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훈의 칼럼】구미, 금오산에 역사와 문화의 새로운 한축을 구축하다.
<필자:경북대 정치학박사, 前구미회 부회장, 새로넷방송 시청자 위원>
탈도 많았고, 말도 많았던 구미 금오산의 “구미성리학 역사관”이 10월 23일 개관하게 되면서 구미도 이제 본격적인 문화·역사에 대한 명실상부한 항해의 닻을 올리면서 많은 사람들로부터 기대와 주목을 받게 되었다.
성리학 역사관은 1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구미성리학 역사관은 2010년 문화체육관광부의 3대문화권(유교·가야·신라) 문화·관광기반 조성사업의 일환으로 시작되었다. 당시 예산이 많이 들어간다는 이유로 시작할 때부터 반대도 많았던 것이 사실이며, 이 사업이 출발할 때는 “역사문화디지털센터”였다.
하지만 많은 논쟁을 거쳐, 드디어 기나긴 준비의 여정을 마치고, 시민들의 공모를 통해 “구미성리학역사관”으로 문을 열게 된 것이다. 구미는 그동안 산업도시로서 제조업을 기반으로 하는 산업·공업도시였다. 따라서 구미는 물질적 가치가 정신적 가치를 앞섰던 경향이 없지 않았다.
이러한 경향으로 구미는 자연적으로 역사적·문화적 자원을 발굴하고, 그 가치를 확인하고 평가하는데, 모두가 등한시 한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나 구미성리학 역사관 개관의 계기로 구미시민들이 역사·문화에 대한 많은 새로운 접근을 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다고 하겠다.
구미는 사실 역사적으로 볼 때, 과거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중요한 인물들을 배출한 유서와 명성이 자자한 곳이었다. 지금은 구미(龜尾)라는 도시의 지명을 가지고 있었지만, 과거 당시에는 선산(善山)과 인동(仁洞)이라는 유교문화권으로 형성하고 있었다.
선산은 조선시대 많은 인재를 배출한다. 조선시대 역사와 인물·지리에서 가장 유명한 저작으로 알려진 이중환(李重煥)이 쓴 택리지(擇里志)를 보면 이중환은 선산을 이렇게 평가했었다.
“조선 인재 반은 영남(嶺南)에서 나고, 영남 인재 반은 선산(善山)에서 났다.”는 “조선인재 반재영남, 영남인재 반재선산(朝鮮人才 半在嶺南, 嶺南人才 半在善山)”이라는 글을 남길 정도로 선산의 명성은 조선시대 어느 고을보다 그 명성이 드높았던 곳이다.
다시 말하면, 선산은 조선시대 인재의 산실이었던 것이다. 즉 “인재를 배양하는 인큐베이터(incubator)” 역할을 했다고 하겠다. 이 주장에 역사를 조금 아는 사람이라면 동의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살고 있는 구미는 조선시대와 아울러 근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많은 인재가 배출되어 국가의 동량(棟梁)과 같았다고 하겠다.
외세의 침략과 수탈로 조선의 운명이 다하는 대한제국 말기, 전국의 의병을 모아 13도 창의군(十三道倡義軍)을 만들어 일본제국주의에 대항하고, 저항한 인물이 바로 왕산 허위(旺山 許蔿)이다. 왕산 허위 또한 우리 구미지역 출신이다.
왕산 허위는 일본이 한국을 본격적으로 지배하기 위해 저항세력을 억압·차단하기 위해 만든 서대문형무소 제1호 사형수가 된다. 그리고 왕산 허위는 일제 식민지가 끝나고, 광복이 된 이후 대한민국 제1호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았다. 왕산의 저항은 조선선비의 마지막 절개와 지조를 만천하에 알렸고, 한국 독립운동의 신호탄을 쏘아 올린 인물이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로부터 극단적으로 상반된 평가를 받고 있는 박정희(朴正熙)대통령 또한 구미지역 출신이다. 정치적 공과(功過)가 상반된 평가를 받고 있지만, 박정희는 경제적으로 국민들에게 배고픔을 해결하고, 대한민국의 경제적 발전에 기반과 초석을 마련한 인물임에는 틀림없다고 하겠다.
사실 지금 안동(安東)을 “정신문화의 수도”라고 한다. 이것은 아마도 퇴계 이황(退溪 李滉) 때문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퇴계 이황은 성리학을 그만의 독특한 학문으로 탈바꿈 시켰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성리학의 꽃과 열매가 퇴계 이황을 통하여 꽃을 피웠고, 열매가 맺혀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꽃과 열매가 맺게 하려면, 반드시 누군가가 씨를 뿌려야 뿌리가 뻗어 나가고, 줄기가 왕성하게 자란 다음 꽃과 열매가 맺는 법이다. 한국 유학사(儒學史)와 성리학사(性理學史)를 통해 보면 조선중기 이전까지 구미는 성리학의 발원지이며, 메카(Mecca)였다. 한마디로 구미는 성리학의 씨가 뿌려져, 뿌리가 왕성하게 뻗어 나갔으며, 줄기 역시 튼튼하게 성장한 고장이었다.
구미는 조선성리학의 절대불변의 야은 길재(冶隱 吉再) → 강호 김숙자(江湖 金叔滋) →점필재 김종직(佔畢齋 金宗直) → 한훤당 김굉필(寒暄堂 金宏弼) → 정암 조광조(靜庵 趙光祖) → 회재 이언적(晦齋 李彦迪) → 퇴계 이황(退溪 李滉)이라는 도통관(道統觀)을 형성하는 단초를 제공하면서 선산은 조선 성리학의 출발점이라는데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위의 도통관을 다시한번 살펴보면, 한훤당 김굉필의 학문의 한 방향은 선산 출신의 신당 정붕(新堂 鄭鵬)으로 이어져 송당 박영(松堂 朴英)에게로 이어졌다. 박영은 많은 학문적 발전을 거듭한 이후 선산지역에 송당학파(松堂學派)를 형성하게 된다. 당시 송당학파는 전국에서 많은 선비들에게 주목을 받으면서 선산이 성리학의 본산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일깨워 주었다.
화려했던 선산의 송당학파는 안동의 퇴계학파의 부흥으로 힘을 잃어 갈 때, 인동지역에서 여헌 장현광(旅軒 張顯光)이 나타나, 그만의 독특하고, 새로운 방법으로 성리학 연구에 접근하게 된다. 그리고 장현광은 그 나름대로 성리학을 체계화하여 나간다.
이것이 바로 영남의 성리학의 또 하나의 주류를 형성하는 여헌학(旅軒學)이다. 여헌학이 등장하면서 성리학의 무게 중심이 안동으로 옮겨 갔던 것을 조금이나마 되찾는 계기를 마련하였다고 하겠다. 이렇게 여헌 장현광이 등장하면서 구미는 학문적 자존심과 위상을 되찾았다.
이러한 과거 철학사나 유학사를 볼 때, 구미는 역사적·문화적 화려한 명성을 가지고 있던 지역이었다. 구미는 한국 경제발전과 궤적(軌跡)을 같이 하면서 성장한 도시이며 지역이다. 따라서 역사·문화보다는 경제가 우선시 되다보니, 우리는 어느 순간 과거뿐만 아니라 역사·문화를 잃고 살아 왔는지도 모른다.
필자는 구미성리학역사관 개관을 통하여, 구미시민들이 앞으로 찬란했던 역사와 문화를 되돌아보면서 미래로 갈 수 있는 장(場)이 마련하게 되었다는 것에 기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마지막으로 역사·문화가 활발하게 논의되고, 누구나 만끽할 수 있는 구미시로 자리매김될 것을 의심치 않는다. 앞으로 구미성리학역사관의 많은 역할과 성과를 기대한다. 과거의 역사는 미래를 보는 거울이다.
기사등록 : 김영숙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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