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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훈의 역사와 인물】용암 박운선생의 국역 문집인 『국역 용암집』발간을 축하하며...

이순락기자 0 28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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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경북대 정치학박사, 前구미회 부회장, 새로넷방송 시청자위원>



올해 3월 필자는 「조선시대 지식인 교류와 연결의 중심에 섰던 용암 박운(龍巖 朴雲)을 찾아 간다」는 역사칼럼을 쓴 적이 있었다. 그런 인연으로 몇 달 전 용암 박운 선생의 문집이 한글 번역이 이루어져 『국역 용암집』 나왔다. 『국역 용암집』이 나왔지만, 대중사회에 알려지기는 분명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해평 용암 박운선생 국역문집 발간위원장 박종석님께서 『국역 용암집』의 내용을 조금이라도 알리기 위해 필자에게 “김박사만큼 우리조상 용암선생을 아는 이가 누가 있는가?” 간곡히 부탁했다. 평소 발간위원장님을 알고 있었지만, 그분이 본인의 선조에 대한 열정이 남다르다는 것에 감동과 감탄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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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평 밀양박씨 용암공파 가계도>


『국역 용암집』 이 출판되게 된 계기는 위원장님이 주관하고 앞장서 용암선생의 문집을 국역본으로 하겠다는 의지와 노력 때문에 출판이 가능했다. 선조와 조상 일에 선뜻 개인적으로 돈과 노력을 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해평 용암공파 발간위원장님의 열정과 집념을 봐서라도 일반인들에게 용암 박운 선생을 더 많이 알리는 것이 필자의 도리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과거에 필자가 쓴 역사칼럼을 기초로 해서 『국역 용암집』이 일반 대중들의 이해도를 높이기 위해 용암 박운의 역사 칼럼을 다시 한번 쓰기로 마음먹었다. 필자의 『국역 용암집』에 대한 역사칼럼이 현대식 발문(跋文)이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이때가 아니면 내 인생에서 용암 박운선생을 기념하고 빛내는 글을 써 볼 수 있겠는가?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필자의 오합지졸의 같은 글재주로는 손을 댈 수도 없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걱정과 함께 부담이 아닐 수 없었다.

 

그것도 조선시대 최고의 선비들로부터 찬사를 받은 용암 박운선생이 아닌가! 오히려 필자에게는 영광스러운 부탁임으로 받아들이기로 마음먹고 생각과 글들을 숙성시키기 시작했다. 용암 박운의 칼럼을 또다시 쓰게 된 원인 중 하나는 필자의 조상 중, 용암 박운의 평생지기이며, 학문을 논하면서 서로의 마음을 어루만졌던 진락당 김취성(眞樂堂 金就成)·구암 김취문(久庵 金就文) 형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용암 박운선생처럼 위대한 인격자이자, 철학자를 이렇게 필자의 글로 표현하는 것은 필자의 인생에 있어서 다시없는 행운과 영광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러한 생각으로 칼럼을 써는 것을 받아들이며, 한 시대를 풍미하고 치열하게 살다 간 용암 박운의 역사적 자료를 더듬기 시작했다.

 

그리고 필자는 칠흑 같은 망망대해에서 빛을 찾는 마음으로 짧은 글속에 용암 박운선생의 인생과 철학을 녹여야 했기 때문에 많은 고민을 하면서 글과 생각을 만지기 했다. 필자의 아둔하고 모자라는 실력으로 조선시대 최고의 선비들이 과찬을 아끼지 않은 “용암 박운”을 만나러 가 보기로 한다.

 

조선시대를 통틀어 가장 저명한 학자라면 누구나 퇴계 이황(退溪 李滉)이라 손꼽을 것이다. 퇴계는 고려시대 전래되어 조선에 정착하기 시작한 성리학을 퇴계만의 새로운 세계관으로 이끌어 중국 중심의 성리학을 조선 중심의 성리학으로 재발견한 인물이다. 그래서 학자들과 현대인들은 퇴계가 심도 있게 연구한 성리학을 “퇴계학(退溪學)”이라 명명한다.

 

그래서 조선에서 글과 말을 할 줄 아는 선비들은 퇴계를 단순히 학문만을 가르친 선생이 아니라, 성인(聖人)에 가까운 인물로까지 묘사했다. 임진왜란을 이후 한국의 성리학은 일본에 전래되기 시작하는데, 속을 들여다보면 “퇴계학”이었다.

 

이후 조선에서 일본으로 전래된 퇴계학은 일본의 지식인 사회에서 끊임없이 연구하기 시작하여 오늘날에는 일본의 가장 높은 단계의 학문으로 발전·승화시겼으며, 일본 지식인 사회의 지식인의 기준과 척도가 되었다. 사실 퇴계는 한국보다 일본에서 더 추앙받는 인물이다.

 

조선 최고의 선비이자 학자였던 퇴계는 선산의 용암 박운(龍巖 朴雲)선생을 “지금 세상에서 얻기 어려운 선비(今世難得之士)”라는 짧은 글로 극찬의 평가를 한다. 퇴계의 이러한 평가는 용암 박운선생이 여느 선비와는 분명 남다른 학식과 인품을 가지고 있었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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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암 박운에게 안동 도산서원의 퇴계 이황이 보낸 편지>

 

사실 용암선생은 퇴계선생보다 8살이 많음에도 퇴계를 스승으로 삼아 궁금하거나 의문이 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물음을 했다. 용암선생은 학자들이 범하기 쉬운 남을 인정하지 못하고, 옹색하며 옹졸한 마음과 태도를 취하는 것과 상반되게 행동을 하였다. 한마디로 넓은 도량(道場)을 가진 도학자(道學者)임에는 틀림없다고 평가할 수 있겠다.

 

용암선생의 이러한 점을 볼 때 그가 평생 학문을 하면서 쌓은 인품이 옹졸하거나 편협한 것이라 아니라 거대한 바다와 같다고 해야 할 것이다. 용암선생 스스로도 도학자(道學者)로서 학문이 정점에 닿았음에도 퇴계에게 제자의 예를 갖추어 질문하고 답했다는 것은 보통사람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다.

 

용암선생은 퇴계에게 배우는 것을 부끄러워하거나 수치스럽게 생각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용암선생에게 평생 지대한 영향력을 끼쳤던 인물들은 진락당 김취성(眞樂堂 金就成), 송당 박영(松堂 朴英), 회재 이언적(晦齋 李彦迪), 퇴계 이황(退溪 李滉) 등이었다.

 

용암 박운은 진락당 김취성과 함께 송당 박영선생을 중심으로 선산지역에서 송당학파(松堂學派)를 출범시켜 선산을 성리학의 메카로 발전시키는데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박운은 송당 박영선생을 “동방리학(東方理學)의 종장(宗匠)”이라고 평가했을 만큼, 송당 박영은 학문적으로 젊은 용암 박운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회재 이언적은 퇴계 이황이전 조선 성리학의 도통(道統)을 있는 인물로, 조선 성리학사에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송당학파를 출범시킨 송당 박영, 진락당 김취성, 용암 박운은 회재 이언적과 서로 만나 도학(道學)에 대한 많은 교류를 함으로서 선산 지역의 성리학을 한계 더 진일보 시켰다.

 

용암은 사마시에 시험인 진사(進士)시험에 합격한 이후 더 이상 과거시험에 나아가지 않는다. 그것은 아버지의 유언 때문이다. 아버지 박종원(朴宗元)이 아들 용암에게 출사(出仕)하지 말 것을 당부한 유언의 이유는 당시 정치의 중심이었던 조정이 산림에서 출사한 선비들인 사림파와 조선의 기득권을 가진 훈구파사이에 극심한 대립으로 선비가 화를 입는 사화(士禍)가 끊이지 않던 때이다.

 

어지러운 세상에 벼슬보다는 학문을 하라는 부친의 유언이 있었기 때문에 용암은 더 이상 벼슬에 나가는 것보다 포기하고, 오로지 학문을 길을 걷는 도학자(道學者)의 길을 선택한다. 용암 박운의 삶의 궤적(軌跡)을 살펴보면 용암은 도학자로서 행운아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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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시 산동면 성수리에 있는 용수암, 용수암은 박운이 강학을 하던 곳, 요즘은 기도처로 많은 사람이 찾음>

 

학문의 길을 접어든 이상 학자로서는 당대 최고의 스승을 만나는 것이 학문하는 사람으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더 없는 영광이었다. 학문에 뜻을 두면서 용암 박운은 엄청난 행운을 맞는데, 그 행운이 바로 송당 박영, 회재 이언적, 퇴계 이황을 만난 것이었다.

 

송당 박영, 회재 이언적, 퇴계 이황을 만나서 학문의 길을 묻는다는  것은, 조선시대 성리학을 공부하는 도학자로서 가장 큰 행운과 영광을 용암 박운은 부여 받은 것이다. 만약 용암이 벼슬길에 나갔다면, 이러한 당대의 걸출한 석학들을 아마 만나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용암 박운의 행운은 3명의 스승을 만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평생 마음과 학문을 논할 수 있었던 친구이자 도반(道伴)이었던 진락당 김취성(眞樂堂 金就成)을 만나 송당 박영 문하에서 공부했다는 것이다. 용암 박운에게 훌륭한 스승들이 있었다면, 김취성은 용암 박운이 외로운 도학자의 길을 걷는 과정에서 가장 좋은  정신적 벗이었다.

 

진락당은 용암과 함께 당시 선산지역에 송당학파를 이끌었던 좌장(座長)이었다. 진락당과 용암은 벼슬보다는 산림(山林)에 은거하며 학문에 뜻을 두고 교류하면서 학문을 논했으며, 은둔하는 처사(處士)로서의 삶을 살았다.

 

애석하게도 용암 박운의 평생지기인 진락당 김취성이 먼저 세상을 떠나자, 용암은 그 슬픔을 잊지 못하고, 먼저 세상을 떠난 진락당 김취성을 그리워하며 못다 한 그들의 우정을 위해 더욱 학문연구에 전력을 다한다. 이 두 사람의 인연으로 용암 박운 집안과 선산김씨(善山金氏) 집안은 수백 년을 이어져 왔고, 두 가문사이의 인연은 오늘날까지 돈독하고 두텁게 이어가고 있다.

 

용암 박운이 죽자, 스승 퇴계는 그의 묘비에 새기는 묘갈명(墓碣銘)에서  “일부러 나를 찾아오다가 물이 막혀 돌아간 적이 있었다. 그가 이처럼 나와 사귀려고 노력하였는데도 내가 한 번도 그의 집에 가서 그가 나를 만나고 싶은 소원을 이루게 할 수 없었으니 벗을 저버린 것에 깊이 부끄러워한다.”고 퇴계의 부끄러운 행동을 내용을 남긴다.

 

그리고 퇴계는 “선산이란 고을에는 앞에는 길선생(吉先生)의 풍절(風節)이 있었고, 뒤에는 박송당(朴松堂)과 정청송(鄭靑松)의 도의(道義)가 있었다.”라고 하면서 선산의 선비들과 학문을 존경과 찬사로 표현 했다. 길선생(吉先生)은 야은 길재(冶隱 吉再)선생이며, 정청송(鄭靑松)은 신당 정붕(新堂 鄭鵬)선생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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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시 장천면 상림리에 있는 용암 박운의 묘소>



퇴계는 선산의 선비들이 이와 같은 길선생, 박송당, 정청송의 훌륭한 스승들이 있기 때문에 좋은 가르침을 본받게 되어 큰 선비들이 많다면서 퇴계는 세상을 떠난 용암 박운을 회상하며 묘갈명에 마음속에 있는 슬픈 마음을 글로 옮긴다.

 

용암 박운의 학문과 인품에 대한 평가는 기호학파를 이끌었던, 당대 최고의 학자의 반열에 올라 있었던 율곡 이이(栗谷 李珥)가 발문(跋文)을 남기는데, 그 내용은 “내가 용암 선생의 격몽편(擊蒙編)을 읽어보고 나서야 용암의 학문에 대한 공부가 깊고 부지런함을 알았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가 문장을 가려 뽑은 것이 이렇게 정밀하고도 절실할 수 있었겠는가?

 

과거의 여러 선생들을 지금은 만날 수 없지만, 용암이 후대 사람들을 위해 이 책에 다 모아 놓았으니, 용암이 후학들에게 베풀어준 은혜가 또한 지극하다고 할 것이다.”라고 율곡 이이는 평가했다.

율곡 이이는 기호학파를 이끌었던 종장(宗匠)으로 학문적 측면에서 퇴계의 성리학과 학문적 궤(軌)를 달리 하는 측면이 없지 않았음에도, 용암선생의 저술을 읽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조선시대에 서로가 바라보는 시각이 다를 때는 가차없는 비판이 이어짐에도, 율곡 이이는 그런 시선에 아랑곳 하지 않고, 선비로서 진심으로 사람을 대했던 것을 용암선생 발문을 통해 알 수가 있다고 하겠다.

 

이후 용암은 퇴계학의 도통(道統)을 이어가는 대산 이상정(大山 李象靖)으로부터도 발문을 받았다. 용암 박운은 살아서는 조선 최고의 스승들을 만나 교유하면서 학문을 성취하였으며, 죽어서도 조선 최고의 학자이자 선비들에게 아낌없는 찬사를 받았다. 조선시대를 통틀어 이러한 석학들의 찬사를 받아 본 선비는 아마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퇴계 이황, 율곡 이이, 대산 이상정 이외에도 인품과 학문으로 이름을 알렸던 기라성 같은 선비들인 구암 김취문(久庵 金就文), 송암 노수함(松庵 盧守諴), 송정 최응룡(松亭 崔應龍), 명고 정간(鳴皐 鄭幹) 등이 용암 박운선생을 존경하는 마음으로 애끓는 찬사의 글을 남겼다.

한 개인이 죽은 이후에 누구로부터 글과 말을 받느냐에 따라 죽은 이와 살아남은 가족의 품격이 달라졌던 시대에서 용암 박운선생과 그 가문은 조선 최고의 찬사를 받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선시대는 누가 묘갈명을 쓰고, 문집의 발문을 누가 쓰느냐가 웬만한 벼슬하던 것보다 더 중요한 시대였다.

 

용암 박운선생이 세상을 떠났지만, 그 행운은 계속되었다. 그것은 바로 그의 묘비의 글씨를 조선시대 최고의 명필가로 평가 받았던 한석봉(韓石峯)인 한호(韓濩)가 쓴 글씨체이다. 행운이 그 본인에게 계속된다는 것은 단지 행운이 아니라, 실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하겠다. 용암박운의 행운은 곧 실력이었으며, 그 실력은 바로 오랫동안 학문을 하면서 쌓은 인품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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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석봉이 직접 쓴 “효자 성균진사 박운지려(孝子成均進士朴雲之閭)” 비문>


용암 박운선생은 학문뿐만 아니라 부모님이 살아 계실 때 어느 누구보다 효행을 다하였고,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나서도 부모님 산소 옆에서 3년간 시묘살이를 극진히 하여 많은 사람들로부터 그의 효행이 회자(會子)되었다. 그래서 선조 임금은 효자 정려(旌閭)를 내려 용암 박운의 효행에 대한 정려비를 세우게 하였다.

 

정려비문은 “효자 성균진사 박운지려(孝子成均進士朴雲之閭)”이다. 용암선생은 비록 산림(山林)에 은거하며 처사(處士)적 삶을 살았지만, 죽을 때까지 도학자의 길을 잃지 않았던 진정한 선비였다고 평가할 수 있겠다. 한마디로 용암 박운은 선비로서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찬사(讚辭)는 다 받았다고 하겠다.

 

용암 박운 가문 후손들은 이러한 자부심을 간직하며, 오늘날에도 국가와 지역사회에서 조상들을 욕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는 가문으로 유명하다. 용암 박운이 보여준 삶의 철학적 가치를 재현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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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평 용암 박운종택에서 국학진흥원에 기탁한 귀중한 자료>

밀양박씨 해평 용암종택에서 수백년 동안 간직한 용암 박운 선생의 역사적으로 중요한 유품 678점을 2004년 국학진흥원에 기탁했으며, 아직 용암 박운 유품을 종택에서 700여점이 보관하고 있다. 그런데 국학진흥원에 기탁된 유품들의 중요성이 인정되어 2015년 유네스코 기록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기사등록 : 김영숙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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