 젊을 때에는 올라와도 그렇게 느껴지지도 보이지도 않던 것이 나이를 먹은 이유일까! 바위와 바위 사이로 보이는 경치는 아름답기보다는 사람을 겸손하게 하는 것 같았다.


약사암의 주지스님의 법명이 대혜(大惠)이다. 금오산 중턱에 있는 폭포 이름이 바로  대혜폭포(大惠瀑布)이다. 대혜폭포는 필자가 어렸을 때만 하더라도 금오산을 울린다고 하여 명금폭포(鳴金瀑布)라고 하였다. 그런데 이제 명금폭포를 쓰지 않는다. 


이유는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의 사람들이 명금폭포라고 이름 붙였다는 이유로 대혜폭포로 다시 이름 붙였다고 한다. 대혜폭포의 물로 저 밑 아래에서 농사를 짓고, 임진왜란 때에는 금오산성 안에서 이 물로 많은 사람들이 생명을 유지할 수 있었다고 하여 큰 은혜를 입었다 해서 대혜(大惠)라고 한다.


어쩌면 약사암 주지 대혜스님은 출가를 한 이후 운명적으로 금오산의 약사암에 오게 되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금오산에는 2개의 대혜가 있다. 약사암 대혜 스님을 뵙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스님께서는 여기 법당에 모신 부처님이 약사여래불이라며 중생들의 아픔과 슬픔을 치유하는 부처님이라는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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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사암 대혜 주지스님>

 

또 이 부처님이 원래는 지리산에서 왔는데, 약사암에 놓자마자 더 이상 움직이질 않아 이 법당에 앉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픈 사람들이 많이 찾아온다고 하면서 이 약사암은 신라시대 의상대사가 이곳에서 수도한 곳이며 유서 깊은 암자라는 것을 설명했다. 의상대사가 누구인가? 


원효대사와 의상대사는 중국 당나라에 함께 불교를 공부하러 가다가 어느 동굴에서 하루 밤을 자다가 원효대사가 물을 마셨는데, 물맛이 너무 좋아서 잠을 편안히 자고 일어나 아침에 보니 죽은 사람의 해골에 담겨진 물을 마셨다.


원효는 아침에 일어나 “진리는 결코 밖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서 찾아야 한다”는 깨달음을 터득하고 의상과 헤어져서 돌아왔다. 그 이후 원효는 세속으로 나가 어려운 불교의 교리와 경전을 대중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게 해 불교대중화에 선구자적 길을 간 사람이다. 


그래서 원효는 당나라 유학길을 포기하고  다시 신라로 돌아갔다. 그러나 의상대사는 당나라 유학의 길을 포기하지 않고 당나라로 가서 불교를 공부하고, 신라로 돌아와 당시 귀족 중심의 불교를 기층 민중과 함께 할 수 있는 화엄종을 만들고, 실천적 수행을 통해 불교 대중화에 앞장선 사람이었다. 


원효대사와 의상대사는 신라 불교가 귀족중심에서 민중중심으로 이동시킨 선구자적 인물들이었다. 의상대사는 당시 대부분 사람들이 가기 힘든 곳, 물과 음식이 귀한 곳을 찾아 수행을 했다고 한다. 부족함과 고통을 통하여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마음에서 구미 금오산의 약사암까지 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금오산(金烏山)은 신라·고려시대 대본산(大本山)·남숭산(南嵩山)으로 불리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지금의 금오산은 고구려의 승려 아도화상이 신라에 불교를 전파하러 당시 선산 땅에 와서  어느 날 금오산 근처에 이르러 태양이 마지막 빛을 뿜어내는 순간 그 속으로 까마귀가 날아가는 모습이 흡사 황금까마귀처럼 보였다고 해서 까마귀 오(烏)자를 넣어 금오산(金烏山)으로 이름 지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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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이 금오산 거인상을 넘어 가는 저녁노을>


그래서 강한 태양의 정기를 받은 명산 금오산이라 구미·선산에서 역사에 많은 인물들이 난다고 한다. 고려가 망하자 야은 길재(冶隱 吉再)가 금오산에 채미정(採薇亭)을 짓고, 조선성리학의 씨를 뿌리면서 많은 걸출한 제자를 배출하여 조선의 유학을 번성시킨 출발점도 금오산에서부터 출발한다.


약사암의 대혜스님은 체력이 바닥나고, 허기에 지친 필자에게 점심 공양을 손수 준비해 주셨다. 일하는 사람이 없어 식사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혼자 준비해야 되기 때문에 비록 반찬은 없지만, 많이 드시라며 따뜻한 밥과 국을 정성스레 밥상에 내놓으셨다. 


스님과 함께 점심공양을 한 이후 숟가락을 놓는 순간, 그때부터 지친 몸이 한결 좋아졌고, 모든 것이 똑바로 보이기 시작했다. 비록 선명하지는 않은 겨울 날씨지만, 약사암에서 내려다보이는 구미시 전체의 광경과 경치가 카메라 렌즈처럼 한눈에 들어왔다. 그러면서 작은 나의 존재를 돌아보며, 작은 깨달음 하나를 얻어가야겠다는 욕심마저 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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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벽에 아찔하게 자리잡고 있는 약사암>


대혜스님과는 한번도 보지 않았지만, 평소 SNS를 통해 서로 사는 이야기를 보다보니, 처음 만나는 순간이었지만, 그렇게 멀게 느껴지지 않았다. 대혜스님이 평소에 자주 뵙던 분처럼 자연스러웠다.

그래서 필자는 스님을 졸라 출렁다리 건너편에 범종이 있는 곳으로 가보자 하고, 다시 약사암의 약수인 석간수가 나온다는 우물이 있는 곳으로 가 보기도 했다. 평소 출렁다리 문은 굳게 닫쳐있었지만, 필자의 부탁으로 굳게 닫쳐있는 자물쇠를 열어 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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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수인 석간수를 먹기 위해서는 위험천만한 이 다리를 건너야 한다>


필자는 그 순간 많은 것이 스쳐지나갔다. 구미의 관광자원은 금오산과 낙동강 이것을 잘 이용할 방법만 찾으면 타 지방자치단체보다 유명한 곳을 만들 수 있을 텐데 하는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그것이 바로 금오산 정상에 위치하고 있는 약사암 근처의 스카이 워크를 설치하는 것이다. 


중국에서는 이미 스카이 워크는 모든 관광지 다 있을 정도이다. 그리고 국내에서는 지금 강원도 춘천의 소양강 스카이 워크, 충북 단양의 스카이 워크, 경남 하동의 스카이 워크는 지금 전국으로 유명해서 많은 관광객이 찾고 있다.

약사암 주위에 사용하지도 않는 굳게 잠긴 출렁다리가 아닌 스카이 워크를 설치한다면 더 많은 구미시민과 관광객이 찾아 올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해 보았다. 현재 약사암에 있는 출렁다리는 안전상 문제도 있고, 녹이 쓸어 미관상 금오산과 어울리지도 않는다.


약사암을 뒤로하고 보물 제490호가 있다는 마애보살입상을 보러 가기 위해 처음으로 가는 길을 따라 가기 시작했다. 정상에 부근에 부는 세찬 삭풍은 사람을 날려 버릴 것만 같았다. 그 길을 가는 도중 사람들이 먹을 수 있는 물인 석간수가 나오는 곳이 두 곳 정도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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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사암에서 마애보살입상 쪽으로 가다가 나오는 석간수> 

그리고 드디어 마애보살입상을 보는 순간 놀라움이 큰 바위만큼이나 필자를 덮쳐왔다. 바위의 모서리를 조각하여 마애보살입상을 만들었던 것이다. 보는 순간 그 옛날 정과 망치만 있던 시대에 그 얼마나 오랜 시간동안 저 바위돌을 다듬고 조각하였을까? 나라면 과연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차가운 바람과 함께 스쳐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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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오산 큰 바위 모서리 중앙에 새겨진 보물 제490호 마애보살입상>


대구 팔공산의 갓바위도 처음 봤을 때 신기하고,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만들 수 있나 했지만, 금오산의 마애보살입상을 보는 순간도 바위의 모서리를 이용해 어떻게 저렇게 만들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아주 그 옛날 사람들의 예술적 감각과 솜씨 그리고 종교에 귀의하는 마음을 생각하며, 다시 길을 걷기 시작했다. 


마애보살입상에 대한 감탄을 뒤로 하고, 다시 길을 걷기 시작하는데 산 정상 부근에서 부는 바람은 내가 가는 길을 허락하지 않을려는지 너무 강하게 불어왔다. 강한 바람을 뚫고 걷다보니 얼마지나지 않아 금오산의 슨플 사연이 자리한 오형제 돌탑에 도착하였다. 오형제 돌탑을 쌓은 분은 어떤 분인지 모르지만 너무도 예술적으로 잘 쌓았고, 한눈에 보아도 정성이 무척 많이 들어갔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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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벽에 아쓸아쓸하게 쌓은 오형제 돌탑> 

돌탑의 사연은 대충 이러하다. 돌탑을 쌓은 할아버지의 손자가 안타깝게 일찍 하늘나라로 가는 바람에 그 손자를 그리워하며 10년이 넘는 시간동안 큰 바위 위에 돌탑을 쌓았다고 한다. 그 안타깝고 슬픈 마음을 할아버지는 손자에 대한 그리움을 돌탑에 시(詩)로 표현 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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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나라로 간 손자를 그리워 하며 할아버지는 돌에다 시를 적었다>

 

다시 발길을 옮겨 1970년대까지 금오산에서 사람이 살았다는 성안으로 방향을 잡았다. 산속에는 빨리 어둠이 내린다고 점점 어두컴컴해지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드디어 사람이 살았다는 성안으로 도착해서 제일 먼저 금오산성 중수송공비(金烏山城 重修頌功碑)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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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원군 때 금오산성을 외성과 내성을 새롭게 쌓고 수리하였다는 성안 중수비> 

 

내용은 한말 대원군시절에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방치되었던 금오산성을 다시 수리하고 쌓고 1만여 사람이 살 수 있도록 했다는 것이다. 성안에는 9정(井) 7택(澤)이 있는데, 이것은 9개의 우물과 7개의 연못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 높은 곳에 물이 가득 찬 연못들이 아직도 몇 개가 있다. 이러한 환경으로 1970년도까지 성안에서 사람들이 감자·배추·무 농사를 짓고 살았다. 


어둠이 점점 더 짙어지기 시작해서 급하게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하여 내려오니 벌써 해는 금오산 서쪽으로 사라져 버리고, 울창한 소나무 숲만이 내려오는 사람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태양의 강한 정기를 받는다는 금오산을 뒤로 한채 어둠이 내린 산길을 따라 사람들이 살고 있는 저 밑 불빛이 보이는 곳으로 바쁜 걸음을 재촉했다.




기사등록 : 조은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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