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光頭칼럼, “설교도 짧게, 생각의 길이도 짧게?”

이순락기자 0 204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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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光頭 이순락, 본지 발행인 ~



설교는 짧게

 

성경의 사도행전(209)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유두고라는 청년이 창문에 걸터앉아 있다가 바울의 말이 오랫동안 계속되므로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몹시 졸다가 삼층에서 떨어졌다. 사람들이 일으켜 보니 죽어 있었다(바울이 그를 살려주고 그기 드로아 즉 트로이 전쟁으로 유명한 터키지역에 있는 소도시를 떠났다).

 

바울이라는 사람은 예수의 위대한 제자 중 한 사람이다. 그는 학문도 높고 집안도 소위 대단히 지체 높은 가문 출신이다. 그런 그의 대단한 설교임에도 불구하고 어떤 청년이 설교에 취해(?) 졸았다가 일어난 사건을 숨기지 않고 보여주고 있는 성경의 내용이다. 필자의 짧은 생각으로는 목사님들께서 이 성경 구절을 염두에 두고 설교는 부디 짧고 선명하게 하시라는 것으로 가르치고 있지 않겠냐는 것이다. 평신도의 편견일까...


나는 우리 교회에서 목사님 설교시간에 가끔씩 심하게 조는 경우도 더러더러 있었다. 그런 때는 잠이 부족했거나 심히 피곤했을 경우이긴 해도. 우리 담임목사의 설교는 언제 들어도 전국 최고의 설교라고 하고 싶을 정도인데도 그렇다. 설교 시간에 내가 졸았을 때마다 난 마누라에게 혼이 나곤 한다.어이그, 참말로 못 말겨, 정말. 내가 부끄럽고 창피해 죽겠다니까. 장로라면서 목사님 설교하시는데 고개를 흔들흔들하며 꾸벅꾸벅 졸고 있으니~~” “ㅎ ㅎ” ‘그래도 삼층 난간은 아니잖아. 그래봤자 앞 의자에 이마 찍는 것 뿐 인데 뭘...ㅋ ㅋ


라면, 인터넷 문화시대 그리고 칼럼...

 

아가씨의 치마 길이와 설교(연설)는 짧을수록 좋다(?)는 말은 이미 너무도 잘 알려진 말이다. 그런데 갑자기 라면이 떠오른다. 라면이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기호식품으로 된 배경에는 아마 빨리빨리 문화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라면은 통상 쉽고 간단히 조리하여 5분 이내 먹을 수 있는 가장 한국적인 멋진 기호식품이 아닌가


김밥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시간이 없어 급할 때 한 끼 요기를 간단히 해결할 수 있는 것 중의 하나가 김밥인 것이다. 라면이든 김밥이든 그것이 일본에서 비롯됐건 어찌됐건 이미 우리 문화로 자리 잡고 세계화된 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지금은 인터넷 문화시대다. 무엇이든지 빠르고 짧게, 짧고 선명하게 전달하여야 한다. 모르고 답답하면 인터넷 포털에서 검색창을 두드리면 간단하게 해결될 수 있는 시대이다. 스마트 폰만 있으면 정말이지 빠르고 쉽게 궁금증을 해결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닌가


그래서인지는 모른다. 설교나 연설이 아닌 칼럼도 그렇다고 생각 한다.필자가 페이스북을 통하여 알게 된, 진실로 존경해 마지않는 진보성향의 목사님 한 분이 계신다. 그분의 글(주장)을 보면 성경말씀과 연계, 시대적 현실 정치의 잘못된 부분에 대한 추상같은 비평조의 글은 언제나 공감이 가고, 진심으로 존경과 사랑을 전하고 싶은 마음이다. 그런데 솔직히 나는 최근에 와서는 그분의 칼럼(칼럼이라고 명명할 수는 없겠지만)을 끝까지 읽어 본 일이 거의 없다. 너무나 길기 때문이다. 스마트 폰을 들고 읽기엔 목(고개)이 너무 아프다. 그래서 아예 일부만 읽고서도 감동을 받아 댓글에는 최고 공감 표시, 즉 핑크빛 하트 표시를 붙이곤 한다.


사랑하는 후배 지인의 역사칼럼도 그렇게 느끼곤 했다. 그의 해박한 역사적 지식과 안목은 늘 탁월한 면모를 보여주고 있긴 해도 그렇다. 필자의 나이 탓, 체력 탓이긴 하지만 책이 아닌 스마트 폰으로 읽기엔 웬만한 인내심으로는 끝까지 읽는 것이 솔직히 참으로 힘이 드는 긴 글이다. 그래서 무척 조심스레 조언으로 충고했었다. 그런데 그게 대단히 불쾌했던 것으로 보였다. 그래서 그 뒤로는 아예 언급을 피했다.

 

그의 글과 대조적으로, 생각보다 너무 짧은 글이라 무언가 좀 아쉽지만, 군더더기 없는 짧고 명쾌한 칼럼을 쓰는 후배 지인도 있다. 가끔씩은 아가씨의 짧은 치마 길이가 너무 지나쳐 저건 좀... 이라는 생각을 가질 때처럼, 그런 아쉬움도 있긴 하지만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그의 어록이라는 글을 좋아하고 늘 기다려질 정도이니 좋아하지 않을 수 없다. 무엇보다 짧고 명쾌하기 때문이다.


생각의 길이도 짧아야 하는가?

 

최근에 공개된 sns에서 모시의원과 기자 한 사람의 언쟁이 가히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많은 페친들에게 회자되고 있는 중이다. 둘 다 각자의 주장이 옳다는 사정이다. 심지어 상당수의 많은 사람들이 소통하고 있는 단체 카톡(카카오톡) 방에서도 다툼이 그렇다는 것이다(필자는 그 단톡방에서 빠져 나왔기에 그런 내용은 전혀 모른다).아무튼 주제넘게 중재해야겠다 싶어 스스로 나섰다가 정말이지 심한 모욕을 받았다. 그 시의원은 나를 향해 육두문자만 안 썼다 뿐이지 손가락질로 삿대질 하며 마구잡이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었다. 그래서 , 이 친구가 제 정신이 아니로구나.’ 하고 판단, 앞으로 당신 일에는 죽이 되든 떡이 되든 상관 않겠다 하고 도망치듯 빠져 나왔던 일이 있었다.


참으로 사람의 근본 됨됨이가 의심스러워 보이는 그의 행동에 너무도 실망이 컸었다. 필자의 나이 운운하면 할 말이 없겠지만 아마 적게 잡아도 열 살은 더 아래일 그가 시의원이라는 직위 탓인지는 모르지만, 소위 동네 양아치도 유분수지... 그동안 그에게 가졌던 관심과 지지 그리고 사랑이 너무도 허망하게 느껴졌었다. 결국 필자의 사람 보는 안목이 전혀 없었다는 것이다.


()는 학문(學問)에 앞선다는 공자님의 말씀이 그 순간 필자를 붙잡았기에 어금니 악물고 수모를 견디며 벗어날 수 있었다. ‘너의 실체가 그따위 이니 대응해 봤자 똑같은 놈 되겠다.’ 는 것이었기에.

 

무엇보다 필자의 생각이 너무 길었던(?) 탓이다. ‘나라도 나서서 중재해야지. 설마 저들이 나이든 내 말은 알아듣고 서로 화해할 수 있겠지하는 긴 생각이 잘못이었던 것이다. 그저 단순하게 생각하고 불구경 하듯 해야지 가재는 게 편이라는 오해를 받게 됐으니... 그에게 전했던 과유불급(過猶不及)’이란 말은 바로 나 자신에게 하여야 할 말임에 틀림없었다. 중재(仲裁)해 보겠다고 나선 필자의 오지랖 넓은 짓이었으니까


2021.5.10. 



기사등록 : 이순락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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