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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두칼럼

오래된 사진 한 장, 그리고 젊은 날의 단상(斷想)

이순락기자 0 25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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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光頭 이순락, 본지 발행인 ~

미국인 지인(知人) 윌리암 G 워크 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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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인 지인 미 공군 윌리암 G 워크 장군 ~

 

사진 속의 주인공은 옛날 나의 미국인 지인(知人) 윌리암 G 워크 장군(소장)이다. 그는 자신의 사진을 나에게 선물, 사진에서 보듯 나의 좋은 한국인 친구 이순락에게, 윌리암 지 워크, 제네럴~)”이라고 사진에 직접 서명을 하였고, 당시 너의 아들에게 선물해라. 부디 앞으로 훌륭한 사람이 되기를 빈다.”고 하면서 내 아들에게 별 두 개짜리 견장 한 쌍도 선물했다. 그 견장은 아직도 보관 중에 있다.

 

윌리암 장군은 당시 매년 한미 팀스피리트 훈련이 있을 때마다 내리 3년을 한국에 왔었다. 한국에 올 때 마다 나에게 우리 공군부대와 무슨 특수임무를 수행하는 군부대 정보기관(?) 등에서 겹겹으로 미리 연락이 오곤 했다. 장군님께서 이순락 교수님을 만나고자 약속하셨으니 부디 시간 약속 어기지 마시길 바랍니다.”는 등으로 확인을 거듭 하곤 했던 것이다. 미군 투 스타가 정말이지 대단한 VIP인 줄은 그땐 별로 의식하지 못했던 나였다.

 

짧은 영어실력, 그러나 최선을 다한 나의 안내에 감사

 

그를 처음 만난 것은 대구의 동촌 망우공원에 있는 홍의장군 곽재우 동상 앞에서였다. 그가 유난히 관심이 깊은 것을 보고 나의 그 잘난 콩글리쉬 영어 실력으로 임진왜란 당시 정규군이 아닌 민병을 모아 일본군과 싸워 크게 이겼고, 그는 붉은 비단 옷을 입고 말을 타고 다녔기에 홍의장군이라 한다.”고 하면서 이 공원 이름이 그의 다른 이름 망우당’()을 따서 그를 존경하는 뜻에서 만들어진 것이다.”고 하면서, 더러는 막히는 말주변이었지만 그가 굉장히 감탄하면서 나의 설명에 고마워했다. 자신이 아마 군 고위 장성이라서 더욱 그랬으리라. (그의 뒤편에 미군 장교 두 사람이 멀찍이 수행하고 있었지만, 당시의 나로서는 그들을 의식하지 못했다.)

 

윌리암 장군은 미 공군 통신통제 부사령관이었고, 한국전에도 참전했다고 하였으며, 자신의 아들도 당시 미 육사 웨스트포인트 졸업반에 있다고 했다. 3년째 한국에 왔을 때가 그를 본 마지막이었고 그 후로는 단 한 차례도 만나지 못했다.

 

그가 크게 마음먹고 나를 자신이 타고 갈 헬기에 함께 동승, 평택으로 가서 한국 장군들 별이 30여 개 동행, 골프를 치니 소개 시키겠다. 꼭 같이 가서 함께 즐기고 오자고 간곡히 부탁했지만 난 정중히 사양했다. 당시로서는(지금도 속칭 오줄없고 융통성이라곤 없는 신세지만) 그가 나를 어떤 방법으로서든 한 번 키워 줄려고(?) 애를 썼음에도 그런 운수대통의 기회를 놓쳤으니...(다 팔자소관 아니겠나만...)

 

아무튼 나로서는 그분에게 한국에도 이렇게 어리벙벙한 젊은이도 있지만 나름대로 지적 소양을 갖춘 사람도 더러더러 있음을 은연 중 보여주는데 만족하고 자존감을 지키는데 최선을 다했다.

 

안동대학교 시간강사 시절...

 

그 뒤 얼마 후에 안동대학교 무역학과에 시간강사로 출강을 했었다. “무역학과에서 공부하는 여러분이 나의 견해로는 최고의 선택을 했다. 부디 영어 공부 그것도 특히 영어회화는 필수적으로 하라. 그러면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대우의 김우중 회장처럼 전 세계시장을 누비며 활보할 수 있다.”고 하면서 윌리암 장군과 친구로 맺은 일화를 소개해 주기도 했다.

 

당시 시간강사인 나를 무척이도 따르든 학생 두어 명이 내가 살고 있는 대구 신혼살림 집에 왔다. 양주를 밤이 새도록 마시며 거의 뜬 눈으로 지내다 갔었지만, 그 학생 몇 명이 이 사진을 보고 학교에 가서 별별 공상 소설 같은 스토리를 만들었기에 배꼽을 쥐어짜며 박장대소했었던 일도 있었다.

 

안동대에 처음 출강했을 땐 구미~안동 간 국도가 비포장이었다. 뒷날 포장된 후엔 운전면허를 따고 마이카로 작은 승용차를 구입, 직접 차를 끌고 다니니 얼마나 편하고 세상 좋은지 몰랐다.

 

팩시밀리에 대한 설명에 도무지 믿지 않는 학생들과 교수​

재미있는 일은 학생들과 학과 교수들에게 당시 처음 나온 팩시밀리 기기에 관한 설명을 했었을 때 그들은 단 한 사람도 나의 말을 믿지를 않았다. ‘대구라는 큰 도시에서 왔다고 거짓말을 해도 너무 하네식이었다. 당시로서는 국제무역에서 가장 빠른 통신수단이 텔렉스라는 것 밖에 알려진 것이 없었으니...

 

나의 설명인 즉 종이에 그림을 그려 전화기에 장치된 기계(팩스)에 넣으면 상대방이 그 그림을 그대로 받아 볼 수 있다는 설명을 도대체 믿지 않았던 시대였었다. 연암 박지원의 중국 견문록인 열하일기를 읽고 당시 사람들은 물론 임금까지 저런 미친놈 봤나식으로 앞선 문명을 기록한 것을 두고 정신병자 취급했다는 얘기도 쉽게 흘려보낼 수 없는 아이러니를 겪기도 했었다.

 

사진 한 장을 우연히 찾은 일로 인해 지난 젊은 시절을 회상하고 보니 역시 나는 늙은이임에 틀림없다. 늙은이는 지난 시절을 추억하며 산다고 하니... 아무튼 젊은 한 순간을 더듬어 보니 감회가 새로울 뿐이다.

 

2019.5.6





기사등록 : 이순락기자 / gbmnew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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