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두칼럼]친일 사학에 의한 보편적 역사관의 오류
*편집자 주 : 아래의 글은 필자의 지인인 초등학교 교장 선생님 출신인 분과 주고받은 내용입니다. 다만, 필자는 역사학 전공자는 아닙니다. 그러나 보통사람들의 역사관이 잘못된 부분이 지배적이라 이건 아니다싶어 올리는 글입니다. 관심을 가지시고 일독해 주시길 바랍니다. ~
교장선생님의 주장도 존중합니다.그것이 바로 우리의 올바른 역사를 뭉갠 친일사학자의 주장으로 경도되고, 쇄뇌된 역사의식의 결과이니까요(교장 선생님은 ‘학봉 김성일의 잘못 대처로 우리나라가 왜적의 침입을 받아 나라가 결단 났으며... 김성일 이라하면 한이 맺힌다’ 는 등의 주장을 했음).
친일 사학의 학봉 선생 폄훼
일본군들이 40년 가까이 이 땅을 지배하면서 ‘조선 놈은 안돼. 조선 놈은 항상 분열돼서 일어설 수 없는 나라야.’ 식의 주입식 교육을 덮어 씌웠습니다.
그래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책략(침입)을 했지만, ‘조선 놈 너희들이 먼저 분열했고, 김성일 같은 놈이 조정에 준비하지 않도록 했기에 그런 결과가 나온 것이야.’ 식으로 주입시켰던 역사입니다.
당시(1592~1598) 조선 천지는 도탄에 빠졌고, 백성들은 썩어빠진 벼슬아치들의 가렴주구로 도적떼가 일어나고, 민심이 흉흉하여 어지럽기 짝이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가운데 또다시 당장에 군역(軍役)이다, 뭣이다 고 하면서 세금을 거두면, 오늘날로 말하면 민중봉기가 일어날 정도라서 학봉 김성일 선생이 ‘아직은 괜찮을 것이니, 천천히 대비하고 나라살림을 바로 챙기자’는 주장을 펼쳤던 것입니다.
이를 두고 친일에 물든 사학자들이 일본 탓이라기보다는 내부에 있는 김성일같은 무리가 반대했기에, 일본침입의 결과가 일어났다는 주장을 고착화시켰던 것입니다.
그 뒤로 이승만과 박정희의 집권 등으로 이어지면서 친일적 사고나 역사관은 바뀔 수 없었던 상황으로 이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학봉 선생이 끝까지 자기주장만 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은, 그가 왜군이 쳐들어오자 가장 앞장서서 의병을 거병, 의병장 곽재우 장군을 도우고, 진주성 싸움에서 김시민 장군을 도우는 등의 구국 활동이 이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과거 우리나라의 대표적 친일 사학자 중에 이병도라는 분이 있었지요. 역사학계의 거목으로 추앙받은 인물이지만, 그로부터 영향을 받은 후학 사학자들의 역사의식이 과연 어떻겠습니까?
아직도 잘 밝혀지지 않고 있는 왜정시대 일본의 조선인 유학생들이 동경시내의 정부청사에 폭탄을 투척시킨 의거사건이라든가, 큐우수우(구주) 탄광에서 강제노역으로 수없이 죽어간 원혼들의 넋을 변변하게 기리지 못하고 있는 등을 들 수 있습니다.
일본의 가장 무서운 적 : 한민족
일본 사람들이 세상에서 가장 두려워하는 민족(국가)은 미국도 중국도, 독일이나 이스라엘도 아닌 우리 한민족입니다.
토요토미가 이 땅을 침범했을 때 서애 류성룡 대감의 아저씨 벌되는 분이 왜장 첩자(류성룡 암살 임무)로 온 자를 붙잡아 “너희들이 수 만 명 쳐들어와 조선을 결딴내지만, 몇 년 뒤 돌아 갈 때는 살아가는 놈은 불과 몇 놈밖에 지나지 않을 테니, 토요토미에게 그리 전해라.” 하는 유명한 일화도 있습니다.
본국으로 돌아간 극소수의 왜군들은 (일본 전역에 남자들이 거의 씨가 마를 정도가 되니) 일본 전역에 방을 붙였다고 합니다. 즉 ‘일본의 모든 여자들은 어떤 남자라도 원하면, 어디서든 몸을 바쳐라. 거역하면 단칼에 목을 벤다.’는 령을 내렸다고 합니다.
일본의 성씨 29만 1129 종류, 한국 274개 성씨
그래서 일본 사람들은 성씨가 수 만 가지라고 하고 있지 않습니까. 저들의 성씨라는 것이 솔밭이니 늪, 큰 밭 등으로 하고 있는 이유가 다 있는 것입니다. 남자가 어느 솔밭에서, 늪에서 혹은 큰 밭에서 여자와 관계를 해서 낳은 자식의 성을 만든 것입니다. 즉 전중(田中)이네, 뭣이 어쩌네 하는 식으로 성씨가 정해졌다고 전하고 있으며, 1997년도 ‘일본성씨 대사전’에 의하면 29만 1129종류의 성씨가 있다는 공식적인 통계가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한국 274개 성씨).
일본의 기모노라는 여성의 전통 의상은 속옷이 없고, 항상 누울 수 있도록 담요 구실을 하는 천을 달고 있다고 합니다. 구전되어 오는 이야기라 신빙성이 어느 정도인지는 모릅니다만, 일본사람들은 성에 관한 개방적(?) 풍토가 크다고 합니다. 그래서 가까운 친척과의 관계도 쉽게(?) 맺어지는 등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특히 정치인들의 경우는 ‘배꼽 아래는 말하지 않는다.’는 전통이 흐르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 연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본인들은 우리 한국(조선)의 여자들을 ‘위안부’라는 이름으로 성노예를 삼은 것에 대해서 반성은커녕 그게 뭔 대순데? 식의 사고가 있는 것으로 보여 집니다.
교장선생님,저의 주장이 결코 옳다고는 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이런 역사의식도 있음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학봉 김성일 선생이 정말이지 죽을 죄인이라면 왜 안동에서 퇴계 선생의 도산 서원에서 위패를 모실 때 ‘왼편인가, 오른편인가?’ 하는 다툼이 일어났을 정도였을까요?
‘징비록’의 류성룡 대감은 영남유일의 영의정 출신인데, 그와 더불어 학봉 김성일을 버금가는 우대를 받도록 하겠다는 유림들의 역사관을 잘못된 것이라 주장할 수 있을까요?
부디 이런 대승적 역사관, 살아있는 역사관도 있음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긴 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도 좋은 하루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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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등록 : 이순락기자 / gbmnew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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