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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 이야기

허소, 그는 독립투사 1세대 왕산 선생의 후손이 아닌가

이순락기자 0 80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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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5월 21일, 아침 6시 반에 잠에서 깨어 기상하였다.
나는 세수를 하고 면도를 한 후 석주 이상룡 선생의 존영을 뵈었다.
석주선생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에 취임하여 서간도와 상해를 오고갈 때 왜경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삭발을 하신 적도 있었다.


석주 이선생은 삭발을 했음에도 그 단정하고 의기가 서린 눈빛은 충분히 신선의 위엄과도 같았을 것이다.
선생의 사진을 보면 필설로 다 표현못할 감동이 느껴진다.

나는 그날 선생의 존영에 읍을 드리고
신흥무관학교 교가를 불렀다.

평소에도 즐거울 때나 괴롭거나 울울할때도
곧잘 읊조리던 노래였다.
나는 정확히 2004년도부터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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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날 안동 문화의 거리에서 안동유림의
'황교안은 구세주'라는 아첨성발언에 대한 규탄을
하기 위해 피켓을 들고 1인시위를 하였다.

시위를 한 그 곳은 석주 이선생의 친아우 만진 이상동 선생이
안동 최초의 기미년 삼일만세 혁명을 펼친 곳이였다.

1인 시위 후 나도 미처 예상 못했던 뜨거운 반응에 스스로 잠잠하기를 기다렸다.
내이름 석자를 걸고 내 고향을 걸고 한 시위였음에도 풍산류씨와 서애 류성룡의 14대손이라는 불필요한 타이틀이 눈에 거슬리기도 하였다.

왜냐하면 내가 항의하고자 했던 바의 본질을 자칫 흐릴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애써 적극 변명하지는 않았다.

그 날의 내 가슴 속에는 석주이선생에 대한 흠앙심이 가득하였다.
또 내가 살아온 그 험난한 길에 내 마음 속 등불이 된 이도 바로 석주 이선생이었다.


그로부터 대략 반년이 지난 후 방산 허훈, 성산 허겸, 왕산 허위의 5대손 허소 후보를 만났다.
그것도 그냥 만난 것이 아니라 내가 살고 있는 달서을에 국회의원 출마를 한 것이었다.

방산 삼형제와 석주는 우리 항일운동사에 있어 "3대 독립운동 명문가"에 속할 뿐 아니라 끈끈한 동지애로 이루어져 있다.

그보다 조금 앞서 나는 페친이신 우병오 선생님을 통해 임청각 종손께 석주이선생의 아들 동구 이준형 선생의 문집 '동구선생문집'을 한질 얻게 되었다.

퇴계학을 공부할 앞으로의 여정에 퇴계학의 그 끝에는 석주 이선생이 있기에 나는 몹시도 감격하였다.


그러던 차에 허소 후보의 출마는 과연 우연인지 기연인지 모르겠다.


내가 허소를 지지하는 이유는 방산 허선생의 자손이기도 하거니와
그 역시 그 선조가 걸었던 길과 비슷한 일면이 있기 때문이다.

방산 3형제는 평탄한 길을 가지 않았다.
안온함을 쫓지 않고 온가족이 모두 헌신하였다.

좋은 자리 마다하고 고향의 변화를 위해 험지인 고향에서 출마한 허소의 도전은
곧 바보 노무현이 걸었던 길이기도 하다.


나중에 내가 나이가 들어 노인이 된 후에 꼬꼬마 아이들이
"할배요 할배는 젊었을때 뭐했니껴?" 라고 묻는다면
나는 스스럼없이
"아이괴이...야아이야~할배는 절머씔 쩍에 노무현도 찍고 문재인도 찍고 허소도 찍었다. 지지도 하고 다 그래따~이느마야 어허허"
라고 답할 것이다.


류돈하 쓰다





기사등록 : 이순락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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