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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훈의 역사와 인물】 충신 김종무(金宗武)! 장렬한 최후를 맞았지만, 그의 충절은 역사에 영원히 빛나다.

이순락기자 0 614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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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대 정치학박사, 前구미회 부회장, 새로넷방송 시청자위원>


구미시민이라면 고아읍 원호리에 있는 들성지 주위의 산책길 돌아봤을 것이다. 그리고 원호 푸르지오 옆으로 있는 “들성마을” 표지석과 대로변에 정려각(旌閭閣)을 한번쯤은 보았을 것이다. 사실 이곳은 선산김씨(善山金氏) 일명, 들성김씨들이 살았던 “웃골”이라는 집성촌이었는데 도시화의 물결로 지금은 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필자가 이야기 하고자 하는 것은 그 중에서도 “충신김종무정려비(忠臣金宗武旌閭碑)”에 대해서이다. 김종무(金宗武)는 필자가 지난번 쓴 「금오산에서 조선 최고의 청백리, 구암 김취문(久庵 金就文)을 만나다」의 주인공 조선 최고의 청백리라고 할 수 있는 구암 김취문(久庵 金就文)의 큰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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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미시 고아읍 원호리 들성마을에 있는 충신 김종무정려비, 조선 숙종 원년에 세워졌다>


1592년 (선조25년) 4월 13일, 조선은 개국(開國)이래 한번 겪어보지 못한 전쟁의 서막이 열리는 날이다. 우리는 이 날에 일어난 일본과의 전쟁을 임진왜란(壬辰倭亂)이라 역사에 기록하고 있다. 이 전쟁으로 조선전기와 후기를 나누는 분수령이 되며, 조선은 전쟁의 후유증을 극복하는데 수백년이 걸린다.

그러나 정작 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분로쿠·케이초오노 에키(文祿慶長の役), 도요토미 히데요시의(豐臣秀吉)의 조선출병(朝鮮出兵), 조선역(朝鮮役)으로 기록하는 것은 일본인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큰 역사적 사건으로 평가하지 않기 위해서이다.


임진왜란으로 조선에 침략한 일본인의 학살로 조선인 60~80만명이 죽었다고 한다.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선두로 20만명을 이끌고 첨사 정발(僉事 鄭撥)이 지키고 있던 부산진을 함락시킨다. 정발은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무장의 모습으로 끝까지 장렬하게 싸우다 전사한다. 그러나 최고지휘관 경상좌수사를 맡던 박홍(朴弘)은 왜군이 쳐들어왔다는 말을 듣고, 무기와 식량을 불 지르고 성을 버리고 도망간다.

 

이후 왜적들은 동래부사 송상현(宋象賢)이 지키고 있던 동래성으로 진격한다. 좌수사 박홍의 도망처럼 여기서도 군사권의 최고책임자 지위에 있던 병마절도사인 좌병사 이각(李珏)은 백성들과 동래성의 무기와 식량을 버리고 성 밖으로 나가 도망쳐 버린다.


왜군은 동래부사 송상현에게 “전즉전 부전측 가아도(戰則戰 不戰則 假我道), 싸우려면 싸우고, 싸우지 않으려면 우리에게 길을 빌려 달라.”는 뜻을 전달하자, 송상현은 “사이 가도난(死易 假道難), 죽기는 쉬워도 길 빌리는 것은 어렵다.” 왜적들에게 전달하면서 왜군의 동래성 공격이 시작되자 동래부사 송상현을 중심으로 성안의 모든 사람들이 끝까지 항전을 하였지만, 오래지 않아 동래성은 함락되고 성안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전사하거나 왜적의 포로가 된다.


여기서 눈여겨 볼 것은 경상좌수사 박홍과 좌병사 이각이 식량과 무기를 버리고 도망친 것을 비롯하여, 경상우수사 원균(元均)은 노량진으로 도망가면서 경상우수영의 전선(戰船) 백여척과 화포·무기를 바다에 침몰시킨다. 또한 남해현령은 식량과 무기창고에 불을 지른 후 도망쳤다. 군사최고책임자들의 이 같은 행동들은 왜적이 북상하는데, 장애물을 조선 군사최고책임자들이 스스로 없에 줌으로서 왜군은 힘들이지 않고 북쪽으로 진격할 수 있었다.


이후부터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왜적의 선봉대는 거침없이 말 그대로 파죽지세(破竹之勢)로 임금이 있는 한양을 향해 북상하게 된다. 조정은 4월17일 왜적이 쳐들어왔다는 보고 받자, 4월 19일 군사책임의 전권을 행사하는 도체찰사에 류성룡(都體察使 柳成龍)을 임명한다. 류성룡은 전란을 대비해 이미 이순신(李舜臣)을 전라좌수사, 권율(權慄)을 의주목사에 발탁했던 유비무환(有備無患)을 알았던 사람이다.

그리고 그가 저술한 징비록(懲毖錄)을 통하여 현대인들은 임진왜란이 어떻게 진행되며, 전란을 어떻게 수습했는가를 알 수 있었다. 류성룡이 1592년 (선조25년)부터 1598년까지 7년 동안에 걸친 임진왜란에 대하여 집필한 징비록은 현재 국보 제132호 지정되어 있다. 류성룡의 이러한 업적을 기리기 위해 한국 해군은 한국 최고의 전함인 이지스함을 서애 류성룡함으로 이름 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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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최고의 명재상 서애 류성룡 영정>


도순변사 신립(都巡邊使 申砬), 순변사 이일(巡邊使 李鎰), 종사관 김여물(從事官 金汝岉), 경상우도초유사 김성일(慶尙右道 招諭使 金誠一), 경상좌도안집사 김륵(慶尙左道安集使 金玏)을 각각 임명하여 민심을 수습하는 한편 각 지역의 의병(義兵)이 일어나도록 하기 위해서 비상개각을 단행한다.


왜적은 부산 → 울산 → 경주 → 영천 → 대구 → 인동 → 선산 → 상주로 진격하고 있었다. 상주는 문경을 거쳐 한양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이며, 당시 상주는 사통팔달의 교통의 중심지였다. 상주가 함락되면 전쟁은 걷잡을 수 없는 상황으로 전개되기 때문에 어떻게든 상주에서 적을 차단하는 작전을 전개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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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주 북천 임란전적지 일대, 임진왜란 때 상주 북천에서 전투 일아난 곳으로 추정하고 있다>


상주를 막지 못하면 왜적이 한양으로 가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4월 23일 순변사 이일은 종사관에 문관출신의 박호(朴箎)·윤섬(尹暹)과 중앙군 60명을 이끌고 상주에 도착한다. 순변사 이일은 전라도수군절도사로 있다가, 1583년(선조 16년) 여진족 니탕개(尼湯介)가 조선 국경지역을 침략하자, 이를 격퇴하고 두만강을 건너가 여진족 공격하여 공을 세운 인물이며 기병전에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그래서 순변사 이일은 상주에서 왜적과 전면전, 그것도 기마병을 이용한 작전을 구상하고 있었다.


이일은 말을 타고 전쟁을 하는 기병전에 강한 측면이 있었기 때문에 역마를 이용한 군사작전을 위해 11개 역(驛)의 찰방(察訪)들에게 역마동원령을 내렸다. 그러나 역마동원령에 말을 몰고 상주에 도착한 사람은 선산 출신의 사근도 찰방(沙斤道 察訪) 김종무(金宗武) 한사람뿐이었다. 역마동원령에 따라 김종무는 사근도에서 말을 관리하는 역노(驛奴) 100여명과 전투에 사용할 군마 130~150여필을 가지고 상주성으로 도착했다.


순변사 이일이 상주에 도착했을 때는 상주목사 김해(金澥)는 순변사를 기다린다는 핑계대고 산속으로 도망가고 없었다. 판관 권길(權吉)이 상주성을 지키고 있었다. 순변사 이일은 군사가 없는 것을 확인하고 분노하여 판관 권길을 목을 베어 죽이려 한다.  이 때 김종무는 순변사 이일에게 도망간 “백성들에게 곡식을 나누어 주고, 그들과 함께 싸워야 합니다.”라고 건의하는 함으로서 상주 판관 권길은 군사를 모을 것 순변사 이일에게 약속하고, 밤낮으로 백성과 군사들을 독려하여 수백 명을 모은다.


4월 25일 새벽 왜적의 상주성 공격이 시작된다. 그런데 순변사 이일은 임진왜란이 그 전의 전쟁 양상과 전혀 다르다는 것을 파악하지 못하고, 기존의 기마전과 진법(陣法)을 통한 전투를 준비했던 것이다. 이미 왜적은 서양에서 수입된 총을 사용하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총을 이용한 전쟁의 개념을 알지 못한 이일은 그에 대한 대비를 전혀 하지 못했다.


4월 24일 개령현(開寧縣)의 농민이 찾아와 순변사 이일에게 “왜적이 상주 가까이 왔습니다.”하지만, 이일은 이 보고를 허위보고라고 믿고 목을 베려 하였다. 그러나 농민은 다급하게 “제 말이 맞는지 아닌지는 내일 아침에 왜적들이 쳐들어오는지 아닌지 확인한 다음 죽이시면 되지 않습니까?”하자, 이일은 농민을 옥에 가두었다. 아침이 되어도 아무 일이 없자, 이일은 농민의 목을 베어 허위보고의 본보기로 모든 군사들에게 보였다.


상황이 이렇게 흘러가자, 왜적의 척후병이 몰래 나타나 척후활동을 하여도 어느 누구 하나 순변사에게 보고를 하려 하지 않았다. 한마디로 상주전투는 작전보다는 경계에 실패한 전투였다. 그리고 순변사 이일은 왜적이 육전(陸戰)에 약하다는 계산으로 상주성 안에서 방어적 전투를 하려는 것이 아니라, 넓은 벌판에서 왜적과 전면전을 생각했다. 그래서 상주 북천(北川)에서 군사들에게 진(陣)을 연습시키고 있었다.


전면전에 대해 모든 참모들이 반대했음에도 순변사 이일은 강력하게 북천전투를 기획하고 실행에 옮겼다. 그리고 왜적의 척후병이 나타나 조선의 상주성의 모든 것을 파악하고 있을 때, 순변사 이일은 그것을 간파하지 못했다. 상주성 안에서 불이 나고 연기가 피어오르자, 그때서야 왜적이 나타난 것을 알고 급하게 전투태세를 취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넓은 벌판에 진을 갖춘 상주의 조선군은 왜적의 화승총의 공격을 당해 낼 수가 없었다. 왜적의 공격에 상주에 집결한 조선군은 진영과 대오는 순식간에 무너지기 시작한다. 그러나 순변사 이일의 종사관인 박호, 윤섬 그리고 사근도 찰방 김종무와 이경류(李慶流)등은 장렬히 싸웠다. 중과부적이라는 전세를 파악한 순변사 이일은 도망치기로 마음먹고 참모들에게 “나를 따르라”하자, 함께 싸우던 참모들은 일제히 “장차 무슨 면목으로 임금을 뵈올 수 있겠습니까?” 하며 끝까지 사우다 장렬히 전사한다.


또한 사근도 찰방 김종무 · 이경류 · 판관 권길 ·호장 박걸 등이 조선 최고의 장수라고 할 만한 순변사 이일이 도망친 전투에서 최후까지 장렬하게 싸우다 전사한다. 이들이 장렬하게 싸우고 죽는 동안 순변사 이일은 상주를 도망쳐 충주의 신립 장군이 있는 탄금대로 도망가자, 전투를  치열하게 벌이고 있던 군사들마저 대열을 이탈하여 도망치기 시작했다.


사근도 찰방 김종무는 그의 고향이 선산 들성마을이었다. 선산을 거쳐야 상주로 갈 수 있었지만, 풍전등화의 위기 속에서 사적인 가족의 안위는 돌아 볼 수가 없었다. 고향 땅에 가족을 뒤로 한채 상주 북천으로 달려갔던 김종무는 그렇게 상주 북천 전투에서 장렬히 싸우다 전사했다.

불행은 한꺼번에 온다고 했는가? 고향 선산에 남겨진 김종무의 가족들인 노모, 부인은 김종무의 전사 소식에 죽고, 아들과 동생은 전쟁으로 인한 여파로 죽는다. 임진왜란은 당시 어느 누구 할 것이 죽음과 고통이었지만 선산김씨와 김종무, 그리고 남겨진 가족에게는 더 없이 가혹한 전쟁이었다.


김종무는 1548년(명종 3) 선산 들성(坪城)에서 조선 최고의 청백리라 할 만한 대사간·홍문관부제학을 역임한 구암 김취문의 첫째 아들로 태어난다. 김종무는 학식과 인품에 있어서 당시 널리 알려져 각계각층의 천거로 벼슬길에 나간다. 김종무는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년전 전라도 종6품의 외관직인 남원의 오수찰방(獒樹察訪)으로 부임했다가 함양의 사근도 찰방으로 자리를 옮겨 얼마 있지 않아 임진왜란이 일어난다.

상주 북천전투에서 눈앞에 두고 있던 김종무는 처음부터 순변사 이일에게 상주성 안에 진을 칠 것을 주장하였다. 그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은 이일을 원망하며, 항상 자기를 따라 다니던 노복(奴僕) 한룡에게 김종무가 항상 가지고 다니던 부채를 주면서 “나는 이제 여기서 죽는다. 너는 이 부채를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 가족들에게 내가 여기서 죽었다고 전하라.” 그러나 노복 한룡은 부채를 가지고 주인 혼자 남겨두고 떠나지를 못해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다 주인의 운명과 같이 한다.


김종무는 갑옷을 고쳐 입고, 말에 올라 적진으로 뛰어들었지만, 왜적이 쏜 총탄에 죽는다. 슬프게도 김종무가 가족들에게 전하라고 했던 부채를 손에 꼭 쥐고 있었던 노복도 왜적의 총탄에 죽고 말았다. 그리고 김종무를 따라 참전했던 재종질인 김겸(金謙)도 김종무를 따라 장렬히 싸우다 전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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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시 서후면 성곡리에 있는 김종무와 류씨부인의 묘비>

 

김종무가 상주전투에서 전사한지 90년이 흐른 1675년(숙종 1년)에 그의 공이 인정되어 충신(忠臣)으로 인정되어 충신김종무정려비(忠臣金宗武旌閭碑)가 그가 태어난 고향 들성 마을 앞에 세워지고, 1721년 (경종1년)에 상주 북천 충렬사(忠烈祠)에 제향 되어 졌다.


김종무는 안동 하회마을의 풍산류씨(豐山柳氏) 입암 류중영(立巖 柳仲郢)의 사위이다. 따라서 겸암 류운룡(謙庵 柳雲龍), 서애 류성룡(西厓 류成龍)과 처남매부지간이 된다. 따라서 김종무는 임진왜란을 진두지휘하고 있던 명재상이라고 일컬어지는 영의정 겸 도체찰사 류성룡의 처남이 된다.


김종무의 가족들은 지금의 금오산 도선굴에 피해있었다. 상주북천 전투에서 김종무의 사망소식을 듣자, 어머니 광주이씨(廣州李氏)는 그 슬픔과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죽음을 맞이 하였다. 그리고 류씨 부인마저 슬픔과 고통으로 혼절하여 사경을 헤매던 중 친정인 안동 하회마을의 큰오빠인 겸암 류운룡이 하인들을 시켜 큰 대바구니에 여동생을 담아 오라고 명을 내린다.


하인들은 급히 금오산의 류씨부인을 하회마을로 옮겨가던 도중 안동 입구인 일직(一直)에서 안타깝게 1592년 9월 26일에 세상을 떠났다. 김종무와 류씨부인의 묘소는 안동시 서후면 성곡리의 안동권씨 시조 권행(權幸) 묘소 근처에 있다. 류씨부인의 아버지 류중영의 묘소가 바로 거기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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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권씨 시조 권행과 풍산류씨 유중영의 묘소 근처의 김종무 묘소 위치>

 

류성룡은 동생의 죽음을 이렇게 표현했다. “슬프다. 여동생은 천성이 영리하고 순수하였으며, 타고난 기질이 남달리 유순하여 평생에 빠른 말과 급한 빛이 없었다. 하지만 그에 다른 복록의 보답을 얻지 못하여 평소에 곤궁이 심했고, 수명 또한 길지 못해 겨우 마흔한 살로 난리를 만나 떠돌아다니다 죽고 말았으니, 하늘이 어찌 사람에게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라고 묘지명을 쓴다.


김종무의 큰 아들인 김충(金翀)은 어린 나이에 경전과 사서에 모르는 것이 없었지만, 금오산 도선굴에서 피난 도중 안타깝게도 16세에 사망한다. 김종무의 남겨진 혈육은 오직 둘째 아들 김공(金羾)과 김종무의 딸만 남게 된다. 그들을 돌봐 줄 사람은 안동 하회의 외삼촌인 류운룡·류성룡 형제였다. 

가족 모두가 죽었음으로 김종무의 둘째 아들과 딸은 외가인 안동 하회마을로 가게 된다. 하회마을의 류운룡·류성룡은 생질인 김공을 친자식처럼 먹이고 입히며 교육을 시킨다. 이러한 외가에서 살던 김공은 외삼촌들로부터 높은 수준의 학문을 전수 받게 된다.

나중에 김종무의 딸은 외가에서 훌륭하게 성장하여 안동 내앞마을 의성김씨(義城金氏) 청계 김진(靑溪 金璡) → 약봉 김극일(一) → 김철(金澈)로 이어지는 내앞마을 의성김씨 대종택인 김철에게 시집을 가 의성김씨 종가를 훌륭하게 이끌어 간다. 비록 김종무는 죽었지만, 살아남은 아들과 딸은 훌륭하게 자라 명문가를 이루어 낸다.


외가에서 살던 김공은 1594년(선조 27년) 피난 중이던 여헌 장현광(旅軒 張顯光)을 찾아가 제자로서 예를 올리고 사제지간이 된다. 여헌 장현광의 눈에 김공은 보통 아이가 아니었다. 그리고 장현광은 김공에게 본인의 생질인 노경필(盧景佖)의 딸과 혼인을 주선한다. 고향 선산으로 돌아 온 김공은 노경필의 딸과 혼인을 한다.

김공이 노경필의 사위가 되면서 이후부터 인동장씨(仁同張氏), 선산김씨(善山金氏), 안강노씨(安康盧氏), 풍산류씨(豐山柳氏)는 사제관계와 인척관계로 발전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


퇴계학(退溪學)을 전수받은 서애학파(西厓學派)의 김공은 안동시대를 마감하고 여헌학파(旅軒學派)로 방향을 전환한다. 김공의 큰 외삼촌인 류운룡이 인동현감(仁同縣監)으로 있었을 때 장현광의 높은 학문과 인품을 익히 알고 있었다. 그리고 류운룡이 인동현감으로 있을 때 길재선생 묘소 정비와 지주중류비(砥柱中流碑)를 세우면서 인동·선산에 인연이 많았다.

그리고 김공의 작은 외삼촌인 류성룡이 봉화 도심촌에 피신해 있을 때 장현광이 찾아 온다. 류성룡은 장현광을 보는 순간 대유학자가 될 것과 나라의 큰 스승이 될 것을 예언한다. 이러한 연유로 류성룡은 아들 수암 류진(修巖 柳袗)을 여헌 장현광에게 보내어 수학하게 했다. 장현광을 아마 높이 평가했기 때문에 이러한 파격적인 결정을 내릴 수 있었을 것이다. 이후 류진은 장현광의 제자 중 여헌십철(旅軒哲)로 성장하고 대학자로 나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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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조선의 성리학을 이끌었던 여헌 장현광>

 

김공의 결혼한 이후 외가살이를 청산하고, 고향 선산으로 돌아와 선산김씨 집안의 형제들인 김경(金澃) · 김양(金瀁) · 김하량(金厦樑) · 김하천(金廈梴)을 여헌 장현광 문하 입문의 길을 연다. 이들이 여헌문하에서 수학한 이후 선산김씨뿐만 아니라 지역을 대표하는 학자로 성장하는 발판을 마련한다.

그리고 이들은 스승 여헌 장현광을 평생토록 보필하면서 여헌학파의 중심적 인물들이 성장하게 되었고, 여헌학(旅軒學)을 지역사회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으로까지 외연(外延)을 확장시키는데 크게 기여한다. 아무리 좋은 학문이라 할지라도 반드시 그 학문과 스승을 지지하는 세력이 필요한 것이 동서고금을 진리인 것이다.


김공이 외가인 안동 하회마을에서 있었을 때 외삼촌들인 겸암 류운룡과 서애 류성룡에 대해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의지할 곳 없는 외로운 몸이 되자, 겸암(謙庵) · 서애(西厓) 두선생이 친아들처럼 돌보며 바르게 교도하였다. 이 때문에 글을 읽고 뜻을 가다듬으며 몸을 근신하고, 행실을 닦는 방법을 알게 되었다.”라고 하는 것처럼 김공은 겸암(謙庵) · 서애(西厓) 두 분의 외삼촌에 대한 고마움과 깊은 존경심을 표현하고 있다.


금오산을 많은 사람들이 찾으면, 반드시 대혜폭포 찾아 물이 떨어지는 것을 시원하게 구경한다. 폭포 밑에 폭포수가 모이는 작은 못이 바로 욕담(浴潭)이다. 대혜폭포 절벽에는 자세히 살펴보면 욕담 김선생 영귀대(浴潭金先生詠歸臺)라는 글자가 바위에 새겨져 있다. 이 욕담이 바로 전쟁으로 모든 것을 잃은 김공의 호(號)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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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무의 가족들과 욕담 김공이 피난처였던 도선굴로 가기전의 대혜폭포와 연못이 바로 욕담(浴潭)이다>


욕담 김공(浴潭 金羾)은 금오산 도선굴과 대혜폭포에서 있는 동안 임진왜란은 김공의 모든 것을 빼앗아 갔고 그에게 있어 죽을만큼의 시련의 과정이었다. 누구도 겪어보지 못한 가족들의 죽음으로 처절한 아픔과 고통을 경험했다. 김공은 이 고통과 슬픔을 한시라도 잊지 않기 위해 어쩌면 스스로 욕담(浴潭)이라 하였는지도 모른다.


선산김씨 가문의 김취문 → 김종무 → 김공으로 이어지는 절(節) · 충(忠) · 학(學)은 그 옛날 조선시대에서 빛났다고 평가 할 수 있다. 상주 북천전투에서 순절한 충신 김종무는 지금이나 그 때나 높은 사회적 신분에서 요구하던 도덕적 의무인 "노블리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를 실천한 선비였다고 평가 할 수 있겠다.  


들성마을을 지나 갈 때가 있다면, 한번 쯤 충신김종무정려비를 확인하는 것도 잊혀져 가는 충성(忠誠)의 의미를 되새겨 보는 기회가 아닐까! 한다.
 



기사등록 : 이순락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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