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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두칼럼

“당신은 도대체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노?”

이순락기자 0 164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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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光頭 이순락, 본지 발행인 ~

1.

오늘 아침에도 나는 와이프로부터 핀잔을 들어야 했다. 말끝마다 듣는 핀잔이고 또한 오늘은 유독 평소와 달리 기분이 몹시 우울했다. 그래서 한 마디도 대꾸하지 않다가 출근길에 현관문을 나서면서 내가 한 말이다. “입을 뗐다 하면 쿠사리(핀잔) 듣는 데 (음식물 쓰레기) 이거나 들고 갈게.”하고 나섰다. 와이프표정이 좀 계면쩍었을 것(?)이었다.

 

나는 나름대로 이 나이가 되어도 하고 싶은 일을 열심히 하며 살아가고 있기에 마음이 항상 편하고 좋다. 이런 마음가짐은 아마 근본적으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라는 신앙적 방편이 있기 때문일 것이리라. 그러나 와이프 입장에서는 나에 대하여 항상 불만 가득한 입장일 것임에 할 말이 없다. 비까번쩍하는 자가용은 못 굴려도 살림살이에 지장 없도록 생활비 한 푼 이라도 제대로 주는 일없는 무능한 서방이니...

 

당신은 도대체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노?” 이 말은 수시로 들어야 하는 와이프의 핀잔이다. 내 손에서는 (이상하게도 말을 잘 듣지 않는) TV 채널도, 새로 마련한 현관문 전자키 작동도 서툴다 보니 와이프 앞에서는 모든 것이 주눅 든 꼴이라 제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사실 아무것도 없다. 얼어붙은 것일까.

 

2.

바깥에 나오면 나도 이야기가 조금은 다르다. 70 줄에 든 나이 탓도 있겠지만 언론 하는 기자 신분 덕택으로(?) 비교적 사람대우는 받고 사는 편이다. 나 자신이 사람들에게 쉽게 이야기 하듯 잔 머리 굴리면서글줄이나 써는 정도는 되고 있으니 그럴 것이다.

 

또한 캐리어라는 것도 있다. 이걸 요새 사람들은 스펙이라고 하더라만. 좋은 학교는 아니지만 그래도 정통하게 대학, 대학원 석·박사 과정도 마쳤고, 명예경영학 박사라는 타이틀도 얻었으니... 젊어서 십 수 년 간 대학교수도 했었고, 지역의 주간지 신문사 대표부터 시작하여 언론 밥을 먹은 지도 십 여 년은 됐다. 요 최근엔 또 순수민간인 단체를 조직, 500여 명의 회원을 확보한 회장직함도 획득(?)하지 않았는가. (으흠~).

 

금년 들어 이곳 구미(선산)에 정착한지도 25년차에 이른다. 아들과 딸이 이곳에서 중, 고등학교를 졸업했고, 대학을 마쳤으니 속칭 말하는 2의 고향이다. 아마 남은 여생 또한 이곳에서 보내고 마감할 것이리라.

 

3.

연좌제가 아직도 있을까? 지금 문재인 정부에서는 없으리라고 확신한다. 연좌제란 사상적으로 빨갱이’, 좌파족속으로 지칭하여 관공서 취업을 제한하며, 그 가까운 일가친척도 모두 한 통속으로 보아 항상 요시찰 인물이 되는 제도이다. 느끼는 기분은 항상 한 여름날 마스크 끼고 생활하는 것과 같다고 할까.

 

내가 마지막으로 위협을 느낀 시기가 대구에서 결혼 후 대학원 석사과정 다녔을 때이다. 당시에 유언비어처럼 떠돌던 속칭 불온서적’ 6~7권을 집의 문 앞 신발장 위에 낚시 밥(?)으로 턱 놔두었던 사건이 있었다. 아마 정보기관에서 그랬을 것이라는 의심을 지금껏 하고 있다. 당시로서는 속이 떨려 바로 경찰(파출소)에 신고, 책자를 수거해 가도록 하여 용케도 혐의(올가미?)를 벗어날 수 있었다.

 

나의 가까운 친척이면서 어렸을 적부터 존경해 마지않던 한 분이 인혁당 사건으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던 일이 있었고, 그 이후로(사실은 그 훨씬 전부터였지만) 늘 무슨 어두운 그림자처럼 나의 주위를 맴돌 듯 떠다니고 있었던 것이다.

 

4.

나는 대학 다녔을 때 한동안 권투에 거의 미치다시피 했었다. 류마치스 관절염이라는 병을 얻어 선수로서는 빛을 보지 못한 불운이 있었지만. 당시 부산의 자갈치 시장 쪽 남포동 육교 부근에는 대학생들과 젊은 회사원들이 많이 찾는 유명한 막걸리 대포집인 양산집동래집이 있었다. 막걸리에 취해 남포동, 광복동 거리를 친구들과 어깨동무도 하며, 소리치고 노래도 부르며 시내 중심가를 휘잡듯 한 세월도 있었다순간의 찰나 같은 짧은 시절이었지만.

 

깡패들도 물론 있었음은 두 말할 나위없다. 혹시라도 싸움이 벌어졌다하면 깡마르고 왜소한 체구의 내가 나서면 문제는 쉽게 해결되곤 했었다. 그런 젊은 날의 추억도 주마등 스치듯 그립고, 아쉬운 것이다.

 

반면에 공부도 참으로 열심히 했었던 기억이 있다. 도서관 지정석에 앉았다 하면 평균 세 시간씩은 보내고 자리에서 일어서는 열공을 했었다. ‘관청(과거) 은 깨어나라고 했었지만...

 

5.

대구 모 대학에서 겸임교수로 있었을 때였다. 산업시찰로 포항제철 견학 후 포항 시내 해수욕장으로 가서 학생들과 함께 잠깐 동안의 자유시간을 가졌다. 바다를 좋아했던 나는 혼자서 해변을 걸었다. 그런데 갑자기 덩치가 우람한 군 필 학생 두 녀석이 나를 붙잡아 바닷물에 던지려고 뛰어 왔었다.

 

나는 웃으면서 도망치며 , 너희들 자꾸 날 괴롭히려 따라오면 너희들이 다치는 수가 있데이.”했었다. “좋습니다. **교수님이 교수님을 바다에 던져 넣고 오라는데요.”하면서 막무가내로 달려들었다. 믿기지 않을 얘기지만 난 그들을 한 녀석씩 넘어뜨렸다. 그러면서 봤제? 또 오면 진짜 너그들 바다에 밀어 넣는다.”고 소리쳤다. 녀석들은 백 여 명도 더되는 구경꾼(학생, 교수) 앞에서 혼이 났고, ‘아니, 이럴 수가식으로 후회(?)하며 포기했다. 그 뒤로 학생들과 교수들 사이에서 이순락 교수가 확실히 한 가락 하긴 하네.’라는 소문이 많이 퍼졌던 일도 있었다.

 

나의 전성기 시절(?)이었던가. 이 당시엔 방학이면 1년에 한번 정도는 대구의 중소기업 사장들의 요청에 따라 외국에 수출 주문을 받기 위해 출장을 갔었다.

그 당시 가장 기억에 남는 회사는 성서공단에서 천막치고 공장을 했던(돈이 없어서 건물 안에 못들어갔다) 분인데, 얼마 전에 만해도 모 로터리클럽 무슨 지역 총재라는 자리에 앉아 1억 원이라는 거액의 기여금도 낼 정도의 회사로 성장했으며, 그 기틀을 내가 마련해 주었던 것이다. 지금도 아끼며 쓰고 다니는 모자가 그와 같이 스웨덴 출장 후 프랑스 파리 상젤리제에서 그로부터 선물 받은 것이다. 나름대로 젊어서는 영어로 밥을 먹고 살았던 무역실무 전문가였고, 겸임교수로서 자부심과 긍지도 대단했었다.


·스피리트라는 한·미 합동 군사훈련이 있었을 때였다. 우연찮게 대구시내 망우공원이라는 곳에 산책삼아 갔다가 서툰 영어실력이지만 어떤 미군에게 곽재우(홍의) 장군에 대해 설명을 했었는데, 알고 보니 그분은 미 공군 통신통제 사령관 윌리암 지. 워크 장군(소장) 이라는 분이었다. 그 인연으로 그 후에도 한국에 올 때마다 나를 불렀고, 나는 학교 연구실로 그를 안내하여 내가 지금도 즐겨하는 밀크커피(봉지)를 함께 마시기도 했었다. 그는 나의 아들에게 주라면서 견장용 별 두 개짜리 계급장(보관 중)을 한 쌍 주는 등 나름대로 좋은 우정을 맺기도 했었다.

 

6.

한 번 사장은 영원한 사장입니다.”

내가 이곳 모 주간 신문 사장으로 잠깐 동안 근무한 경험이 있었다. 나의 구미에서의 언론인으로서 첫 출발지였다. 당시 김 모 회장은 회식을 할 때마다 폭탄주 돌리기가 유명했었다. 회식이 잦았을 정도로 좋은 분위기였지만 나의 근무기간은 생각보다 무척 짧았다. 그렇지만 직원들(기자, 사무직)은 위에서 쓴 것처럼 한 번 사장은 영원한 사장이라며 지금까지도 좋은 연을 이어가고 있다.

 

뒤에 그 신문사 간부 직원이었던 사람이 ㄱㅁ신문을 창간한 관계로 그곳에서 한동안 칼럼을 부지런히 썼었던 일도 있었다. 그러던 중 이명박 대통령이 후보로 나섰을 때, 용기 있게 후보자격 없다고 썼다가 곤욕을 치른 경험도 있었다. 그런 경험 후 불안심리(?)로 인해 신문기자는 하고 싶었어도 일반신문이 아닌 기독신문에 관계하여 7~8년 동안 도왔던 일도 있었기에 구미미디어라는 인터넷신문을 기독신문의 지원으로 시작할 수 있었다. 나의 언론에 관한 간략한 출발 설명이다.

 

7.

철학자 김형석(100) 교수님이 KBS 5부작 방송에 출연하여 잠간씩 시청했던 일이 있었다. 그 분 말씀에 대단한 충격과 감동을 받았다. “내 일생 살아오면서 65세에서 80세까지 가장 열심히 일을 많이 했다.”고 하셨다. 그러면서 더욱 충격적인 것은 “98세 때 강연을 160회했고, 책을 두 권 썼다.”고 하셨다.

 

그분의 예화 이야기는 이미 비교적 잘 알려진 것이지만 새삼스럽게 감동적인 울림으로 가슴깊이 새겨졌다. 즉 농부가 산속에서 독수리 알을 가져와 달걀과 함께 부화시켰고, 병아리와 같이 키웠다는 것이다. 그런데 제법 크게 자랐음에도 독수리는 독수리가 아닌 닭으로 자라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 독수리를 광주리에 담아 높은 산으로 가져갔다고 했다.


독수리를 높이 쳐들고 깊은 산속 높은 곳을 보여주며 네 고향으로 가라.”고 날려 보냈더니, 독수리가 몇 바퀴 공중을 배회하다가 드디어 높이, 멀리 날아갔다는 이야기를 학생들에게 들려준 방송도 보았다.

 

돌이켜 보면, 내가 인터넷 신문을 시작했을 때가 65세 때였고, 올해로 창간 6년차에 이르는 것임에 , 나도 열심히 일해야겠구나.’고 각오를 새삼 다지게 됐었다. 독수리의 예화도 더더욱 감동적이었음은 물론이다.

 

앞서 언급했었지만, 실버단체를 조직, 출범시켰던 일은 전적으로 지인의 도움에 의한 결과물이었다. 어쨌든 그 일로 인해 나로서는 그야말로 독수리의 꿈을 꾸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지금 영남복지신문(주)이라는 법인체 언론기관 설립을 준비 중에 있다. 인터넷 신문으로 출발(등록)했지만, 곧 주간지 종이신문으로 탈바꿈하고자 한다. 이런 일은 사실 남들이 봤을 땐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그러나 내겐 진실로 보람과 긍지를 가지는 독수리의 날갯짓을 펼치고자 하는 일이다.

 

과거에 소위 말해서 사업실패를 경험한 나로서는 더 물러설 곳이 없다. 그러니 일어설 일 밖에 없다는 배짱을 가지고 오늘에 이른 것이다. 그런 마음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어차피 마누라에겐 여전히 무능한 남편이라 미안하지만, 사실 구박덩이니깐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것 아니겠는가.

 

Yes, I can !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성경말씀을 의지하며, 재도약의 발판 위에 과감히 일어서서 달리고자 한다.  내가 믿는 하나님께서 함께해 주실 것을 믿으며 뛸 것이다.

 


기사등록 : 이순락기자 / gbmnew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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