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소, 그는 독립투사 1세대 왕산 선생의 후손이 아닌가
2019년 5월 21일, 아침 6시 반에 잠에서 깨어 기상하였다.
나는 세수를 하고 면도를 한 후 석주 이상룡 선생의 존영을 뵈었다.
석주선생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에 취임하여 서간도와 상해를 오고갈 때 왜경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삭발을 하신 적도 있었다.
석주 이선생은 삭발을 했음에도 그 단정하고 의기가 서린 눈빛은 충분히 신선의 위엄과도 같았을 것이다.
선생의 사진을 보면 필설로 다 표현못할 감동이 느껴진다.
나는 그날 선생의 존영에 읍을 드리고
신흥무관학교 교가를 불렀다.
평소에도 즐거울 때나 괴롭거나 울울할때도
곧잘 읊조리던 노래였다.
나는 정확히 2004년도부터 불렀다.
나는 그날 안동 문화의 거리에서 안동유림의
'황교안은 구세주'라는 아첨성발언에 대한 규탄을
하기 위해 피켓을 들고 1인시위를 하였다.
시위를 한 그 곳은 석주 이선생의 친아우 만진 이상동 선생이
안동 최초의 기미년 삼일만세 혁명을 펼친 곳이였다.
1인 시위 후 나도 미처 예상 못했던 뜨거운 반응에 스스로 잠잠하기를 기다렸다.
내이름 석자를 걸고 내 고향을 걸고 한 시위였음에도 풍산류씨와 서애 류성룡의 14대손이라는 불필요한 타이틀이 눈에 거슬리기도 하였다.
왜냐하면 내가 항의하고자 했던 바의 본질을 자칫 흐릴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애써 적극 변명하지는 않았다.
그 날의 내 가슴 속에는 석주이선생에 대한 흠앙심이 가득하였다.
또 내가 살아온 그 험난한 길에 내 마음 속 등불이 된 이도 바로 석주 이선생이었다.
그로부터 대략 반년이 지난 후 방산 허훈, 성산 허겸, 왕산 허위의 5대손 허소 후보를 만났다.
그것도 그냥 만난 것이 아니라 내가 살고 있는 달서을에 국회의원 출마를 한 것이었다.
방산 삼형제와 석주는 우리 항일운동사에 있어 "3대 독립운동 명문가"에 속할 뿐 아니라 끈끈한 동지애로 이루어져 있다.
그보다 조금 앞서 나는 페친이신 우병오 선생님을 통해 임청각 종손께 석주이선생의 아들 동구 이준형 선생의 문집 '동구선생문집'을 한질 얻게 되었다.
퇴계학을 공부할 앞으로의 여정에 퇴계학의 그 끝에는 석주 이선생이 있기에 나는 몹시도 감격하였다.
그러던 차에 허소 후보의 출마는 과연 우연인지 기연인지 모르겠다.
내가 허소를 지지하는 이유는 방산 허선생의 자손이기도 하거니와
그 역시 그 선조가 걸었던 길과 비슷한 일면이 있기 때문이다.
방산 3형제는 평탄한 길을 가지 않았다.
안온함을 쫓지 않고 온가족이 모두 헌신하였다.
좋은 자리 마다하고 고향의 변화를 위해 험지인 고향에서 출마한 허소의 도전은
곧 바보 노무현이 걸었던 길이기도 하다.
나중에 내가 나이가 들어 노인이 된 후에 꼬꼬마 아이들이
"할배요 할배는 젊었을때 뭐했니껴?" 라고 묻는다면
나는 스스럼없이
"아이괴이...야아이야~할배는 절머씔 쩍에 노무현도 찍고 문재인도 찍고 허소도 찍었다. 지지도 하고 다 그래따~이느마야 어허허"
라고 답할 것이다.
류돈하 쓰다
기사등록 : 이순락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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